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길 위에서 길을 묻는 것
-‘나의 부활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인류에 부쳐
[파 스 카 성 야(나해)2021. 4. 3. Marc. 16,1-7]
1. 포크로 접시를 긁듯이 사랑하고 싶다(김태용) 2. 말 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 3.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길 위에서 길을 묻는 것 |
1. 포크로 접시를 긁듯이 사랑하고 싶다(김태용)
길을 잃지 않고도 길을 찾을 수 있을까?
김태용의 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자음과모음, 2010)는 박경리나 김훈, 황석영 등의 소설, 대서사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이것도 소설이라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언어를 해체하고, 서사를 해체하고, 장르를 해체하고, 글쓰기를 해체한 자리에 이미지만 남는 소설이 과연 소설일 수 있는가? 그 질문 속에는 언어, 서사, 장르, 글쓰기, 이미지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김태용이 자끄 드뉘망이란 이름으로 쓴 시에서
“포크로 접시를 긁듯이 사랑하고 싶다”(김태용, 보리스를 위한 세미나 중에서)라는 시행이 나온다. “~~하고 싶다”라는 사랑의 의지는 이미지만 남고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것, ‘사랑을 결코 ~~ 할 수 없다’라는 의미를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런 맥락에서 ‘때늦은 모든 것, 뜻밖의 모든 것, 엇나간 모든 것, 모든 것의 모든 것’ 에 대한 408페이지의 『숨김없이 남김없이』(자음과모음, 2010)는 단 하루에 읽기에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소설에 해당한다.
여기서 말하는 ‘집중력’은 서사를 따라가는 기존의 소설 독법에서 벗어나 이미지를 따라가는 독법을 의미한다. 초현실주의자 달리의 그림을 감상하듯,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개들의 언덕에 사는 뭐, 미파, 아이, 그녀, 대령 등은,...불확정성의 세계에 던져진 인류의 들끓는 아우성에 대한 어떤 이미지의 퍼즐맞추기에 해당한다.
소설 강독 시간에 이 소설을 읽고 학생들이 토로한 단견가운데.... 기분이 아주 더러울 때 이 소설을 읽으면 자신의 기분이 얼마나 양질의 기분 좋음인 줄 알 수 있다...카레를 다시는 먹고 싶지 않게 만드는 소설이다...소설에서 건진 건 없는데 작가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끼게 됐다... 이 소설은 ‘착란’이란 부제가 붙어야 한다. . 작가가 난해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게 아닌가 싶다...1930년대 이상 소설을 욕하면서 읽은 거에 심히 미안함을 느낀다...난해함을 이렇게 설득하는 그 집요함에 끌렸다....시처럼 읽으니까 위대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쓴 시를 소설처럼 읽으면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읽었는데 어느 순간 중독되어 있는 나를 보았다. 묘한 경험이다....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무척 윤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기르던 개를 잔인하게 죽여 끄슬려 먹는 장면에서 주체할 수 없이 울었다. 혐오가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슬픈 소설이다....소통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 사랑을 하게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알 수 있다...이해와 오해가 같은 말이란 것 알게 해줬다....등등....
소설가 박성원은 『숨김없이 남김없이』를 읽은 소회를 이렇게 덧붙인다. “이것은 외로운 전쟁이다. 빛의 속도만큼이나 분주해진 문학과의 전쟁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천 번의 담금질이 담겨있다. 이때껏 우리에게 이런 문학이 있었던가? 고독하며, 질기고도 질긴 울음이 새겨져 있다. 우리 이제 한번쯤을 솔직해지자. 그동안 우리들이 외면하고 부인했던 문학의 순수함을,”이라고 평한다.
몇 단락을 읽어본다.
①우리의 삶은 시작도 끝도 없는 서사의 쪼가리다. 쪼가리의 쪼가리다. 더 이상 쪼가리가 될 수 없는 최후의 쪼가리다. 우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못한다. 우리는 부사와 형용사를 허용할 수 없는 무미건조한 문장의 조사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지도 죽이지도 못한다. 우리는 우리도 아니다. 나는 우리 중의 하나가 아니며 나이기를 거부한다. 하는 실수와 후회라는 이름의 세계가 버린 사생아다. 주장하지도 토로하지도 못했다. 세상이 그들을 버리기 전 그들이 세상을 버렸다.
