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 빈서판)에 쓴 청춘의 문장들

나뭇잎숨결 2021. 1. 7. 03:58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백지, 빈서판)에 쓴 청춘의 문장들

-사람아, 너의 신비와 품위를 생각하라(발터 카스퍼 추기경)

 

 

참고

 

1. 마태오 2,1-12

2. 아리스토텔레스, 『에티카-영혼에 관하여』

3. 에릭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강영계 역, 박영사, 1985

4. 이븐 투파일, 『하이 이븐 야크잔Ḥayy ibn yaqzan』(1175년경)

5. 존 로크, 『인간 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6. 스티븐 핑커, 『빈 서판:The Blank Slate』 , 2002

7.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천개의 고원』(1980)

8.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정명진, 부글북스. 2018

9.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진석용 역, 나남, 2018

10. 장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부크크(Bookk), 2018

11.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04

12. 김명정, 「소설 ‘하이 븐 야크잔’에 나타난 철학적 주제에 대한 고찰」,

아랍어와 아랍문학 18권 1호, 2014

 

 

 

 

 

1.

 

 

 

인간은 자기 운명의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인가? 아님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운명이 정해진 결정론적 존재인가? 이 주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

 

먼저, 김승희 시인의 「보리수나무 아래로」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을 읽어본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더욱 정직하겠지,/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생각하지 않지만//나는 한밤중에 일어나/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물푸레나무 아래 휘어진 히아신스꽃길이/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흔적 같은 향기로/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청춘을 중퇴한 듯해./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 듯한/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쓰러질 것 같아서/시간의 문지방을 베고 누우면/그래, 그래, 그런 착한 깨달음이 오지./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결국은/보리수나무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이제야 비로소 난/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모든 길이란, 아마도, 나,/자신의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는/길이므로.(김승희)

 

김승희 시인은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결국은/보리수나무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바라본다. 보리수나무는 부처와 연결하여 깨달음의 환유로 쓰인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 자신에게 주어진 일(삶)을 끝까지 살아낸 사람, 그 열정을 ‘청춘’이라고 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청춘을 중퇴한 듯해./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 듯한/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 화자는 삶에 대한 온전한 투신, ‘청춘’의 시간을 자신에게 되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라고 보고 있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이백의 「장진주」) ‘아아, 장차 어찌할꼬, 이 청춘을’(설요의 시) ‘꽃시절이 모두 지나고 나면 봄빛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김연수, 청문의 문장들)

 

소설가 김연수는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생명이, 목숨이 곧 사랑인데, 삶이 곧 사랑인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고, 한 철 봄과 같은, 천상병 시인이 바라본 잠깐 ‘소풍’ 온 거 같은 이 찰라의 생을 보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김연수는 인간의 유한성을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희망은 단지 종교가 던진 환상, 형이상학의 초월논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어떻게 우리의 삶을, 어떻게 우리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에게는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쉽고, 이미 존재자체가 사랑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 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의 노트에 오직 사랑만 쓰기 때문이다.

 

김승희나 김연수가 청춘의 문장으로 집어든 것이 ‘사랑’ 이었다는 것이 우리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 그들은 모두 나이와 상관없이 청춘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에 청춘의 문장을 쓴다는 것은, 우리에게 빈 서판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우리에게 얼마만큼 자유의지가 허용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렇기에 청춘은 나이와 상관없이 이 세상 순례가 끝나는 순간까지 가장 뜨거운 시간, 가장 뜨거운 목숨을 스스로 선택해 살아내는 일이라면, 자신이 진리의 정착민이 아니라 진리의 노마드임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증명이라 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천개의 고원>을 가로질러 횡단하는 비결정적인 <~되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타블라라사, 빈 서판에 ‘자유의지’라고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2.

