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의지Wesenswille와 선택의지Kurwille, 당신 자신을 바라보기!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결코 경험하지 않는다
참고
1. 루카 1,1-38
2.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모놀로기온』, 박승찬 역, 대우고전총서, 2012
3. 토마스 아퀴나스, 『지성단일성』, 이재경 역, 분도출판사, 2007
4. 김현태, 『둔스 스코투스의 철학사상』, 가톨릭대출판부, 1994
5. 윌리엄 오컴, 『논리학대전』, 박우석 역, 나남출판사, 2017
6. 테야르 드 샤르댕,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
7. 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한길사, 2005
8.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 역, 열린책들, 2009
9. 버트런트 러셀, 『행복의 정복』,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2009
10.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1』, 이기우외, 문학동네, 2016
11,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역, 민음사, 2010
12. 프로이트 『꿈의 해석』, 조대경 역, 서울대출판부, 2014
13. 페르디난트 퇴니스,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곽노안 역, 라움, 2017
1.
“나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있다”
마리아의 ‘수태고지’와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바라보기 위한 화두다. 인류는 즈카르야의 시간, 혹은 마리아의 시간 두 시간 중 어느 시간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즈카르야의 시간은 인과율에 사로잡힌 시간이라면 마리아의 시간은 인과율을 뛰어넘은 시간이다. 인류사의 모든 갈등과 논쟁의 한 가운데는(신자든 아니든) 두 사람의 시간이 내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인과율을 뛰어넘은 마리아는 가톨릭 신자들만의 어머니가 아니다.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자 종교의 카테고리와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넘어 정당하게 해석되고 상찬되어야할 ‘인류’에 해당한다.
진리의 노마드였던 이들의 글을 먼저 읽어보기로 한다.
① 그러므로 주님, 당신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큰 어떤 것”입니다.(안셀무스)
②"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시킨다...신의 명령이 선하고 신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신은 그것을 명한다."(토마스 아퀴나스)
③“선하기 때문에 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하고자 하기에 선하다.”(둔스 스코투스)
④“실체나 원리는 불필요하게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오컴의 면도날)
교회사를 읽어보면 안셀무스와 아퀴나스는 타락한 종교로 지목받던 시대, 종교는 이성의 시녀로 폄하되던 시대에 하느님의 가치를 지켜내려 그들 자신이 ‘불’이 되었던, 진리의 노마드였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혹세무민의 교설 혹은 사변적인 것으로 치부돼,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끝끝내 지켜내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인가?
①안셀무스와 ②아퀴나스, ③스코투스, ④오컴은 실재론과 유명론을 가름하는 보편논쟁의 한 가운데 있던 이들이다. 이들은 사물과 보편자와의 관계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실재론자는 ‘보편자는 개별적 사물에 앞서 실재로 존재한다’고 보았다면, 유명론에 따르면 ‘보편자는 개별적 사물 뒤에서 인간이 만든 이름에 불과하다’며 인간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으로 바라보았다. 실재론자인 안셀무스와 아퀴나스는 ‘마음 바깥에 보편자가 실재한다’고 보았으며, 유명론자인 오컴은 ‘보편자는 인간의 정신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또한 하느님의 ‘선’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토마스 아퀴나스는 종교 안팎의 공격을 온몸에 받으며 진리의 본질을 수호하려 하였다. 안셀무스와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존재증명하려 했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고상한 부분이므로 인간이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신의 존재를 추론(推論)하는 것은 신을 찬미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반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둔스 스코투스는 신비주의 입장에서 이성보다 사랑이 우월함을 강조했다. 아퀴나스가 강조한 이성의 지위를 낮추고 신의 의지를 절대화했다. 인간의 이성을 우위에 놓으면 신은 자신의 의지로 무엇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비판이다. 창조는 신적 의지로부터 나오며, 신은 논리적 모순이 없는 것만을 원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도덕적 질서도 신적 의지에 의존하므로 결국 선하다는 것은 신이 원한다는 점에서 선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⑤“웃음이 왜 그리 두려운 겁니까?” “이 책을 본 학자들이 모든 것에 대해 웃을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움베르토 에코)
⑥밤에는 꿈이, 낮에는 농담(웃음)이 무의식을 대변한다. (프로이트)
⑤움베르토 에코는 중세의 보편논쟁과 신 존재증명은 절대적이거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단지 한 시대의 중세적 가치였을 뿐이며 ‘희극과 웃음살인’이라는 소재로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써서 교회를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이를 ⑥프로이트는 ‘웃음예찬론자’들의 심리에 내재한 공격성을 진리에 대한 무의식적인 방어기재로 바라보았다.
