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이전과 그 이후, 인류의 독해능력의 현주소에 부쳐
-“이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라인홀트 슈테혀)
[주 님 수 난 성 지 주 일(니해) 20212021. 3. 28. Marc. 14,1-15,47]
1. 사랑을 하면 오래 살고 싶어진다 2.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김훈, 『칼의 노래』} 3. 삶의 ‘본론’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
1. 사랑을 하면 오래 살고 싶어 진다
이 글은, 마르코 복음 14장 62절에 나오는 “그렇다”라는 3음절을 이해하고 싶어서 쓴다.
한국인의 한국어 ‘난독증’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 문장 뿐 아니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어 화자가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현상, 즉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도 의사소통의 장애가 발생하고 서로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수록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해가 쌓이는 현상을 이름이다.
“내가 당신을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당신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나는 인식을 초월한 곳에서, 당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레비나스)
이런 상태를 철학적으로 ‘레비나스 효과’라고 부른다. 레비나스가 ‘뭘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의 효과이다.(참고http://blog.daum.net/m-deresa/12387159) 타자의 철학을 말하는 레비나스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지 모른 채, 독자는 레비나스에게 ‘뭔가 대단히 개인적인 소환명령을 받은’ 느낌을 받으며, 자신이 레비나스 이해에 충분한 보편성이 없음을 자각하면서도, 그만 자신이 ‘레비나스 이해’를 아는 듯이 말해버린다. 이 ‘개인적으로 소환되는’ 느낌을 레비나스는 ‘영감(inspiration)’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라고 말한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모두 한권의 책에 해당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얼어붙은 땅, 사랑의 빙하를 갖고 있다. 그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불사불멸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키워드이자 서로가 서로를 읽는 유일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내가 이꼴 저꼴 안보고 일찍 죽었어야 했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혈연과 인연이 웬수같을 때 어르신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에서 말하는 그 죽음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죽음이다.
반면,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과 다른 관점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살아 남은 자의 슬픔』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도 산다는 것은, '영원히 산다'는 의미와는 다른 차원의 산다, 를 의미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당신이 필요해요`라는 연인의 한마디 말 때문에 브레히트는 빗방울도 두려워했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존재하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고 그가 나를 찾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이의 호출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사랑의 자세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영 떠나보낸 사람들을 몇 알고 있다. 그들은 떠난 사람이 꼭 내 옆이 아니어도 좋으니 어딘가에 존재하기만 해도 원이 없겠다고 말한다. 오늘 하루 잘 존재하자. 빗방울도 두려워하면서.(허연)
언어적으로 사랑을 정확히 규정할 수 없지만,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오래살고’ 싶어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주 평범한 일상을 모두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갑자기 ‘시간’에 예민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지?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것이다. 건강관리를 아무리 잘해도 백년 안팎밖에 살 수 없다는 게 억울할 정도다. 사랑하고픈 사랑을 하기엔 너무 짧고, 해야하는 사랑을 하기엔 너무 길다.
그때, ‘영원’이란 초시간 개념이 우리의 이해 영역으로 들어온다. ‘영원’은 ‘사랑’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초시간 개념이다. 그때, 어렴프시 예수님이 우리와 얼마나 오래 함께 하고 싶었으면 독해능력의 초보인 인류를 향해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라는 약속을 하셨던 것일까?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저 말이 이해가 가능한 말인가? 상대가 이해하지 못해도 끝까지 할 수밖에 없는 사랑, 선택지가 사랑밖에는 없는 삶...
2.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김훈, 『칼의 노래』)
모든 작가는 독자에게 자기만큼의 독해능력을 은연중 요구한다.
김훈은 『칼의 노래』 첫 문장에 '꽃이'로 쓸 것인지 '꽃은'으로 쓸 것인지, 둘 중에 어느 것을 쓰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결국 '꽃이'라고 썼다는 후문이다. 프랑스어판 출간 당시 김훈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된 내용이며, 2008년에 발간된 김훈의 산문집 『바다의 기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에서 버려진 섬이란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빈 섬이란 뜻으로, 거기 꽃이 피었다는 거예요.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소설은 몽매해집니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해서 끌고 나가는 그런 전략이 있어야만 내가 원하고자 하는 문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와 ‘은’ 이라는 조사의 차이로 『칼의 노래』 자체에 대한 공감이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의미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해서’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고, 그것은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 즉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 바탕에 해당한다. 이것은 독자의 공감 여부가 아니라 본인이 글을 쓰는 본질적인 작가의식에 해당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 그 제목은 누가 붙였나? 작가가 처음 정했던 제목은 '광화문 그 사내' 였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광화문에 있어서 그렇게 지은 듯하다. 결국 편집장이 소설을 읽고 김훈을 설득해서 '칼의 노래'라는 제목이 지어졌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라 할만하다.