 

강론에서 인용한 아우구스티노, 안젤루스 살레시우스, 발터 카스퍼 추기경님의 통찰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빈 서판이 무엇이며, 거기에 어떤 문장들을 써야 하는지, 즉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인가? 신은 단지 인간에게 결정론적인 유한한 생을 주셨는가? 라는 그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도움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십니다(아우구스티노)

 

Ⓑ그리스도께서 천 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고 해도, 그대 안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영원토록 헛되이 산 것입니다(안젤루스 살레시우스)

 

Ⓒ사람아, 너의 신비를 생각하라, 너의 품위를 생각하라(발터 카스퍼 추기경)

 

 

‘우리의 도움 없이는’, ‘그대 안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너의 신비와 품위’가 공통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에 해당한다. 그것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르는데, 그 은총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이 우리를 믿는다는 연역이 가능하다. 믿는 행위란, 신이 우리를 믿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류는 오랫동안 삶이 주어졌다는 이 경이로운 사건 앞에서 인간의 본성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타블라라사>라는 개념을 통해 변화, 발전, 진화, 창조가 가능한가를 묻고 또 물었다. 그 고민의 출발점은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인가? 아님 이미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든 운명이 정해진 결정론적 존재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①인간은 ‘미 기입된 서판’을 갖고 있다. 덕에 영향을 받은 무언가는 그것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 이전에 지성의 작용으로 인해 잠재적으로 우리 사고 안에 영향을 미치며, 비록 이것이 실재하기 이전에 이에 대한 생각은 우리 사고 안에 같은 방식으로 잠재되어 실제로 존재하기 전에도 각인되어 있다. 이는 지성이 작동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아리스토 텔레스)

 

'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빈 서판, '깨끗이 닦아낸 서판'이라는 뜻으로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Tabula rasa”라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미 기입된 서판’으로 소급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같은 사고는 스토아학파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②‘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 그 사람은 무언가 쓰일 수 있는 종이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아에티우스)

 

스토아 학파인 아에티우스는 지각은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감정에 의해 생성되며 이는 ‘밀봉된 왁스판 위’라는 표현을 한다. 아울러 지각은 이해될 수 있는 것(가지각)과 이해될 수 없는 것(불가지각)으로 나뉜다. 전자는 객체에서 기인하는 사실의 기준을 의미하기 때문에 동시에 실제 대상과 상응한다. 이와 반대로 후자는 어떠한 객체와의 관련성도 없다. 혹여라도 불가지각이 객체와의 관련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이는 상응할 수 없고 오히려 애매하거나 또렷하지 않은 상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③ “인간의 지성은 탄생부터 ‘빈 서판’을 닮아 있고, 교육과 개인이 알게 될 내용에 의해 작성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아비체나)

 

11세기에 이르러 <Tabula rasa>의 개념은 페르시아 출신의 철학가인 아비체나에 의해 보다 명확해진다. 그에 의하면 지식은 이 세상에서 하나의 추상적 개념을 지닌 객체와 경험적 친근성을 형성하면서 획득된다고 밝힌다. 또한 지식은 이성적인 삼단논법을 통해 발전되며 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유도하는 하나의 명제 진술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④피조물의 완전성으로부터 어떤 것을 분리시키는 것은 창조적 능력의 완전성 그 자체로부터 그것을 떼어내는 것이다."(토마스 아퀴나스)

 

13세기에 들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Tabula rasa>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비첸나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인간 그 자체의 완전성을 창조의 근간으로 바라본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성 보나뻰두르에 의해 정교화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종교적으로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인간의 자유의지, 혹은 환경결정론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사회철학으로 대두된 것은 17세기 경험론자 존 로크에 의해서다.

 

⑤ 백지(Tabula rasa)는 인간이 그 출생에서부터 비어있는 서판의 형태로 탄생되며, 이는 선재된 지식이 아닌 동시에 인간의 후천적 감각 경험에 의해서만 지식이 추가될 수 있다...인간이 지닌 자유란 바로 우리가 쓸 수 있는 삶이라는 ‘백지’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존 로크)

 

존 로크는 경험론에 바탕해 인간이 이상, 진리, 신의 관념 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본유 관념론"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의 "빈 서판(書板)" 개념은 역사적으로 세습왕권과 귀족 신분의 정당성을 뒤흔들었고,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 윤리적 보편성을 획득했다.

