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의 전환, 치료와 치유의 해석학(1)
The Transformation of Perception, Therapeutics and Hermeneutics of Healing
|
1. 소비되는 ‘몸’과 텍스트의 풍요로움
2004년 빌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몸을 이용해 전력과 자료를 송신하는 방법과 기술에 대한 특허를 얻었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인간 혈액은 21세기 혈액이라 할 수 있는 정보를 실어나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착안한 특허였다. 이 기술은 피부의 전도적 속성을 신체 주변의 전기장치와 연결하는 데 사용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이용해 허리에 찬 휴대폰에서부터 소리와 영상을 전송할 수 있는 귀걸이와 같은 장치들이 가능해진다. 각자 몸에 맞게 입을 수 있도록 고안된 새로운 기술들은 사용자가 자신에게 특화된 컴퓨터 장치를 '재단'할 수 있다. 피부를 전도체로 이용하는 장치들은 사용자의 건강을 모니터링해주는 부가적인 기능을 갖기도 한다. 몸에 부착된 다양한 장치들은 단 하나의 전력공급원으로부터 피부를 통해 전력을 공급받는다. 이 기술을 이용한 가장 미래적인 장치는 바로 피부를 이용한 키보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팔을 두드리면서 글을 쓸 수 있다. 이렇게 피부를 정보 채널로 사용하는 장치들은 일반적인 컴퓨터와 블루투스 기술과는 달리 다른 전파들로부터 방해받을 가능성이 없으며, 따라서 도청을 방지할 수도 있다.
'몸'의 주술, 분신 상상력/피부는 몸의 안과 밖 경계를 나타내는 관문이다. 얼굴을 비롯해 몸은 그 사람의 성격, 나이, 신분, 직업, 인종 등 수많은 코드를 나타낸다. 특히 여성의 경우 피부는 여성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매체로까지 작용한다. 수많은 성형, 화장품은 이미 황금 알을 낳는 산업이 되었다. 사실 상식을 초월할 정도의 성형수술비, 고가의 화장품이 통용될 수 있는 것도 여성들의 환상과 상상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몸이 세상과 만나는 장소이자 매체로서의 피부는 신화시대로부터 수많은 상상력의 보고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운 피부를 위해 매일 우유로 목욕을 했다는 소문이라든가, 드라큘라 백작부인으로 잘 알려진 바토리 백작부인이 청춘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들의 피로 목욕했다는 이야기들은 입에서 입으로 수천 년을 전해져오고 있지 않은가. 몸에 대한 상상은 문신에서부터 바디아트, 커널아아트 등, 몸은 소비의 최전선에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최대자본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몸'은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생산과 소비의 주체라 하겠다.
예술사에서 ‘몸’은 소재이자 주제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만큼 넓은 장르에 걸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세한 유파도 드물다. 초현실주의는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상상력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작품을 창작하는 데 무의식과 자동기법을 도입했다. 초현실주의가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게 하는 통로가 바로 ‘몸’ 이었다. 의식 깊숙이 내재한 무의식을 발현시키고 자유로운 연상작용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성이나 의식, 정신보다 ‘몸’을 통해서였다. 이는 ‘몸’이 모순되는 것들을 융합시키는 도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몸’은 금지되고 억압되어온 것을 풀어헤쳐 상상력의 모험이 펼쳐지는 장소였다. ‘몸’은 의식의 경계로부터 소외되었던 것들이 표출되고, 갖가지 실험들이 행해지는 탈경계의 장소였다.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몸'은 동물·식물·광물 등 낯선 것들과 혼합되기 시작했고, 통일된 몸의 경계를 허물며 일상적인 오브제나 자연과 콜라주가 되었다. 그런 콜라주 속에서 머리는 포크, 몸은 조개, 팔은 나무가 되었다. 초현실주의에서의 '몸'은 모든 경계들이 뒤섞이고 융합되는 새로운 상상력의 장이었다. 초현실주의 이전에는 이처럼 과감하게 '몸'을 해체시키지 못했다. 아니 '몸'에 대해 이런 상상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기계론적 사고, 유물론, 이성중심주의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몸을 상상하고자 시도했다.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같은 많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인간의 몸을 조각낸 것은 더 이상 인체를 '대칭성'이라는 기하학적 원칙에 입각해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오나르도다빈치가 구상한 '몸'의 대칭성은 우리의 신체가 정확한 '비율' 을 토대로 설계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한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공간을 좌우와 전후로 나누는 기하학적 사고를 하게 된 배경을 신체의 대칭구조에서 찾기도 한다. 반면 초현실주의자들이 이성적 사고의 신체적 토대가 되는 대칭성을 의도적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그들이 두번의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인간의 '몸'을 상상하되, 더 이상 폐허의 원인인 '이성'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져낸 조각난 '몸'들을 이전과는 다른 수단을 이용해 결합시키면서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사유했다. 새로운 수단은 '무의식'이었고 성적인 힘이기도 했다.
