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존재 사이

나뭇잎숨결 2021. 3. 24. 15:00

 

 

하여 나란,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존재 사이

 

[사 순 제 5 주 일 (나 해) 2021. 3. 21. Jean. 12,20-33]

 

 


1. 습명(襲明), 정(情)의 하늘과 한(恨)의 바다에서
2. 인간의 육신은 하느님의 자기 진술 자체이다(칼 라너)
3. 생명을 선물로 받은 유한자가 어떻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나?

 

 

 

 

 

 

1. 습명(襲明), 정(情)의 하늘과 한(恨)의 바다에서

 

 

정천한해(情天恨海)

 

-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도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한용운의 「정천한해(情天恨海)」는 인간이 지닌 정(情)과 한(恨)이라는 유한한 사랑이 어떻게 '님'이라는 초월자 안에서 완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도(求道)의 시에 해당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정(情)만 드는 것이 아니라 한(恨)도 쌓인다. 주고 싶은 것을 다 줄 수 없고, 받고 싶은 것을 다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情)이 높으면 한(恨)도 그만큼 깊어진다. 정(情)이 높은 만큼 한(恨)도 깊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정(情)만 있으면 좋으련만 정(情) 곁에는 늘 한(恨)도 함께 따라다닌다.

 

정(情)과 한(恨)은 사랑의 두 얼굴이다. 대립의 개념이자, 그것이 원만하게 풀리지 못한 채 한쪽으로 치우쳐 극에 달하면 상극(相剋)이 된다. 정(情)과 한(恨)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어떻게 건너는가에 따라 정한 (情恨)과 원한(怨恨)으로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정(情)이 한(恨)을 끌어가지 못하면 한의 응어리가 자신도 모르는 원한(怨恨)이 되기도 한다. 정(情)과 한(恨)이 따로 나뉘지 않을 때, ‘님’이라는 절대자를 보게되고 정한(情恨)은 모든 이의 정한을 바라보는 상생(相生)의 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한용운 시는 정(情)과 한(恨)을 대립이나 상극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성정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인간사로 어떻게 정(情)과 한(恨), 그 심연을 건널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1연에서 화자는 정한(情恨)의 정서는 가을하늘 보다 높고 봄바다 보다 깊음을 바라본다. 인간의 사랑, 그 정한(情恨)의 정서가 세상 그 어떤 사물보다도 높고, 깊다고 바라본 것이다.

 

2연에서 정(情)이 싫은 것도 아니고, 한(恨)이 병 될 리도 없지만 인간은 정(情) 의 하늘도 끝내 오르지 못하고, 한(恨)의 바다도 결국 건너지 못한다고 인간의 유한성을 바라본다. 정한(情恨)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한(情恨)은 인간으로 하여금 유한, 혹은 한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고 할 수 있다.

 

3연에서 화자는 정(情)의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한(恨)의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다는 정한의 다른 얼굴을 보게된다, 일반적으로 정한(情恨)을 고통이나 상처로 바라보지만 화자는 오히려 정한(情恨)은 죽을만큼 힘들고 높고 깊을수록 아름답고 묘하다고 말한다. 그 고귀함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 곳에 오를 수도 없고, 그 것을 건널 수도 없다. 그 이름을 알아도 다다를 수 없다는 두겹의 한계 앞에서,

 

4연에 이르러 화자는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즉 정한(情恨)이 너무 힘들고 사무쳐서, 정한(情恨)을 유발하는 사랑이 사라진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고 말한다.

 

정한(情恨)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정한이 없는 세계에 살 바에야 차라리 삶 자체를 반납하는 게 낫다고 한다. 화자는 정과 한을 존재의 이유로 긍정한다. 정(情)만 원하지도 한(恨)을 버리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초극은 현실이 변화되어서 그 상황을 넘어선다면 여기선 정한(情恨), 그 상황자체가 인간의 존재이유임을 바라본 것이다.