 

성서학자인 Edward Pococke에 의해 스스로 ‘성장한 철학자’라는 뜻인 ‘Philosophus Autodidactus’ 라는 라틴어 번역본이 출간되는 데, 이는 안달루시아계 이슬람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이븐 투파일의 소설이다. 존로크는 이븐 투파일의 소설에서 ‘백지’ 개념을 도출한다.

 

12세기 아랍의 알모하드의 왕 아부 야쿠브 유수프의 궁정의사와 고문을 지냈던 이븐 투파일의 쓴 〈하이 이븐 야크잔Ḥayy ibn yaqzan〉(1175경)는 철학소설이다. 그는 완전히 고립된 무인도에서 50세까지 생활하는 한 사람의 자기교육과 철학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븐 투파일은 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이가 황폐한 섬에서 홀로 지내며 유아기부터 성인기에 이르기 까지 사회적인 고립 속에서 나타내는 심적 발달단계를 묘사한다.

 

이븐 투파일의 소설은 존 로크에게 영감을 주어 추후 『인간 지성론』에서 나타나는 <Tabula rasa>의 개념정립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존 로크는 인간 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실현의 장을 '백지'라고 부른다.

 

로크의 철학체계 안에서 <Tabula rasa>는 인간은 그 지성적 측면에 출생에서부터 비어있는 서판의 형태로 탄생되며, 이는 선재된 지식이 아닌 동시에 인간의 후천적 감각 경험에 의해서만 지식이 추가될 수 있다고 보았다. <Tabula rasa>는 각 개인이 백지의 상태로 태어나는 것과 더불어 그들이 지닌 개인적 자유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는 개인은 그들이 지닌 고유한 성격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인간의 종적 차이는 구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자율적이고도 주체적 자아에 대한 가정은 추후 로크의 ‘자연권’ 사상을 낳는다. 아울러 <Tabula rasa>와 관련한 그의 사상은 종종 토머스 홉스의 인간본성론인 ‘천부인권사상’과 비교되기도 한다.

 

로크의 <타블라라사> 사상은 이후 장 자크 루소와 프로이트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루소는 <Tabula rasa> 개념을 이용하여 미래 사회의 복지와 농업에 대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 ‘자기애에서 이타성’까지 나간다. 진정한 자기애만이 이타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이 채워지지 않은 빈 서판의 상태로 태어났다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대 긍정으로 그는 이를 ‘일반의지’라고 부른다. 루소의 사상은"자연은 인간을 선량·자유·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회가 인간을 사악·노예·불행으로 몰아넣었다"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인간은 일반의지로 인해 진화와 변화, 창조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인간이 반드시 복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오늘날 복지사회 시스템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또한 그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미국혁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Tabula rasa> 개념은 20세기에 들어 사회과학 전 분야에서 보편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초기 우생학에서는 인간의 지능이 그가 속한 사회적 계급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상정했으나, 추후 이 주장은 기각되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주장은 인종차별주의로 이해되기도 하는 등 인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촉발했다.

 

⑥"무엇이 한 사회의 주류에 속한 사람들을 각기 다르게 만드는가의 문제와 관련해서 수천 년 간 지속되어 온 본성-양육 논쟁은 사실상 끝이 났거나 끝이 나야 한다"(스티븐 핑거)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언어ㆍ인지심리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The Blank Slate: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2002)에서 유전자 지도로 대표되는 20세기 생물학적 발견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인간은 "유전자 결정론-환경 결정론" 또는 "본성-양육" 논쟁은 다시 뜨거운 논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진행중인 논쟁으로 떠오르게 했다.

