웜홀ⓒ Jurik Peter/Shutterstock.com
‘오늘’이라는 ‘언제’, 그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
-나인 그것이자, 나였던 그것이고, 언제나 나일 그것에게
[대림 제1주일(나해) 2020. 11. 29 마르코13,33-37]
참고
1. 마르코 13,33-37/마태오 22,34-40
2.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최민순 역, 바오로딸, 1965
3. H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홍경실 역, 교보문고, 1991
4.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강영안 역, 문예출판사, 1996
5. 알프레도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오영환 역, 민음사, 2003
6. 에드문트 후설, 『시간의식』, 이종훈 역, 한길사, 1996
7. 마르티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 1998
8. 데이비드 호킨스, 『의식혁명』, 이종수 역, 한문화, 2006
9. 에크하르트 톨레, 『NOW』, 류시화 역, 조화로운삶, 2008
10. 이중식,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의 인터페이스의 의미」, 『연세대학원신문』, 2005년 9월 5일, 10면.
1.
‘지금, 여기'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이미'를 유보하는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과거-현재-미래가 어떻게 '오늘'이 될 수 있는지를 성찰하기 위해, 먼저 시간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기로 한다.
①시간의식의 분석은 기술적 심리학과 인식론의 매우 오래된 교차점이다. 여기에 놓여 있는 극히 곤란한 점들을 깊이 깨닫고 이러한 문제에 필사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최초의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고백록』 11권 14장에서 28장까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간문제에 몰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부분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에드문트 후설)
②마음은 기대. 지각.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사실 미래의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를 이미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지나가는 것인 까닭에 길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
①에서 후설은 <시간 문제>를 성찰하려면 반드시 아우구스티누스를 우회할 수 없다고 술회한다. 에드문트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서 전개된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은 객관적 시간(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시간)을 그것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명하는 것이다. 자연적 태도에서 주어지는 객관적 시간은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에 의해 지향된 대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여 시간과 시간의식의 상관관계를 해명하고 여러 차원의 시간과 여러 차원의 시간의식을 체계적으로 해명함을 목표로 한다. 다차원적 시간의식과 그를 통해 경험되는 다차원적 시간을 해명하는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현상학의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이며, 현상학의 전체 체계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 시간의식은 그것과 결부되지 않은 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의식이며,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작동하는 근원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②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시간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며 ‘기대-지각-기억’, 즉 마음이라는 체에 걸러진 것만을 시간으로 인식한다고 보았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는 관점이다. 그는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오는 경우, 어느 그윽한 곳에서 오고, 현재에서 과거로 갈 경우 어느 그윽한 대로 흘러, 미래인 어디로부터 현재인 어디로 해서, 과거인 어디로 흐르며, 현재인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통하여 지나가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③우리들을 현실 자체에 직면시켜야 한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그 시간은 나의 조바심,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더 늘일 수도 없고 더 줄일 수도 없는 나에게 속하는 지속의 어떤 부분과 합치하고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모든 행동은 미래를 조금씩 잠식하는 것이다. 이미 더 이상 없는 것을 붙잡는 것,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예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의식의 첫 번째 기능이다. 의식에게 있어서 현재란 없다.(앙리 베르그손)
④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미래의 외재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론들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다.(레비나스)