 

이 정도의 정의 극에 이르고 한의 극에 이르면 그 다음은 어떤 상태일끼? 현실에서 이 정도에 이르면 정한에서 손을 놓게 된다. 사랑 자체에 두 손을 들게 된다. 다시는 사랑하지 말자,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여기서 한용운 시의 역설이 나타난다. 정한(情恨)에서 손을 놓게 된다는 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주의기도 할 때처럼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는 것과 같다.

 

이 정한(情恨)은 화자로부터 시작하였으되 극한에 오른 정한(情恨)은 이제 정한 그 자체로 넘어간다. 정한(情恨)의 극은 혼자서는 능히 이루지 못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눈 두 사람이 끝까지 정한(情恨)을 쥐고 있을 때, 모든 극極에 다다른 것들이 보여주듯,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물이 얼게 되고 물이 끓게되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것과 같다.

 

5연과 6연에서 아아, 라는 탄식은 극極에 이른 정한(情恨)에서, 정(情)의 하늘이 ‘님’의 이마보다 낮고 한(恨)의 바다가 ‘님’의 무릎보다 얕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운 정의 하늘이 님의 이마에 미치지 못하고, 그토록 묘한 한의 바다가 님의 무릎보다 낮다는 습명(襲明:돌연 갑자기 밝아짐)이 이루어진다.

 

님의 정한(情恨)은 얼마나 더 높고 깊기에...?

 

여기서 한용운 시의 역설의 미학, 그 ‘비틀림’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역설은 곧바로 인간사에서 초월자로 수직상승한다. 그러나 한용운의 시의 역설은 이 ‘비틀림’을 통해 ‘인간사-인간사- 초월자’라는 수평이동을 시도한다. 단순이 인간의 정한은 초월자에 의해서만 완성된다고 서둘러 변증법을 시도한다면 이 또한 억지스럽다. 다 줄 수도 없고 다 받을 수도 없는 저 심연 속에서, 정한(情恨)의 비틀림, 그 문이 열린다.

 

아아, 아아...라는 저 두 번의 탄식이 안고 있는 정한(情恨)의 크기를 염두해 둘 때,

 

인간의 정한(情恨)에서 어떻게 ‘님’이 개입되는지 바라보게 된다. 애뜻한 정이 크면 클수록 세상의 정이 무한한 것임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지에 모란이 떨어지듯’ 인간은 자신이 바라본 것만 이 세상에 가득한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화자는 천지에 정한(情恨) 아닌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화자는 정(情)의 눈으로 정(情)을 바라보게 되고, 한(恨)이 깊어진 만큼 한(恨)의 바다가 건널 수 없는 바다임을 알게 된다. 세상의 어떤 생명도 정한(情恨)이 아닌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화자의 정한(情恨)이 극에 이르러 뭇 생명의 정한(情恨)으로 흘러가게 될 때, 화자의 눈물이 누군가의 눈물과 합쳐져 정의 손끝이 저 하늘에 닿을 듯 하고, 한의 다리가 저 바다를 건널 듯하다. 그때 화자의 정한(情恨)은 이 세상의 정한을 다 바라보지 못한 정한이요, 그로인해 화자는 자신의 정한이 ‘님’이라는 ‘세계’의 그 이마보다 낮고 님의 무릎보다 낮은 것임을 보게 된다.

 

정한의 극에서 모든 생명이 살아낸 그 길의 이름이 다름 아니라 정한(情恨) 이었음을 보게될 때, 정의 극에서 정을 보고, 한의 극에서 한을 보는 ‘습명’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상극(相剋)에서 생극(生剋)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5연과 6연의 비약은 한용운 시인 전 생에 걸친 구도의 깨달음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님'은 수평적 세계의 타자라는 그 님이자, 수직적인 세계의 초월자라는 그 님이라 할 수 있다. 정(情)과 한(恨)의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두 ‘님’에 도달하는 변증법을 통해 정한(情恨)은 모든 이들의 정한(情恨)을 바라보는 길이 된다.

 

그로인해, 7연에서 화자의 조건이 어떠하든, ‘님의 품에 안겨서’ 정(情)의 하늘에 닿고 한(恨)의 바다를 건너 정한(情恨)을 완성 하겠다고 한다. 그때, 화자의 정은 모든 정의 정이요, 모든 한의 한이 된다.

