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희망의 원리; 미망(迷妄)에서 여백(餘白), 전이(轉移)에서 배치(配置)로

나뭇잎숨결 2021. 3. 5. 10:11

 

희망의 원리; 미망(迷妄)에서 여백(餘白), 전이(轉移)에서 배치(配置)로

 

[사순 제2주일 (나해) 2021. 2. 28. Marc. 9,2-10]

 

 


1. 희망은 제2의 혼(괴테)
2.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
3. 희망은 미장센(mise-en-scene)이 아니다(마르코
9,2-10)

 

 

 

 

1. 희망은 제2의 혼(괴테)

 

‘희망’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 몇 편의 글을 읽어본다.

 

①내 몸의 통점을 이어놓고 나면/나의 형상이 되리라// 그렇듯 나무는 나무의 통점의 총합이다/ 아픔이 사라진 나무는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세상에, 생이 아픔과 동의어라니//아프지 않으면 노래가 떠오르지 않듯이/다리가 아프지 않을 땐 다리가 있는지도 모른다//나무의 통점에서 꺼낸 잎이 푸르다/꽃은 통증의 역설이다(복효근, 「꽃」)

 

복효근의 「꽃」에서는 희망과 절망, 고통과 기쁨을 동시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흔히 고통이나 아픔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나 복효근 시인은 생명 본래의 속성으로 통점, 통증을 생명현상으로 치환한다. ‘세상에, 생이 아픔과 동의어라니’에서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나 예외없이 아픔을 내장하고 있으며, 그 아픔에서 아름다움이 표출된다고 보고 있다.

 

②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길과 같은 것이다. /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 「희망」)

 

『광인일기』, 『아큐정전』을 쓴 루쉰은 ‘희망’은 ‘길’과 같다고 말한다. 애초에 희망이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주저앉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그 자체가 희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희망은 홀로라는 단독자에서 벗에나 공존과 닿아있다는 점에 희망은  열린지평이라 할 수 있다.

 

③희망이란 말도 엄격히 말하면 외래어일까/ 비를 맞으며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절망의 이야기를 나누며 희망을 생각했다/ 절망한 사람을 위하여 희망은 있는 것이라고 그는 벤자민을 인용했고. 나는 절망했다. 그러므로 나에게 희망이 있다고 데카르트를 흉내냈다.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유대인의 말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은 결코 절망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김광규, 「희망에 관한 시」)

 

김광규 시인은 ‘절망의 시간에도 희망은 언제나 앞에 있는 것, 어디선가 이리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싸워서 얻고 지켜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싸우고 이긴다는 표현은 상황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포함해 설사 상황 그대로일지라도 상황에 사로잡히지 않는 내적 자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희망은 결코 절망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다는 이 역설,

 

④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거 같아/ 절망은 중력의 편안함이라고 할까.../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나 날아가버린 그 밤에도/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라는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 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희망과 나, /희망은 종신형이다./희망이 외롭다(김승희, 「희망이 외롭다」)

 

김승희 시인은 희망은 ‘종신형이기에 결코 인간이 벗을 수 없는 천형’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은 단독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윤리로 보기 때문이다. 그때 희망은 복효근 시인의 시선처럼 생명성과 거의 동일하므로 설사 절대자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대자연 앞에서 모든 생명체에 대한 인간된 자의 반향(反響)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내려놓지 않는 것은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왜 이 세상이 폐허가 되면 안되냐고, 왜 절망의 중력에 누워버리면 안되냐고 시인은 절규하듯 묻는다.  이 세계가 폐허로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희망이고 그 희망은 외로움이기에 그런거냐고...

 

그렇다면 왜 시인들은 절망하면서 희망을 놓을 수 없을까? 그 답을 괴테는 이렇게 들려준다.