②그의 말이 곧 문장이 되었고, 문장이 곧 그의 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다. 목적도 대상도 결말도 없는 문장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가 사멸되었다. 궤멸과 괴멸의 문장들이 욕구가 거세된 그의 밤과 낮을 느슨하게 지배했다. 언제 글을 보여줄 건데, 라는 물음에 그는 결코 글을 쓰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가 쓰는 문장들은 문법에 어긋나 있으며 쉽게 허물어지는 허약한 상상력에 기대 있었다.
③언어의 안과 바깥에 경계를 지워주는 창문은 도대체 어디에. 어디에? 어디에? 어디에! 어디에! 어딘가. 어디쯤. 어두워진다. 어두운. 언어의 속살. 파고드는. 바스락거리는. 이글거림. 최후를 예감하는 최초의. 사그라질 때만 빛을 발하는. 검고 텅 빈 곡선. 선명한 이름을 부르는 녹색 광선. 언어의 덫. 덫의 언어. 언어의 겹. 겹의 언어. 언어의 주름. 주름의 언어. 언어의 파동. 파동의 언어. 언어의 속. 속의 언어. 언어의 살. 살의 언어. 언어의 속살. 속살의 언어. 언어의 샅. 샅의 언어. 돋아나는. 더듬거리며 뭔가를 기억하려 애쓰는. 잡힌 것. 만질 수 없는 것. 잡혀도 볼 수 없는 것. 볼 수 있어도 말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있어도 만질 수 없는. 더듬거리고 파고드는. 지글거림. 없는. 없던. 말. 부스러기들. 말. 부스럭거리는. 미끄러지는. 서걱거리는. 가려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말의. 속살. 따위의. 말. 발목이 잡힌다.
④뭐와 말을 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모호해지고 더 낯설어지기만 했다. 말의 소용돌이에 빠지면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처음에 시작한 말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수없이 반복했고, 애초에 말의 속성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다. 뭐를 통해 말의 유용함 이전에 말의 무용함을 먼저 깨우친 것이다. 어쩌면 재앙과 불행은 재앙과 불행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닥쳐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말을 통해 뭐는 나에게 침묵을 가르쳤다.
이쯤에서 작가 김태용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서울예대문창과 교수다. 그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넓고 쾌적한 교수 연구실, 혹은 자신의 집 서재에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가로1.5미터, 세로2미터의 고시원에서 글을 쓴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거의 관 속 같은 공간에서 글을 쓴다. 피곤할 때, 고시원 바닥에 대각선으로 누워 잠을 자다보면 대개 악몽을 꾸게되고, 꿈에서 떠오른 이미지들이 그를 소설로 밀고 간다고 말한다.
“의도적으로 닫힌 공간을 소설 배경으로 삼는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작정이 없이 시작한 소설이라도 쓰다보면 어느새 공간이 닫혀 있다는 걸 깨닫고 합니다. 아마도 글을 쓰는 공간이 저도 모르게 심리적으로 작용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그는 한때, 영화를 꿈꾸는 형과 하루에 영화 5편을 볼 정도로 영화마니아였다. 고교시절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로 많이 읽었던 이성복, 최승자, 오규원의 시가 아니라, 레오 카락스의 영화가 그를 문학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군복무시절 마지막 휴가를 앞두고 레오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가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개봉에 맞춰 일부러 휴가를 늦췄는데, 하필이면, 군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하던 그가 주말 밤에 폭발물 사고를 당한다. 온몸에 80% 이상의 화상을 입었고, 10여 차례의 수술 끝에 10개월이 늦게 의가사 제대를 한다. 제대후 1년 동안 햇빛을 보면 안 돼 집안에 갇혀서 지내야 했으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기력했고,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던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시와 소설의 독자가 아니라 습작을 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를 세상으로 다시 걸어나오게 한 것이 문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시원은 이 절박한 시간의 상징성인 듯하다.
