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라는 이름의 사랑, 분리(分離)와 망아(忘我) 사이
-존재론적 따뜻함, 타자를 적극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것!
[그 리 스 도 왕 대 축 일 (가 해) 2020. 11. 22. Matthieu. 25,31-46]
참 고
1. 마태오 25,31-46
2. 대니얼 유스투스 리비히(J. F. Liebig;1803~1873) 양분최소량의 법칙(養分最少量의 法則; Liebig's law of minimum’
3. G 로핑크,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신교선 역, 성바오로출판사, 1989
4.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최혁순 역, 범우사, 1988
5.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마이스터에크하르트 선집』, 이부현 역, 누멘, 2009
6. 유대교 랍비, 『탈무드』, 이동민 역, 인디북, 2001
7.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역, 민음사, 2009
8.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을 굶주리는가?』, 유명미 역, 갈라파고스, 2007
9.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역, 이후, 2007
10. 안젤름 그린,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 김선택 역, 성서와함께, 2002
1.
사랑은 분리(分離)와 망아(忘我-자신을 잊음) 사이 라는 주제를 바라보기 위해 먼저 몇 편의 글을 읽어본다.
① 사랑한다는 건 /참말 사랑한다는 건/또 하나의 나 /또 하나의 내 목숨을/숨막히도록 숨막히도록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김남조의 「태양의 각문(刻文)」)
②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면 매일 밤 그 하늘 위에서/영원한 불의 글자가 활활 타올라/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환성을 지르며/하늘에 쓰여진 그 말을 읽으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하이네의 「고백」)
③ “나 에드워드는 나 자신과 내 후손의 왕위를 포기한다는 취소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음을 선언한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 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다”(영국 왕 에드워드 8세의 왕위 포기 선언)
④만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대신 존재할 수 있는가? 만일 내가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 하러 존재하는가? 만일 오늘이 그런 때가 아니라면 과연 그런 때는 언제일까?(탈무드 미슈나로부터)
⑤소유와 존재는 상식에 호소할 것이 못된다. 소유와 존재는 앎에 관한 것이다. 앎은 미망을 깨뜨리는 것,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앎은 표면을 뿌리까지 뚫고 들어가 근원에 이르러서 적나라한 실재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현상을 뚫고 들어가서 비판적이고 능동적으로 진실을 향해 가급적 핵심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타자를 적극적으로 존재하게 해주는 것이 존재의 한 양식, 사랑임을 알게 된다.(에리히 프롬)
⑥그대는 사막에 찾아 들어가 금식할 필요가 없다. 백성들의 생활은 때때로 광야보다 더 쓸쓸한 곳이요, 작은 일은 큰 일에 비해 한층 더 해내기 어려운 것이다...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열어 ‘공허’하게 하는 것, 자신의 자아가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신적 부와 힘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⑦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우리의 진정한 사명은 단 하나,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이었다(헤르만헤세)
①,②,③에서 너와 나의 <분리>를 넘어선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④,⑤,⑥은 우리가 존재와 소유 사이에서 <분리>를 넘어서지 못한 이유, 혹은 넘어설 수 있는 이유에 관한 글이다. ⑦은 <분리>와 <망아> 사이에서 <망아>로 넘어서고자 하는 영혼의 몸부림이다. <분리>와 <망아> 사이, 우리의 사랑은 그 어디쯤에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오른쪽(망아)과 왼쪽(분리)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기의 사랑하면 떠올리는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사랑을 기억 한다. 사랑을 위해서 왕위를 포기한 영국의 왕 에드워드 8세, 우리가 두 사람의 사랑을 세기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에드워드 8세의 선택을 포기해야 하는 수많은 <원인> 중의 하나로 보지 않고, 심프슨 부인에 대한 유일한 사랑의 <이유>로 보기 때문이다. <원인과 이유>는 인간의 선택과 행동, 그 매커니즘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면서 묵상한 마태오 25,31-46에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진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바로 사랑의 선택 앞에 서 있는 우리, 인류의 표상에 해당한다.
성서에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진 이들에 대한 비유가 자주 나온다. 그때 그 오른쪽에 있는 사람도 ‘나’이고 왼쪽에 있는 사람도 ‘나’임을 바라보는 것이 순례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도약시킬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태오 25,31-46과 강론에서도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진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또한 <모르고 한 일에 대해서도 그 결과를 물었다>는 것에 초점이 놓여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드린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자비의 기도와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어떤 모름은 용서 될 수 있고 어떤 모름은 용서가 되지 않는가? 먼저 복음의 핵심 부분을 읽어보기로 한다.