 

이렇듯, 「정천한해(情天恨海)」는 1연~4연이 정한의 인간사를 통해 5연~7연에 이르러 ‘님’이라는 초월자의 세계 속에서 정한(情恨)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한용운은 인간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바라본 후, 그 대척점에서 절대자인 ‘님’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情과 恨이라는 인간사를 통해 초월자인 ‘님’을 만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정한(情恨)의 극한에서 님(세계)을 만날 수 있다는 초월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2. 인간의 육신은 하느님의 자기 진술 자체이다(칼 라너)

 

 

그렇다면 정한(情恨)으로 수렴되지 못한 이들의 사랑, 원한(怨恨)에 가까운 그 정한(情恨)은 어디로 흘러가나?

 

인간이 천수를 다 누린다고 해도 100년은,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나누기에도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인간의 수명자체가 정한(情恨)이라 할 수 있다. 진정 영겁(永劫) 앞에 찰라다.

 

천수를 다 누려도 인간의 정한(情恨)이 끝이 없거늘, 하물며 정한(情恨)조차도 누리지 못한 이들의 정한(情恨) 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줄까?

 

역사적으로 1차세계대전 사망수는 853만명~ ? 2차세계대전 사망자는 3,500만~6,000만명. 월남전 사망자수는? 한국전쟁 사망자수는? 코로나19사망자수는? 크고 작은 전쟁, 사건 사고로 익명의 사랑으로 돌아간, 그 사랑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언제까지 원한과 은혼의 구천을 헤메고 있나?

 

우리는 모든 죽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의식있는 죽음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무명의 죽음들, 그들이 하고 싶었던 그 사랑들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리스도 신앙:어제와 오늘』(요셉 라칭거, 장익 역, 분도출판사, 1974) 은 그 답을 주고 있다.

 

사랑은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을 찾는 외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외침이 성취될 수 없고 사랑이 무한을 갈구하면서도 줄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실은 사계에 잠겨 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다. 아울러 사랑은 어떠한 것만이 불사불멸을 이룰 수 있는가를 가져다 준다.

 

①~④에서 사랑을 생명으로 바꾸어 읽어볼 수도 있다. 모든 사랑은 불사와 불멸을 갈구하지만 그 사랑이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 있기에 스스로는 ‘불사불멸’에 이를 수 없다. 불사불멸 (不死不滅)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영원이다.

 

 

사랑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 위에 두는 사람, 즉 사랑을 위해서는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용의가 있는 경우에만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더 클 수 있다. 사랑이 죽음보다 위대해지려면 그에 앞서 단순한 생명보다 더 커야만 한다. 사랑이 의향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동시에 사랑의 힘이 단순한 생물세계의 힘보다 높고 후자를 지배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⑤~⑧에서 불사불멸을 살기 위해선 사랑의 가치가 생명의 가치위에 두어야 한다는 것, 즉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의향이 있는 경우에만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고 전언한다.  이 역시 아름다운 세계지만 필부필녀로서는 닿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오직 한 분 만이 참으로 바탕을 베풀어 줄 수 있다. 그분은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생성과 과도의 한가운데 머무는 <존재자>, 내 존재의 그림자와 메아리만 간직하지 않은 자, 그의 생각이 현실의 잔영만이 아닌, 산 이들의 신이다. 나 자신이 그분의 상념이고 그는 말하자면 내가 내 안에 있는 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나를 세워준다. 그의 생각은 뒤따르는 그림자가 아니라 내 존재의 원천적 힘이다. 그에게서는 내가 그림자로만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안에만 머물고자 할 경우보다 진실로 더 가까이 나에게 머물게 된다.

 

⑨~⑫에 이르러 오직 한 분만이 우리에게 그 불사불멸의 바탕을 이루어 준다고 보고 있다. 그 분은 우리의 그림자와 메아리만 간직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상념이자, 근원적으로 나를 세워주고 내 존재의 원천적 힘이라고 전한다. 진실로 내 안에서 나보다 더 나에게 머무는 분이라고 보고 있다.

 

그분은 누구인가?