 

희망은 제2의 ‘혼’이다. 아무리 불행하다하더라도 혼(魂)이 있으면 인생이라는 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혼’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망망대해에서 타고 가던 배가 부서져도, 널판지 한 조각에 의지하고 두 손을 움직이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끝내 살아내는 것, 열정, 파토스는 인간에게 ‘혼’이 있다는 존재 증명 같은 것이다.(괴테, 『파우스트』)

 

희망을 생명현상이자, 함께 가는 길이자, 희망은 결코 절망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이자, 세상을 폐허로 완성시키지 않는 힘의 원천인 것은 괴테가 바라본 대로 희망은 제2의 ‘혼’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모든 것을 잃은 파우스트박사가 끝까지 삶에 대한 열정, 파토스를 놓지 않은 것은 그가 지닌 혼(魂) 때문이라고 보았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아닌, 어떤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아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닌, 어떤 정신의 만족을 위해서도 아닌, 오직 생래적인 혼(魂)의 잠재태라고 본 것이다. 인간의 삶을 이리저리 끌고다니는 악마 메피스토는 메피스토텔레스의 줄인 말로 ‘빛을 사랑하지 않는 자’ 라고 한다면, 희망은 ‘빛을 사랑하는 자’라는 의역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희망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사순1주 강론에서)이라는 할 때, 희망은 어떤 정서(情緖)나 현상(現象)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本質)을 바라볼 수 있는 ‘비전Vision)이라 할 수 있다. 본질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 혹은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예견(豫見) 그 자체를 희망이라 할 수 있다.

 

 

 

 

 

 

 

2.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

 

 

그렇다면, 희망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사순1주 강론에서)이라는 할 때, 희망은 어떤 정서(情緖)나 현상(現象)이 아니라 생명의 본질(本質)을 바라볼 수 있는 ‘비전Vision)이라 한다면 이것은 표정의 미소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 희망을 내재화 하는 것은 사랑이나 믿음처럼 어떤 초월적 의지의 개입이 있어야 가능함을 알 수 있다.

 

희망에 관한 시나 글을 읽다보면 ‘희망’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나 구체적으로 나 자신에게 무엇을 희망하나? 라는 성찰로 들어가면 <모른다>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희망이라는 말 앞에서 첫 번째 직면하게 되는 상황이 ‘희망’이 무언지 ‘모른다’는 것이다. 평정심, ‘아파테이아apatheir’ 감정, 정열, 고통 공포, 욕망 쾌락 같은 정념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님 어떤 희열, 기쁨을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동물이나 식물처럼 본능적인 생존의지가 희망인지?

 

본질적인 것을 향해 삶의 방향을 잡게 하는 어떤 것이라고 희망이라는 개념이 어렴프시 잡히는 순간에도, 무엇을 현상이라고 보며 무엇을 ‘본질’로 볼 것인가 하는 잇닿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모른다’는 것에 직면한다.

 

이렇게 희망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이미 희망하는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혹은 절망을 모르면서 절망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파편화된 생각 자체가 우리에게 희망에 대해 시사하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희망은 엄격하게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사순1주 강론에서)이라 할 때 이것은 현상이나 정서적 측면이 아니라 본질적 측면과 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물리적인 꿈의 성취 같은 것을 제외한다하더라도 분명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내재되어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 이룬다는 것은 물질세계의 이룸보다 더 포괄적인 이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전제로 할 때, 희망은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는 존재론적이고 선취적인 의식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희망의 내용과 관련되어 희망이 선택 가능한 영역인가에 대한 물음이 다시 제기된다. 희망에는 어떠한 상태든 언제나 선취의식이라는 의미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희망에 어떤 선취의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했을 때, 이 의식은 이미 우리 내부에 주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외부에서 작동하는 힘에 대한 반동현상인가? 자유의지 실현여부에 달려있는 것인가? 희망이 주어지는 것인가? 찾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낳게 한다. 희망은 정서(情緖) 현상(現象) 이 아니라 본질(本質) 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본질은 무엇인가?

