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 '영원'을 여는 암호

나뭇잎숨결 2021. 2. 26. 03:00

 

 

'테사라코스테'(40일, Τεσσαρακοστή), '영원'을 여는 암호

 

- 사 순 제 1 주 일 (나 해) 2021. 2. 21. Marc. 1,12-15

 


1.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2. 유혹자의 이름은 무엇인가?(Quel est le nom du séducteur?)
3.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마르코 1,12-15/마태 4,1-11/루카 4,1-13


 

 

 

1.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어떠한 처지에서도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 그런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실망하게 하거나 희망하게 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우리를 주저앉히거나 계속 걸어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주제를 생각해보기 위해,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과 <삶>을 읽어본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오랫동안 나는 이제 곧 진정한 삶이 시작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언제나 온갖 방해물들과 급하게 해치워야 할 사소한 일들이 있었다 마무리되지 않은 일과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끝내고 나면 진정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방해물들과 사소한 일들이 바로 내 삶이었다는 것을-<삶>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은 많은 사람들이 암송하고 있는 시이자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을 준 시에 해당한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은 것처럼 춤출 수 있고,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고,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할 수 있고,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일할 수 있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럼 살 수 있는 그 상태는 지복직관의 상태이자, 많은 영성가들이 통찰한 ‘분리’가 완전히 극복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춤추라-사랑하라-노래하라-일하라-살라’는 그녀가 마주한 한계상항 앞에서 자신을 가볍게 들어올렸을 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그녀의 다른 시 <삶>은 통제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삶’이 자신의 기대와 바람과 의도와는 어긋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에 대해 ‘그러나 결국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런 방해물들과 사소한 일들이 바로 내 삶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삶을 가볍게 들어올리는 것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 무거움과 하찮음을 바라보는 것 또한 삶이라는 현실인식,

 

전자의 시를 존재론적 시라고 본다면 후자의 시를 실존의 시로 볼 수 있다. 전자의 시는 가슴으로 쓴 시라면 후자의 시는 마음으로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전자기 한계상황을 극복한 시라면 후자는 한계상황은 수용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시인 알프레드 디 수자는 어떤 상황에서 이런 낙차를 가진 존재와 실존의 시를 동시에 쓰게 된 것일까? 그녀의 전기적 사실을 참고한다면 그녀는 6살 때 소아마비를 앓기 시작해, 18살 때 열차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왔고, 8차례의 척추수술을 받았으며, 결국엔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47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에게 주어진 상황은 저 밖의 세계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육체가 바로 그녀의 한계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6살에서 47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공교롭게도 40년,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의 시간을 그녀는 살았다. 어느 날은 자신의 삶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어떤 날은 주어진 실존의 상황에 눌려 그 삶 때문에 압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흔히 그녀 앞에는 두 개의 상반된 수식어가 붙는다. ‘붙꽃같은’과 ‘비극적인’ 이라는 수식어다. 알프레드 디 수자는 ‘불꽃같은’ 삶은 산 ‘비극적’ 시인이라고 회자된다. ‘불꽃같은’은 그녀가 ‘육체’라는 그녀의 한계상황을 뛰어넘었다는 초월에 대한 상찬이고. ‘비극적’이라는 평가는 그녀가 결국엔 ‘육체’를 뛰어넘지 못하고 꺾이고 말았다는 ‘한계상황’에 방점을 찍은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들어올릴 수 있었으며, 돌연 그 들어올렸던 자신을 저 지하의 어둠으로 던져버리게 되었나?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에서, ‘아무도- 한 번도-아무도- 돈이 필요하지 않은- 오늘이 마지막처럼’에서 그녀가 마주한 세계를 망각하였을 때, 즉 한계상황에 사로잡히지 않았을 때, ‘나’라는 존재만을 보게 되었을 때, 그녀는 가볍게 그녀 생을 들어올려 깃털처럼 가볍게 이 세상을 건너갈 수 있었다. 그때 세계는 그녀의 존재를 유혹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망각하고 오직 세계만 보게 되었을 때, 즉 한계상황만 보게되었을 때, 그녀는 그 세계 앞에서 쓰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녀는 시로써 뿐 아니라 그녀 삶으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자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두 삶을 동시에 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제단에 그녀 자신을 남김없이 제헌했다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그녀 앞에 놓인 ‘육체’라는 한계상황이 그녀 삶을 이리저리 끌고간 ‘유혹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 자신의 상황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음에도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라고 자신과 세계에게 말할 수 있었던 것에서 ‘유혹자’는 좀 더 예민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기로 한다.