⑤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지배에 놓여 있는 일상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한하고 고독하고 불안으로 가득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사유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의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각자의 방법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응답이 감사이며 반향이다.(하이데거)
⑥현재는 과거로부터 파생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건 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미래는 현재가 그 자신의 본질 속에 그것이 미래에 대해서 가지게 될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재 속에 내재(內在)한다. 현재가 미래에 대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현재 속으로 선취(先取) 되어 내재한다. 현재는 자신을 부단히 넘어섬으로써 과거를 만들고 그것을 자신 속에 지양, 보존하면서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화이트헤드)
③에서 ‘창조적 진화’를 주장했던 베르그손은 우리가 체험된 시간(질적)과 시계의 시간(양적)을 동시에 살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시간인 질적인 시간만 ‘실재적인 지속’ 이므로, 그 시간만 미래적인 의미라고 보았다. 베르그손과 같은 맥락에서 사르트르 역시 인간의 미래란 인간의 자유, 즉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④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손과 사르트르의 시간의 주인으로서 주체적 시간관과는 달리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홀로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이나 베르그손이 바라본 ‘순수한 지속의 의미인 시간이 아닌, 나치의 수용소에서 『시간과 타자』를 쓴 레비나스에게 시간에 대한 기대나 예측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보았던 것은 당연하다. 타자는 항상 나의 기대나 예측을 배반하고 예측불허의 시간 속에 출현하는 존재이므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⑤하이데거는 레비나스와 다른 시간관을 통해 시간을 자각한다는 것은 본래적 자신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다. 시간 앞에서의 ‘나’의 유아론적 주관주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있음’ 속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있음’에 주목하고 관여할 때만이 존재자에 속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그 자신의 존재에 속한다는 특권이 나오므로 비로소 존재자에 떠맡겨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⑥에서 화이트헤드는 시간이란 현실적 존재가 객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바라보았다. 나라는 주체는 어떤 시간을 경험하고 그로써 주체로서의 존립을 끝내고 술어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은 하나의 우주질서의 과정을 살아내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실재로 오늘은 “히틀러는 무엇이다”처럼 주어였지만, 내일은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이다”로 서술어가 된다고 보았다. 물질이라는 우주의 시간은 ‘나’를 지우는 냉혹함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⑦시간이 멈추면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문제란 어느 시점의 지각이
빚어낸 인공물에 불과합니다. 평화의 상태는 공간이며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공간에 의해 존재와 경험을 갖습니다. 이때 시간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으므로 미래를 우려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지난일로 고통받거나 다가올 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결말도 없기에 상실이나 비탄이나 욕망이 없습니다. 순수한 지각만이 모든 세상과 모든 우주를 넘어 시작도 끝도 없는 빛으로 ‘나’를 비춥니다. 그때 ‘나’는 몸이라기 보다 ‘그것’인 것같이 됩니다. 보편의 체험입니다.(데이비드호킨스)
⑧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도 당신이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다. 미래가 당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당신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 어떻게 하면 지금, 평화로울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과 화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깨닫는다. 자신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당신을 살고 있음을. 삶은 춤추는 자이다. 당신은 춤이다. 마음은 언제나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를 가정한다. 그 마음을 넘어야 현존의 의식이 깨어나고 그때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 이 모든 실체를 하나의 전체로 연결한다. 현존이란 바로 오늘을 사는 지혜, 오늘 이 순간을 맛보는 집중력, 그러니 현재에 머물라, 그때 세계는 이원성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Oneness가 된다(에크하르트 톨레)
⑦에서 데이비드 호킨스 ⑧에서 에크하르트 톨레가 바라본 시간은 시간이 사라진 상태, ‘오늘’을 사는 존재론적 시간에 대한 통찰이다. 두 사람은 물질의 우주에서 영혼의 우주를 통합하고 넘어선 시간을 사는 현대 영성가들이다. 두 사람이 바라본 ‘오늘’이라는 시간도 우리가 말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된 의미로써의 ‘오늘’이 아니라 ‘평화’라는 어떤 상태로, 영혼의 현주소를 의미한다. 이때, 시간이 사라진 상태에서의 평화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J의 언명이 적시하는 바로 무시간의 시간체험과 같은 맥락이다.