 

④개체의 본질은 개체를 초월한다(플라톤, 『파이돈』 )

 

플라톤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에 의해서 아름답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들의 문답을 통해서 묻고 대답할 때 ’~인 자체‘라는 표시를 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것이기도 하며, 이 모든 것들에 관한 지식들은 우리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획득하여 갖고 있었다는 것, 이 필연적인 것’ 이 ‘본질’이고 본질은 선험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아름다운 사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에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분유(分有) 이론을 도출한다. 그럼에도 현상계에서는 이 아름다움이 훼손되어버린 현실을 목격하고 『국가』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을 건널 때, 너무나 목마른 영혼이 이 강의 물을 마셨고 그 순간 본질적인 이데아를 망각했다는 신화소를 끌어들인다. 풀라톤에게 있어 본질은 현실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뒤에 영혼이 돌아가는 세계에 모여있다고 보았다.

 

⑤개체의 본질은 개체에 내재한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은 이미 개체 속에 내재해 있다고 말한다. 전체 즉 개별적인 살과 뼈 속에 본질인 에이도스가 있고, 이 에이도스는 질료에 있어 다를지라도 그러나 그것은 종에서는 같다고 보았다. 그것들의 종은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론』에서 구체적인 개체들을 이루고 있는 개체들의 조직 원리를 ‘영혼’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영혼은 육체와 무관한, 형상과 무관한 불변하는 실체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체가 소멸하면 영혼도 소멸하는 가변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다. 본질은 형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혼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모두 통합해 신학적으로 신 존재증명인 <영혼> 개념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본질에서 영혼개념이 도출되는 이러한 일련의 사유 과정들은 우리에게 희망은 보다 근본적인 지점을 바라보는 ‘비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은 현상 너머를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희망을 바라보는 비전은 인간이 자동적으로 완성하는 주체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인류사의 궤적은 여러 명제로 그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그것을 완성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초점이 모아지고 여기서 다시 절대적 타자(신)를 인류는 소환하기에 이른다. 신을  소환하기를 꺼리는 학자들은 초월자 혹은 절대자라는 말로 주체의 자리를 대치하기도 하였다.

 

⑥절대적 타자가 우리의 유한성을 보완한다(버클리 주교, 『하일라스와 필로누수 사이의 세 가지 대화』)

 

아일랜드의 버클리주교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연결하여 질료를 상징하는 하일라스와 정신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필로누스의 대화를 통해 당시 영국의 경험론에 대한 선험론적인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버클리 주교는 감각을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 이들을 대변해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라는 경험론적 명제를 도출한다. 그는 이런 경험론적인 명제를 통해 신은 지각의 대상이 아니라 지각의 주체로 설정한다.

 

인간의 지각은 유한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에 내가 지각하지 못하는 것을 지각하는 존재가 누구인가를 묻게 된다. 그가 바로 신이요 절대자이며 신은 모든 것을 언제나 지각하기 때문이고 이 지각의 주체 확장을 통해 신을 제시한다. 내 지각의 불완전성 혹은 유한성은 신의 지각으로 대체됨으로서 온전해 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버클리 주교는 우리의 앎을 보장해주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불변의 타자로 인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무한 혹은 영원한 삶으로 넘어갈 수 있으며. 따라서 희망의 원리인 본질은 인간의 지력만으로는 결코 지각할 수 없는 지점이라고 본 것이다.

 

⑦상대적 타자가 나의 유한성을 보완한다(들뢰즈, 『의미의 논리』)

 

버클리 주교와는 달리 들뢰즈는 “대상에서 내가 보지 못한 부분, 그 부분을 동시에 타자가 볼 수 있다”는 타자론을 정립한다. 내가 대상의 숨겨진 쪽을 보기위해 돌아가면 나는 대상 뒤에서 타자를 만나게 되고, 타자의 봄과 나이 봄이 합쳐질 때, 대상의 총체적 봄이 달성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내 등 뒤의 대상들은 타자들이 그것들을 볼 수 있음으로 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며 나는 그것들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타자는 나로 하여금 세계 안에서 ‘봄’을 완성할 수 있는 여백들과 전이를 확보해 준다.