한국 문학에서 초현실주의, 의식의 흐름, 자동기술법을 문학으로 끌어들인 시인 가운데 어떤 ‘현상’이라 이름이 붙을 수 있는 이가 이상이다. 이상의 「각혈의 아침」은 자신의 몸. 혹은 병을 시의 소재로 끌어들여 소멸하는 몸과 텍스트의 풍요로움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시화한다.
Ⓐ사과는 깨끗하고 또 춥고 해서 사과를 먹으면 시려워진다. 어째서 그렇게 냉랭한지 책상 위에서 하루 종일 색깔을 변치 아니한다. 차차로―둘이 다 시들어 간다. //Ⓑ먼 사람이 그대로 커다랗다 아니 가까운 사람이 그대로 자그마하다 아니 어느 쪽도 아니다 나는 그 어느 누구와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들의 어느 하나도 나를 알지 못하니 말이다 아니 그 어느 쪽도 아니다(레일을 타면 전차는 어디라도 갈 수 있다).//Ⓒ 담배 연기의 한 무더기 그 실내에서 나는 긋지 하니 한 성냥을 몇 개비부러뜨렸다. 그 실내의 연기의 한 무더기 점화되어 나만 남기고 잘도 타나보다 잉크는 축축하다 연필로 아무렇게나 시커먼 면을 그리면 연분(鉛粉)은 종이 위에 흩어진다. //Ⓓ레코드 고랑을 사람이 달린다. 거꾸로 달리는 불행한 사람은 나 같기도 하다 멀어지는 음악소리를 바쁘게 듣고 있나보다.//발을 덮는 여자구두가 가래를 밟는다 땅에서 빈곤이 묻어온다. 받아 써서 통념(通念)해야 할 암호 쓸쓸한 초롱불과 우체통 사람들이 수명(壽命)을 거느리고 멀어져 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나의 뱃속엔 통신이 잠겨 있다. 새장 속에서 지저귀는 새 나는 콧속 털을 잡아뽑는다 밤 소란한 정적 속에서 미래에 실린 기억이 종이처럼 뒤엎어진다.//벌써 나는 내 몸을 볼 수 없다 푸른 하늘이 새장 속에 있는 것같이 멀리서 가위가 손가락을 연신 연방 잘라 간다. 검고 가느다란 무게가 내 눈구멍에 넘쳐 왔는데 나는 그림자와 서로 껴안는 나의 몸뚱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알맹이까지 빨간 사과가 먹고싶다는 둥 피가 물들기 때문에 여윈다는 말을 듣곤 먹지 않았던 일이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종자는 이제 심어도 나지 않는다고 단정케 하는 사과 겉껍질의 빨간 색 그것이다. 공기마저 얼어서 나를 못 통하게 한다. 뜰을 주형(鑄型)처럼 한장 한장 떠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호흡에 탄환을 쏘아넣는 놈이 있다. 병석에 나는 조심조심 조용히 누워 있노라니까 뜰에 바람이 불어서 무엇인가 떼굴떼굴 굴려지고 있는 그런 낌새가 보였다.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어릴 적 사진에서 스스로 병을 진단한다.//Ⓕ가브리엘 천사균(天使菌) (내가 가장 불세출의 그리스도라 치고)이 살균제는 마침내 폐결핵의 혈담이었다(고?)폐속 뼁기 칠한 십자가가 날이날마다 발돋움을 한다. 폐속엔 요리사 천사가 있어서 때때로 소변을 본단 말이다.//나에 대해 달력의 숫자는 차츰차츰 줄어든다. 네온사인은 색소폰같이 야위었다.//그리고 나의 정맥은 휘파람같이 야위었다. 하얀 천사가 나의 폐에 가벼이 노크한다. 황혼 같은 폐속에서는 고요히 물이 끓고 있다. 고무전선을 끌어다가 성(聖) 베드로가 도청을 한다. 그리곤 세 번이나 천사를 보고 나는 모른다고 한다.//Ⓖ그때 닭이 홰를 친다―어엇 끓는 물을 엎지르면 야단 야단―봄이 와서 따스한 건 지구의 아궁이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모두가 끓어오른다. 아지랑이처럼 나만이 사금파리 모양 남는다. 나무들조차 끓어서 푸른 거품을 자꾸 뿜어내고 있는데도(1933. 1. 20.)