울지마라/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기다리지 마라//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눈물을 흘리신다//새들이 나뭇가지에/앉아 있는 것도/외로움 때문이고//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외로움 때문이다//산 그림자도 외로워서/하루에 한번씩/마을로 내려온다//종소리도 외로워서/울려 퍼진다.

 

물가의 수선화를 보고 세계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외로움을 바라본 시인의 맑은 영혼이 느껴지는 시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눈물을 흘리신다’그러니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고 시인은 순리에 순응하는 것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외로운 운명이라고 노래한다.

 

이 시에서는 흔히 순리대로 살아, 그러면 마음이 편해, 라고 말하는 목소리와 오버랩 된다. 그렇다, 순리대로 살면 조금은 편하다. 그런데 마음은 늘 순리대로 살고 싶지 않겠다고 한다. 마음은 유혹자래도 좋으니 실존의 외로움과 허기를 채우겠다고 한다, 천번 깨지고도 천한번째 같은 말을 되풀이해 들려주는 것이 마음이다. 가슴(영혼)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나의 가슴이면서도 가슴은 나의 마음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과 가슴은 따로 논다. 

 

우리는 여기서 가슴과 마음을 '분리'하는 그 유혹자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 이름을 묻게된다.

 

 

 

 

2. 유혹자의 이름은 무엇인가?(Quel est le nom du séducteur?)

 

 

그렇다면 세계(나-너-신)와 분리를 조장하는 그 유혹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유혹자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놓인 처지, 상황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항상 일정한 처지(處地), 다시 말해서 자기 주위의 일정한 여러 사물 즉, 환경으로서의 자연 내에 존재한다. 인간은 상황적 존재다. 그래서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라 불리는 칼 야스퍼스는 인간을 ‘상황내 존재(In der Situation Sein)’라고 부른다. 그 상황이란 변화가 가능한 상황과 변화가 원천봉쇄된 상황이 있다. 전자의 상황을 한계상황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상황은 가변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앞에 있는지, 야스퍼스의 생각을 좀 더 살펴본다면,

 

①한계상황(Grenzsituation) 앞에서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모든 유한한 것은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인간은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을 경험한다. 이 좌절은 인간 자신으로 하여금 실존에의 비약을 가능하게 한다. 실존의 비약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초월자 앞에 서게 된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상황 앞에 서게 될 때 비로서 신을 알게 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신을 체험한다는 앎, 신을 닮아 산다는 그 앎이다.

 

우리는 그것을 개별자로써 체험한다. 개별자이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상황 역시, 독립적 실체로서 철저히 객관 세계를 부정한다.

 

②존재론은 결국은 언제나 내재론(內在論)이며, 인간에 의해서 인식되어 존립하는 것에 대한 교설, 존재자로서의 존재에 관한 교설이다. 여러 세계상은 항상 특수한 방법으로 인식된 세계고, 그것이 잘못되어 세계 존재의 일반으로까지 절대화된 것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처한 개별적 상황을 통해 ‘분리’의 원인인 ‘불안(결핍)’이라는 조건을 구체화한다.

 

③모든 것은 불쾌할 정도로 뚜렷하게 인류의 몰락을 예언하는 듯하다. 점점 더 신속한 상품 교환을 낳는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으로 현존재가 변해가고 있다. ···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세상에서 인간의 실제 행동이 자유를 말살시키는 방향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다.