그의 자전적 인터뷰 기사들을 읽다보면 그의 인생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틱한 서사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그가 서사를 구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자체가 걸어가는 한편의 소설인 셈이다. 혹자는 영화가 그를 소설가로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단편적인 오해다. 그가 읽었던 시, 그가 보았던 영화, 그의 삶의 궤적이 퍼즐처럼 맞춰져서 그를 문학으로 밀고 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포크로 접시를 긁듯이 사랑하고 싶다”(김태용)는표현이 담지하고 있는 스펙트럼의 크기가 슬프게, 혹은 아프게 다가오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른 채 어떤 의지로 채워진 시간 속에서 흔들리면서 비틀거리면서 길을 잃으면서 계속 걸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마치 포크로 접시를 긁듯이, 아무것도 건져 올린 것이 없음에도, 그 행위를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면 이젠 결말이 뻔히 보이는 드라마를 보듯, 그럼에도 결말을 모른척하면서 뭔가 해야 할 거 같은 생명의 부채의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길을 잃으면서 길을 찾은 것이 산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소설을 인내심을 갖고(?) 한 권이라도 읽다 보면, 어느새 그의 팬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언어가 구사하는 구심력의 매직이다. 길을 잃었던 자가 길을 잃었던 자를 알아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그의 문장에 중독된다. 의미의 영역이 아니라 중독의 영역에 가깝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를 알지 못한 채 누군가를 중독처럼 사랑하게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 마치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을 추종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엄밀하게 추종은 방황이다. 열정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길을 잃는 방황이다.
2.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비트켄슈타인)
어떤 철학적 명제 앞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이 경우는 자기경험의 절대화로 인해 유발된다고 할 수 있다.
비트켄슈타인의 철학을 수용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언어 체험을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비트켄슈타인 하면 떠오르는 철학적 명제인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비트켄슈타인)는 거의 경구화된 명제다. 그런데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전에 그 명제에 동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말하지 못했던 것이 모두 저 문장으로 설명가능하다는 간접화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말할 수 없었던 것과 비트게슈타인이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많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다’에 방점을 찍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가 말할 수 없다고 하는 부분은 종교, 윤리 철학, 미학 등 형이상학적 주제들이다. 우리가 말할 수 없었던 것은 삶의 다방면에 걸쳐서 납득당하지 못한 것들, 앎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만 길을 잃고 헤메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를 도출한 비트겐슈타인 역시 길을 잃고 헤메면서 길을 찾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독일의 철강왕의 유산 상속자이자, 1차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의 전쟁포로가 되는 상황, 가족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살의 충동 등 극한 상황을 체험한 철학자다.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는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이다. 초판의 서문은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썼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본문을 썼으며 일정량이 모이면 러셀과 무어에게 보냈고 1918년 완성하였다. 초판의 출간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22년에 이루어졌다.
⑤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실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로운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명제들-그러므로 철학과는 상관이 없는 어떤 것-이외에도 아무 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있는 어떤 기호들에도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게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기존의 철학에서 적용하는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에는, 이러한 문제들의 문제 제기가 우리의 언어 논리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뜻은 대략 다음의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나에겐 여기서 전달된 사고들의 진리성은 불가침적이며 결정적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나는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기존의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을 제시한다. 그림 이론이란 언어는 세계를, 명제는 사실을, 이름은 대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러한 것들이 실제 대응 관계에 있다고 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일기장에 “한 문장에는 하나의 세계가 연습 삼아 조립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그림 이론은 기존의 철학, 특히 형이상학이나 도덕학에서 신이나 자아, 도덕과 같은 것들은 실제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없어서 뜻(Sinn)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같은 것은 실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윤리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몰고 갔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증명할 수 없어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구태여 증명하려 하여 무가치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의 철학적 명제라기 보다는 윤리적 명제에 가까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선언이 그로 하여금 길을 잃게 되는 계기는 『확실성에 관하여』에 잘 나타난다.
