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천 한 번째 '들음',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

나뭇잎숨결 2021. 1. 28. 03:40

 

천 한 번째 '들음',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 견자(見者)와 착란(錯亂) 그 어디쯤(랭보)
2.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사르트르)
3.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헬렌 슈크만)
4. 베드로의 물고기,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
      -마르코 1,14-20/요한21, 1-19


 

 

 

 

1. 견자(見者)와 착란(錯亂)그 어디쯤(랭보)

 

랭보는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見者'-'보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범인이 보지 못한 현상 너머를 볼 수 있고, 천 번의 이별 후에 천 한 번째 만남의 이름이 무엇인지 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은 그들이 표현한 두 겹의 진실 ’언어와 언어 너머‘를 공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몇 편의 이별 시를 읽어본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장미의 가시인가, 장미와 가시인가' 이런 질문은 언제 하게되나?라고 묻는 김승희의 「장미와 가시」를 읽어본다.

 

①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우리가 타자와 만나는 것은 꽃(가시)이 꽃(가시)을 만나는 것과 같다. 둘 다 꽃이거나 둘 중에 한 사람만 꽃의 상태이거나, 둘 다 가시의 상태거나. 여기서 둘 다 가시의 상태일 때 문제가 발생한다. 서로의 생을 찌르는 고통이 인고의 차원이 아니라 상대에게 질문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순간 이별은 내정되어 있다고 하겠다. 더욱이 상대에게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묻게 되었을 때, 그 다음 수순은 이별이다. 왜? 만남은 이 모든 것이 섞이어 내장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의 선명한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이 만남이기 때문이다. 만남도 ‘기승전결’이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을 두루 거치게 되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꿈이라면」

 

②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출세(出世)의 해탈(解脫)도 꿈입니다./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

 

한용운의 「이별은 미의 창조」

 

이별은 미()의 창조(創造)입니다./이별의 미(美)는 아츰(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系) 없는 검은 비단과,/죽엄(죽음) 없는 영원(永遠)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꼿(꽃)에도 없습니다./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미(美)는 이별의 창조(創造)입니다.

 

한용운 시 전반에 이별이 전제되지 않은 시는 없다. 이별 때문에 시를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별에 관한한 한용운은 이별을 하나의 미학으로 끌어올린 ‘견자’에 해당한다. 그는 이별을 당한자가 아니라 그는 이별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다. 이별 속으로 한없이 걸어들어가 그 자신이 이별이 된 사람이다. 그가 무엇을 보았기에 이별은 미()의 창조(創造)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가 이별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고 담담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라는 자기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랑이 곧 불멸’이라는 이 확신은 한용운 시의 제단에 ‘회자정리會者定離거자필반去者必返생자필멸生者必滅사필귀정事必歸正’(만난 것은 헤어지며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고,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고, 결국에는 옳은 이치대로 돌아간다)이라는 불교의 윤회사상이 가시적인 현상들을 들어올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그의 종교가 그의 현실을 끌어갔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의 현실을 그의 미학이 품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남조는 「겨울 바다」 에서 모든 것을 다 겪은 후에, 여전히 살아내야 한다는 문제 앞에 서 있는 한 실존적 자아를 보게 된다. 그 역시 한용운처럼 이별을 형이상학으로 들어올리기는 하지만, 한용운처럼 이별을 미학의 차원으로 품지는 않는다. 김남조는 이별을 하나의 삶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④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김남조의 ‘겨울 바다’는 만남의 끝이요, 죽음을 표상하는 동시에 인생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겨울 바다는 만남과 이별, 상실과 획득, 죽음과 탄생, 절망과 희망의 분기점이 되는 공간이다. 화자는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음에 주목한다. 그 시간의 얼굴이 ‘남은 날은 적지만’ 그 유한을 수용하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영혼이 있기 때문에 ‘뜨거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그 상태로 넘어서고 있다고 하겠다. 김남조 시에서의 화자는 이별을 형이상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한용운과 맥을 같이하지만, 이별을 하나의 미학으로 까지는 치환하지 않고 실존의 차원에 놓아둔다는 점에서 ‘인고(忍苦)’를 바라본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서정주의 「견우의 노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언 허이언 구름 속에서/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칠월 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서정주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⑥섭섭하게,/그러나/아조 섭섭치는 말고/좀 섭섭한 듯만 하게,//이별이게,/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엊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의 시에서 이별은 재회하기 위한 조건이다. 이별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만남은 진정한 만남에 이룰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서정주의 이런 자세는 한용운처럼 형이상학이 내재된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감당하는 지의 여부와 연결되어 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도 진정 내세를 기약한다기보다 오늘의 상처를 감당하기 위한 여과장치처럼 보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저 하늘로의 초월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이다.