Ⓐ에서 나와 사과는 똑같은 물리적 속성을 지닌 사물에 해당한다. 나는 사과를 통해 나를 보고 있다. 책상위의 사과와 그 사과를 보고 있는 나, 하루종일 색깔이 변치않는 사과는 시간이 흐르자 시들어 간다. 사과의 시듦을 보고 사과와 나는 시간 앞에서 소멸이 예정된 사물이라는 등치가 이루어진다. 이는 고전적 ‘몸’에 대한 이해, 자연주의적 육체, 사람의 몸은 모든 물질과 더불어 자연의 한 부분 흙으로 돌아갈 사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에서 나의 타자화, 타자의 타자화가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나도 세계도 가깝거나 멀거나 한 그런 공간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존재지만 그러나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몸’은 나에게조차 소외된다. 나의 것이면서 나일 수 없는 ‘알 수 없다’는 소통의 부재 앞에서 나는 나로부터 멀어지고 가까워지고를 반복하지만, 타자 역시 가깝거나 멀어지면서 공간의 거리와 상관없이 결국은, 드디어는 ‘알지 못하므로' '알 수 없으므로' 파악과 이해의 대상이 아닌 버려지고 소외된 사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레일을 타면 전차는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이 레일은 이상에게 무엇이었을까? 문학이자, 유년의 나르시스적 기억이다.
Ⓒ에서 나는 살기를 포기한 자다. 그러나 문학을 포기한 자는 아니다. 자기 병에 가장 치명적인 담배연기로 가득한 방에서, 죽음으로 성큼 다가가며 하고 싶은 일이자 할 수 있는 일,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 “담배 연기의 한 무더기 그 실내에서 나는 긋지 하니 한 성냥을 몇 개비부러뜨렸다. 그 실내의 연기의 한 무더기 점화되어 나만 남기고 잘도 타나보다 잉크는 축축하다 연필로 아무렇게나 시커먼 면을 그리면 연분(鉛粉)은 종이 위에 흩어진다”
Ⓓ에서 화자는 음악을 듣고 있다. 청각을 통해서 나는 내 몸에서 떠남을 시도한다. 그러나 내 몸을 볼 수가 없다, 는 것에 이르러 다시 내 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새처럼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몸이 온전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때 속까지 빨간 사과를 먹고 싶어 했다는 생각에 이르러 과거의 사과와 오늘 책상위에 놓인 겉과 속이 다른 사과에서 자기 운명의 필연성을 상기한다. 자기 예언처럼 사과의 운명은 자신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화자는 이제 통증을 몸으로 느낀다. 문학이 끝나고 예술이 끝난 자리에 소멸하는 그의 ‘몸’만 남아 있다. 예술로도 문학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그의 몸이 있다. Ⓔ에서 나의 호흡에 탄환을 쏘아넣는 놈이 있다. 자신의 통증으로 인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나를 진단한다. 나의 정맥은 휘파람처럼 야위어있음과 어릴적 사진을 보고 자신의 병을 다시 진단한다.
Ⓕ에 이르러 화자(작가 이상은 가톨릭 신자였다)는 그리스도를 소환한다. 자신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 나르시스즘적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베드로가 닭이 울기전 예수를 세 번 배신하였듯, 그러나 시간이 자신을 배신한다. Ⓖ‘어엇 끓는 물을 엎지르면 야단 야단’에서 화자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모두가 끓어오른다. 아지랑이처럼 나만이 사금파리 모양 남는다.’
27세에 요절한 시인 이상은,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 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代償) 세계로 탈출하려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 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오감도」 계열의 시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 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 유희는 그의 인식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시창작 방법이 되어 ‘이상현상’이라는 문학장르를 형성한다.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원고향인 유년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 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詩作)은 그러한 욕구 충족의 한 표현으로 그는 인간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문학에 제헌한 시적 구제(詩的救濟)를 꾀했다.