위의 7명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바라본 시간은 단선적으로 실존적 시간관(후설, 베르그손, 레비나스, 하이데거)과 존재론적 시간관(아우구스티누스, 데이비드 호킨스, 에크하르트 톨레)으로 나뉘어 바라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실존과 존재론은 확연히 구획되는 영역이 아닌 바, 과거-현재-미래 역시 분절적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물질의 우주와 영혼의 우주를 넘나들며, 시간 앞에 호명된 자로서 그들이 지닌 의식의 층위에서 어떤 내적 지평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을 문제 삼거나 고찰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을 상정하지 않을지라고 신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시간의 주인이 신이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우리 역시, 역사적이고 물질적 우주를 살면서 어떻게 영혼의 우주를 넘나들며 모든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오늘>을 살 수 있는지? 또한 <오늘>을 산다면 성서에서 말하는 그 <언제>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런 연쇄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성서와 복음을 통해서 어떻게 <오늘>이 모든 시간과 공간을 건너가는 웜홀인지, 어떻게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인류에게 <오늘>이 ‘사랑의 힘’을 발견하는 인테페이스인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⑩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마르코 13,33-37에서 <주인이 언제 올지>를 바라본다는 것은 강론에서 말하는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맥락임을 전제로 시작한다.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의미를 살아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마주한 시간의 의미를 모른 채 구원의 때 그 ‘언제’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서 경험(살아야지만)해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 앞에 구원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다면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시간 속에서의 자신을 자각할 때만이 존재를 있게 한 존재자를 알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시간과 미래는 오직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설정될 수 있다는 레비나스의 시간을 통합하면 그 시간은 <애주애인>의 시간을 의미한다. 사랑이 지닌 구원의 힘이란 바로 <애주애인>과 동일한 의미의 그 사랑일 것이다.
복음과 강론을 대응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다.
Ⓐ주인이 언제 올지? ------------------------>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
Ⓑ과거-현재—미래---------------------------> 오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
성서에서 J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깨어있음>을 요구한 것일까?
Ⓐ에서 <주인이 언제 올지 안다>는 것은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을 바라본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성서에 나오는 이들의 예수님 체험의 극점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분이 오는 시간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을 체험하는 바로 그 때였기 때문이다.
니코데모와 유다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저녁일지), 바오로(한밤중일지), 백인대장(오후 3시일지), 베드로(닭이 울 때일지), 마리아막달레나(새벽일지) 제자들(부활의 아침일지)...이들 뿐 아니라 그분을 만난 그 누구의 시간도 사랑 아닌 시간이 없었다. 그러므로 주인이 오는 그 언제인가는 심판의 때가 아니라 사랑을 체험할 바로 그 때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바오로의 시간과 유다의 시간과 베드로의 시간은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을 발견하는 시간의 모멘트에 해당한다. 실수나, 실패, 죄마저도 구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에서 벗어난 바오로와 베드로와 제자들, 그 반대로 과거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했던 유다가 경험한 시간은 우리가 그분을 어떤 주님으로 경험하는 가에 따라 <구원>과 연결된다. 이때 우리가 경험한 시간은 사랑의 통로이기도 하고 죽음의 통로이기도 하다. 마치 구약의 시간과 신약의 시간이 나눠지는 교차점과 같은 의미다.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들의 죄나 실수나 실패에 머물지 않고. 추락의 밑바닥에서 사랑의 체험을 통해, 그들 역시 사랑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때 <주인이 언제 올지>의 그 시간은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을 경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에서 <과거-현재-미래>가 <오늘>로 수렴되는 것이 사랑의 원리라는 것을 데이비드호킨스와 에크하르트톨레의 시간관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시간이 사라진 ‘평화’의 상태에서 우주의 모든 존재들과 하나Oneness라는 실재를 통찰했다. 분리가 사라진 하나Oneness, 호킨스박사와 톨레가 통찰 한 그 하나Oneness인 사랑은 인류가 궁극에 도달하고 완성할 바로 그 지점이다.