 

모든 시인에게 이별은 한용운의 시처럼 형이상학으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이형기의 「낙화」와 서정주의 「견우의 노래」도 분명 이별을 넘어서지만 그 넘어섬은, 이 땅의 문제, 삶의 차원 혹은 인격의 차원에서 다뤄진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도 서정주의 시처럼 이별은 어떤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형기는 성숙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이별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지극한 자기애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별이 다음 사랑의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을 그는 바라보았을 것이다. 천 번의 이별이 천한 번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그는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렇듯, 한용운, 서정주, 이형기, 김남조의 시처럼 어떤 상태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반면 김승희의 시처럼 팽팽하게 ‘장미일까’ ‘가시일까’ 어떤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보류하는 것, 즉 넘어가기 직전의 그 시간과 대결하고 있는 것, 아마도 그것은 산다는 것은 답을 얻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임을, 즉 물이 끓고, 얼음이 얼 듯, 어떤 ‘임계점’ 앞에서 그 상태를 다른 차원으로 넘기지 않고,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바라보는 것’ 역시 견자의 한 면모라 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시에 멈춰 선 것은, 이미 시인은 견자이거나 견자[見者-보는 사람]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바라본 어떤 지점을 우리 역시 바라볼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아예 시인은 견자[見者] 라고 천명한 랭보의 선언을 읽어보면 ‘다른 사람이 쓰러진 그 지평선에서 시작하는 것이 시인’이라고 밝힌 그 맥락에서 삶은 한번이 아니라 수천번 쓰러진 것이나 다름없음을 바라본 것이라 할 것이다.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자기 자신을 완전히 깨닫는 일입니다. 그는 그의 영혼을 추구하며, 그것을 검토하며, 시련을 가하고 가르쳐갑니다. 자신의 영혼을 알고 나서는 그것을 가꾸어가야만 합니다. (……)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랜, 엄청난 그리고 추리해낸 착란에 의해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견자로 만듭니다. 사랑과 고통, 광증의 모든 형태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시인은 그 자신을 추구합니다. 자신 속에 모든 독소를 걸러내어 오직 그 정수만을 간직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신앙과 초인적인 모든 그의 힘이 필요한 말할 수 없는 고역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가장 위대한 죄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범죄자, 가장 위대한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의 박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미지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왜냐하면 그는 그의 영혼을 단련해서 가꾸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누구보다도 풍요해진 영혼을! 그는 미지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미쳐 날뛰며 자기 환각들에 관한 지식을 상실하고 말 때에 그는 반드시 그 환각들을 볼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엄청나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사물들에 의한 약동 속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때에는 가공할 만한 다른 작업자들이 올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쓰러진 바로 그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시인은 견자다’ 라는 이 선언은 랭보가 앞으로 ‘견자[見者]’로서 세계를 자유롭게 항해하겠다는 출사표에 해당한다. 랭보는 베를렌느로 상징되는 모든 뜨거운 만남과 수없이 이별 한 후에, 착란이 있어야 견자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시인이다. 착란이 견자를 낳은 어미이듯, 자신의 삶을 극단으로 밀고 간 ‘시인’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만남도 이별도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나이’ 그에게 삶이란 어떤 것에도 잡히지 않는 ‘바람’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랭보는 ‘견자(見者)와 착란(錯亂) 그 어디쯤’ 에 있던 사람이고, 이것이 규정할 수 없는 모든 시인의 운명이라면, 또한 모든 인류의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랭보에 관한 참고 문헌------------------