초현실주의를 이끈 대표적 작가 앙드레 브르통은 ‘몸’을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소통할 수 있는 것과 소통할 수 없는 것, 높은 것과 낮은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지각되지 않기 시작하는 정신의 어떤 지점"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몸’이 모순되는 것들을 융합시키는 도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몸은 금지되고 억압되어온 것을 풀어헤쳐 상상력의 모험이 펼쳐지는 장소였다. ‘몸’은 의식의 경계로부터 소외되었던 것들이 표출되고, 갖가지 실험들이 행해지는 탈경계의 장소였다. 이렇듯, 예술과 문학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몸’을 도구화하여 텍스트의 풍요로움을 낳았다.
2. ‘사이세계’와 ‘접합점’으로서의 몸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예술과는 달리 한계효용에 달한, 매일 조금씩 낡아가는 ‘몸’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메를로 뽕띠는 ‘사이세계’와 ‘접합점’으로서의 ‘몸’으로 “만져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지는 자의 순환이 있고, 만져진 것은 만지는 자를 파악한다. 또 보이는 것과 보는 자의 순환이 있다. 보는 자는 보이는 것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리고 심지어 보이는 것에 만지는 자의 등록이 있고, 민질 수 있는 것에 보는 자의 등록도 있다.”라고 말한다.
몸에게 있어 마음은 하나의 세계다. 마음은 늘 세계에 반응하고, 동경하고, 충돌하고 세계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을 얻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흔히 오욕칠정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에 해당한다. 이 관계가 불협화음을 일으킨 것을 ‘병’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마음과 몸의 관계를 어떻게 인류는 사유하고 있나?
심신 일원론心身一元論(mind-body monism)이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이이로부터, 이원론은 이황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몸과 마음의 이분을 제거하고 모든 현상을 하나의 동일된 원리나 단일한 소재의 표현으로 설명하기 위해 철학에서 심신 문제는 정신과 물질, 특히 의식과 뇌 사이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였다. 헤겔과 셸링에 의해 절대 동일성(absolute identity) 이론으로 발전하였고, 21세기 들어 신경증질환의 대두로 말미암아 심신 문제는 신의 마음과 몸의 상호 작용에 대한,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을 거부하면서 사회 심리학과 그 관련 분야에서 정석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심신일원론은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고 있는 심리 철학과 관련이 있다. 심리 철학에서의 일원론은 3가지 범주로 나누어 바라본다. 현상론적 일원론은 몸은 정신의 하위개념으로 오직 정신만이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중립적 일원론은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 것 모두 그 실체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물론적 일원론은 물질적 세계가 우선하며, 의식은 물질적 세계의 상호 작용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mind-body dualism는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출발하여, 세계나 사상(事象)을 두 개의 상호간에 '독립'하는 근본 원리로 설명하는 입장이다. 세계나 인간을 설명할 경우에 쓰인다. 이원론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호간에 '독립'하는 두 개의 근본 원리들로는 빛과 어둠, 선과 악, 신과 자연, 신과 물질 우주, 정신과 물질, 의식과 물질, 영혼과 육체, 영성과 물질성 등을 대립적 입장에서 바라본다. 이원론의 주요 개념들은 독립, 대립, 투쟁, 승리, 이원론에서 두 개의 원리가 상호간에 '독립'한다는 개념은 두 개의 독립적인 원리가 서로 간에 '대립'하고 '투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립과 투쟁의 과정을 통해 두 개의 독립적인 원리 중 어느 하나가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관점이 흔히 이원론의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 된다.
심신비이원론心身非二元論, mind-body Nondualism)은 두 개의 원리가 존재하는 것이 항상 이원론인 것은 아니다. 동양 철학의 주역(周易)의 경우, 음양(陰陽)의 두 개의 원리가 있지만 이 두 개의 원리가 때로는 서로 대립하고 때로는 서로 융합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변천하면서 조화, 균형, 중도, 또는 중용의 상태를 찾아간다는 입장을 가지는데, 이런 입장은 일원론이나 이원론으로 세계는 설명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두 개의 원리는 '두 개의 독립적인 원리'가 아니라 한 존재 또는 원리 속에 있는 두 개의 '극성(polarities)' 또는 '측면(aspects)'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다.
독일의 기독교 신비주의자이자 신학자인 야콥 뵈메는 천국과 지옥이 모두 영혼(Soul) 안에 있다는 비이원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어디로 갑니까?" 스승이 제자에게 대답하였다: "영혼(it)은 그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다." 제자인 주니우스는 의문에 차서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죽어서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스승인 테오포루스는 대답하였다: "영혼은 그 어디에도 갈 필요가 없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육체와 함께 있던 필멸하는 외적인 생명이 영혼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일 뿐이다. 영혼은 그 자신(itself) 내부에 이미 이전부터 천국과 지옥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가지고 있다. 성경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within you, 너희 안에, 너희 내부에) 있다. 그러므로 그 둘 중의 어느 것이건, 천국이건 지옥이건 영혼 안에서 현현한다. 즉, 천국이건 지옥이건 영혼이 서 있는 그곳에서 나타난다."