작가의 작품이지만 최초의 독자인 편집장은 작가가 말하지 못한 것을 끄집어냈다. 독자의 독해능력이 작가를 설득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또 100만부 이상 팔린 김훈의 『칼의 노래』는 작가와 독자가 완성시켰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완성에 독자들로 하여금 동참하게 만든 것은, 다시 작가로 돌아간다. 김훈의 ‘사유’를 통해 나온 필력 때문이다. 작가에게 사유란 무엇인가? 세계를 읽어내는 그의 독해능력이다.
‘의미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해서’ 쓰지 않으면 첫 문장을 쓰지 못했던 그는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니체의 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박경리의 『토지』,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최인훈의 『광장』등은 그들의 대표작이자 그들은 그 이후에도 글을 발표하긴 했지만, 그 대표작을 넘는 작품은 쓰지 못했다. 그 작품들이 그 작가들의 필력의 본론이었고, 피로 쓴 글이었고, 이 세계를 읽은 사유의 총체였다고 할 수 있다.
3. 삶의 ‘본론’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작가가 글 한편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피로 글을 쓴다고 할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면, 그것이 글쓰는 자의 본령이자 본론이라 한다면, 우리는 어떤 본론을 쓰고 싶어 신앙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놓이게 된다.
주님수난성지주일의 긴 복음 가운데 “그렇다”는 예수님 생의 본론에 해당하는 첫 문장이다. 무엇보다 “그렇다”를 독해하는 첫 인류가 대사제, 수석사제들, 율법법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신에 대한 이해가 가장 편협한 그들에게 신성모독이라는 빌미를 제공하면서 십자가형에 처하게 되는 "그렇다"라는 선언, 그 물러설 수 없는 인류에 대한 사랑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 1~15) 가 그 답일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해도 언젠가 인류가 알아듣게 될 그 사랑!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난독증의 독자를 향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최고의 문장을 보여주어야 하는 예수, 과연 그 말의 첫 독자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하신 말씀인가? 그래서 그분은 독해의 해석본에 해당하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또 보여주셔야 했다. 우리는 그 부록이라 할 수 있다.
복음을 읽어본다.
마르코 14, 6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물었다.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62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63 대사제가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64 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65 어떤 자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분의 얼굴을 가린 다음, 주먹으로 치면서 놀려 대기 시작하였다.
주님수난성지주일 복음 가운데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라는 대사제의 질문“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예수님, “그렇다”라는 3음절이 담고 있는 저 무거움은 예수님의 운명만 바꾼 것이 아니라 인류의 운명도 바꿨고, 오늘 우리의 운명도 바꿨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다”라는 말씀 앞에서 흘린 눈물, 십자가를 바라보며 흘린 눈물이 그것을 대변한다.
라인홀트 슈테혀 추기경님이 쓰신 『이 사람은 누구인가=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묵상』(장익 역, 분도출판사, 2018)에서 “그렇다”는 “그럼에도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사랑이라고 전한다.
(작년에 오신부님이 주님수난강론중에 추천해준 책이다. 올해 사순절 시작하면서 읽었다. 번역자가 장익주교님이라 라인홀트 슈테혀 추기경님의 인격과 장익 주교님의 인격이 어떻게 교합하는지를 볼 수 있는 사순절 묵상서다.)
Ⓐ 모든 어두움을 무릅쓰는 ‘그럼에도 사랑’의 가장 감격적인 실증(實證)이 그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두려움을 무릅쓰고 ‘네’하는 사랑을, 인간들에 대한 숱한 실망을 무릅쓰고 믿는 사랑을, 악의에도 불구하고 보복을 모르는 사랑을, 고립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위해 거기 있는 사랑을 당신 아들에서 실증하신다. 이미 우리네의 일상에서도 ‘그럼에도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동산에서의 어두운 시간에서 돌아온 예수는 전혀 다른 분이다. 이제는 결연하고 용감하며 정녕 초탈한 분이다.“
Ⓑ스물네 시간, 상황은 긴박했다. 그들은 시간에 쫓겼다. 예수 사건을 처결하자면 금요일 저녁 여섯 시까지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때가 되면 성전 언덕으로부터 사제들의 나팔 소리가 성내로 울려 퍼지며 번제의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른다. 이를 시작으로 여드레에 걸쳐 대축제가 벌어지는데, 축제 기간에는 재판은 물론이고 처형도 허락되지 않는다. 게다가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동의 절차도 남아 있다. 대사제들이 최고의회에 갑작스럽게 소집된 것은 목요일 늦은 저녁이었다. 그때까지는 채 스물네 시간도 남지 않았다. 여러 증인들이 나서 예수가 죽을죄를 지었다며 고발한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다. 그런 경우 유다의 법에 따르면 피고 예수는 석방되어야만 한다. 그러자 대사제 카야파가 직접 묻는다. “내가 명령하오.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밝히시오.’” 아니라고 하면 아직은 살길이 열려 있다. 그렇지만 자신을, 자신의 소명을 배반하게 된다. 예수는 침묵을 깨고 밝힌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아람으로 ‘그렇다’는 의미이다). 그로써 예수는 독신죄(瀆神罪)로 사형 언도를 받는다.