삐에르 쁘띠피스, 『랭보—지옥으로부터의 자유』, 장정애 옮김, 홍익출판사, 2001
롤랑 드 르네빌르, 『견자 랭보』. 이준오 옮김, 문학세계사,1983
앙리 뻬이르 『저주받은 시인들』, 최수철・김종호 옮김, 동문선, 1985
이준오 편역, 『랭보와 베를렌느 비교론』, 예림기획, 1999
월리스 파울리,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 이양준 옮김, 민미디어, 2001

 

 

 

 

 

 

 

 

2.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사르트르)

 

시인 뿐 아니라 인류 모두 ‘견자(見者와 착란(錯亂) 그 어디쯤’ 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지점으로 몰아가고 싶은 것일까? 아니 몰아가는 것일까?

 

위에서 바라본 시들은 이별을 수용한 상태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시들이다. 그러나 이별을 예감하고, 이별조차 포기하거나 반납한 상태도 있다. 그것을 롤랑 바르트는 ‘절제된 도취, 비소유의지’라고 부른다.

 

실존 전부가 걸려 있는 관계에서 더이상 사랑을 진행시킬 수도, 이별을 감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립지대로 물러선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김승희의 시처럼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이런 질문조차하지 못하게 된 상태, 선택이 원천봉쇄된 상태에 해당한다.

 

아예 이별이라는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해당한다. 사실 이 상태는 ‘살고 싶어서’ 이별을 모른 척 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살고 싶어서 아니라 ‘그냥’ 살고 싶어서, 마치 사르트르가 던진 명제처럼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Life is C between B and D(=Life is Choice between Birth and Death)’라고 했던 그 상태에 몰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시나리오 작가 조진국은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역설적인 표현을 한다. “운명이 내 사랑을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운명적인 사랑을 할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⑨“아무리 지금의 사랑이 운명론을 향해 화살표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결국 그 지점에서 담대하게 돌아서느냐, 비장한 음악을 배경으로 불치의 슬픔 속으로 뛰어드느냐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운명이 내 사랑을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운명적인 사랑을 할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조진국.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해냄출판사, 2008)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롤랑 바르트는 ‘절제된 도취, 비소유의지non-vouloir-saisir’라고 부른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바라본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Life is C between B and D(=Life is Choice between Birth and Death)’가 되는 상황이다.

 

‘절제된 도취, 비소유의지non-vouloir-saisir’는 ⑩~⑮에서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재인용한 부분으로(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문학과지성사, 1991)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A)- 로테(B)-자살(C)’이 도출되는 과정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⑩소유의 의지 vouloir-saisir.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專有)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사랑에 빠진 순간 "그 사람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게 줄 의무가 있다"라는 어떤 상황 속으로 자신을 밀고 간다. 사랑의 ‘착란’이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겁이 난 그는 침대 위에 몸을 던지고, 생각을 되씹으며 이제부터는 그 사람의 아무것도 더 이상 소유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베르테르가 결심하게 되는 ‘비소유의 의지 N. V. S. : non-vouloir-saisir’ 는 자살의 도치된 한 대체물이다. 자살하지 말 것(사랑 때문에)이라는 말은 그 사람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로테를 소유하려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그 순간에 베르테르는 자살한다. 이 포기는 사랑의 포기가 아니라 삶의 포기다. 사랑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삶을 포기한다?

 

비소유의지를 결심한 베르테르는 자신을 설득한다. ⑪소유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비소유의 의지 또한 보여져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봉헌의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나는 정념의 그 뜨거운 격앙을 "메마른 삶이나, 죽음에의 의지, 그 커다란 무력감"으로 바꾸고 싶지는 않다.(괴테, 젊은베르테르의 슬픔)

 

비소유의 의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격렬하고도 메마른 것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나는 감각 세계에 자신을 대립시키지 않으면서 내 마음속에 욕망이 자유롭게 회전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을 "내 진실"에 기대게 한다” 그런데 내 진실은 절대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사랑이 결핍될 때, 나는 마치 '포위하기'를 단념하는 군대처럼, 물러가거나 자신을 분산시킨다라고 말한다.