 

칼 라너는 이를 “인간의 육신은 하느님의 자기 진술 자체이다”(칼라너, 『익명의 그리스도인』)라고 말한다.

 

정한으로 넘어갈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 모든 목숨들을 ‘육체’가 아닌 인간 조건의 총체적인 종합인 ‘육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의 육신은 하느님의 자기 진술 자체’라는 칼 라너의 통찰이 이를 해명해 준다.

 

여기서 그분을 알고 부른 인류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그림자와 메아리와 잔영과 상념을 넘어선 곳’에 계신 그 분이,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생성과 과도의 한가운데 머무는 <존재자>에서 그 답이 제시된다.

 

그분을 알고 믿고 부른 이들의 하늘만이 아니고 , 모든 이가 이고 있는 바로 그 하늘, 하늘에 계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지난주에 바라본 릴케의 『기도시집3부』에서 “오 주여, 각자에게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 각자가 사랑과 의미와 슬픔을 만났던, 진정 그 삶에서 비롯된 죽음을” 이라고 노래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품은 모든 정한의 목숨들,

 

우리는 여기서 익명의 모든 정한들이 구천을 헤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생성과 과도의 한가운데 머무는 <존재자>에서 쉼의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하게 된다.  원한과 익명과 무명의 죽음조차 그분의 죽음 안에서 ‘육신’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생명을 선물로 받은 유한자가 어떻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쉬워진다. 얼마쯤 숙련공이 된다. 음식을 만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엄마가 대충 만들어준 음식은 언제나 초보가 따라 할 수 없는 궁극의 맛을 낸다.

 

그런데 신앙은 아니다. 갈수록 어렵다. 그동안 예수님은 수많은 표징과 담화와 선언을 통해 ‘보아라’, ‘들어라’, ‘바라보라’에서, 이제는 영원히 살고 싶으면 ‘죽어라’를 요구하신다. 그냥 살려주시다가 이제는 죽으라 하신다.

 

우리의 생명은 분명 우리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 순전히 주어진 것이다.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느닷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자이자, 내쫒긴 자이자, 밖에 서있는 자이다. 그런데 그 거저 주어진 그 생명을 영원히 하려면 이번엔 죽으라 한다. 죽으면 살리라! 이 원가상환을 요구하는 듯한 언명이 자명하게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되고, 은총이 되기에 어떤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아니, 이미, 우리는 인류가 축적한 신앙보고서를 읽고 들어서 알고는 있다, 교리적으로 ‘죽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읽고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앎은 사계절의 순환이 있다는 것을 아는 딱 그만큼 안다는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앎이다.

 

신앙은 1차적으로 타자가 아니라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설득당한 만큼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이 ‘믿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언명은 J의 어록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자 믿음의 차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존재 사이‘ 그 사이에 처한 우리가 스스로에게 그 은총 지위를 줄 수 있는가?

 

복음과 강론에서는 ‘생즉필사, 사즉필생’을 말하고, 그것은 ‘무능력의 전능’에서 나온 사랑법으로 세상에서 가장 불온한 사랑방식을 전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의 단상과 사랑에 대한 담론은 사랑의 무능력함에 대한 보고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잘 하고 있었는지가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싶고, 잘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순5주 강론과 복음에서는 이 ‘사랑의 무능력’함에 대한 ‘불온한’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능력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사랑 앞에서도 무릎을 꿇는, 마치 무릎을 꿇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처럼 언제나 무릎 꿇을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그 위로가 ‘죽으면 살리라’는 위로와 격려다.

 

복음(요한, 12,20-33)을 읽어보기로 한다.