⑦사랑에 있어서 제일의 계기는 내가 나만으로서의 독립한 인격이고자 하지 않는 것.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때에는 나는 자기를 결점이 많은 불충분한 것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제이의 계기는 내가 한 사람의 다른 인격 속에서나 자신을 획득한다는 것. 내가 다른 사람 속에서 보람을 얻으며 또 다른 사람도 나의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G.W.F.헤에겔)
⑧나는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 첫째는 그것이 황홀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황홀은 너무나 찬란해서 몇 시간의 이 즐거움을 위해서는 남은 생애를 전부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둘째로는 그것이 고독감-하나의 떨리는 의식이 이 세상 너머로 차고 생명없는 끝없는 심연을 바라보는 그 무서운-을 덜어주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 다녔다. 마지막으로 나는 사랑의 결합 속에서 성자와 시인들이 상상한 천국의 신비로운 축도를 미리 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찾았다. ( B.A.W.러셀)
관념론과 실증론을 대변하는 ⑦헤겔과 ⑧러셀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에 직면하여, 물질(형이하학)은 절대적인 사랑(형이상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보아 변증법적인 통합을 이루기도 하였다.
⑨과거로부터 전승된 텍스트가 해석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텍스트 내용의 진실성이 작동되어 해석자에게 자명하고 무의식적인 것(선입견)이 자명성을 잃는다. 이에 비로소 해석자는 스스로의 선입견을 음미해 텍스트에 물음을 세우게 된다.(가다머)
⑩나의 죽음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발언하는데 구조적으로 필수적이다. 나는 살아 있다라는 언표는 나의 죽어 있음을 수반하며 그것의 가능성은 내가 죽어 있을 가능성을 요구한다...여기서 우리는 “나는 죽어 있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이해할 수 있다(데리다)
해석학자로 불리는 ⑨가다머는 세계는 거대한 텍스트이자 세계를 해석하는 것은 진리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질의지로써 텍스트와 해석자가 지닌 해석의 의미는 진리의 대결로 바라보았다면, 해체론자인 ⑩의 데리다는 진리는 홀로 진리일 수 없고 상대적인 세계가 존재해야지만 가능하다고 보아, 세계는 반쪽의 진리를 보충해주는 것으로, 진리든 무엇이든 ‘절대’라는 말은 진리의 반쪽일 뿐이라고 바라보았다.
언뜻 보면, 보편논쟁이든, 관념론이든 실증론이든, 해석학이든 해체론이든 소모적인 논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이런 논쟁들을 통해 끊임없이 본질적인 ‘진리’가 무엇인가를 애타게 묻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논쟁하는 그들조차도 그들이 왜 그런 논쟁에 일생을 소진하고 있었는지 모른 채, 진정한 ‘빛’을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배고픈줄도 모르는 배고픔이자, 그리워하는지도 모르는 그리움이자, 애타는 줄도 모르는 애태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표현해 “나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도 모르는 내가 이미 저 앞에서 무엇이 참다운 ‘사랑’이고 ‘기쁨’이고 ‘진리’ 이고, ‘자유’이고 ‘풍요로움’인지 그 ‘빛’이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으며, 찾아 헤메는 길 위의 노마드라는 것이다.