 

베르테르는 사랑을 취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자신을 설득한다. 자신을 순결한 성반처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비소유의 의지가 어떤 전략적인 생각이라면(마침내!)? 만약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척하면서 여전히 그를 정복하려 한다면(물론 은밀하게?) 그를 보다 더 확실하게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사라진다면?” 이것이 베르테르가 로테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⑫'르베르시reversis'란 카드놀이(최소 득점자가 이기는 놀이)는 현자에게는 잘 알려진 그 위장이라는 것에 근거한다("내 힘은 내 약함에 있다"). 그러나 이 상념은 하나의 술책일 뿐이다. 그것은 내 정념 깊숙이 자리잡으면서도 내 강박관념이나 고뇌를 건드리지 않는다.(마지막 함정 : 나는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면서 내가 남기게 될 나의 그 "멋있는 이미지"에 흥분하며 황홀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 체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미덕에 대한 어떤 열광 때문에 아르망스는 흥분한다. 그것은 옥타브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기에."(스탕달, "아르망스")

 

베르테르는 설득의 과정에서 서서히 로테에 대한 사랑과 죽음을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비소유의 의지에 대한 상념이 상상적인 것의 체제와 단절되기 위해서는 내가 언어 밖의 어디엔가로, 무기력한 상태로 추락해야만 한다(어떤 막연한 피로감을 핑계대면서). 그것은 어쩌면 단순히 자리에 앉는다s'asseoir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베르테르는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동원한다.

 

⑬"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어도, 봄은 오고 풀들은 저절로 자란다". 다시 한번 동양 철학을 빌린다면, 비소유의 의지를 소유하지 않으며, 오는 것을(그 사람으로부터) 가도록 내버려두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물리치지 아니하며, 받되 보존하지 않으며, 만들되 제 것으로 하지 않는다 등등. 또는 "완벽한 도(道)는 선택하는 것을 피하는 어려움 외에는 어떤 어려움도 제시하지 아니한다."(노자, 도덕경)

 

그러므로 욕망은 여전히 다음과 같은 위험한 움직임으로 '비소유의 의지'를 심화시킨다. 베르테르는 “내 머릿속에는 사랑해요라는 말이 떠오르지만, 나는 그 말을 입 안에 가두어 발화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나의 그 사람이 아닌, 또는 아직은 나의 그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침묵 속에서 말한다 :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자제하고 있다고” 베르테르는 이 상태에서 이 상태를 확정하려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눈다.

 

가질 수 없는 데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 상황에서, 뤼시브록과 니체는 그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⑭ "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 기진맥진한 영혼은 마시지 않고도 취했네! 자유롭고도 취한 영혼이여, 잊어버린 잊혀진 영혼이여, 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해버린 영혼이여!"(뤼시브록, 『자전적 주제에 관한 15개의 변주곡』)

 

더 이상 기도하지 말고 찬미하라!...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나 너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너희와 내가...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해내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닦아버릴 스펀지를 주었단 말인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살해자 중의 살해자인 우리는..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안성찬 역, 책세상, 2005)

 

더 이상 기도하지 말고 찬미하라!”처럼 형이상학으로 형이상학을 비판한 니체, 하지만 그의 철학이야말로 '형이상학의 정점이며 근대적 계몽의 가장 무자비한 전형'이라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니체를 형이상학자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니체는 인간에게 자연을 순수하게 해석할 능력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 덧붙이게 된 해석이 바로 형이상학이라고 보았다. 니체 스스로 형이상학을 추방하고 해체하는 입장에 있었음에도, 한편으로는 니체 역시 형이상학적 사유를 완전히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결국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의 특징이며,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도 그것을 포기할 방법이 없었다.