⑨‘‘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용서 받을 수 있는 <모른다>와 용서 받을 수 없는 <모른다>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몇 개의 질문으로 생각해 본다.
Q1. 그들은 왜 공통적으로 “언제, 우리가?”라고 물었을까?
사랑은 하나Oneness라는 차원에서 바라볼 때 언제 우리가?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염소로 분류된 왼쪽의 사람들의 모른다의 핵심은 너와 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분리(分離)>에 기반 한 모른다이다. 양으로 분류된 오른쪽 사람들의 모른다는 너와 나는 하나라는 사실을 안 상태의 망아(忘我-자기 잃음)에서 나온 모름이다.
이렇듯 언제 우리가는 너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와 관계된다. <분리>나 <망아>는 사랑의 엄청난 거리를 의미한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심판은 <분리>에 대한 자기 심판에 해당된다.
사랑은 모든 에너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고 유일하고 궁극의 에너지다. 유일한 실재다. 유한한 우리에게 영원한 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유일한 마스터클래스이자 마스터키다.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은 영원한 세계의 주인이다. <분리>로서는 결코 알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영원이다. <망아>로써만 알 수 있는 사랑이다. 그 <망아>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것이자 영혼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아이처럼 단순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너와 나는 하나가 아니라는 <분리> 마인드로는 그분의 사랑을 알길 없고 그분도 알 수 없다. 지옥 혹은 울부짖음은 결코 사랑을 알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너도 모르고 결과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삶. 즉 그분을 모르는 상태를 의미한다. 너와 내가 하나임을 알 때 그때 주님과 우리가 하나인 것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 주님하고 불러서 해결될 수 없고 오직 의식의 대전환을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까지는 안타깝지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망아忘我-나를 잊은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 복음이나 강론의 초점일 듯하다. 너와 나는 하나라는 것을 안 사람이 어떻게 바로 그분인가는 모를 수 있을까?(이 부분이 가장 오랜 시간 묵상을 요구한 부분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도 엄밀히 너와 나는 분리된 채로의 정서적 체험으로 시작한다. 사랑이 깊어지고도 여전히 선택의 갈등이 존재한다면 너와 나는 아직 하나가 아닌 상태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삶으로 넘어갈 때 미묘하게 여전히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 그 상태, 필리아의 단계에 머문 교환적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몰아적 사랑>은 사랑하는 나도 사라지고, 사랑하는 너도 사라지고, 사랑하는 그분조차도 사라진 오직 사랑이라는 신성만 남은 상태, 거기엔 단순하게 사랑만 있고 자명하게 사랑만 있는 그 상태다. 더 이상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이 <망아적 사랑>을 바라볼 수 있다, 제자라는 인류도 사라지고, 예수님 자신도 사라지고, 아버지도 사라진 그 상태...사랑이라는 이름조차도 쓰일 수 없는 죽음을 넘어선 곳, 그 상태만이 세상 창조 이전에 준비된 그 나라를 볼 수 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분리>인 상태로는 주어진다 해도 살지 못하는 바로 영혼이 따뜻한 나라. 아이의 마음으로만 알 수 있는 나라, 천국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인지 조차 모르는 사랑이고, 깨어있는지 조차 모르는 깨어있음Love I do not even know if I am awake I do not know일 것이다.
Q2 ‘이 작은 이들 가운데’는 어떤 의미로 바라볼 수 있나?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갖은 존재로 이 세상 순례를 하고 있다. 굶주림, 목마름, 나그네, 헐벗음, 병듦, 감옥에 갇힘...등등은 우리의 실존 상황 가운데 가장 기초적인 문제 <마음과 몸>이 극한에 봉착한 상황, 인간 최저치의 생존을 의미한다.