칼 융은 비이원론의 입장에서 "모든 대립물(all opposites)이 한 존재 속으로 결합된 신이 아브라삭스(Abrasax)이며, 아브라삭스는 기독교의 신과 사탄(God and Devil)의 컨셉트보다 더 고차적인 컨셉트의 신(God higher)"이라고 하였다. 같는 맥락에서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Demian)》에서 아브라삭스에 대해 비이원론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새는 알에서 나와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싸운다. 알은 세상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상을 깨뜨려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오른다. 이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이다." (막스 데미안)
"아브라삭스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이름을 최고신의 이름이라 생각할 수 있다. 최고신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일은 신적인 요소들과 악마적인 요소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닥터 폴렌스)
이원적 원리들도, 이들을 보는 관점에서 '대립과 투쟁 그리고 어느 한 쪽의 승리 그리고 다른 쪽의 패배'라는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을 가지는 경우 비이원론이 된다. 완전한 존재인 신과 불완전한 존재인 자연은 서로 대립하는데 결국에는 신이 자연을 이기고 신의 의지가 실현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관점을 가진 경우 이원론이지만 반면, 자연 속에 신의 일부 또는 전체가 실체로서 혹은 법칙으로서 이를 통해 신의 의지가 작용하고, 이 작용과 더불어 자연이 성장하고 변화하며, 결과적으로 신의 의지가 실현되게 된다는 관점을 가진 경우 비이원론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왜 ‘몸’은 세계의 중심도 아니면서 마음과 영혼의 어떤 상태를 드러내는가?
“왜냐하면 몸만이 쓰러지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만이 만지거나 만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정신”은 단지 완전히 그 자신에게 닫힌 현존의 형식적이고 공허한 지표들만을 제공한다. 몸은 이 현존을 개방한다. 그것은 이 현존을 현재화하고 바깥에 내놓는다. 몸은 그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그 사실을 통해서 다른 몸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사라진 이의 진정한 몸이 된다. (장 뤽 낭시Jean-Luc Nancy가 쓴 『나를 만지지 마라』)
이를 칸트는 이원론적 관점에서 지배자the majority와 소수자the minority로 나누고 이 두 세계가 한없는 분열을 방치하고 조장한 것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소수자the minority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소수자란, 타자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소수자를 지배하는 힘은 세계일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 안의 독재, 이성이 몸을 정신의 하위 개념으로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갈레노스(Galenus)와 히포크라테스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의 신체부위, 몸은 각자 고유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되었다.”(갈레노스) 1250년경 이탈리아의 아나그니 성당에 그려진 벽화에서 히포크라테스가 고대 의학을 완성한 갈레노스로부터 의학을 배우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스승의 가르침을 확대해 “음식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음식이 약이 되게 하고 약이 음식이 되게 하라.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 걷는 것은 인간의 가장 좋은 약이다. 진정한 의사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히포크라테스) 여기서 몸과 마음은 비이원론에 해당하며 종속변수임을 알 수 있다.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란 말이 나오게 된다.