영성가인 닐 도날드 윌시는 “신이 너희를 보는 대로 너희가 너희를 본다면, 너희는 크게 웃을 것이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웃는다’는 것은 자기비하나 자조의 웃음이 아니라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창조된 자의 ‘자기긍정’을 의미한다.
2. 즈카리야의 시간-나 아닌 것이 아니고는 나인 것도 없다
이렇듯, 우리는 자신이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음에도 어떤 말이나 행동을 서슴없이 하게 될 때가 있다. 원인을 모르는 결과 앞에 서 있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루카복음 1장의 즈카르야의 하느님 체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하나의 이정표이다. ‘나 아닌 것이 아니고는 나인 것도 없다’는 것은, 어떻게 대립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도 이 세상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이 사라지고 ‘오늘’이 가능한지 바라보는 과정에 해당한다.
성탄은 하늘과 땅이, 말씀과 사람(혹은 물질)이 하나가 된 사건이다. 예수님이 가난한 구유에 누워계시다,에서 ‘가난한 구유’에 방점을 찍어 감성적으로 바라보는 한 우리는 언제나 인과율과 종교를 나누는 이분법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집단체면이다. (예수님께는 우리의 찬미나 연민이 필요없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류의 99% 대다수가 단적으로 세계를 이분해 바라보려는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인류애적인 지침도 사실은 땅과 하늘이 하나로 된 사건, 물질과 말씀이 하나가 된 사건의 본질을 바라보는데, 동시적인 사건임에도 선후맥락이 전제되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이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바라보고 알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인 것을 당연히 알 수 있기에 그렇다. 성탄의 본질적 의미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임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러므로 왜 신이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를 먼저 바라보는 것이 성탄의 궁극적인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한 아기>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지금 인류역사의 어느 시대에 머물러 있는지, 그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나의 시선이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형성하는 하나의 층을 공고히 하는 것은 아닌가를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영성적으로 인류는 두 번의 빠스카 축제를 거행한다고 보아야 한다. 부활을 당연히 빠스카라고 바라보지만 성탄이야말로 빠스카임을 바라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성탄이 인류의 정신사를 통과 혹은 해체하는 더 근본적인 빠스카라는 것, 신이 사람이 되었다는 강생의 신학은 십자가신학과 부활신학을 낳는 모태에 해당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기억 앞에서 인과율에 기반한 상반된 두 세계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인류역사에 신의 구체적 개입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하게 되고, 부활이 결과라면 성탄은 그 원인에 해당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긍하게 된다.
인류역사는 끊임없이 세계를 분절하여 선악과 좌우로 나누어 이해하려 했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분절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해 바라보았다.
종교와 이성의 분리, 과학과 영혼의 분리, 창조론과 진화론의 격돌,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갈등, 인과율과 비결정론의 충돌, 유물론과 관념론의 충돌, 선험론과 경험론의 갈등...등등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인류의 자기기만이자 융이 바라본 집단 무의식에 해당한다.
루카복음 1장에서 즈카리야는 인류가 직면한 갈등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마리아는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면 즈카르야도 결국은 마리아의 시간으로 넘어갔지만 그 시간차의 깨달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루카복음 1장은 인류 역사의 영적 진화의 단계 혹은 과정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보여준다.
특히 즈카르야와 마리아는 인류의 오랜 고민과 충돌과 방황을- 과학과 영혼의 분리/창조론과 진화론의 격돌,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갈등/ 인과율과 비결정론의 충돌/ 유물론과 관념론의 충롤/ 선험론과 경험론의 마찰...등- 인간이 어떻게 물질적이고 상대적인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는가에 대한 <고요한 답>에 해당한다.