이들은 나라는 개성적인 고유한 개별자를 놓아버린 상태에서 보편자로 넘어간 바로 그 사랑을 체험하고 있다. 살아서 천국체험이다. 개별자인 ‘나’라는 자아(에고)를 놓아버린 그 상태를 호킨스는 “나인 그것이자, 나였던 그것이고, 언제나 나일 그것에게”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때 ‘나’를 ‘그것’이라 하는 이유는 모든 물리적인 우주와 영혼의 공간을 넘어선 바로 <보편자인 신성>의 상태를 의미한다. 개별적인 나를 자각할 필요가 사라진 ‘참나’를 의미한다.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고 또 내려 놓았으면 고유한 인격을 모두 지우고, 보편적인 신성으로 넘어갔을까? 그 상태를 그들은 <평화> 혹은 <오늘>이라고 부른다.
데이비드 호킨스는 3세 때 ‘나는 존재한다’는 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병을 앓고 있던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으며, 정신과 의사이자, 불가지론자였다. 호킨스는 38세 때 임사체험을 하면서 극적으로 신을 만난다. 이후 그는 물리학과 정신의학을 결합시키면서 현실과 현실 너머를 동시에 사는 방법을 인류에게 전하려한 영성가였다. 홀로 영적인 기쁨을 맛보거나 추종자들에 둘러싸인 은수자가 아니다. 미국 전역에서 몰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한 현역의사였다. 하늘과 땅, 두 세계를 아우르는 그의 12권의 영적 저서들은 종교를 초월해 마더 데레사와 같은 타종교인들과 교우를 가능하게 한 인터페이스였다.
그렇다면 호킨스는 하루아침에 그런 시간의 비약, 영적 상태에 이른 것인가? 그의 12권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의 <마음과 정신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을 알려고 했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했는지, 자신이 누구일 수 있는지를 살려고 했는지, 자신의 체험을 나누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그는 영적인 몰모트였다. 자신을 객관화 시키려 평생을 투신했다. 철저한 자기성찰과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생명체에 대한 근본적인 연민으로 자신을 지복직관의 상태에 이르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이 사라졌다라고 표현한 <오늘>이라는 지점의 웜홀은 그분의 섭리, 빛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마태오 22,34-40에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한 사랑>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호킨스나 톨레가 바라본 모든 시간 속에 담겨진 그 <오늘>에 해당한다.
시간이 사라졌다는 말은 성서에서 말하는 그 <언제>의 의미가 일생에 딱 한 번 주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모든 시간만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을 하나로 바라볼 수 있고, 하나의 시간이란 사실 시간이 사라졌다고 말 할 수 있는 <오늘>인 것이다.
과거-현재-미래 모든 시간을 아우르는 <오늘>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그분이 함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때 <주인이 언제 올지>에서 말하는 그 '언제'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간 속에 담긴 그 사랑이다.
반면,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주인이 오는 그 시간이 우리가 죽는 바로 그 순간, 일회적인 시간이라고 바라보기 때문에, 대림시기의 의미가 죄의 심판으로 축소되거나, 두려움으로 왜곡되어 전해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르는 <언제>는 ‘언제나’ 혹은 ‘모든’의 의미에서만 그분이 말하는 사랑의 지평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연속성 혹은 영원성을 바라본다면, <주인이 언제 올지>는 미래적 의미의 시간이 아니라 ‘이미’ 도래한 시간을 알아보고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때 <사랑이 지닌 구원의 힘>을 우리는 특정 시간이 아니라 매일 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가끔, 이 시간은 영원하길, 이 시간은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어떤 시간에 대한 판단과 평가와 호불호가 있었다. 시간에 대한 평가가 사라지는 그만큼 사람에 대한 평가도 사라졌다. 지금은 모든 시간에 담긴 <오늘>의 사랑을 모든 이에게서, 모든 자연현상에서, 모든 생명체에서 보려고 한다. 보려고 하니까 매일 더 잘 보인다.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시간조차도 그것은 <오늘>을 만드는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고통의 크기만큼 연민의 크기도 커졌다. 개인적으로 호킨스박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분에게서 느껴지는 우주를 감싸는 무량무한한 연민의 마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연민은 어머니의 마음이자 성모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마음이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복음과 강론에서 말하는 <주인이 언제 올지>의 그 ‘언제’와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을 발견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며, 도래하지 않은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모든 순간과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인연 속에) 그분의 사랑을 알아보는 시간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그분의 시간을 막연히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아니라 언제나 모든 곳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을 알아보는 시간, 내가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언제’라는 시간이 포괄하고 있는 <오늘>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을 발견할 수 있는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라고 할 수 있다.