심신일원론의 입장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를 바라보는 영성가들은 몸의 무죄성을 추정한다. 모든 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상처받았다고 생각한 그 순간, 비로소 상처받는다. 불안을 만드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닌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다. 몸의 병이 육체를 방해할 수는 있어도, 의지를 방해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관심은 오롯이 자신의 마음을 향해야 한다.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는 것이 좋다”(에픽테토스)
“고통받는 자가 고통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는 순간 치유는 이루어진다. 병은 마음이 어떤 목적을 위하여 몸을 사용하려는 마음의 결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치유의 기적이다. 이는 모든 형식의 치유에 적용된다. 환자가 그렇다고 결정되면 그는 회복된다. 누가 의사인가? 오직 환자 자신의 마음이 의사이다” (헬렌 슈크만)
“걱정과 미움과 두려움은 그 파생물질인 불안, 애달픔, 성마름, 탐욕, 불친절, 심판하기, 비난 따위와 함께 어느 것이나 모든 세포들을 공격한다. 이런 조건에서 건강한 몸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자만심, 방종, 욕심 같은 것들은 앞의 것들보다 다소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신체의 질병이나 불편을 가져온다. 모든 병은 무엇보다 정신에서 창조한다”(존 도날드 윌시)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참고: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un amour inexprimable) http://blog.daum.net/m-deresa/12389642)
“인간이 세계-내- 존재라고 할 때, 인간은 수동적으로 세계를 수용하게 된다. 인간은 특정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질료적이며 감성적이며 육신적이며 경험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의 인식은 생득적이지 않고 취득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실재는 질료이자, 타자적 존재 실재라고 할 수 있다.”(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
“영혼이 육신의 유일한 형상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었다기 보다는 영혼과 제1질료로 구성된 존재이다. 영혼은 형상으로서 제1질료 안에서 자신을 실체적으로 표현하고 자기 본연의 구체적 실재가 된다. 육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세상적 ‘자기 소여성(自己 所與性;Selbstgegebenheit)’을 나타나고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과 육신의 단일성은 육신은 더 이상 영혼의 감옥이 아니요 영혼의 방해물이나 단순한 도구적 질료가 아니라고 보았다. 육신 없이 영혼은 인격체일 수 없으며 도대체 존재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3. 치유되는 ‘몸’과 부서지는 ‘몸’: 마르코1,29-39/마르코1,40-45/2고린토12,7
그렇다면 몸과 마음이 훼손된 상태, 그에 대한 ‘치유와 복음의 상관관계Correlation between Healing and Gospel’는 무엇인가? 치료와 치유는 함께 가는 것인가, 전문화되고 분화된 것인가?
“‘질환’은 의학적 개념으로 신체의 기관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상태를 지칭하나 ‘병’은 그의 사회적 기능과 그 존재에서 느끼는 가치하락과 소외의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질환은 치료하고 병은 치유한다”(허버드대 L. Eisenberg)
성서에서 치유는 기적의 차원, 일상적이고 개인적 차원, 사회.문화적 차원, 자연현상적 차원, 상징적 차원 등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그 모든 치유의 기적이 여타의 기적 사화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전일적 차원the whole dimension of the gospel’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즉 전일적 (全一的).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히 통일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치유가 전일적 차원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성서에서 말하는 몸(soma)에 대한 이해를 통해,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육신을 부활을 믿으며’와 ‘치유의 기적’이 하나로 모아지는 신비를 함께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몸의 치유가 단지 육체를 낫게 했다는 치료의 의미, 단일 사건이 아니라 영육이 함께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었다는 전일적 차원으로 수렴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때, 육신과 마음의 유기체적 통합의 차원, 심신일원론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치유는 영육의 전일적 차원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성서에서 질환은 ‘nosos’(마태4,23/루가9.1/마르코34,사도19.12)를 사용하고 병에 해당하는 ‘astheneia’(마태오8,17/요한5,50), ‘kakos’, ‘exein’(마태4,24)는 ‘치료하다’(hiaomi), ‘치유하다’(therapeuo), ‘온전하게 하다’sothesomi등의 동사와 연결된다.
치유를 기적이라고 할 때 기적(miracle)은 ‘놀라워하다’는 동사 ‘mirari’에서 비롯하였다. ‘경이로움’에서 시작된 기적은 자연현상에서 머물지 않고 인간의 역사에 개입된 신의 현현(epiphany)이라는 표징의 의미가 담겨있다. 따라서 창조는 기적의 시작으로 보며 구원을 기적의 완성으로 보기로 한다. 무엇보다 기적의 원리는 사랑이다. (기적의 원리:http://blog.daum.net/m-deresa/12388066)
성서에서 기적은 ‘하느님의 지고한 행위’(신명3,24), ‘놀라운 일’(탈출기 5, 11) ‘능력과 징표’(탈출기7,3, 신명기4, 34)등, 인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그 바탕이다.
예수님 시대, 엣세네파나 바리사이파는 기적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사두가이파는 기적, 천사.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마 치유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렸다거나 수많은 기적사화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신적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세기 역사가 폴리비우스 요세프스는 성서의 기적에 대하여 가급적 ‘자연현상’으로 설명하였으며,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마이어와 필로는 하느님의 특별한 역사적 개입으로 기적을 바라보았다.