 

이렇게 나로 하여금 봄을 완성시킨 타자는 나에게 삶의 균열을 경험하게 만드는 역설적 존재라고 보았다. 타자가 나타나기 전에 어떤 안전한 세계였다(내가 본 과거의 시간을 의식의 총체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타자의 등장으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의 진면목을 보게됨으로써, 위협적인 세계의 도래를 보게되면서, 나의 자아에 이전에 없는 균열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나의 자아는 이때 비로소 한 과거의 세계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임을 알게되고 타자가 가능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에 매몰되었던 존재임을 아프게 인정하게 된다. 이로써 타자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배치, 아장스망agencement을 실현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유한성을 보충하는 타자를 신 대신 인류가 만나는 구체적 인간으로 설정한다. 들뢰즈에게 본질을 볼 수 있는 혹은 희망에 대해 조심스럽게 타진할 수 있는 것은 여백들과 전이를 통한 삶의 재배치에 있다고 본 것이다.

 

독일의 철자이자 신학자 몰트만에게 많은 영향을 준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란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로 표출되며, 타자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재배치 할 것인가와 연결하고 있다. 희망은 불가피하게 미래라는 시간개념이 개입된다고 보고 있다. 미래의 현재화, 본질은 언제나 ‘아직’의 상태로 우리에게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⑧희망은 아직 아닌 존재하지 않은 것, 희망이 모든 아님을 아직 아님으로 바꿈으로써 부정성을 극복한다.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인간의 모든 지적능력과 모든 존재의 지평을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념화되기는커녕 한 번도 언어로서 표현된 적이 없다. 테레키우스 파로는 라틴어 문법을 처음으로 연구하다가 미래라는 시제를 잊어버렸다고 한다. 이렇듯이 미래는 철학의 명제에도 철학의 영역에서 아직 제대로 이해된 바 없다. 따라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아직 아니다’, 라는 어떤 존재론적인 토대에 바탕을 두어 이해되어야 한다. (에른스트블로호, 박설호 옮김, 솔, 1995)

 

희망의 원리,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 라는 것은 아직은 없음(무)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아님은 어떤 특정한 무엇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것,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 어떤 것이 드러나 있지 않음, 아직 접하지 못한 경험, 첫 질문에 대한 보류된 답이라 할 수 있다.

 

유토피아적 질료가 자기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Vor-Schein미리 드러남, 선현인데, 예측된 상은 주관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고 그는 말한다. 희망의 내용은 예견적으로 파악되는 것으로 모든 창작활동이나 사유활동에 중요한 개념으로 이것은 주관적 정서나 인지작용에 국한하지 않고 구체적인 희망을 구성하는 자연질료의 창조적인 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된다고 보고 있다. 그는 희망이 관념의 영역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가에 주목한다.

 

이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앞서는 개념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가 변증법적으로 엉켜있는 시간 개념으로, 이는 존재론적 시간개념이기도 하고 이 시간 개념 속에서 선취 혹은 선 파악, 선취하는 것, 예견하는 것으로서 ‘자기와의 만남(selbstbegegnung)’이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우리는 갑자기 그림 속에 있고, 바로 그 모습이 순식간에 그려지면서 충만된 삶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희망 앞에서 구성되지 못한 마지막 질문은 죽음이라는 바깥 영역에 대한 것으로 블로흐가 의도하는 것은 가장 반유토피아로써의 죽음 역시 희망을 근본적으로 좌절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실존은 죽음에 대하여 불가역적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블로흐는 여기서 ‘복음’에서 그 실증적 인물을 찾고 ‘예수를 좌절을 모르는 현실’로 바라보게 된다.