⑥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원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곳에서, 각자는 타자를 바보니 이단이니 하고 선언한다. 나는 내가 타자와 ‘싸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도대체 왜 그 타자에게 근거를 주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디까지 가겠는가? 근거들의 끝에는 결국 설득이 있을 뿐이다.(비트겐 슈타인, 『확실성에 관하여』)
아버지에게서 받은 많은 유산을 주변에게 나눠준 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러브콜도 마다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시골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그는 자신이 말한 철학의 명제를 스스로 살아내려는 윤리적인 결단을 한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교사 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언어에 대한 성찰이 얼마나 피상적이며 제한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와 다른 수준의 언어규칙을 갖고 있는 타자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초기에 주장하던 언어규칙은 자신과 유사한 언어규칙에 익숙한 지성인들이었고 상류계급이었다. 그들에게 적용되는 언어규칙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단어가 다른 문맥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모국어 화자에게서 확인하게 된 것이다. 모국어 화자끼리 다양한 삶에 의해 모든 언어는 다양한 문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타자가 갖고 있는 언어 규칙에서 그는 마지막 문장에서 말하듯 자신이 철학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 자기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타자와 자신의 삶이 다르듯 언어규칙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나는 도대체 왜 그 타자에게 근거를 주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디까지 가겠는가? 근거들의 끝에는 결국 설득이 있을 뿐이다” 라는 자기 모순을 발견한 것이다.
윤리와 종교, 철학과 미학을 담지하고 있는 말할 수 없는 것에서 침묵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⑦실제 언어를 조금 더 면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그것과 우리의 요구사시의 갈등은 더 첨예해진다. 그 갈등은 간당하기 힘들어진다. 요구조건은 이제 공허한 것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위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탄구』)
그는 철학은 길 위를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자살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길 위의 다른 언어규칙을 갖고 있는 타자를 피할 수 없다. 동일자에 가까운 비슷한 지적수준을 갖고 있는 타자가 아니라 영원히 동일자라고 인정할 수 없는 다양한 타자와 같은 길 위를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후기철학에 해당하는 『철학적 탐구』에 이르러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쓰임의 다양함에 있다, 라고 수차례 강조한다.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언어를 생각하지 말고 보라, 라는 말은 그런 맥락이다.
흔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그 중간에 오스트리아 경험이 집대성된 『확실성에 관하여 』가 있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이 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 데 집중된 반면,
『철학적 탄구』에 집대성된 후기 사상은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데 중심이 놓여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주어진 언어-놀이 안에서 그 단어들이 사용될 때 가장 잘 이해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이자 그의 언어철학의 전환에 해당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 철학에서 주장했던 언어의 논리학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언어의 의미는 결코 한 가지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게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바탕으로 『철학적 탐구』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된다. 초기의 그림 이론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포함한 기존에 있었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있기 전에 생활양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언어는 그 '뜻'이 아니라 '사용'에 본질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쓰임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것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이라고 불렀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놀이에 비유했는데, 줄넘기 놀이, 술래잡기, 가위바위보 등의 '놀이'에서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삶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 길위를 걸어가는 것이었다. 자기 안에서 길을 잃으면서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 보듯, 길을 잃어버린 자만이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하는 사람만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3.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길 위에서 길을 묻는 것
그렇다면 “부활은 우리의 희망”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길 위에서 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단순히 예수님의 부활만이 아닌 우리자신의 부활임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파스카 성야] 강론에서 오신부님은, ‘부활은 무엇인가’와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씨앗은 죽었다가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살아납니다. 씨앗과 꽃은 본질이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보잘것없는 씨앗이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부활하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씨앗과 꽃은 본질이 같습니다. 하지만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보잘것없는 씨앗이 죽어서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부활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을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는 씨앗이 꽃이 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부활할 때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 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즉시 알아보지 못한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죽어야만 부활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부활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길을 잃은 인간을 찾아 아주 멀리 오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길을 잃으실 정도로 멀리 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부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찾으셨고, 당신의 자리를 찾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길을 알려주시고, 우리가 앉을 자리로, 우리를 안내해주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그 길과 그 자리를 향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는 부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다. 성서학자 Charles Perrot의 말을 인용해서 씨앗과 꽃은 본질은 같지만 드러난 모습은 전혀 달라서 상식적인 눈으로는 부활을 알아 볼 수 없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던 이유이자 우리가 누군가의 부활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부활은 씨앗과 꽃을 비교하는 것과는 비교의 차원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고 부활은 물신성을 초월하는 경지에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설득당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알렐루야! 알렐루아!라고 환호할 수 있다.
