마니피캇(Magnificat)

사랑과 상처 혹은 사랑의 상처, 그 흔적의 존재론

나뭇잎숨결 2021. 4. 14. 04:59

 

사랑과 상처 혹은 사랑의 상처, 그 흔적의 존재론

- L'existence de l'amour, de la blessure ou de l'amour, de la trace

 

[부 활 제 2 주 일 (나 해) 2021. 4. 11. 요한 20,19-31]

 





1.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김춘수, 「구름과 장미」)
3. 타인은 하나의 상처이자 부활이다(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3.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요한 20,19-3)



 

 

 

1.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김춘수)

 

 

김춘수 시인의 「구름과 장미」(1948)를 읽어본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구름과 장미」(1948)는 김춘수 시인의 초기시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평생 김춘수 시인이 규명하고자 했던 시의 지향이 담겨 있다.

 

이 시의 해석의 관건은 ‘구름’과 ‘장미’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확연히 다른 세계를 어떻게 온전히 수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적 출발에는 언제나 김수영과 릴케 두 시인이 있었다. 동시대인이었던 김수영 시인과 시인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영감을 준 릴케는 김춘수 시인이 극복해해야할 시의 과제였고 그로 하여금 평생 시란 무엇인가를 묻게 만들었던 본질적인 질문에 해당한다.

 

김춘수 시인이 김수영과 릴케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구름’은 어떤 유토피아에 온몸을 던진 관념을, ‘장미’는 구체적 형상으로 다가온 존재를 해명하는 하나의 준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작가와 연결하여 「구름과 장미」(1948)를 바라보면 구름은 ‘김수영적’인 어떤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라면, 장미는 ‘릴케적’인 형상의 세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름’은 관념이고 ‘장미’는 형상이라 한다면, 그것은 김춘수 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삶에서 맞닥뜨린 정체성 문제로 귀착된다.

 

1연에서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임은/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에서 임은 가졌지만 임은 알 수 없다는 무명의 난제 앞에 서게 된다.

 

임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임이 존재함에도 그 임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임은 구름(하늘)이기도 하고 장미(땅)이기도 한 존재로 오기 때문이다. 어떤 한 얼굴로 와도 알 수 없는 임인데, 극과 극의 상반된 얼굴로 그 임은 오기 때문이다.

 

2연에서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밤엔 뜰 장미와/마주 앉아 울었노니’에서 구름과 장미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은 구름 그 자체로는 알 수 없고 물속에 잠긴 구름 혹은 눈물 속에 흐르는 구름을 통해 구름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찰나의 인상만을 주는 가상(假象)의 세계다.

 

시인 이장욱은 이렇게 말한다.

 

시 속으로 바람은 불고 구름은 흘러간다. 구름은 눈뜨면 물 위에 담기는 부드러운 가상(假象)이다. 그것은 형태를 지니지 않아 만져지지 않으며, 그것은 수면에 스스로를 비추며 흘러갈 뿐이어서 인간의 규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름은 드러냄과 사라짐의 경계를 스스로 지우며 저 하늘에 유구하다. 그렇게 님은 ‘구름’이 되어 온다.

 

그렇다면 또 다른 임의 실체인 ‘장미’는 어떠한가?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낮에 가상의 구름 때문에 헤메이다, 밤에 자신의 뜨락에서 구체적인 형상인 장미로 온 임을 본다. 장미는 밤의 뜰에 피어 그의 울음을 받아준다. 임을 부르며 울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제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어둠속에서 그를 위무하며, 그것은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인 것이어서 울 수 있음에 잠시는 허허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장미는 꽃 지는 계절에 지는 꽃잎들 속으로 흩어질 유한(有限)을 제 운명으로 지니고 있기에, 장미가 되어 온 임은 잠시 생에 머물다 갈 뿐이다.

 

구름이라는 가상의 세계, 장미라는 유한의 세계로 임은 그렇게 온다. 결핍으로 오고, 결여라는 이름으로 온다. 모든 이에게 임은 있으되 그 임은 그렇게 늘 ‘그리운’ 임이 된다. 임이 마음에 오롯이 있어도 임은 그토록 그리운 존재인 것이다.

 

3연에서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하염없는 날일수록/하늘만 하였지만/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그리하여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를 그 ‘뉘(누구)’를 두 겹으로 읽을 수 있겠다.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아무도 님을 보지 못했다) 그 임은 나로서는 끝내 알 수 없는 임이기에 그렇다. 혹은 밤낮으로 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고 울고 있는 '나'를 참으로 임이 보았을 것인가, 라는 자탄으로도 읽을 수 있다.