즈카르야과 엘리사벳은, 구약의 아브라함과 사라와 도플갱어처럼 닮아 있다. 그것은 인류가 영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구약이 끝난 21세기에도 계속되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정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 앞에 인류는 늘 망설이고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자기 스스로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지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나이 백살된 나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아흔살이 된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던 말인가?(창세기16, 17)
Ⓑ“즈카르아야, 너의 창원이 받아들여졌다...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 5-25)
아브라함과 즈카르야는 믿음의 조상에 해당한다. 그들 삶의 중심에 늘 하느님이 있었고, 그들은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분께 자기 소망을 직접 청원한 사람들이자 직접 그 청원에 응답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그분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넘지 못한 영적 장애는 이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인간을 포함한)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닿아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믿음과 인과율을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는 인류의 상징에 해당한다. 인간과 물질과의 관계가 인간과 신의 관계를 적시(摘示)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기준이 낮과 밤, 선과 악, 미와 추, 좋다 나쁘다, 춥다 덥다... 등등 대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왜 문제인가?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문장은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생각이 인간 혹은 물질이 되었다>는 문장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인간은 신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무신론을 따르지는 않되, 무신론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할 필요는 너무나 많다. 유신론자가 유신론자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는 것보다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더 반어적 혹은 역설적으로 진리와 닿아 있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르트르와 니체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하이젠베르크와 아인슈타인을 그냥 통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질의 진화까지 포함하는 영적 진화의 테제를 단선적으로 바라보는 한 우리는 말을 하되, 벙어리 상태인 즈카르야의 상태를 사는 셈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지 않으며, 우리의 기도는 늘 우리를 배신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늘 유보되고 우리의 갈망은 늘 결핍에 시달린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발설된 말(기도)이 말의 길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 말은 벙어리가 한 말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말씀과 물질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말씀과 물질은 분리개념이 아니다. 말씀과 물질을 나누어 자신의 상황을 인과율로 바라보고 대립적인 것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전승, 집단무의식, 체면에 해당한다. 영성가들은 이를 환상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즈카르야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모르고 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 진술했다는 점에 그의 정직성이 놓여 있다. 신을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사실은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기진술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발화한다고 할 수 있다. 발화자와 청자가 자신임을 알 때, 신앙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신앙고백은 신에게 들려주는 고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진술은 자신에게 들려주는 영혼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즈카르야의 예처럼 자기 앎에 대한 진술을 정확히 했을 때, 그때 우리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여지를 자신에게 준다는 점이다. 성서에서 말을 못한다는 것을 즈카르야에게 내려진 벌의 의미로 기술되어 있지만, 벌이나 지옥은 언제나 자신의 선택의지에 대한 결과를, 자신이 맞이하게 되는 유폐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지옥이 존재하지 않아도 지옥을 믿는 자는 지옥을 체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인과율은 즈카르야가 알고 있는 세계의 구성원리에 대한 앎의 전부였다. 신이 인간의 모름에 해당하는 그것에 벌을 주었다기보다는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시간을 마주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할례일에 이르러서야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즉 이 세계는 물질과 말씀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즈카리야의 노래는 거의 성모찬송과 비슷한 맥락의 노래라는 점에서 마리아가 부른 마니피캇은 영적 정점에서 누구든지 부르게 되는 영가임을 알 수 있다. ‘자기진술이 막혔다’, 혹은 ‘말을 못한다’는 것은 진정한 영가를 부르기 위해선 거쳐야 하는 은혜의 시간, 자기성찰의 시간이라고 해야 마땅할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즈카르야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 성전에 봉헌될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던 사건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사건에서 ‘앞을 보지 못했’던 시간과 쌍벽을 이루는 사건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노마드들이 거치는 탈출기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진리를 내려놓고 그분의 진리를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다.
서두에서 바라본 것처럼 우리는 모두 진리를 애타게 찾고 있다. 진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음에도 진정 보아야 하는 것을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가 체험하는 세계는 하늘과 땅이 분리된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때, 우리의 기도나 소망은 언제나 유보되며, 그때 우리는 분절적 시간에 갇혀서 ‘오늘’을 살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연옥이자 지옥이다.