 

니체의 이러한 아이러니는 그로 하여금 ‘더 이상 기도하지 말고 찬미하라!.’ 혹은 ‘더 이상 말하지 말고 노래하라’ 는 명제를 낳게하고, 사르트르가 던진 명제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Life is C between B and D(=Life is Choice between Birth and Death)’인 것처럼 탄생(A)과 죽음(B)사이에 선택(C)이 있다는 베르테르의 역설이 놓일 자리를 마련해 준다.

 

 

 

 

 

산티아고 가는 길

 

 

 

 

 

 

3.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B와 D 사이의 C다‘가 아니라, ’A는 A이고, B는 B이며, A는 B일 수 없고, B는 A일 수 없다‘고 바라본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이별(분리)란 없다. 

 

우리는 어떤 시간 앞에 딱 마주설 때가 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춘 상태 같은, 이런 시간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손익분기점을 바라볼 때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듣다가 바흐의 일정한 단조가 계속되는 캐논을 반복해서 듣게되는 그런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만남이나 이별이라는 단어조차도 더 이상 쓰지 않게 되는, 쓸 수 없게 되는 시간 앞에 서게 되는 경우다.

 

대부분의 영성가들은 그런 시간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⑯“무조건 적인 사랑은 타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상태에 있으면 타인에게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으며 사랑받기 위해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타인이 어떻든 간에 사랑한다. 사랑이 무조건적이면 애착과 기대와 숨은 의도가 없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마음에 적어두지 않는다. 그냥, 존재 자체가 사랑임을 가슴이 알려준다.”(데이비드 호킨스, 『내려놓음』, 판미당, pp.215~231)

 

 

⑰아타바스카어에서는/서로 헤어질 때 뭐라고 해요?/작별에 해당하는 말이 뭐예요?//바람에 그을린 그녀의 얼굴 위로/언뜻 마음의 잔물결이 지나갔다/'아, 없어.' 하고 말하며/그녀는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우리는 그냥 '틀라아' 하고 말하지/그것은 또 만나자는 뜻이야/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아/너의 입이 너의 가슴에/작별의 말을 하는 적이 있니?//그녀는 초롱꽃이나 되는 것처럼/가만히 나를 만졌다/헤어지면 서로 잊게 된단다/그러면 보잘것없는 존재가 돼/그래서 우리는 그 말을 쓰지 않아//우리는 늘 네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한단다/돌아오지 않으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 거야/무슨 말인지 알겠지?/우리에게는 작별의 말이 없단다(메리 톨마운틴, 「우리에게는 작별의 말이 없다」 )

 

⑱항상 깨달은 자들은 같은 것을 선택한다. 그들의 창조는 즉석에서 이루어진다. 그 상태에 이르려면 의지가 현실로 드러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선택해야 한다. 의지와 체험사이의 간격이 줄어드는 것을 볼 때, 이별이나 죽음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닐 도날드 윌시, 『신과 나눈 이야기』, 조경숙 역, 아름드리,1997)

 

⑲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헬렌 슈크만, 『기적수업-텍스트』. 구정희 역, 기적수업, 2015)

 

데이비드 호킨스, 메리 톨마운틴, 닐 도날드 윌시, 헬렌 슈크만은 신과의 분리가 없으므로 인간에게도 이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영성가들이다. 호킨스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출판한 책들을 강연하러 다닌 것이 아니라 주로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기적수업』을 강연하러 다녔다.

 