 

예견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희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희망은 공포와 반대되는 정서일 뿐만 아니라(공포역시 예견될 수 있기 때문) 보다 근본적으로 인지적 유형의 ‘방향설정’에 해당한다. 그렇게 규정된 미래지향적인의 표상과 생각은 사려깊지 못한 충동적인 그림이나 추상적인 유형의 좁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예견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희망의 반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미망’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은 길을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위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버클리주교, 들뢰즈, 에른스트블로흐의 사유의 궤적을 종합하면 여기서 희망은 절대적인 타자이든 상대적인 타자이든 세계의 본질을 인식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여부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이 ‘좌절을 모르는 현실’ 혹은  ‘앞을 향해 나아가려’하는 희망의 원리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3. 희망은 미장센(mise-en-scene)이 아니다(마르코 9,2-10)

 

그렇다면, 신앙안에서 이 ‘좌절을 모르는 현실’ 혹은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희망’이 어떻게 가능한가?

 

복음(마르코 9,2-10)을 읽어 본다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 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에서 ‘높은 산에 오르셨다’는 표현에는 이 지상과 구별되는 ‘외딴 곳’의 의미로 이는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는 영적인 장소. 공간성을 의미하는  ‘여백’이라 할 수 있다. 이 여백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가 된 '오늘', 바로 지금을 의미한다.

 

이 ‘여백’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상황에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다. 고통과 좌절. 실망과 체념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한계상황에 대한 거리두기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늘 어떤 상황 앞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상황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절대화할 때 그 상황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그때 <나-너-신>이라는 길을 모두 잃게 된다.

 

예수님도 자주 외딴 곳에 머무르셨듯, 우리는 그 외딴 곳, 높은 산으로 상징되는 영적 공간에서 우리에게 좌절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으로부터 숨고르기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여백이다.

 

우리가 상황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그 상황이 무화되어서 자유롭기도 하겠지만 그 상황 자체를 재 맥락화 시킬 수 있는 힘에서 얻어지는 자유이기도 하다. 이는 높은 곳, 혹은 외딴 곳의 영적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여백은 머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걸어가기 위한 것이다.  이런 영적체험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체험이 소명을 가능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제자들은 동시에 두 세계를 경험한다. 눈이 밝아지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시야와 그러나 그 상황을 바라보는 두려움이라는 상반된 체험. 그 순간에 제자들이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체험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능했다는 데 초점이 놓여있다. 사랑은 우리의 현재보다 언제나 넘친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데에는 우리의 한 생이 다 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도나 묵상, 명상은 높은 산에 오르거나 외딴 곳에 머무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때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 황홀경은 그분을 따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영적 충만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는 것도 사실이다. 초막을 짓고 그 상태에 머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커져서 영적 황홀경에 대한 충만까지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하늘과 땅의 여백을 체험했던 그 경험으로 우리는 현실을 재맥락화 시킬 수 있는 힘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영안이 열리면 들을 수 있는 청력도 강화된다고 할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을 확증한다.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을 ‘재배치’ 혹은 재맥락화 시킬 수 있다. 그분을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이제 영적 체험을 한다는 것이기에, 세상이나 자신의 마음이 일으키는 소음에서 멀어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기 삶을 재배치 혹은 재맥락화 하고픈 원의가 생긴다. 들뢰즈가 통찰한 타자체험처럼 그 말씀은 우리의 안전한 삶을 뒤흔드는 것이기에 듣는다는 것은 단지 경청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그분이 원하는 삶으로 송두리째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 ‘죽은 이들 가운데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생사관의 ‘전이’이자 파스카가 완성되는 지점에 해당한다. 우리가 마지막 통과하야 할 한계상황은 죽음이다. 이것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 궁극에 도달할 희망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넘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것,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 때문에 가능하다.

 

이 말씀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전언이자 신 정체성에 관한 것이자 신앙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전능과 사랑이 어떻게 그분의 정체성인지, 영웅적 스펙터클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보면서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실은 우리 삶도 그분을 따라 그런 삶으로 ‘전이’됨을 의미한다.