 

이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한계 상황의 끝, 죽음으로 이끌고, 가변적 상황이었던 것이 불변의 한계상황으로 치닫게 만든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을 죽기 전에 체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임에도 죽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관념의 영역이고 다른 사람의 영역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죽음을 좀 더 냉정하게 묵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앞에서 마음의 소리보다 영혼의 소리를 더 잘 경청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④‘사람은 결국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이 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말하려 한다. ‘사람은 죽는다’에 대한 분석은 일상적 죽음을 향한 존재의 존재양식을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낸다. 우리는 ‘사람은 죽는다’라는 사실에 무관심한 평온을 갖는다. 즉 ‘나는 죽는다’가 아니고 언제나 우리는 죽는다이기 때문이다.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나'라는 개별자를 알게 된 후에 '너'라는 개별자를 알게 되는 필연 앞에 인간은 서 있게 된다. 야스퍼스는 한계상황 앞에서 너라는 세계와의 유대를 실존을 위한 필수 요소로 규정하면서 이 유대가 ‘나’라는 개별성을 잃는 그 유대가 아님을 강조한다.

 

⑤인간의 본래적 가치는 그가 가까이하는 유(類)나 형(型)에 있지 않고, 대리하거나 바꿔칠 수 없는 역사적 개별자에 있다. 그럼에도 실존은 다른 실존에 의해서 그리고 동시에 다른 실존과 함께 자신이 될 때에만 나타난다. 전달이 없으면 이성은 잠시도 존재하지 못한다. 현존재적 현실성, 의식 일반과 정신은 모두 전달에 의해 운동하고 변화한다.

 

우리의 실존은 고립 상태가 아니다. 개별자로서 홀로 있는 인간은 인간일 수 없다. 상호간 의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공동체에 의해서만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너를 알았다는 것이 너의 불안과 나의 불안을 종식시키지는 못한다. 이에 이르러 야스퍼스는 허무주의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을 초월자에서 찾는다. 신앙을 부정하며 현실 인간에게만 희망을 찾으려는 시도는 또 다른 허무주의를 낳을 뿐이다. 신을 안다는 것은 한계상황 앞에서 삶의 마지막 암호를 푸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⑥인간의 신격화가 허무주의로부터 구제해주는 듯하지만, 그 자체가 숨겨진 허무주의다.” 인간에게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영웅에 의존하여 인간의 신격화로 향하지만 결국 환멸을 느끼고 또 다른 허무주의에 빠진다. 어느 순간 다만 인간에 불과하다는 경험을 하면서 더 깊은 허무주의에 빠진다.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초월자는 세계가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며 자신 속에 근거를 두지도 않고 자기를 초월하는 존재를 가리킬 때만 존재한다. 고요는 초월자 속에 보존되어 있다. ··· 신의 불변성은 안정의 암호 중 하나다. 그곳을 향해 인간은 자기를 넘어 내달린다.

 

불안을 벗어난 안정은 오직 초월자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성이라는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초월자라고 보았다.

 

⑦ 인간이란 항상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므로 실존주의는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려하고, 더 높은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존재한다. 부단히 현실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야스퍼스는 나를 알기 위해서, 너를 알기 위해서, 신을 알기위해서 '명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⑧윤리적 행위에 의해 전체 삶의 질을 정화시키려면 일상적 의식에서 일어나는 철학적 사고와 명상의 경험이 손을 잡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철학적 명상에는 첫째, 자기반성이 있다. 둘째는 초월해가는 명상이다.

 

이 명상에는 성스러운 대상이나 장소, 고정된 형식이 없다. 오직 내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만이 있다. 그는 명상을 통해 세계의 이분법을 넘어서게 되고, 희망이라는 세계지평을 볼 수 있다고 보았다.

 

⑨“이성은 무한한 변증법을 야기한다. 양자택일, ‘~도 ~도’, ‘이것이냐 저것이냐’, 화해나 분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러한 모든 것을 넘어서서, 정지 속에서 정지하지 않고 앞으로 뚫고 나간다.

 

이때 우리는 비로서  한계상활을 초월하게 된다. 외견상 통합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희망은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라 할 때, 초월은 초월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통해 초월할 수 있으며, 시간의 한계를 통해 시간의 소멸, '영원'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를 실존개명, 드디어 눈을 떴다고 표현한다. 