 

철학사를 개괄해 살펴본 "인간의 마음은 빈 서판에서 출발하는가"라는 문제제기는 단지 철학의 논제가 아니라 인류의 오랜 고민, 우연과 운명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삶과 사랑을 늘 고민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이 땅의 문제, 삶의 문제를 묻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인가? 아님 이미 운명이 결정된 존재인가?는 인류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3.

 

우리가 <타블라라사> 백지 혹은 빈 서판을 갖고 있는 존재라면 우리는 여기에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해 다시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난 존재인가? 결정론적 존재인가의 논의로 이어진다. 우리는 매순간 스스로 어떤 행위를 선택하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행사하는 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시간에 대해 우리는 대부분 결정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아님 자유의지와 운명결정론을 오락가락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가 회피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책임이 아니라 자유라는 점을 말해준다. 우리에게 중요한 선택들을 누군가가 대행해 주었음 하는 자기정체성의 반납이다. 

 

자유의지는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능력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지는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는지에 대해 논란은 인과 관계에서 인간 자유와 자연 법칙의 비중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다.

 

인류는 자유의지와 관련해 크게 양립가능론과 양립불가론으로 나뉘어 바라보았다. 양립가능은 기본적으로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동시에 성립될 수 있다는 입장이고, 양립불가론은 자유의지와 결정론 중에 어느 한 가지만이 성립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양립불가론은 다시 인과적결정론, 비결정론으로 나뉜다. 양립불가론적 결정론자들은 이 세계는 애초에 모든 것이 결정됐고, 인간에게 자유선택의 여지 앞에 그 책임의 소재를 물으므로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비결정론자의 주장은 우리에게 빈 서판이 주어졌다는 것에서 신의 모상을 닮았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으며, 신의 사랑이 무한하다면 신이 준 자유도 무한다는 입장이다.

 

이렇듯,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는 종교적, 윤리적, 과학적 함의를 품는다. 예를 들면, 종교 영역에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것은 이 세상의 행,불행을 누구의 원인으로 보아야 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윤리 영역에서 자유의지는 행위에 책임 소재를 묻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과학 영역에서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은 물리적 인과 관계가 인간의 행위와 정신을 전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특히 인류의 대다수를 속박하는 자유의지는 카르마라 불리는 인과적 결정론에 매여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래가 현재까지의 사건들과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장이다. 이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부른다. 이미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었다면 이는 신은 없다는 무신론을 낳게 된다. 아님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신의 무능으로 귀착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냥 구경꾼에 해당한다. ‘산다’라는 말에서 파생한 ‘삶’은 성립될 수 없다는 논리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결정론적인 사고 속에서 안일을 추구하는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⑦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자유에 부담을 느낄 때, 또는 변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항상 결정론으로 대피할 준비를 갖춘다." 라고 말한다.

 

⑧ 에릭 프롬은 『자유에서의 도피』에서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⑨홉스는 자유의 원인을 추상적 관념인 의지에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서 찾았다. 그는 "자유는 의지, 욕구에서 추론해낼 수 없다. 자유는 자신이 바라는 행위를 끊임없이 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했다.

 

⑩데닛에 따르면, “모든 것이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도, 인간이 신이나 라플라스의 악마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 자연계의 혼돈 현상과 인간 지식의 한계로 인해, 인간 같은 유한한 존재는 미래가 결정돼 있는지 판단할 수도 없고, 미래가 결정돼 있다고 해도 미래를 알 수 없다”

 

⑪허버드대의 사회심리학자 제임스는 “어제가 내 삶의 위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르누비에의 글을 읽고 자유 의지에 대한 정의가 착각에 대한 정의일 필요는 없음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면에서 생각을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착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것이다. 자유 의지에 대한 내 첫 번째 행위는 자유 의지를 믿는 것”

 