 

우리의 희망은 이 세상의 어떤 장애에서 벗어난 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지상적 삶의 최종적 장애를 극복하는 그 지점까지 넓혀진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설왕설래하는 것도 당연하다.

 

타볼산-골고타 산- 타볼산 이 사랑의 완성 포인트를 한순간에 제자들이 통찰하고 내재화했다면 오늘 우리는 더 큰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 제자들의 미망(迷妄) 과 오늘 우리의 미망(迷妄)은 크게 다르지 않고 ‘여백(餘白), 전이(轉移), 배치(配置)를 통해 그분의 백성으로 온전해질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순2주 강론에서 오신부님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이 모습은, 제자들이 매여있어서는 안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에 매여있으면, ‘당신의 길을 가셔야 하는 예수님을 놓아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타볼 산에서 내려와서 다시 골고타 산으로 오르시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예수님의 진정한 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에게만 고통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만의 고통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하느님의 고통이기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겪으셔야 할 고통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희망을 버린 사람은 당신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희망을 버린 사람은, 이미 지옥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겪을 고통은 지옥을 경험하는 고통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을 경험하는 고통을 겪더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전해주시기 위해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변모, 당신의 본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서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은. 실은 제자들과 우리 역시 가야할 길이기도하다. 누군가의 길을 가도록 지켜주는 것은 내 길을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순례의 종착에 있지 않고 순례의 여정 중에 있다. 이 여정은 타볼산과 골고타산을 동시에 체험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은 하느님의 고통이듯, 인류의 어떤 고통도 우리와 무관한 고통은 없다. 고통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연대의 시작이기도 하다는 루쉰의 생각과 닿아있다. 고통만이 우리로 하여금 공존의 타자의식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서 인식의 대 전이(轉移)를 보게 된다. 하느님 나라의 포괄적 의미는 죄의 차원을 넘어선 희망의 차원임을 알게 된다. 이는 복음에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의 희망의 지평이 죽음을 넘어선 곳, 부활에 있음을 적시한다고 할 수 있다.

 

Ⓖ‘희망이 사라지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그렇기에 제자들에게 ‘미리 앞당겨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제자들은 앞으로 제자들이 감당할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바라보게 된다. 제자들이 그 순간에 그것을 통찰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분께 아낌없이 ‘사랑받았던 기억’은 그들이 고통받는 순간에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랑을 완성하는 것은 그분 사랑이 함께 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이 아니면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희망도 완성될 수 없다는 것, 사랑이 곧 희망이라는 것, 여기서 향주삼덕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연쇄적이라기 보다는 동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는 어떻게 땅과 하늘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오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희망의 로드맵에 해당한다. 고통과 죽음이라는 인류 모두가‘거쳐야하는 과정’이 어떻게 희망이 될 수 있는가를 예표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희망한다’는 것은 ‘고통을 묵상한다’는 것과 같음을 바라보게 된다. 사순시기에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묵상하는 것이자, 우리의 희망이 대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만큼의 고통, 고통만큼의 사랑’은 사랑과 고통의 크기가 같다거나 희망과 고통의 크기가 같다는 양적 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사랑과 희망은 고통을 절대적으로 포괄하고 넘어선 경지이지만, 그 질적인 ‘전이(轉移), 배치(配置)’를 가져오는 데, 고통은 지렛대의 원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희망이 없이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고, 고통 없이는 희망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과 희망은 동일선상에서 우리를 동시에 추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빵과 눈물을 동시에 삼키고 있는 사람에게 감히 “희망의 끈을 놓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희망을 끈을 놓으면 어쩌나 쯧쯧”등등... 쉽게 말해질 수 없는 단어가 희망이다.