 

Ⓐ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시편을 방불케하는 사순5주 오신부님 강론에서,

 

Ⓔ전능하신 분의 죽음! 죽음을 선택하신 전능하신 분!...하느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느님은 계시지만, 전능한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모순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사랑도 전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능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이 전능해지면 사랑은 힘이 되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권력이 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이요, 능력이 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변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힘이요, 능력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전능한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전능해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힘이요, 능력이 된다면 그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게됩니다. 힘은, 능력은, 사람을 무릎꿇게 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군중과 제자들)그들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놀라운 기적의 힘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의 힘은 존경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정신은 희생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희생으로 표현되고 희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희생 없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그 희생까지도 받아들인 전능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정의를 택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지만, 사랑이신 하느님은 전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무능력하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 또한 사람들의 눈에는 무능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 무능하게 보이는 그 사랑이 사람들을 구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능함에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무능함으로 표현되는 사랑, 그 사랑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웃는 그 무능함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강론에서는 공통적으로 사랑의 무능력함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 무능력의 전능함, 하느님의 무능함에 희망을 걸어야 함을 전하고 있다. 그 무능력함은 사랑의 정신 안에는 희생이 있기 때문이며, 하느님조차도 그 희생을 받아듣여야만 했다는 사랑의 역설을 전한다.

 

우리는 복음과 강론을 통해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서 동시에 심한 자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의 무능력함과 우리의 무능력함이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무능력함은 사랑의 무능력이지만, 우리의 무능력은 사랑이 아닌 탕진의 무능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무능력으로 표현된 그 사랑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 무능력함의 자리를 재배치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된다. 어떻게 그분의 무능력의 전능함이 우리에게 구원의 표지가 된다고 할 수 있을까.

 

한용운의 「정천한해(情天恨海)」에서 정한의 극한에서 그 정한이 님에 의해 완성되었듯, 우리의 무능력 역시 그 분 안에서 구원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서 있다.

 

나는 빈손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탕진했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걸어갈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나는 밖이고, 밖에서 계속 찾고 있다. 나는 계속 헤메고 있다. 나는 계속 배고파하고 있다. 나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쓰러지고 있다. 나는 여전히 비어있다는 자체를 힘들어하고 있다. 나는 겉만 뜨겁다......등등...

 

이 모든 자기 상실 앞에서 그분이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문제삼지 않을 거란 사실이, 어떻게 고스란히 은총으로 받아들여질까?

 

우리는 여기서 유다와 베드로의 눈물을 보게 된다.

 

지난주 강론처럼 유다의 눈물은 윤리도덕적인 자기행위에 대한 판단의 결과, 그는 끝까지 자신의 행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끝내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볼 수 없었기에 예수의 십자가는 패배자의 낙인이라고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 끝에는 필연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설사 자살하지 않았어도 산다는 자체가 그건 자살과 맞먹는 절망의 연속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베드로는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에서 자신의 무능함에 시선을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그분의 무능함 속에 가려진 그 사랑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만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기 때문이고, 부활을 볼 수 있었기에 거슬러 올라가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십자가사건 이전에 베타니아에서 있었던 “라자로야 나오너라”(요한 11 38~44)에 담긴 생명의 표지를 바라보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예루살렘 입성 전 막달레나의 옥합을 깨트린 사건과 라자로의 소생 사건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우리게 보여준 전사에 해당한다. 또한 사계에 갇혀있는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불사불멸을 가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건이다.

 

라자로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에게 주어진 선물로써의 생명이다.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을 때, 죽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 먼저가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생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상실이 두려운 것은 충만을 모르기 때문인 것과 같다. 죽으면 살리라는 것은 ‘생명-죽음-생명’이라는 이 순환고리를 바라볼 때 가능할 것이다. 생명이라는 선물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바라볼 때, 죽움이라는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내 원인이 아님을 알 때, 내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인간은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와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존재 사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무능이 그분의 무능과 질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되지 않지만, 우리 자신의 무능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있다. 그분의 무능으로 보이는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베드로의 눈물을 우리가 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다의 눈물이든  베드로의 눈물이든  흘리게 되어 있다. 어떤 이유로든 무능하지 않은 인류는 없다. 무능은 인간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능에 대한 자책의 눈물(유다의 눈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걸어가게 하는 치유의 눈물(베드로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때,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고, 그분의 '무능의 전능'을 바라볼 수 있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론의 주제인  '하느님의 무능함으로 표현된 그 사랑에 희망'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무능하게 보이는 그 사랑이 사람들을 구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능함에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무능함으로 표현되는 사랑, 그 사랑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웃는 그 무능함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