영성가들이 전하는 공통의 메시지는 ‘죽음은 없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도 이별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거룩한 아들이므로(실재) 우리는 고통받을 수 없고 고통 속에 있을 수 없다(실재)는 것. 죽음과 고통이 없다면, 언뜻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부인하는 듯 하지만,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이미 끌어안고 그것을 넘어선 상태, 즉 '실재'의 범주가 순차적 시간을 넘어섰음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시간은 오직 '오늘'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성가들처럼 본질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성가들이 전하는 공통된 전언은 우리 내면의 거룩한 성전, 영혼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으로 본다. 우리가 들어야 하는 영혼의 모음을 듣지 못하고 세상의 소음을 듣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신을 부르면서 세상의 소리를 듣는 이율배반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 선과 악, 물질과 영혼을 이분하여 바라보기 때문이고. 우리가 신과 연결될 수 있는 내면의 코드, 영혼과 연결이 필요할 때 오히려 인류는 그 연결코드를 빼버려 되려 거기에서 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신이 창조주라면 우리의 삶도 계속되는 창조 과정이어야 함에도 그 창조의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했던 것들을 수시로 바꾸고, 우리가 마음을 바꿀 때마다 우주전체의 방향도 바뀐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가지 마음과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갖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로 만들어질 때까지 마음이 거기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함에도, 초점을 맞추고 중심을 잡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간다. 소중한 그 무엇인가를 택할 때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즉, 온 힘과 온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택하도록 해야 함에도, 우리가 목마르게 찾고 있는 동안, 그것은 벌써 우리에게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과 판단을 내릴 때 오직 한 가지만 고려하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선택의 기준은내가 누구인지?를 진술하는 것인지, 내가 되고자 하는 존재를 선언하는지만' 고려하면 된다.

 

그럼에도, 선택의 순간에, 자신을 수많은 선택의 상황(갈등)으로 몰아감으로 선택하는 것과 원하는 것의 괴리만을 늘 경험한다는 것. 이는 선택으로 사는 사람은 의식하는 행동으로 사는 사람이며, 우연으로 사는 사람은 과거의 체험으로 살려는 사람인데, 우리는 과거와 우연에 기댄 삶에 길들여져 삶과 죽음을 분리한다고 보았다.

 

창조가 목적이라면 결정은 쉽게 이루어지고, 선택은 빠르게 현실화된다. 영혼은 '창조'하고 정신은 '반응'한다. 우연은 의식 없는 반응으로 사는 사람의 특징으로, 영혼은 자신의 지혜로 지금 이 순간에 겪는 체험을 신이 우리에게 보내준 체험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미리 보내진 체험이고. 영혼은 정신이 생각해낼 수 없을 것을 알고 있고. 영혼은 느낌으로 말하기에 느낌에 귀 기울이고 느낌대로 따르며, 느낌을 존중하지만. 이때 진짜 느낌과 가짜 느낌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데, 과거의 체험에 근거하여 반응하는 것이 가짜 느낌이며, 지금의 진실에 근거한 체험을 창조할 때 그것이 진짜 느낌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다. 후자만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낼 수 있고. 자신의 영혼에 귀기울일 때 우리는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인지 알 것이며. 자신에게 맞는 진실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진정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말하는 지가 아니고, 누가 듣는 자인가와 연결되어 있고,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느끼는가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감각은 영혼의 언어이고, 영혼은 우리의 진실이며. 우리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진실을 사랑으로 표현할 때, 부정적이고 위험스런 결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죽음이 없듯, 고통도 이별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죽음과 고통과 이별이 있다고 말하는 비실재만 존재한다.  자신의 진실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명백히, 그다지 적절한 일이 아니기에. 얼마나 사랑으로, 얼마나 사랑과 자비라는 신성들을 우리 삶으로 들어오게 하는가가 하늘이 우리를 굽어 살피는 것이며, 따라서 얼마나 자비롭게, 얼마나 예민하게, 얼마나 용기있게, 얼마나 완벽하게, 얼마나 사랑으로 모든 순간에, 모든 생명체를 대하는가만 초점으로 삼으라고 그들은 조언한다.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 하느님의 평화가 있다.” 는 것은 깨달은 이들의 궁극의 지점인데, 여기서 ‘실재와 비실재’를 어떻게 자명하게 분별하고,  영혼의 소리를 듣을 수 있는지가 우리 순례의 화두라 할 것이다.

 

 

 

 

 

 

 

 

 

3. 베드로의 물고기,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

 

우리의 순례가 “견자(見者)와 착란(錯亂) 그 어디쯤(랭보), 혹은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사르트르). 혹은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헬렌 슈크만)” 는 것은 어떤 특정한 대상들의 순례의 여정이 아니라, 그 모두가 복합적으로 우리 순례의 과정에서 반복되어 되풀이되는 현상일 것이다.