⑫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방박사의 별은 하늘에 있지만 우리의 별은 땅에 있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더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새로운 실천철학='에티카'를 끌어내기” 라고 말한다.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생물학(생리심리학)적인 원리를 알게 되면서 결정론과 유물론 사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많은 이들은 이런 질문을 했다. “정신 과정까지 포함해 생명체의 모든 것이 물질로 환원될 수 있다면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이는 단지 착각일 뿐이고, 개인의 책임과 도덕성도 무의미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인간은 단지 신의 무대에 등장하는 부수적 존재, 하나의 기능에 불과한 존재인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좋든 나쁘든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엮고 있다. 그런데 미덕이든 악덕이든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은 흔적을 남긴다. 신이 아무리 너의 죄나 실수를 헤아리지 않고 용서한다한들, 너는 신의 사랑이라 한들,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고 한들, 우리 안에는 실수나 실패나 죄를 낱낱이 헤아리는 결정론적인 인류, 집단 무의식같은 체면이 존재한다는 것. 뿌리 깊은 두려움이 있다는 것. 더욱이 신경세포와 신경섬유의 분자들이 우리의 실수를 헤아리고, 등록하고, 기억의 시냅시스에 남김없이 저장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

우리의 행위 가운데 장점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단점을, 실패를, 죄를 무슨 보물처럼 기억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빈 서판에 쓴 것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신의 고백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지난 시간, 과거를 기록한다는 것,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그분이 주셨다고 고백하는 순간조차도 우리는 죄에 묶여 있는 결정론자인 셈이다. 그래서 겨우 자기네 그 쪽 동네 한바퀴 산책하는 자유밖에 자신에게 주지 못한다.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준 자유의지의 전부라면 슬프지 아니한가? 인간을 붙들고 울고 싶지 않은가? 그래서 천진난만한 자기 안의 아이를 노회한 어른이 가차없이 검열하고, 누구에게도 실수하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그런 자신을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아파테이아’의 노예가 된다. 이것은 엄밀히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결정론적 운명론을 신봉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 된 것이라면 우리는 생의 무대에서 당장 뛰어내려야 한다.

 

 

 

 

 

 

 

 

 

 

 

4.

 

여기까지 쓰고 나서 <창세기>의 낙원추방 설화를 다시 읽었다.

 

<신과 나눈 이야기>를 쓴 닐 도날드 윌시를 비롯한 많은 영성가들이 아담과 에와를 원죄의 원흉으로 보지 않고 자유의지의 원심력 시험에 실패한 최초의 인류로 보았다는 점,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바라보고 싶었다. 아담과 에와는 자유의지의 원심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초기 인류의 모습이라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실은 자유의지의 크기를 서로 확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이이지만 똑같은 자유의 크기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즉 감당하는 자유의 원심력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컨대, 한 사람은 자기가 몸담은 동네 한 바퀴 정도의 산책의 자유를 자유라고 살 때, 한 사람은 중력을 넘어 다른 은하까지 자유의 자장이 확장되었다면, 동네 한 바퀴의 자유를 사는 사람은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작음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중력을 넘어선 사람의 자유를 부인 혹은 제거할 수밖에 없다. 반면 더 큰 자유를 바라본 사람은 자유의 걸음마를 하는 인류를 끝끝내 보듬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십자가의 원리는 자유의 원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공현대축일 복음에서 이것을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여기서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이 문장에 주목해 보자

 

헤로데와 예루살렘 시민들은 예수님의 자유의 크기를 바라보지 못한 동네 한바퀴 정도의 자유를 사는 어찌보면 불쌍한 연민의 대상들이었다. 불쌍하면서 동시에 사악하기조차한 어리석은 인류 헤로데는 세속의 권력이 있으므로 자유의 상징인 예수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두려움의 끝을 갈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의 끝이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그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므로 누군가를 대신 죽일 수밖에 없었다.

 

동방박사만 자신이 본 별을 보고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본 헤로데 역시 끝까지 자기가 본 바대로 걸어갔다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보았는가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라 하겠다.