 

⑩상황은 공간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삶과 관련된 일체의 것에 의해서도 의미·규정된다. 상황은 어떤 의미 연관적인 현실성을 의미한다. 상황은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상황은 이 양자가 동시에 나의 존재에 대하여 이익 혹은 피해, 행운 혹은 제한을 뜻하는 구체적인 현실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황 내 존재인 한 인간의 관심의 정도에 따라서 상황의 의의도 달라진다. 상황이라는 개념은 외적인 환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특수한 품성, 즉 육체적·정신적인 상태까지도 포괄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일상에서 접하는 상황일반에 대해서는 능동적인 노력을 통하여 상황을 피하거나 부담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보다 결정적이고 근원적인 다른 상황이 있다. 야스퍼스는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상황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나는 항상 상황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 나는 투쟁이나 고통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나는 불가피하게 생명이라는 부채를 안고 있다는 사실, 나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을 한계상황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한계는 내재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이미 초월자를 가리킬 만한 그 본래의 기능을 시작한다. 개별적인 한계상황, 즉 죽음·고통·투쟁·죄책 등을 체험함으로써 초월이 일어난다. 인간은 현재의 질서가 불충분한 데서 한계상황이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기 때문에 단지 이 질서를 개선하려고만 하였다. 질서로서 인식한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제거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것들과 대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스퍼스에 있어서 한계상황은 인간이 회피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그것이 아니면 인간의 본질을 충분히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한계상황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위로써 그것을 변경할 수는 없다. 존재는 한계상황이 억압하는 현실에 부딪히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행동의 근거에 회의를 느낀다. 존재는 삶의 가장 내면적인 근거에서부터 불안을 감지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좌절은 가능적 실존을 현실적 실존으로 비약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서 <분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유혹자에게서 벗어났다는 것이자, 유혹자로부터 비로서 자유로워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운 자만이 희망하는 자일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유혹자의 이름을 어느 정도 적시할 수 있다. <나-너-신>이라는 이 스크럼은 생의 조건이다. 이 조건 가운데 한 사슬이라도 빠졌을 때 우리는 연쇄적인 <분리>를 경험하게 된다. 유혹의 결과는 <분리>라고 할 때, 그 유혹자의 이름은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혹자는 기존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서 ‘밖에 서 있는 자로서’ 자기초극과 자기초월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함으로써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려고 결단하지 못하는 ‘나’ 라고 할 수 있다.

 

 

 

 

 최영심(1946∼ ), 유리화, 1997년,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3.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마르 1,12-15/마태 4,1-11/루카 4,1-13

 

 

사순 1주 복음, 마르 1,12-15/마태 4,1-11/루카 4,1-13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한계상황'을 뛰어넘었는지 바라볼 차례다. 복음은 그 한계상황을 '유혹'이라는 어휘로 표현해서, 유혹을 윤리도덕으로 국한해 본질적인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개별적인 상황윤리를 절대윤리화 하는 바리사이파즘에 빠지게 한다는 점이다.

 

복음과 강론을 읽어본다. 사순1주 오신부님 강론에서,

 

“광야를 유혹을 받으신 장소로 기억하느냐? 아니면 유혹을 이긴 장소로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광야가 주는 의미가 달라질 것이고 광야에 대한 기억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이겨내려면 욕심을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일입니다. 사순시기에 가져할 희망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시작해야할 이유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새출발을 해야 할 이유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버리면 다시 일어설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1,12-15 그때에 12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마르코 복음 사가는 사순시기의 포문을 “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라고 전하고, 마태오와 루카 복음사가는 40일 동안 ‘단식한 후’에 허기가 진 상황에서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한다.

 

저, 유혹을 팜므파탈의 유혹으로 국환 혹은 치환하여 바로보는 한, 우리는 바리사이파처럼 윤리도덕의 노예가 되거나 영원히 예수님의 추종자로 머물다 갈 뿐이다.

 

이 유혹의 이름은 무엇인가? 인류가 존재하는 한 마주하게 될 ‘한계상황들’이다. 느닷없이 생명으로 ‘밖에 던져 진 자’로서, 인류가 마주하게 될 한계상황을 그분이 먼저 경험하고, 그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던 그 Ⓐ~Ⓕ는 사순시기뿐 아니라 그분을 신앙하는 우리가 가장 먼저 정립해야할 지침이다.

 

빵과 말씀(나와 나와의 관계) 파워와 포스(나와 세계와의 관계), 전능과 사랑(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이 대조된 상황 자체는 대립이 아니나 무게중심이 어디로 기우는가에 따라 그것은 대립이자 유혹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무게중심이 어디로 기우느냐의 관건은 야스퍼스의 철학처럼 결단(선택)을 통한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와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여기서 빵과 말씀은 대척점에 있는 존재양식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신 상황은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라는 그 상황, 오늘날 우리와 무관한 상황인가?