그 다음, Ⓓ와 Ⓔ가 우리에게 문제이다.
이제 우리의 부활이 남아 있다. 이 과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더 많은 희생이나 더 많은 고행이나 더 많은 봉사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존재상태’에 이르러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 ‘특정한 존재상태’에 이르면 그 다음으로 희생이나 고행, 혹은 봉사는 실은 감사의 행위이지 부활을 체험하는 대가적 지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부활의 체험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위에서’ ‘주어지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철저히 우리의 내적 가난을 체험하는 가운데 내리는 풍요로움이라고 할 때, 선물로 주어진 ‘부활을 우리의 희망’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자동적으로 부활에 편승하는 것일까? 아님 우리 각자의 삶에 맞는 그 죽음 뒤에 부활을 체험하는 것일까? 또 부활은 육체의 죽음 뒤에 경험되는 사후체험일까?
이런 질문들이 우리 안에서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죽음을 딛고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아!”
신앙인들이 환호하는 이 환호 속에는 ‘믿을 수 없음과 믿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상반된 두 세계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환호할 수 있는데, 나의 부활에 대해서는 멈칫거린다는 점이다. 실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부활을 경험하는 제자들의 상태에서 그대로 반영된다. 무엇보다 부활의 체험은 집단적인 경험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 경험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루살렘의 체험(요한, 20,1-9), 갈릴래아의 체험(요한 21. 1-19절) 엠마오의 체험(루카 24,13-35)은 ‘부활’을 바라보는 오늘 우리의 상태를 가장 잘 짚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1-9)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 24,13-35)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라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속에 뛰어 들었다 (요한 21. 1-19절)
Ⓐ예루살렘-Ⓑ엠마오로 가는 길-Ⓒ갈릴래아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체험하는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다. 마리아막달레나의 부활체험을 성 그레고리오교황님은 이렇게 전한다. http://blog.daum.net/m-deresa/12389309 성 그레그리오 교황의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Hom. 25,1-2.4-5: PL 76,1189-1193)
“진리 자체이신 그분은 "끝까지 찾는 자는 구원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찾았지만 처음에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찾았기에 찾아냈습니다. 찾고 있는 동안 그녀의 애타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소망이 더욱 강렬해져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거룩한 열망은 그 성취가 지체될 때 더욱 커집니다. 열망이 지체되어 시든다면 그것은 참된 열망이 아니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에 도달하게 되면 이는 그가 진리를 불타는 사랑으로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본이름으로 불리우자 자기를 부르는 분을 알아 뵙고 곧장 "라뿌니" 즉 "선생님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외적으로 마리아가 찾고 있었던 대상이었지만, 내적으로는 그에게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분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구체적인 부활체험은 진리를 찾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석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진리의 죽음에도 그 갈망을 멈추지 않고 찾아 헤메는 자의 표본인 셈이다. 그렇기에 진리를 찾는 자는 결코 진리를 찾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진리란 세계의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내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되는 바로 그 ‘이름’에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과 같은 존재론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
엠마오가 어딘지 지도상으로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없는 길 위를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 이들은 12제자들보다는 포괄적 제자군에 속하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에게 기대했던 것은 유다의 기대치와 결코 다르지 않았다.
기대는 다른 말로 열정의 초기 상태를 의미한다. 제자들이나 그들이나 오늘 우리들이나 1차적인 열정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께 뜨겁게 기대했고, 그럼에도 그들이 쓰고 싶었던 시나리오는 비극으로 끝났다. 어떤 드라마도 주인공을 죽이지는 않는다. 유다는 자살했고, 그들은 거의 자살상태의 심리적 추락으로 옛 삶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그들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을 따르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벗어나 길 위에 있다.
길위의 사람들,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바로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신앙이라는 순례의 여정에서 ‘인간의 기대와 하느님의 기대 사이의 간극’ 그 좌절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다시 옛 삶으로 귀의하려는 우리 자신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제자들의 좌절은 모두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서 시작된 일로 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릇된 구세주론을 갖고 있었든,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권능의 하느님에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따랐든, 어찌되었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이들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보면 그들은 모두 “그분은 만났기 때문에” 빈무덤이든, 다락방이든, 갈릴레아든, 엠마오든... 숨거나, 헤메거나, 가고 있는 중이였던 것이다.