이처럼 치유와 기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심리의 저변에는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심리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예수님이니까. 하셨겠지, 하셨을 테지, 라는 관찰자시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성서에서 치유의 기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은 기적을 체험한 한 개인의 차원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느님 나라의 ‘표징semeion’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임마누엘’ 체험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표징이자 신의 모상인 온전한 인간에 대한 표징을 동시에 읽어낼 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마르코1,29-39, 마르코 1,40-45, 2고린토12,7에서 치유된 몸과 치유가 거절된 몸을 통해 복음의 ‘전일적’ 차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코1,29-39)
Ⓐ~Ⓔ에는 환자 당사자가인 베드로의 장모 본인이 아니라 일행이 병의 상황을 예수님께 알려 주었고, ‘다가가서 잡아 일으키는’ 예수님의 손, 행위에 의해 치유가 이루어진다. 몸에 대한 몸으로의 응답이다. 이 응답의 원리는 기적의 원리인 그분의 한없는 사랑이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있던 열병은 북 팔레스티나 지역의 기후병 말라리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병은 일상의 일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치유의 ‘만짐’은 일상으로의 회복에 초점이 놓여있다. 일상의 모든 일은 그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m-deresa/12385014
이때 '몸'은 메를로 뽕띠가 바라본, ‘사이세계’와 ‘접합점’으로서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만져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지는 자의 순환이 있고, 만져진 것은 만지는 자를 파악한다. 또 보이는 것과 보는 자의 순환이 있다. 보는 자는 보이는 것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리고 심지어 보이는 것에 만지는 자의 등록이 있고, 민질 수 있는 것에 보는 자의 등록도 있다.”
여기에서 Ⓒ-Ⓓ-Ⓔ의 과정은 당시 엣세네파나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만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몰려든 수많은 환자들, 특히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은 단지 유능한 의사, 치료자일 뿐이었다. 오늘날 의사는 치료만 할 수 있을 뿐이고, 교회는 치유의 기도만 할 수 있을 뿐으로 세분화되는 그 사이와 틈새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코 1,40-45)
Ⓕ~Ⓗ는 나병(saraat, lepra, elephas, elephantiasis)은 근동지방의 사회문화적 차원, 구약의 예방의학적 차원, 죄의 근원에 대한 종교적 차원이 모두 결합된 복합적인 추방구조를 지니고 있다. 치명적인 피부병의 일종인 나병에 걸린 그 자신뿐 아니라 그의 옷, 그의 주거공간까지 그는 사회 통합적, 안정성을 위협하는 자이자, 퇴출의 대상이자 격리의 대상 즉 죽은 자와 마차가지로 취급되었음을 감안했을 때(레위기13,1-2.44-46)
‘스승께서 하고자 하시면- 내가 하고자 하니’는 당시 사회에서 나병의 불치성, 즉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뿐이라는, 이 간곡한 청원이 담고 있는 신적 표징의 한 고백에 해당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라는 수많은 치유기적에 믿음이 수반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병이 치유되기 전에 이미 나병환자는 이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를 어렴프시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통찰과 믿음의 주술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함묵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로 회귀하는 그 기쁨 때문에 널리 알리고 퍼트리기 시작했다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성서는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형상으로의 인간의 온전한 회복을 꿈꾼다. 이러한 원대한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거쳐야 할 과정이 치유일 것이다. 이처럼 치유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하게 취급될 과제였고, 하느님의 형상으로의 인간의 전적인 회복은 치유의 과정을 필두로 해서 사회적 복귀나 통합을 목적으로 하였다.
병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칸트가 바라본 대로 “소수자the minority로의 전락이고 치유는 그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자란, 타자의 인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줄 모르는 자”이기에 그는 필연적으로 지배자the majority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바로 그 맥락과 닿아 있다.