 

여기서, 그렇다면, 제자들 역시 인류가 걷게될 '거부-추종'의 매트릭스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었을까?를 묻게된다. 마르코 1,14-20과 요한21, 1-19을 연결해 바라보았을 때 만남의 완성이 무엇인지 어렴프시 알 수 있지 않을까?

 

오신부님은 연중 3주 강론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첫 번째 만남과 두 번째 만남으로 초심을 넘어선 두 번째 만남의 ‘결’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제자들의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만남은, 놀라움과 감사함, 그리고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첫 번째 만남이 아니라, 절망과 고통의 순간을 겪으면서, 예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은 두 번째 만남이었다는 것입니다...그 두 번째 만남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과 절망을 겪은 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통의 시간은 때로 은총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꼭 필요한 은총은 그렇게 고통을 통해서 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강론에서 말하는 두 번째 만남은 '만남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만남의 완성은 마르코 1,14-20과 요한21, 1-19을 연결하여 바라볼 때, 그 만남을 완성하는 모멘트가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은 ‘요한이 잡힌 뒤에’ 라는 역사적 사건의 타전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와 연결하여, 이 두 사건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이제 인류가 비로소 하느님 사랑을 바라보고, 알게되었다는 의미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15 이렇게 말씀하셨다.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6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8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19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20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이 부분은 다시 네 부분으로 나누어 바라보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

 

여기서 바오로, 안드레아, 요한, 야고버는 예수님을 따라나선 첫 인류로 상징된다. 추종의 시작이다. 이것을 강론에서는 초심 혹은 첫 만남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혈육을 뒤로하고 그분을 따르기는 따랐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 낚는 어부의 상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들이 추종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그분을 따라 살 때 그때 그들의 만남은 완성된다. 그 만남의 완성이 있기 전에 그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전반에 걸쳐 보여주실 사랑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해야 했으며, 철저하게 그들이 알고 있는 구세주 상을 내려놓아야 했다. 즉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라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의 오랜 방황은 예수를 알려고 했지 자신을 알려고 하지는 못했음을 간과했다. 하여 그들이 왜 그날 그물과 혈육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분을 따라가게 되었는지 사후적으로 알게 된다. 그분의 부재중에 드디어 그분이 누구인지 자신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예수님과 이들의 만남이 완성되는 두 번째 만남을 요한 복음 사가는 이렇게 전한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보아라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라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속에 뛰어 들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갈릴레아, 그들의 3년이 꿈속의 시간처럼 지나고, 그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그들에게 그분이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른다. 처음에도 들었고 그날도 그들은 들었다. 여기서 이 만남이 무엇을 완성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첫째, ‘들음’으로 그들은 그분을 따를 수 있었다.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모든 것이 비어있는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진복팔단에서 말하는 '마음의 가난'을 의미한다. 휘몰아치듯이 그들 생애 있었던 모든 사건들이 가라앉았을 때, 비로소 그들은 듣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둥속에도 있지 않고 불떨기 속에도 있지 않는 '고요한 음성'을 들음이다

 

둘째, 그럼에도 그 순간에도 그들은 그분이 주님인 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의 약점이 아니라 그들의 장점이자, 우리가 배워야할 진리가 어디에서 오는가에 관한 것이다. 진리는 누가 전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것이 진리인가 하는 점이다. 어떤 자리나 위치가 진리를 전하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진리가 진리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

 