⑩독일의 식물학자 유스투스 리비히(J. F. Liebig;1803~1873)는‘리비히의 양분최소량의 법칙(養分最少量의 法則; Liebig's law of minimum)’이라는 이론으로, ‘필수 영양소 중 식물의 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넘치는 요소가 아니라 가장 부족한 요소’라는 ‘최소량의 법칙’을 내 놓았다. 가령 질소, 인산, 칼륨, 석회 중 어느 하나가 부족하면 다른 것이 아무리 많이 들어 있어도 식물은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최대가 아니라 최소가 식물의 성장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이 맥락에서 몸과 마음은 인간의 생존조건 중 가장 작은 부분이고 최소의 부분에 해당한다. 이 작은 부분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몸과 마음이 부서진 상태에서 영혼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 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모름은 모름일 수밖에 없는 모름에 해당한다. 생존의 추위에 내몰린 이들에게 어떻게 몸과 마음을 잊고 망아 상태에 이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⑪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말한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
⑫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현대사회는 매스미디어로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나 잔혹함을 과잉 이미지로 순식간에 전 세계에 전송하여 세계는 폭력이미지로 덮혀 있다. 우리는 순식간에 세계에서 일어나는 재앙을 이미지로 접한다. 우리는 햄버거를 먹으면서 참수되는 장면을 영화처럼 보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공감능력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현실이다. 어떤 사람들이 최소의 인간조건을 누리지 못해 죽어 가는데, 그것을 모른다고 한 인류의 화석화된 심장, 공동책임을 묻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최소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아직 왼쪽에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의 자력으로는 오른쪽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상태에서 자기 영혼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모름과 모든 것이 주어진 상태에서 타자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의 모름의 문제를 야기한다. 후자의 모름은 영적 게으름, 심장의 화석화, 사랑의 불모성, 즉 깨어있지 않음에 대한 냉정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Q3. ‘한 사람’은 어떤 의미일까?
작은 이들 가운데 모든 이가 아니라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나? 이 부분은 성서에서 <한 마리의 잃은 양 찾기> 비유나 <한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왔고 한사람으로 인해 구원이 왔다>라는 그 <한 사람>의 의미를 바라보아야 한다.
벤담이나 밀 중심의 공리주의자들이나 자본주의가 주창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논리와 전적으로 충돌하는 가치관이다.
③에서 <영국 왕 에드워드 8세의 왕위 포기 선언>을 다시 한 번 바라보기로 한다. 현재 영국의 인구는 67,783,451명이다. 왕위를 포기한 1936년은 그보다 인구수가 훨씬 적었겠지만, 당시 영국은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적이고 정치적 혼란기였다. 영국이라는 전체와 이혼녀 심프슨 부인이라는 한 사람의 비교는 사랑의 논리가 아니면 성립될 수 없는 선택이다. 반대로 심프슨 부인 대신 영국을 선택했어도 그 선택은 심프슨 부인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사랑조차도 수량화하려는 현세적 가치관에서 멈출 수 있다. 이는 예수님 공생활 전체를 끌어가는 사랑의 힘이자, 기적의 원리인 것이다. 기적을 체험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한 소년이 내 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알 수 있다.
일차적으로 한 사람은 사랑의 구체적 체험을 의미한다. 모든 이는 사랑의 추상성을 의미한다. 그 일차적 의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한 사람의 구체적 체험에서 전체라는 보편 체험으로 넘어간다. 사랑의 보편성은 하나가 곧 전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소의 위치에 있는 한 사람에게 그가 바로 나이며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은, 그가 몸과 마음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을 알려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엄청난 시간이 요구되는 공들인 사랑이다. 한 사람을 심장으로 낳는 것과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심장으로 낳았을 때, 우리 역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사랑하라는 사랑순환론이다.
우리가 각성되면 될수록 자신이 지은 윤리적 잘못 말고도 인류가 공동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를 모른척 했다는 점에서 인류는 아직도 예수님의 왼쪽에 있다는 것을 엄중히 인식해야 한다. 자비만이 우리가 그분의 오른쪽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식과 세계의식Personal Consciousness and Global Consciousness'의 상관성은 예수님이 진실로 말하노니에서 거듭 강조하시는 '하나Oneness'의 의미에 대한 이해와 닿아 있다(대림 1주에 '깨어기다리는 삶'에서 바라볼 주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몇 주에 걸쳐 거듭 확인시키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분리>에 기반 한 것인지 <망아>에 기반 한 것인지에 대해 준엄한 성찰을 요구한다고 할 것이다.
3.
11월이니까 오늘 주제와 관련하여 죽음에 대한 묵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은 오늘 나의 삶과 내가 하는 사랑에 대해 성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11월이 아니어도 가족이나 지인들, 먼저 하느님 품으로 가신 그분들께 구체적으로 대화를 시도한다(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죽은 다음에 정말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십니까? 참 아버지를 만나셨습니까? 그 나라는 따뜻한가요? 이런 질문에 대해 G. 로핑크는 아래와 같은 답을 들려준다.