그 절망과 낙담의 순간에 ‘생각이 충격 속에 갇혀버린 그 순간’에 ‘시골에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 그분이 ‘먼저’ 다가가신다. 사랑이 절망 곁에 다가간다. 이미 유다의 자살을 알고 있는 예수님, 실의에 빠진 그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셨을까? 절망은 다리가 없다. 오직 사랑만 다리가 있다. 절망 상태인 그들은 예수님께 갈 수 없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과 동행한다.
어떤 충격 속에 잠입해 있을 때, 우리는 동행하는 이들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과의 동행이 끝났을 때 어느 날 문득, 이마를 짓이기며,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 삶에 다가온 부활한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사랑은 뼈아픈 사후체험이다. 그들은 충격으로 눈멀었기 때문에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다.
트라피스트 수도사였던 토머스 키팅은 그것을 ‘열정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열정을 가진 이라야 예수님을 추종이라도 할 수 있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앙하기 위해 그 열정을 송두리 채 죽여야 한다는 사실 앞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 뒤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알아보는 대가는 늘 똑같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수, 교회, 영적 여정, 하느님에 대한 관념이 깨져야 한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려면 문화적 조건으로 제한된 우리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로워야만 한다. 우리가 사적·제한적 시야를 버릴 때 우리의 선입관이나 편견 때문에 숨어 계신 그분을 보는 우리 눈이 뜨인다. (토머스 키팅, 「그리스도의 신비」, 윤종국 옮김, 바오로딸 펴냄)
예수를 신앙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열정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엠마오 보다 더 멀리 간 제자들도 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다. 추종의 열정만큼 더 멀어진 그들에게 그분이 ‘먼저’ 다가가신다.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라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속에 뛰어 들었다 (요한 21. 1-19절)
그 때, 그들이 잡은 물고기가 정확히 '153'마리라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첫 만남의 시간을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고 쓴 복음 사가가, 고기가 '놀랄만큼 많이 잡혔다' '엄청 많이 잡혔다'가 아니고 '153마리'라고 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http://blog.daum.net/m-deresa/12389786
히브리어 숫자값으로 계산하면 '153', (히브리어는 각 알파벳마다 고유의 숫자값이 있다) 이 '153' 은 수학에서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라고 부른다. 트리플 큐브 넘버란 각 자릿수를 각각 세제곱해 더한 값이 원래 자신의 수가 나오는 수를 말한다. 1의 세제곱(1) + 5의 세제곱(125) + 3의 세제곱(27) = 153, 이 '153' 은 17번째 정삼각형의 수로. 수학에서 세제곱이란 정육면체(큐브)를 의미하고, 구약에 나오는 성막안의 성소와 지성소가 바로 정육면체이고,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 또한 정육면체였다. 그것은 '구별된 곳' 즉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153은 미사전례에 나오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성전의 의미가 공간이 아니라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거룩한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분의 부활은 바로 그분 자신을 허물고 새로운 인류라는 성전을 짓게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분이 자신의 몸을 허물어 인류로 하여금 거룩한 시간으로 끌어올린 이 사건이 바로 그분과의 만남의 완성, 부활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이제, 정리해보자
Ⓐ예루살렘-Ⓑ엠마오로 가는 길-Ⓒ갈릴래아
우리는 오늘, 저 길, 어딘가를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길 위에 사람들이다. 어쨌든, 유다처럼 죽지 않고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미 글을 쓰고 있어야 하듯, 부활은 강론에서 언급하듯, 우리 각자의 길을 발견하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앉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선 어떤 길 위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락방도 문이 닫혀있는 하나의 길이다. 그 길 위에서 그분은 그 언젠가, 미래의 시점이 아니라 ‘오늘’ '이미'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동행하고 계시다는 것!. 요는, 우리가 그분이 이미, 먼저, 다가와 동행하고 있음에도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나의 메시야 상이 허물어졌을 때, 나의 상식의 눈이 개안되었을 때, 오늘, 이미 나와 동행한 그분을 알아볼 수 있고,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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