 

저 헛것으로 떠도는 관념(구름)들과 구체적 세계에 피고 지는 이 한 계절의 실존(장미)에 대해서라면, 하긴 세상의 어느 누군들 ‘하염없지’ 않았을 것인가. 이 ‘하염없음’에 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자체가 생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구름(관념)과 장미(세계) 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의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애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되,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 혹은 그 님을 바라보는 나를 보았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된다. 님을 온전히 볼 수 없어서. 또는 온전히 나를 임에게 보여줄 수 없어서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화자는 서성거리고 망연하다.

 

여기에 이르러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은 시인의 고백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에서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 진다.

 

‘구름’과 ‘장미’라는 저 판이한 세계의 모습으로 오는 임을 유한한 존재가 담으려는 그 자세가 이미 자신에게는 금이고, 균혈이고, 상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구름과 장미 사이에 금(균열 혹은 상처)을 이해하려는 평생의 투신으로 시작에 임했듯, 시를 감상하는 독자 역시 각자 자기 내부의 ‘금(균열 혹은 상처)’으로 인해 살아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자기 내부의 ‘금(=균열 혹은 상처)’은 임을 가진 자의 운명이자, 업을 가진 자의 운명이자, 생을 가진 자의 운명일 것이다. 우리에게 애중지애하는 임이 없었다면 어떤 상처도 받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임에게 그 임에게 닿으려는 그 망연자실한 시도가 있었기에 또한 살아낼 수 있었으므로 이 또한 님의 역설일 것이다. 생의 역설은 님의 역설이기도 하다.

 

 

 

 

 

 

2. 타인은 하나의 상처이자 부활이다(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자기 내부의 ‘금(균열 혹은 상처)’이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 힘인가를

 

“타자는 하나의 상처이자 부활이다”라고 말하는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에서 다시 한 번 이를 바라볼 수 있다.

 

어떻게 타자는 우리에게 ‘상처’이자 ‘부활’일 수 있을까?

 

김춘수가 말하는 그 임이라고 부르는 그 타자는 우리로써는 도저히 온전히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상처인 것일까? 그렇다면 알 수 없는 존재인 그 타자는 어떻게 우리에게 부활일 수 있을까?

 

알렝 핑켈크로트는 타자의 윤리를 말하는 레비나스 연구자이다. 그가 말하는 타자의 윤리는 헤겔의 동일성이 아니라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비동일성에서 출발한다.

 

비동일성에서 동일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타자는 비동일성으로 남을 존재이기에 타자는 상처라고 그는 본 것이다.

 

‘나는 그를 둘러싸기 위해, 또는 아예 그를 농락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써보지만, 사랑받는 사람은 거기에서 또 다시 일어선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망아의 사랑만이 타자를 부른다......타자는 높은 곳에서 개괄적인 파악방식에 의해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의심쩍음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맞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환대야 말로 바로 사랑의 형이상학적 의미인 것이다.’

 

그럼에도 알렝 핑켈크로트는 “사랑받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라고 말한다. 타자는 알 수 없는 낯섦이기에 상처이지만 그럼에도 오직 타자를 통해서만 우리는 부활을 확인한다는 사실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서 부활을 확인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두려워하고 머뭇거리는 이유는 타자가 갖고 있는 이 이중적 속성, 상처와 부활의 간극 앞에서 상처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은 타자를 알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결코 ‘타자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타자는 인식론의 차원이 아니란 점이다.

 

타자가 어떤 존재일 거라는 상상은 가능하나 온전하게 그가 누구인지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충분한 증거는 바로 내가 누군가에게 하나의 대상, 즉 타자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확보된다.

 

알렝 핑켈크로트는 “사랑의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항상 당신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으로부터, 막상 당신은 도망가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바로 타자이고 동시에 나이다. 즉 당신은 도망가지만 그것은 나 역시 당신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도망 중인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제자리에 서 있었던 것 역시 아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도 이 점을 확연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 라고 도망치지만 실은 그 사람의 반경에서, 그 사람과의 시간의 흔적이 담겨 있는 공간에서 더 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도망치지만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은 결코 도망칠 수 없으면서 다가갈 수 없기에 고독하다. 타자를 지각하지만 타자성은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는 내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에 비하여 언제나 넘치거나 차이가 있다”

 

그래서 나의 결여는 타자로 인해 채워지지 않는다. 동시에 이것은 타자와 나의 유일한 동일성으로 나 역시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타자의 결여를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레비나스는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을 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즉 대상(타자)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그(녀)에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다는 괴로움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주기도 전에 당신은이미 달아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기도 전에 나 역시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타자와의 사랑은 보다 내밀한 그 어떤 것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어떤 동일성의 범주로도 한데 묶을 수 없고 그 얼굴의 인상을 훔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이러한 환원불가능성으로부터 사랑의 대상을 보다 넓게 확장하기에 이른다. 구체를 건너서 보편성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들이 꿈꾸는 이상향은 언제나 목가적 세계로 귀착된다. 거기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갈래인데, 모든 사회적 유토피아는 집요하게 같은 꿈을 추구하고 있다. 즉 공동체 안에 마치 부부의 결합과도 같이 긴밀하고도 완전한 일체감을 실현하는 꿈”을 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구체가 결여된 보편 잎에서 우리는 그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리는 사랑의 공허로 인해, 존재론적 배고픔을 채우려는 구체적이라는 원 안으로 돌아간다.