진리를 바라보는 데, 깨달음에 이르는데 소요된 그 ‘시간’, 그만큼 ‘오늘’이라는 시간은 우리 삶에서 유예된다. 내가 아닌 것을 통해서만, 나를 알게 되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우리는 진리를 알아보고 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즈카리야의 시간은 사랑의 유보 혹은 지연이라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 어떤 체면상태의 패턴을 보여준 사건이다. 개인의 체험이나 대립물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 이 패턴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장애, 지연을 초래한다. 자연과학과 신앙은 결코 일치 할 수 없다고 보는 인류의 이분법적인 충돌이 초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결과의 원인은 진리를 바라보지 못한 내가 나에게 준 유예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3. 마리아의 시간; 나는 언제나 나보다 한 걸음 앞에 있다.
그렇다면 루카 1,26-38에서 마리아가 보여주는 시간은 무엇인가?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에서 인간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은 같지 않은 거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표면적으로 마리아에게 인간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요셉과 함께 듣지 못했다는 것은 하느님의 소명은 개별적 수락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늘이 땅과 연결되는 하나의 필연적 과정이다. 아직 마리아라는 인류는 하늘의 시간, <오늘>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마리아는 인사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였다’ 마리아는 무엇을 곰곰이 생각하였을까? 마리아는 자신에게 전승되고 학습된 모든 경험의 총체를 되돌려보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두려움, 즈카르야가 경험한 두려움, 요셉과의 관계, 예언자를 선택하는 종교적 관습 등등... 그 모든 인간적 두려움의 정체를 파노라마처럼 바라보았을 것이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학습된 상황에서 벗어나, 하느님 계획에 대한 수락은 은총이자 총애이자 선물이다. 그분의 부르심은 인간을 괴롭히고 궁지에 빠트리는 계획이 아니다. 구세사의 페이지가 열리는 순간에 한 여인이 있다. 최소의 것에 최대가 담기는 순간이다. 보라, 이후에 언급되는 내용은 인류사의 두루마리를 한 순간에 펼쳐본, 보여준 것이다. 그 장엄한 계시 앞에서 마리아라는 인류는 아직도 망설이는 중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여기까지 마리아의 대답은 즈카르야의 대답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인류에게 학습된 인과율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구세사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지만, 마리아 역시 즈카리야 그 이상을 수렴할 수 있는 앎의 차원은 아니었다. 집단무의식, 인류의 학습효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여기서, 마리아는 <성부성자성령>이 함께 하는 삼위일체 교리를 <엘리사벳>이라는 이웃을 통해 간접 확인하게 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주애인>은 동시적이고 함께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점이다.
그 순간,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인과율을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인과율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인류에게 새로운 비전이 열린 것이다. 이는 영적인 사건과 물질적인 인과율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통합, 신앙과 과학이 함께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앞으로 인류가 겪어낼 오랜 갈등에 대한 해결의 실마디, 이미 마리아를 통해서 인류에게 그 답을 들려준 셈이다. 헬렌 슈크만은 이를 <조용한 답>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3년, 수많은 기적에서 이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예수님의 기적이란 에너지와 물질을 어떻게 다루며, 어떻게 재분배하며, 어떻게 재배치하는지, 에너지의 흐름을 어떻게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이다. 과학과 영성을 통합해 바라보는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말씀과 에너지가 동시에 함께하는> 동시성이라고 바라본다.
Ⓔ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마리아 수락의 <네!>
마리아와 즈카르야의 시간의 차이가 여기서 생기고 인류의 오랜 기도들이 지연되는 이유와 즉시 응답되는 기도의 이유가 무엇에 있었는가를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다.
말씀의 전적인 수락의 결과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서 마리아는 하늘과 땅이 하나이듯,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사실과,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충분하다는 체험과, <네!>라는 수락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체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대립물이 통합되었으므로 시간과 공간을 분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늘>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성탄 시기를 보내며,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왜 우리에게 희망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보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오늘>을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 이루어내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의 기도가 엄청난 기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 바로 그 인과율을 도구삼아 우리에게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되기-하기- 소유>라는 삶의 역발상 패턴을 알고 있는지? 등등...