 

대부분 사랑이란 단어를 구체적 대상에게 발화하기를 꺼리면서도 희망은 서슴없이 집어들기도 한다. 자칫, '믿음소망사랑'인 향주삼덕이 기독교의 '미장센(mise-en-scene)'이 아니기를 묵상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희망은 인생이라는 드라마에   부품이 아니다.  사랑을 끌고가는 것도 희망이고, 믿음을 끌고가는 희망이고, 삶을 끌어가는 것도(자살하지 않는 것도) 희망이라면, 그것은 인생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해당한다. 사순2주 복음과 강론을 묵상하다보면 쉽게 발화하기 어려운 말이 '희망'이 아닌가 싶다.(미장센 [mise en scène] 무대에 오른 등장인물의 배치나 동작, 무대 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설계 혹은 부분)

 

예컨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하자’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게 되었을 때, 무너지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내게  사랑과 믿음이 아니라 희망을 주문하게 되었을 때,  희망의 원리는 강한 반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랑의 세 단계에서 보듯, 사랑은 스며드는 어떤 단계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all or nothing’ 이다. 희망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것이지 ‘어느 정도’ 희망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승희 시인은 희망을 종신형의 외로움이라 부르기도 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 뭉턱 빠져나가는 거 같은 어떤 시간 속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도조차도 나오지 않는 상황, 의지조차도 내 마음대로 제어되지 않는 상황, 그때, 내 상황과 달리 희망의 ‘담담한’ 얼굴을 보게되었을 때 희망은 정서나 감정의 차원이 아님을 바라보게 된다. 무조건 믿어, 그럼 모든 것이 잘 될거야, 이렇게 두리뭉실 말 할 수 있는게  아니란 것이다. 이쯤에서 그럼 희망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생명에 대한 존중(탯줄과 비슷)'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과 믿음은 감각적으로 표현이 가능한데, 희망은 감각을 초월한다. 거의 무생물적인 자연에 가깝다. 강론과 복음에서 바라보듯, 희망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생명줄이자, 모세의 시간과 엘리야의 시간과 예수님의 시간과 제자들의 시간과 오늘 우리의 시간이 엉켜있는, 시간을 무화시키는 오늘이자, 의지 너머에서 의지를 추동하는 숨결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랑에 대해, 혹은 믿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만, 희망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희망이 없는 사랑, 희망이 없는 믿음, 과연 그것을 사랑이라고 혹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통렬한 자기비판이 수행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복음과 강론을 통해서 바라본 ‘아직 아닌 존재(das Noch-Nicht-Sein)’인 희망은 ‘미망(迷妄)에서 여백(餘白), 전이(轉移)에서 배치(配置)’를 통해 완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완성은 우리 혼자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타자이면서 동시에 상대적 타자를 만나 완성된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희망의 완성은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타자성을 모두 갖춘 그분의 사랑에서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현실’이란 그분의 사랑을 모르면 불가능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타볼산의 ‘미리 앞당겨 보여주신’ 그 사랑을 체험한 제자들도 수없이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끝까지 그분들의 길을 걸어갔듯, 우리도 우리의 길을 그렇게 걸어가게 되리란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구체가 결여된 사랑은 ‘끝까지 걸어가기’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도 알게 된다. 희망이 사라지는 고통’이란 바로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보여줄 수도, 보게되지도 못하는 그런 치명적인 사랑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 ‘미리 앞당겨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사랑이 얼마나 구체적인 것인지, 그 구체적인 사랑에서 어떻게 희망이 만들어지는지, 희망이 무엇인지,  희망의 원리까지 바라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희망은 사랑이다. 그레서 우리는 그 사랑(예수를 믿는 것)에 일생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가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는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최후의 만찬을 기도문으로 대체하지 않고, 제병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로 나누는 미사 전례에서 이를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보지않고 믿기 위해서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가 관념을 낳는 것이지 관념이 관념을 낳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 구체적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큰 사랑을 하게 되는 사랑의 순환에서 이를 연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