 

더욱이 예수님이 공생활 3년동안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융단포격에 가까운 비판을 가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구세사의 등장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구약, 구약을 외치고 율법을 금과옥조로 들먹였으나,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한 말을 정작 그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자기 배신의 논리인가? 가장 큰 배신은 자기가 자신을 배신하는 그 논리일 것이다. 복음의 트릭스터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무서운 배신 논리로 무장된 사람들이 종교, 사회, 정치의 전면에 포진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 어떤 권력이 쥐어져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점에서 예수의 적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고, 부처의 적은 부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무서운 논리를 떠올릴 수 있다.

 

그렇기에 이방인 동방박사가 그 먼 길을 걸어와(자기 믿음에 대한 자기 보증) 예수님께 경배를 드림으로써 구세사의 두루마리를 왜 특정종교의 카테고리에 국한시키지 않았는지 그 의미를 바라볼 수 있다.

 

“나는 청춘에만 끌린다”

 

이건 J의 전 생애를 축약하는 말이다. 성서 어디에도 그런 문장은 없지만 “쓰러질 때까지 끝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끝까지 걸어간 사람” 그 사람의 심장이 청춘이 아니고 무엇이랴. 자신이 본 별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걸어간 사람, 그들의 심장이 청춘이 아니고 무엇이랴. 자유의 원심력이 이 우주를 넘나드는 그들의 심장이 청춘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삶이라는 빈 서판을 갖고 왔다. 우리는 모두 그 빈 서판에 삶이라는 문장을 쓰는 중이다. 따라서 자유라고 쓰고 운명결정론이라고 읽고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적 세계관을 오락가락 하고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몸담은 동네 한 바퀴의 지유를 살면서 이 우주를, 영원과 무한을, 예수님의 사랑과 자유를, 안다고, 바라보았다고, 산다고 생각하는지 엄중하게 성찰할 일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일반화 할 수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요즘 일부의 대학생들은 주식전문가 못지않게 주식에 투자해서 큰 돈을 번다. 학기마다 차를 바꾸는 학생들도 있다. 그들 중 어떤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주식을 했다고 한다. 매학기 재수강이 일상이 된 그들은 학점보다 돈을 중시한다. 대학은 그냥 휴식과 사교의 장이다. 학점은 자신에게 자유를 보장하지 않지만 돈은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사랑이 없는 삶은 견딜 수 있지만, 자유가 없는 삶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복의 바로미터가 자유고, 자유의 관건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식에 성공하기 위해서 기존의 주식시장의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세계 주식시장의 흐름을 철저히 분석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원어민 못지않은 여러나라의 외국어실력과 세계경제 흐름에 대한 예측, 확률통계에 대한 어마어마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들이 가끔 하는 얘기들, 제약주에 투자하면 손해는 안 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오래살고 싶어하고 젊게 살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에 그 욕망과 제약주가 딱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건강관리로 장수와 젊음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불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분석이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는 자유의지의 전제인 '엘보우 룸'(elbow room, 자유로운 활동 범위)과는 분명히 다르다. 여기서 어떤 자유를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자유라고 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답은 사랑이 전제된 자유만을 자유라고 한다는 j의 삶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자유는 사랑과 쌍생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때, 사무엘 울먼이 바라본 대로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수긍할 수 있다. 어떻게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 경이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애와 같은 미지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희, 우리 모두의 가슴에 있는 '영감의 우체국' 을 통해 다른 사람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 희망, 격려, 용기, 영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자신이 바라본 별에 대한 믿음을 끝내 철회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사람아, 너의 신비와 품위를 생각하라”(발터 카스퍼 추기경)는 것을 삶이라는 펜으로 청춘의 문장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30 m repeat * ] 마스카니(Mascagni)_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_간주곡_고요함, 경건함

Youtube  |  2019.11.18  |  재생 횟수 9,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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