셋째, 들음과 봄이 동시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사랑받던 제자 사도 요한이었다. 끝까지 십자가 밑에 있던 사도 요한만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넷째, 진리를 들 을 수 있는 것은, 마르코와 요한복음 사가의 전언대로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그분의 의지에 그들의 의지가 결합되는 순간에 일어나는 신적 체험이자 만남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천 번의 세상 소리에서, 천한 번째 그분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바로 그 은총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만남의 완성은 예수님만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보고 듣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것, 영혼을 소리를 듣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영혼의 주님을 찬미하며'는 마리아의 마니피캇으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즉 , (저는 어떤 목적으로 주님을 추종하거나 우상숭배하는 자가 아니라)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때, 그들이 잡은 물고기가 정확히 '153'마리라고 복음사가는 전한다.  첫 만남의 시간을  '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고 쓴 복음 사가가, 고기가  '놀랄만큼 많이 잡혔다' '엄청 많이 잡혔다'가 아니고 '153마리'라고 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히브리어 숫자값으로 계산하면 '153', (히브리어는 각 알파벳마다 고유의 숫자값이 있다) 이 '153' 은 수학에서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라고 부른다. 트리플 큐브 넘버란 각 자릿수를 각각 세제곱해 더한 값이 원래 자신의 수가 나오는 수를 말한다. 1의 세제곱(1) + 5의 세제곱(125) + 3의 세제곱(27) = 153, 이 '153' 은 17번째 정삼각형의 수로. 수학에서 세제곱이란 정육면체(큐브)를 의미하고, 구약에 나오는 성막안의 성소와 지성소가 바로 정육면체이고,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 또한 정육면체였다. 그것은 '구별된 곳' 즉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153은 미사전례에 나오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성전의 의미가 공간이 아니라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거룩한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분이 자신의 몸을 허물어 인류로 하여금 거룩한 시간으로 끌어올린 이 사건이 만남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따라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의미를, 강론에서 말하는 두 번째 만남은 Ⓔ, Ⓕ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인류는 그분의 사랑을 직관하고, 듣고, 따를 수 있는 그런 시간을 살게되었다는 의미로 바라볼 수 있다. 이 모멘트는 요한 사도처럼 ‘볼’ 수 있거나 제자들처럼 ‘들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여기서 이 바라봄과 들음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다. 만남의 완성은 자기 십자가와 모든 만남의 ‘십자가’를 지고간 이들에게 주어지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사가는 이 순간을 배드로가 ‘그냥 물속에 뛰어 들었다고 표현한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베드로가 옷을 걸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괴테가 보았다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라고 했을 것이다. (참고http://blog.daum.net/m-deresa/12389592)

 

매일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을 보겠다는 의지, 매일 들어야 하는 것을 새롭게 듣겠다는 의지, 그것만이 문제일 것이다. 우리가 수천 수만번 들었고, 보았던 것을 내려놓고 빈서판에 글을 쓰듯, 매일 다시 보고 들을 수 있을 때, 우리 역시도 ‘153마리의 고기’로 상징되는 ‘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의 시간을 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간을 거룩함이라 하여도 좋고 풍요로움이라 하여도 좋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만남의 완성'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될 것이다. 이 만남을 인류의 영성가들이 오래 찾다가 드디어 바라본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곳에 하느님의 평화가 있다”고 말하는 그 지점일 것이고, 랭보가 오랜 착란 후에 이른  ’견자‘의 시선일 것이다.

 

우리의 순례란,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곳에 하느님의 평화가 있다.”는 저 지점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와 모든 만남이 내장한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짊어진 채,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는 ‘견자(見者)’로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당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하여,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은 첫번째 만남의 그 설렘에서 시작해 수많은 이별(착란의 시간)을 거친후, 서로의 본질을 바라보게 되는 두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그분 안에서 영원한 만남일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김영승 시인의 「너 있는 곳」을 읽어본다.

 

어디냐 거기는/거기 그냥 있어라/하늘 끝쯤은 내 눈에 와 닿는다/알 수 없는 너는 나무 열매 속이냐/쓰린 내 가슴 속이냐/코 끝 때리는 두엄 밀잠자리 엷은 날개 위냐/너는 아무 데나 다 있구나/나는 이 늦은 밤 추근거리는 비/술집에 앉아 있는/나는 아무 데나 있어야겠다/술이 내 가슴에 고이다 보면/아무 데나 있다가/너를 만난다/짧게 울고/너의 모습 꽃을 따듯/따서 담으리라

 

 

 

 

 

Rachmaninov -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 18th Var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