2020년 신자 없는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우리는 사랑스러우며 비싼 대가를 치른 존재입니다. 폴리뇨의 성녀 안젤라는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너를 농담으로 사랑하지 않았다.”(프란치스코 교황님)
오신부님은 2020년, 2021년 강론에서 예수님 사랑의 ‘본론’에 대해,
Ⓓ우리가 다시 용기를 내서, 자신의 삶의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서론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었어도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삶의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그런 사랑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2020년 강론중에서)
Ⓔ우리가 아픔과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인 아픔과 시련과 고통이, 적어도 나 자신과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의 성주간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각자가 받아들여야 할 아픔과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품으려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삶의 결론을 주실지를 기다려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삶의 결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결론으로 부활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2021년 강론 중에서)
Ⓐ~ Ⓔ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사랑, 즉 삶의 본론은 ‘사랑은 죽음 앞에 있다’ 라는 말로 요약가능하다.
예컨대, 내가 말하는 사랑과 타자가 말하는 사랑과 아주 다른데, 우리는 동시에 사랑을 말했기 때문에, 사랑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이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 이 모순 앞에 섰던 인류의 문제는, 신(사랑)에 대한 독해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모든 사랑은 살해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더 많이 독해한(이해한) 사람의 사랑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그렇다”라는 저 말은 인류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은 말이자. 자신의 운명이 왜 바꾸어졌는지도 모른 채 인류의 운명도 동시에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를 아는 인류와 알지 못한채 알고자 한는 인류, 알고 싶지 않은 인류로.
인류의 전 역사는 “그렇다”라는 말과 상관없이 동물적인 생존에서 조금 더 진화한 상태에서 즉, “그렇다”라는 말의 의미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렇다’를 살아야 하는 운명에 소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눈물없이 “그렇다”를 이해할 수 있는 인류는 없다. 그래서 인류는 예수님을 위해서 울 것이 아니라, "그렇다'를 모르는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함에도 또 "그렇다"를 말씀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우느라 눈물의 탕진, 소비로 넘친다.
개인적으로 “그렇다”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많이 울었다. 이 울음은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흘린 눈물이다. “그렇다”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렇다”를 살아야 한다고 너무나 강력하게 현실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렇다”라는 그 사랑을 잘 모르는데 “그렇다”라는 사랑을 해야하고(해야하는 사랑). 사랑하고 싶다(하고 싶은 사랑)는 것이다. 하고 싶은 사랑은 ’저만치‘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사랑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신앙인은 그런 눈물을 흘린다고 할 수 있다.
이 쯤에서, 글 도입부에서 인용한 레비나스의 말을 바꾸어 볼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당신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나는 인식을 초월한 곳에서, 당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쓰는 삶의 본론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한 상태가 아니라, 독해능력의 난독에서 비롯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인 사랑에 소환된 시행착오의 본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분이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부칠 곳 없는 열정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분이 내려주는 결론은 우리 삶의 퇴고에 해당한다. 그 퇴고의 펜은 '자비'다. 우리가 결론까지 감당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은총을 듬뿍 받는’ 삶일 것이다.
그렇기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독해되지 않은 삶을 살게 만든 “이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게 만들고, 또 그것을 묻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라인홀트 슈테혀)를 묻는 두겹의 물음 속에 던져진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때, 강론에서 전하는 삶의 '본론'으로 들어가‘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 을 하려고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다시 용기를 내서, 자신의 삶의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서론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이었어도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삶의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그런 사랑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2020년 강론중에서)
Ⓔ우리가 아픔과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인 아픔과 시련과 고통이, 적어도 나 자신과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의 성주간은,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각자가 받아들여야 할 아픔과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품으려고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삶의 결론을 주실지를 기다려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삶의 결론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결론으로 부활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2021년 강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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