그렇다면 구유에 누워 있는 '한 아기', 예수님을 보고 있는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가 자명해진다. 구유에서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마굿간이나 구유라는(가난이라는) 감상적인 배경인가? 아님 물질과 말씀이 함께 한다는 새로운 비전인가. 하늘과 땅이 함께하는 은총의 원리에 단지 <네!>가 있었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런 맥락에서 마리아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은 영적 성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 마리아 신심이 과도하게 과장되어 있다고 보는 종교 밖 시선은, 사실 루카1장의 <수태고지>만 보더라도 마리아 신심은 제대로 조명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단순히 신과 인간이라는 종적인 위계관계에서 <겸손> 혹은 <동정>이라는 차원으로 국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네!>는 인류역사의 지난한 갈등의 이름-유신론과 무신론의 갈등, 심신이원론적 갈등,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이분법적인 갈등, 분절적 시간과 단 하나의 시간인 ‘오늘’에 대한 수용, 종교와 과학의 갈등, 물질과 영혼의 갈등, 창조론과 진화론의 충돌...등등, 인류 역사의 수많은 갈등의 결정적인 답, <조용한 답>에 해당한다. 마리아는 인류가 도달할 궁극의 지점에 해당한다.
따라서,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는 이 명제(명제라고 해두자)는 단순히 그리스도교 교회의 축제를 의미하는 사건이 아니다. 인류의 오랜 방황의 종식, 본질적 진리를 찾아 헤멨던 지적 노마드들의 집으로 가는 길,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오늘>을 바라보는 지혜와 기쁨의 열림이다. 하늘이, 오늘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은총의 사건이 된 것이다.
인류는(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든 안하든 영적 진화의 어떤 과정 중에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지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영적상태는 형이상학에 국한된 영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즈카르야의 시간을 살 것인지? 마리아의 시간을 살 것인가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기쁨의 선택이자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무엇으로 대체 할 것인지에 대한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퇴니스는 이를 인간이 지닌 <본질의지(Wesenswille)와 선택의지Kurwille)>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당신 자신을 바라보기>의 삶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우리는 결코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 진리, 기쁨, 자유, 풍요...등등은 본질의지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선택해서 사는 것은 우리 각자의 선택의지에 해당한다. 마리아의 시간은 본질의지와 선택의지가 동시에 이루어진 시간이라면, 즈카리야의 시간은 본질의지 보다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에 기인한 선택의지에 편승한 시간을 산 것이라 할 수 있다. 즈카리야의 노래에서 비로서 본질의지와 선택의지가 일치했고,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유예되는 이유은 바로 이 두 의지가 동시적이냐 선후적이냐의 차이라는 것이다. 하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유예하지 않는다. 두 의지의 결합은 하늘과 땅의 연결이고, 마리아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을 탈출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란 측면에서, 인류의 영원한 어머니이자, 집단무의식에서 벗어나 빠스카를 체험한 새로운 '인류'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칠판에 뭔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기하학자 유클리드,
그리고 그림 오른쪽에 천구의를 든 사람은 조로아스터,
그 앞에 뒷모습만 보인채 지구의를 들고 있는 사람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4.
글을 마무리하며,
「세계 위에서 드리는 미사」는 떼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가 학문적 탐사를 위해서 오르도스 사막 한가운데서 미사를 봉헌할 수 없을 상황에 놓였을 때, 땅을 제대삼아 드린 기도문이다.