 

이때 “두 사람이 일체가 되지 않으므로, 사랑에서 교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와 타자는 일체가 될 수 없는,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 양식을 가지고 있음에 비로소 주목하다. 타자의 타자성은 어떤 친밀함의 표현으로도 혈연, 지연, 국가, 인종으로도 환원되거나 소유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타자는 전면적으로 몸을 맡기지 않는 존재방식을 취하는 존재라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 그것은 엄밀하게 우리기 기대하는 타자성의 죽음이다. 그때 타자의 얼굴 그리고 시선에 대해,레비나스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얼굴이 나에게 부과되면, 나는 얼굴의 부름에 귀기울이지 않을 수 없고, 얼굴을 잊을 수도 없다. 즉 그가 겪는 불행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이란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차이(다름)’를 이해한다는 것에서는 결코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인식론적인 것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레비나스의 책임은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철저한 ‘모름’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타자의 타자성을 잊지 않는 것,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의 끝에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에서 그것은 ‘부활’ 이라고 전한다.

 

‘타인은 하나의 상처이다’ 라고 할 때 이 상처는 타자가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동일성을 요구하는 나로부터 내가 받은 것이다. 우리가 타자에게 책임을 지는 것은 동일성의 책임이 아니라 타자가 갖고 있는 다양성, 혹은 개체성에 대한 책임이다.

 

이를 “다양성에 대해서 너그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책임 앞에서 너그럽지 못한 것이다” 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것이 타자와의 경험에서 얻어지는 부활인 것이다. 동일성의 환상에서 그 기대의 죽음으로 인해 비로서 그의 개체성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게 나를 개방하는 사마리아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상처’와 ‘부활’의 이름으로 오는 타자는 누구인가?

 

 

 

 

 

 

3.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요한 20,19-31)

 

아니, 그 질문은 ‘왜 사랑은 상처와 함께 오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바라볼 수 있다.

 

2020년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오래 머물렀던 부분이다.http://blog.daum.net/m-deresa/12388844

 

분명, 우리는 토마스처럼 보고 믿는 신앙에서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의 여정에 있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사랑과 상처, 그 흔적의 존재론’이 무엇인지 우리를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2021년에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부활2주 복음(요한 20,19-310을 묵상하면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부분이다.

 

이 부분은 두 가지의 질문이 수반된다. 왜 예수님은 스스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일까? 또 제자들은 왜 더 멀리 예루살렘을 벗어나 예수님으로부터 완전히, 그들의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치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에서 우리에게 오는 임은 ‘구름과 장미’라는 그 화해불가능한 상태이듯, 또 알렝 핑켈크로트가 『사랑의 지혜』에서 바라본 대로 타자는 ‘상처’와 ‘부활’이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타자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이해를 요구받는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사랑은 상처’와 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상처가 지금 진행중인 상처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상처의 ‘흔적’일 수도 있다.

 

어떤 단어가 구성될 때, ‘사랑과 상처’처럼 병렬적 구성이 있을 수 있다. 이때 사랑은 진행중인 상처다. 그러나 ‘사랑의 상처’처럼 소유격으로 품고 있는 흔적의 단어들이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그 부활의 사랑은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간 ‘사랑의 상처’, 혹은 ‘흔적’의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근원은 바로 그분이고 그분은 이미 태초부터 존재하는 그 빛이라면 그 무한을 유한에 담는 것은 이미 상처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것에 작은 것을 담을 때 흔적도 없을 것이지만, 큰 것이 상대 가능하지 않는 작은 것에 담기기 위해서 그 큰 것과 작은 것은 동시에 금이 가고, 균혈이 생기고,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이든 무엇에 무엇을 담는다는 것은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존재론적 ‘불안’은 하느님의 숨결, 흔적이다라고 전한다.. 이 전언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는 불안이 내재하며 이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요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나니, 우리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쉬지 못하나이다” 라고, 여기서 ‘쉬지 못한다’ 라는 것은 이러한 불안은 우리 내면에 깃든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이 흔적이 우리에게 남긴 하느님적인 것을 우리도 모르게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도망가거나 슬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였다‘라고 전하는 그 의미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부활에 대한 기쁨과 그들 자신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메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동안 몰랐다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분을 보았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그들의 방황과 열정의 방향을 드디어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랑은 상처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에 멈춰서야 한다. 우리는 타자와 완전히 하나라는 동일성을 꿈꾸지만 그 동일성은 우리가 완전히 똑같은 인격이 되어서 사랑하는 그 동일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의 속성상 모든 사랑은 ’희생‘이라는 이름위에서 집을 짓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사랑은 그 희생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자기 초월의 숙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이러한 속성을 통해 사랑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 역시 그런 사랑에 동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2020년 파스카 성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이에 대해