3.
소설가 은희경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행복한 사람은 과거-현재-미래라는 분절된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만’을 산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
그럼에도 어쩌면, 우리는 그 언젠가 2020년의 ‘멈춤’ 앞에서 어쩔줄 몰라했던 기억 때문에 우리 생애 가장 치열했던, 혹은 힘든 시간으로 2020년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하고 자신의 영혼과 매순간 만나는 웜홀을 알게 된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이라는 ‘언제’가 바로 <구원의 힘인 사랑>을 체험하는 그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이며, 우리가 궁극에 돌아갈 보편적 사랑은 -나인 그것이자, 나였던 그것이고, 언제나 나일 그것에게 비추는 완벽한 빛이었음을 바라볼 때, 가장 힘든 시간은 역설적이게도 축복의 시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 너머에 있다. 마치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가 이종(異種)의 경계면에서 발생하는 이치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가장 힘든 시간들은 곧잘 가장 큰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⑪웜홀wormhole은 우주 공간에서 블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통로라는 의미로 제안된 이론상의 개념으로, 사과 표면에 있는 벌레가 사과의 정 반대편으로 가려면 표면을 따라가기보다 중심을 지나가는 게 빠르다. 이때 사과에 중심을 관통하는 웜홀이 생기는데, 이 웜홀은 사과의 표면보다 고차원적이면서 서로 다른 사과의 표면을 잇는 최단 경로가 된다. 이와 유사하게 시공간의 다른 지점을 연결하는 고차원 구멍이라는 의미에서 웜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찰스 리우)
⑫인터페이스 interface는 좁게는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조작 방식을 말하며 넓게는 서로 다른 두 물체 사이에서 상호간 대화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인터페이스는 이종(異種)의 경계면이라는 의미에서 '계면(界面)'이라고 번역해 쓰기도 한다.(도널드 노먼)
인류는, 웜홀, 인테페이스라는 개념과 이론이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우주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거나 상용하는데 ‘빛이 중력장을 넘어선 어떤 공간에서는 휘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은 물리학자들의 축적된 연구 성과물이자 4차혁명을 가능케 한 베이스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이거나 더 나아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자들이었다.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가 삶의 편리를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
이 글 서두에서 바라보았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바라본 실존과 존재론의 상이한 시간을 문제 삼았던 그들의 고찰은 절대적인 사랑을 체험하고 싶어했던 간접적인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그토록 시간을 이해하려고 했던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맥락에서 자신을 불가지론자 혹은 무신론자라고 말하는 이들 조차도 절대적인 사랑을 체험하고 싶다는 외침일 것이고, 그들 스스로 인류를 위해 이미 사랑의 인터페이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이 사랑의 통로가 되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그 주인은 누가 뭐래도 영원한 <사랑>일진데, 우리가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당위에 해당하는 진리라 할 수 있다. 사랑을 체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앞에 있는 사랑을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대림이라는 이 기다림의 시간은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다. 주님을 다시, 더 깊이 체험하는 시간이다. '이미' 온 사랑을 '아직'이리고 말하는 나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기다리는 것이고, 우리 이후의 세대에 대한 선취된 기다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만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사랑을 두려워하는 인류의 기다림을 완성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앞에서 ‘아직’이라는 여지를 주는 우리에게 ‘이미’ 함께하고 있는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바로 그분 사랑의 웜홀이자 인테페이스가 되어야 한다는 유일한 시간인 <오늘>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부기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타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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