 

여기서 빵은 실존의 허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실존의 허기는 실존으로 풀 수 없다는 말이다. 소유하기가 존재하기를 낳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밖에 있는 자’가 이 상황을 초극할 수 있는 것은 빵의 문제는 빵 아닌 것으로 풀어야 한다는 전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빵과 말씀의 관계가 나와의 관계인가?  물질의 흐름을 통제할만큼 각성될 때 자신이 그 어느 곳에도 매일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사랑의 시작이다.

 

자기 식탁에 빵을 올려야 하는 모든 인류는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명제를 먼저 배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대열에 서게된다. 그것이 ‘본질이 실존보다 앞선다’를 바라보기 위해서 매 순간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가치관을 재정립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실존의 상황이 정말로 알 수 없고 추측할 수 없는 경우 “ 사랑은 지금 무엇을 하려하는가?” 라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식탁에 놓인 그 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던져진 자로서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결핍과 배고픔과 허기와 추위, 병고와 환경, 우리 앞에 놓인 개별적 상황들을 일컫는다. 그것이 정치, 경제, 문화적인 정의나 질서의 재편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사랑)’에 그 답이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와 Ⓓ에서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것은 ‘나와 세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의식혁명』에서 바라본 Power 대 Force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어떤 일을 하게 되면(하지 않아도 같은 상황) 자연스럽게 캐리어가 생기고 그에 준하는 어떤 위치도 주어진다. 그 위치는 우리에게 Force라는 ‘힘’을 부여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기보존본능에 의해 ‘Force’를 먼저 경험한다. 그것 자체는 한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므로 중립적인 힘이지만, 그 힘이 주는 매력이 있다. 안하무인처럼 타자의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불온한 매력이다.

 

사회나 국가의 성립은 바로 이 힘에 근거한다.  니체는 그 상태를 ‘힘에의 의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힘은 물리적인 힘에서 정신적인 힘으로의 도약을 가져온다. 타인에게 추종을 요구하고 자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힘에의 의지는 인간이 평생 추구하는 보존본능 속의 쾌락의지와 권력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빵과는 다른 차원의 잉여적 힘이다.

 

이 힘은 인간을 계급화, 등급화, 서열화 시킨다. 이때 만인은 그분 앞에서 ‘같다’는 그분의 (사랑)권능Power에 우리 생을 맡길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Force는 힘이 아니라 우상숭배이며 타인에게는 억압이고 자신에게는 구속임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기꺼이 섬기는 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절대 ‘추종’이 아니라 사랑에 전 생애를 거는 투신을 의미한다.

 

Ⓔ와 Ⓕ에서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이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정립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의 원리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분과 인간의 관계의 바탕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을 제외한 제자들이 십자가의 밑에서 모두 사라진 이유가 무엇이었나? 세례자 요한이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당신이십니까? 라고 묻은 이유가 무엇이었나?

 

단적으로 그것은 권능의 하느님인가? 사랑의 하느님인가를 묻는 '믿음'의 차원에 관한 것이자, 무신론자들이 신 존재증명을 요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권능과 사랑을 동시에 지닌 분이지만, 사랑의 권능이지, 권능의 사랑이 아니었다는 점을 신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다음 기회는 무엇인가? (십자가의) 죽음이다. 여기서 십자가의 죽음이든, 병사든, 불의의 시고든 인간이 마지막으로 맞닥뜨리는 한계상황은 ‘죽음’ 이다.

 

위의 구체적으로 제시된 상황은 인간의 힘으로 어쩌면, 변화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죽음은 인간이 변화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이다.

 

그렇다면 이 유혹사화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답을 주시려 하는가?  우리 개별자 앞에 놓인 한계상황 자체를 무화시키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체적 상황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주셨다. 그것이 말씀- 권능- 믿음-순명이라는 이름의  '사랑' 이다. 소유하기도 행하기도 아니었다. 오직 '신적 존재' 만을 그분은 선택하셨다.