 

제자들에게는 ‘희생을 통해 이루신 그 이상의 사랑’인‘부활’이 꼭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 그 이상의 사랑’인 ‘부활’이 꼭 필요했다는 것입니다.”라고 전한다.

 

그렇다. 부활은 사랑의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그 궁극은 그것을 넘어서는 그 사랑, ‘기쁨’이라고 표현된 그 사랑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사랑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랑에서 도망치지 않는 그 상태, 부활의 사랑을 맛본 것이다.

 

알렝 핑켈크로트의 말처럼 “사랑의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항상 당신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으로부터, 막상 당신은 도망가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은 바로 타자이고 동시에 나이다. 즉 당신은 도망가지만 그것은 나 역시 당신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도망 중인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제자리에 서 있었던 것 역시 아니라는 그 의미에 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사랑과 상처는 함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랑엔 희생 없는 사랑은 없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타자와 타자가 만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질 때, 그 사랑은 ‘상처와 함께 있는 사랑’, 혹은 ‘상처의 흔적이 있는 사랑’ 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두려움과 의심에 쌓여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이라는 세 번의 인사는 제자로 대변되는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가 어떤 것일지 가늠하게 된다.

 

한편 제자들 역시 왜 그 상황에서 더 멀리 도망가지 않고 두려움을 안고 다락방에서 문을 걸어잠근 채 있었을까에 대해, 인간은 사랑에서 도망치지만 동시에 사랑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존재임을 비로서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다시 읽어본다.

 

Ⓐ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어쩌자고 제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아직도 다락방에 모여 있던 것일까?그들이 기대했던 시나리오가 어떻게 끝났는지 이미 보았고 들었던 제자들이 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모여있는 것일까?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두려움과 의심’ 그것 만인가?. ‘두려움과 의심’은 바닥의 사랑에서 경험하는 것들이다. 바닥의 사랑일망정 사랑이 없다면 두려움과 의심조차도 하지 않는다.

 

그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앞에 그분이 나타나 당신의 사랑의 상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준다. 공간이동이 자유로운 그분에게 남아 있는 사랑의 상처, 그 흔적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인사를 하신다. 한 상처가 한 상처를 알아보는 것이다. <사랑과 상처> 혹은 <사랑의 상처>라는 이 간극의 통합 안에서 평화의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는 교회의 존재 이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1)“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파견

 

(2)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자비

 

이 세상에서 아직도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면, 인류의 근원적인 모든 문제의 답, 상처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상처의 역설, <사랑과 상처>의 흔적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사랑에서 도망치는 인류에게 그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역으로 상처없이 사랑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파견과 자비의 수책자가 다름 아닌 ‘두려움과 의심’ 속에서 ‘사랑과 상처’를 바라보게 된 제자들이란 사실에서 우리는 무한한 희망을 보게 된다. 그들은 바로 사랑에서 도망치다 상처받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에서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부활2주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토마스, 그는 우리에게 열정의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자기 의심의 이유를 이렇게 정확하게 발화할 수 있는 토마스는 누구인가?

 

2021년 부활2주 강론에서 오 신부님은

 

“토마스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실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 따라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다시 바뀌는 그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한 때는,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존재는 그렇게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했었고, 예수님 때문에 절망하고 괴로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토마스처럼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그렇게 절대적인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하고, 예수님 때문에 절망하고 괴로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나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고, 나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토마스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 고백은 바로 ‘사랑과 상처’ ‘사랑의 상처’ 그 흔적의 존재론을 쓰고 있는 우리가 오랜 방황과 숨어버림 속에서 도달한 그 지점이고,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때, 우리는 모두 보고 믿는 신앙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대열에 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시간 순서나 과정이 아니라 동시적인 사랑의 방식으로 ‘구체적 사랑과 보편적 사랑’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런 포괄적 사랑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랑과 상처’, 혹은 ‘사랑의 상처’ 그 ‘흔적의 존재론’을 계속 쓰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Faure : 3 Romances Sans Paroles No.3 In A Flat Major Op.17 (포레 : 3개의 로망스 무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