주님, 이번에는 앤(Aisne) 숲 속이 아니라 아시아의 대초원 안에 들어와 있지만, 또다시 저는 빵도 포도주도 제단도 없이 이렇게 서서, 그 모든 상징들을 뛰어넘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순수 실재를 향해 저 자신을 들어올리려 합니다. 당신의 사제로서, 저는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온 땅덩이를 제단으로 삼고, 그 위에 세상의 온갖 노동과 수고를 당신께 봉헌하겠습니다. 저쪽 지평선에서는 이제 막 솟아오른 태양이 동쪽 하늘 끝자락을 비추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불이 찬란한 빛을 내며 떠오르면, 그 아래 살아 있는 땅의 표면은 다시 한 번 잠에서 깨어나 몸을 떨며 또다시 그 두려운 노동을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저는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 낼 소출들을 저의 이 성반(聖盤)에 담겠습니다. 또 오늘 하루 이 땅이 산출해 낼 열매들에서 짜낼 액즙을 이 성작(聖爵)에 담겠습니다. 이제 곧 지구 곳곳으로부터 올라와 '영(靈)'을 향해 모아질 온갖 힘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는 영혼의 깊은 속, 그것이 저의 성반이며 성작입니다. 새날을 맞이하라고 지금 빛이 흔들어 깨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과 신비로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는 지금 저를 먹여 길러 주고 또 저의 삶을 풍요롭게 하도록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하나하나를 보며 사랑합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또 다른 가족을 떠올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마음, 학문 연구, 사상 등의 동질성을 통해, 너무나 다른 요인들을 묶어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가족이 울타인 듯 저를 서서히 에워싸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 좀더 막연하고 일반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고 모두를 감싸 안으면서- 일일이 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살아 있는 인류 전체를 저의 눈앞에 세웁니다. 제가 알지 못하지만 저의 가까이에서 저을 도와 주는 사람들,오는 사람들과 가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사무실, 실험실, 공장에서 일하면서, 진리에 대한 꿈을 가지고, 혹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지상 현실의 진보를 정말로 믿는 사람들, 그래서 오늘도 빛을 향해 열정적 탐색을 계속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가지런하거나 혼란스럽거나 간에, 쉬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거대한 군중 앞에서 저는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특별한 요동도 없이 나아가는 이 거대한 물결 앞에서는 믿음이 굳은 사람이라 해도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저의 온 존재가 바로 이런 깊이에서 올라오는 속삭임에 공명하는 것입니다.
이 하루 동안 더욱 커질 모든 것들, 이 하루 동안 더욱 작아질 모든 것들, 오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들까지도 주님, 이 모든 것을 한껏 저의 품속에 끌어 모으려 하는 것은, 그것들을 당신께 봉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저의 봉헌물이고, 당신께서 바라시는 단 하나의 봉헌물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기네가 수확한 것 가운데 맏물을, 또 가축들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을 당신의 성전에 봉헌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봉헌물, 신비롭게도 당신께서 배고픔을 달래고 목마름을 해소하시기 위해 날마다 필요로 하시는 봉헌물은 이 세상의 성장, 우주 만물의 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걸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 성장뿐입니다.
주님, 새날의 첫 새벽에 당신께서 만드신 창조계 전체가, 당신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것을 다 올려 봉헌하는 이 거대한 제병(祭餠)을 받으소서. 저희의 노동인 이 빵이 그 자체로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부스러기일 뿐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의 고통인 이 술 역시 다음 순간에 사라질 하찮은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볼품없는 물질 덩어리 그 깊이에 당신께서는 거룩함을 향한 어떤 억누룰 수 없는 갈망을 숨겨 두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느낌으로 감지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저희는 모두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저희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제가 비록 당신의 성인들처럼 영적 열망을 지니지도 그분들 같이 드높은 순결에 이르지도 못했지만, 당신께서는 저에게 칙칙한 물질 덩어리 속에서 꿈틀대는 모든 것들을 향해 억누를 길 없는 애정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천국의 자녀이기보다는, 비교 할 수 없이 더, 땅의 아들임을 의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아침 제 어머니의 희망과 비참을 가슴에 품고 마음속으로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렵니다. 거기서 저는 - 당신께서 제게 주셨다고 확신하는 사제품의 힘을 빌어 - 떠오르는 태양 아래 인간 육체의 세계에서 이제 곧 태어날 것과 죽어 갈 것을 위해 '불'을 끌어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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