 

실존의 문제를 존재로 답했다는 이 사실, 이것은 추종으로는 따라할 수 없는 '영원'이라는 지평을 연 것이다.

 

이때,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는 40년, 40일, 40이 아니라 영원을 여는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사랑 '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이 암호는 어떻게 내재화하고 해독할 수 있는지, 조금 더 우리가 마주한 유혹이라는 이름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야스퍼스가 바라본 대로 상황 내의 존재인 까닭에 결코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상황은 인간이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따로 따로 발생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상호관련 되어 있다. 한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지라도 우리는 다른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상황과 상황의 연속이다. 유다처럼 누군가를 팔아버린 상황이 자기를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간다는 것이다. 상황적 관련성 때문에 근원적으로 인간은 상황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상황이 변화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상황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이며, 구속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상황의 포괄성에 묶여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자신이 어떤 상황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구속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과 우리의 선택을 넘어선 것들이 있지만, 자신이 항상 어떤 상황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지라도 자기를 구속하는 상황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경 불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늘 이 상황은 변경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 상황은 현실적으로 항상 변한다. 상황이 시시각각 변화한다는 사실도 분명하지만, 상황이 변할지라도 인간은 항상 어떤 상황에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도 명확하다.

 

그렇기에 한계상황은 그 자체가 변하지 않고, 오직 그것들이 우리 각자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만 변화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계상황은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전망될 수 없고, 한계상황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하나의 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설명되거나 연역되지 않고도 명백하게 그냥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한계상황은 벽으로로싸만 아니라 우리를 들어올리는 매개체가 된다. 한계상황에 처한 우리가 한계상황에서의 체험을 본래적 자기로, 즉 가능적 실존에서 현실적 실존으로 비약하는 계기로 삼느냐 아니면 한계상황에서의 체험을 무의미하게 받아들여 그 상태로 계속 머무느냐 하는 것은 오직 한계상황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결단,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한계상황에 반응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어떤 계획이나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부터 지닌 능동성(영혼)에서 기인한다. 야스퍼스는 이를 우리 내부의 가능적 실존의 생성에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성서에서는 이를 천사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것을 초월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믿음이라고 해도 좋다. 상황은 그대로 있지만 상황에 잡히지 않는. 그래서 상처받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상처받아서 더는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역시 우리에게 있다. '마음'이다. 

 

이제 우리 마음을 이해할 차례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 사가가 전하는 유혹의 내용은 우리 전생애를 통틀어서 경험하는 광의의 의미의 유혹, 실존상황이다. 77억의 인류는 이 유혹의 각론에 해당하는 개별적인 유혹, 상황에 있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분리’라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유혹은 윤리도덕을 뛰어넘는 포괄적인 유혹이라는 점에서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전언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un amour inexprimable) | 길 위의 미사(Missa)

http://blog.daum.net/m-deresa/12389642)

 

독서에서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라고 말하는 그 유혹자의 이름,

 

‘마음’에 대해 ‘마음공부’ ‘명상’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마음은 영혼과 일치할 때까지. 나이면서 나 아닌 것을 경험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매 순간, 어떠한 경우에도 유혹을 이기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실은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유혹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겠지만, 세계(나-너-신)와 분리를 고착화 시키는 것이 유혹의 힘이다. 나와 나, 나와 세계, 나와 그분사이의 ‘분리’를 조장하는 모든 것이 유혹이라 할 수 있다. 이 분리는 윤리도덕보다 광의의 의미의 유혹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혹은 우리에게 상존하는 어떤 상황에 대처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라 할 수 있다. 유혹은 감지할 수 있는 유혹과 감지조차 하지 못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떠한 처지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희망은 사실 유혹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은총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혹을 물리쳤다는 것은 걸어갈 수 있는 희망이 이미 주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은총을 경험한 이라면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 분리를 조장하는 유혹을 물리친 상태일 것이기에 걸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혹을 물리친 것과 희망을 사는 것은 동시적이거나 연쇄적인 은총의 고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번 유혹을 물리쳤다고 유혹의 상태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다, 유혹은 일회적이지 않기에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이자. 야스퍼스가 바라본 대로 상황의 연속 속에 놓여 있고, 그것을 선택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까.