이 치유 사건은 예수가 단지 유능한 치료사가 아니라 소수자the minority와 지배자the majority의 위치가 전복되거나, 견고한 유대사회의 카테고리가 무너지는 기능을 하게 된다. 당시 갈릴래아에는 하니나 벤 도사(Hanina ben Dosa)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치유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원격치료를 할 수 있었고, 바라사이의 경전 토라Torah중심주의를 견고케 하는 이들이었다(신명기13, 2-6)
예수님께 몰려든 많은 군중은 토라중심주의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 몰려든 그들이 안식일 혹은 안식일적인 의미가 있는 저녁시간에 예수님께 몰려든 것으로 그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마치유나 나병 치료는 단지 개인적 차원의 사회복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표한다고 할 수 있다. 몸의 치료나 치유의 의미를 넘어서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보편적인 복음의 의미-삼위일체 사랑의 현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연중 5주의 마르코1,29-39과 연중 6주의 마르코1,40-45에서 치유되는 ‘몸’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았다면, 그렇다면 치유가 거절된 ‘몸’(2고린토12,7)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7-10)
베드로의 장모와 나병환자 치유 사건과는 달리 Ⓘ~Ⓚ에서 바오로는 ‘가시’로 비유되는 치병에 대한 치유의 기도가 세 번이나 거절되었음을 고백한다. 조심스럽게 일부 성서학자들은 바로오로 앓고 있던 ‘가시’를 ‘간질병’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병명이 무엇이든 간곡한 치유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거절된 치유를 통해서 우리는 ‘몸’ 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기로에 서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몸’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물음 앞에 다시 서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심신이원론과 심신일원론과 비이원론과 다른 차원으로 ‘몸’이 규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철저히 훼손된 그분의 ‘몸’을 통해서 또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었습니다”(1고린토12, 27)에서 “유다인들은 표징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고린토1, 22-23)에서 ‘몸’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석, 즉 병들고 늙고 훼손당하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 부서짐이 예정된 약한 ‘몸’이 어떻게 육신의 부활에 이르게 되는가를 연역할 수 있다. 시간 속에서 부서지는 약한 ‘몸’이 부활을 경험하는 고귀한 ‘육신’ 그 사이에 우리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부활resurrection은 융기surrection”라고 보았던 낭시의 이해, 즉,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것, 타자인 것, 사라지는 도중에 있는 것이 몸 자체 안에서, 몸으로서 돌출surgissement하는 것’(장 뤽 낭시Jean-Luc Nancy가 쓴 『나를 만지지 마라』)이라는 말을 수긍하게 된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오늘 ‘몸’의 부서짐과 사라짐을 경험하며, 동시에 ‘육신’의 부활을 살아내는 교회의 ‘지체로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미 살고 있는 종말론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성서는 1차적으로 치유를 통하여 일상으로 우리를 복귀시킨다. 또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온전한’ 회복을 꿈꾼다. 그 결과가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 모든 치유의 바탕에는 기적의 원리인 사랑이 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온전한 몸의 회복이란 ‘몸’에 대한 크로스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몸의 초월이다.
나와 타자를 연결하는 횡적인 몸은 회복되나 이미 나와 하느님과 연결된 종적인 몸은 회복 여부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의 성전, 부활에 동참된 육신으로 포괄된다. 우리의 ‘몸’은 이 이중의 의미를 수행하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치유의 기적 사화는 하느님 나라의 보편적 표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며,
이이체, 「당신의 심장을 나에게」를 읽어본다.
이별은 헤어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 살게 되는 병에 걸리게 한다. 내 기억은 당신에게 헤프다./어쩌면 이리도 다정한 독신을 견딜 수 있었을까./세상에는 틀린 말이 한마디도 없다./당신의 기억이 퇴적된 검은 지층이 내 안에 암처럼 도사리고 있다. 어떤 망각에 이르러서는 침묵이 극진하다. 당신은 늘 녹슨 동전을 빨고 우는 것 같았다. 손이 잘린 수화(手話)를 안다. 우리는 악수를 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추상의 무덤에서 파낸 당신의 심장을/냇가에 가져가 씻는다./누가 버린 목어(木魚)를 주웠다. 살덩어리가 단단해서 더 비렸다. 속마음을 다 드러내면 저토록 비리게 굳어버린다던, 당신의 이야기. 이따금씩 부화하는 짐승의 말./지금 쉬운 것은 훗날에는 아쉬운 것이다./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어떤 강기슭에서는 사람이 태어날 때 끊었던 탯줄을 간직해두었다가 죽을 때 함께 묻는 풍습이 있다. 서로 떨어지지 못한 채 남이 되어버린 슬픔. 나는 마르게 웃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받고 싶었던 거라고 자백했다. 살을 짚어 만나는 핏줄처럼 희미하게 그리워하는.//심장은 몸이 아니라 몸의 울림이다./내가 아프면 당신도 아파하고 있을 거라고 믿겠다./그 아픔에 순교하는 심장이 사랑이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의 원리; 미망(迷妄)에서 여백(餘白), 전이(轉移)에서 배치(配置)로 (0) | 2021.03.05 |
---|---|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 '영원'을 여는 암호 (0) | 2021.02.26 |
‘다마스커스’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 What is Damascus' name for? (0) | 2021.02.05 |
천 한 번째 '들음',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 (0) | 2021.01.28 |
코나투스Conatus, ‘amor naturalis 자기보존의 본성적인 사랑’ (0) | 2021.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