 

따라서, 우리는 유혹자가 누구인가?와 정말 나는 유혹에서 벗어난 상태인가에 대한 성찰을 예민하게 수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외부적인 유혹자보다 더 무서운 것은, 평정심이라 부르는  '아타락시아' 의 상태로  죽음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라고 지시하는 유다의 체념과 절망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처지, 혹은 한계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되는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과 맞물린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더 나아가 그 상황 앞에 있는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황과 그 상황 앞에 있는 나를 정직하게 바라볼 때 ‘유혹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

 

유혹자를 사탄, 마귀 어둠 등으로 부를 때 자칫 유혹자를 전적으로 외부적인 힘으로 치환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유혹자를 오인할 때 유혹은 언제나 ‘당했다’ 라는 피동형으로 제시된다. ‘당했다는 것에는 굉장히 완곡한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회피가 놓여 있다. 이는 마치. 창세기의 낙원추방설화에서 에와 때문에, 혹은 뱀 때문에 사과를 먹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혹은 내가 먹지 말아야 하는 사과를 먹은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 결과는 먹거나 취해서 ‘분리’가 조장되었다는 것이다. 먹고 취함으로 인해 모든 관계에서 <분리>가 공고히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배고픔과 허기가 가중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상황이란 무엇인가? 세계와 내가 합작으로 만든 어떤 사태를 의미한다. 사태는 사실이 아니다. 사태는 사실이 될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이 사태는 논리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논리적 그림 때문에 사태와 사실을 동의어로 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창세기의 낙원추방 설화에서처럼 ‘에와의 꼬임 때문에 나는 사과를 따 먹었다’는 의미명제를 도출한다는 점이다. 이 명제는 ‘나와 나’, ‘나와 에와’, ‘나와 하느님’과의 ‘분리’를 낳는다. 이때 아담에게 유혹자는 누구인가? ‘분리’를 낳은 아담 자신이었다는 점을 너무나 오랜 후에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 “에와(혹은 뱀) 때문에, 나는 사과를 먹었다”

 

⒝ “나는 나 때문에 사과를 따 먹었다”

 

⒞ 사과를 먹은 후에 모든 것과 ‘분리’ 되었다.

 

⒜에서 ⒝로 이동하는 것은 조금 냉정해지면 성찰할 수 있다. 그러나, ⒝에서 ⒞로 이동하는 데 한평생이 걸리거나 평생이 걸려도 알 수 없기도 한다.

 

여기서 흔히 주어의 위치에 누가 있었는냐에 초점을 맞출 때, 사태와 사실을 혼동하게 만들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윤리적 관점에서 ‘누구로 인해서’가 아니라,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과를 먹었다/ 안 먹었다’는 것이 핵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과를 먹은 것이 왜 문제인가?를 아담인 인류는 질문해야 한다.

 

흔히 낙원설화는 먹지 말라고 했는데 먹었다는 게 핵심이 되어 <순종/ 불순종>이라고 이라는 추상적 상황으로 밀고 간다. 야스퍼스가 바라본 대로 ‘우리가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추상성이다. 이것은 사실을 사태화 시키는 것이다. 또 인간이 뻔히 먹을 줄 알면서 왜 사과나무를 심어놓으셨나?와 비슷한 맥락의 물귀신 작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금지된 사과를 먹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 금지는 누가 내린 금지인가? 내 영혼이 내 마음에게 이른 고요한 권고사항이었다. 사과를 먹는 순간, 나는 나 자신과, 나는 에와와, 나는 하느님과 분리된다는 것을, 이 근본 원인과 결과에 대해 물을 때 우리는 유혹자가 무엇인지 보다 분명해 진다.

 

우리가 신에게 순종을 하든 불순종을 하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리는 신의 사랑을 조절하기 위해서 종교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분을 신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이 한계상황 앞에 놓여 있는 나에게 진정한 삶의 방향성, 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 행복을 알게하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가 때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의 당위명제,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이 말을 영성가들은 ‘사랑이여 지금 무엇을 하려는가?’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유혹의 결과가 분리라면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 우리가 아버지의집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것이 희망이라면, 삶=생명=사랑, 이 공식을 부인한다면 우리가 있을 곳이 어디인가?

 

글을 마무리하며,

 

이성부의 「봄 」 을 읽어본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누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