⑬“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비밀에 싸인 세계를 지닌다.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좋은 순간이 존재하고 이 세계 안에는 가장 처절한 순간이 존재하기도 한다./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숨겨진 것, 한 인간이 죽을 때에는 그와 함께 그의 첫눈도 녹아 사라지고... 그의 첫 입맞춤, 그의 첫 말다툼도...이 모두를 그는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간다.’ 벗들과 형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참 아버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라져가고...이 세계로 돌아오는 법이 없다..그들의 숨은 세계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아하 매번 나는 새롭게 그 유일회성을 외치고 있다“(G. 로핑크)
우리는 모두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유일회성의 삶에 초대된 이들이며, 우리가 맞이한 모든 순간들은 늘 우리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일회적인 우리의 삶이란, 매 순간이 우리에게는 어떤 행동과 선택을 요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닐 도날드 윌시는 선택의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⑭“그대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것을 내가 그대를 위해 원한 때, 그때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그대지만, 내가 그대를 위해 원하는 것은 내가 그대를 위해 원할 때, 그때 나가 사랑하는 것은 나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택하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선택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이것은 선택에 대한 유일한 길라잡이에 해당한다. 자명하게 선택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준다. 우리가 선택 앞에서 갈등하는 이유는 <죄의식과 두려움>으로 인한 복잡한 생각과 누구를 위한 선택인지 모호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결정이나 선택의 후회 여부는 누구를 위한 선택이었는지에 의한 <사랑 혹은 자각>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끔 젊은이들이 문학에 대한 질문이 아닌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대부분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이다. 우리가 직면한 행동, 선택에 어떤 갈등 상황에서 우리 영혼의 ‘모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조언이나 의견이 필요한 거다. 그때 나는 그들이 기대하지 않는 대답을 돌려주곤 한다.
선택의 <원인과 이유> 중 무엇을 알고 있는지 먼저 물어본다. 선택은 머리로 하는 선택과 가슴으로 하는 선택이 있다.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선택이다. 그 선택은 단순하고 아무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스스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 상황이란 머리로 답을 얻으려하기 때문이고, 머리로 답을 얻으려 할 때마다 심사숙고 용의주도한 그 밑바닥에 우리 중 누구는 상처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환기다,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훗날 오늘에 대한 회한) 모든 선택의 기준은 오직 사랑임을 안젤름 그린은 이렇게 들려준다.
⑮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말하자면 상처의 밑바닥에 놓여있는 아무도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는 내면의 공간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자기자해의 낡은 틀로부터 자유로워진다(안젤름 그린)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수많은 매개 변수 중 한 원인이 아니었다, 또 그분에게 상처를 남기지도 않았다. 오직 사랑이라는 그 하나의 이유만 있었을 뿐이다.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내려놓은 이유가 여러 <원인>중의 하나로 심프슨 부인은 매개변수 n1,n2,n3,n4....중 하나였다면 그것은 세기의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냥 복잡한 머리싸움일 뿐이고 그 싸움에서 상처받은 두 사람만 남았을 것이다. 오직 심프슨 부인이 유일한 <이유>이기에 그것은 세기의 사랑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고 그는 모든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머리의 논리는 복잡하다. 복잡한 것은 상처를 낳는다. 분리를 낳는다. 상처의 모든 이름은 분리다. 사랑의 논리는 ‘아이처럼’ 단순한 것이다.
우리 앞에는 늘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길이 놓여 있다.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려 할 때 어떤 길을 선택하게(선택하지 않게) 하는 것은 각자 어떤 준거의 틀이 있다. 그 틀은 <두려움과 사랑>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까닭은 선택의 <원인과 이유>가 뒤섞여버려서이다. <원인과 이유>를 카오스 상태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무의식인 <두려움과 사랑>이 섞인 상태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예 사랑이 없다면 갈등조차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아예 두려움이 없다면 그 역시 갈등조차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머리로 이 세상을 통제하려는 걱정이 많을수록 갈등도 많다. 사랑은 영혼의 소리를 듣는 것이기에 갈등이 없다. 단순하다.
우리는 읽어야 할 사랑의 필독서 33페이지 중 이제 1페이지를 읽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때 <두려움과 사랑>은 자각상태에서 진행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읽은 1페이지만큼의 두려움에 의해 본능적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오늘, 우리의 행동이나 선택이 그 언젠가 후회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의 <원인과 이유>가 어디에서 출발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머리로 한 선택인지 가슴으로 한 선택인지의 여부일 것이다. 따라서, 선택하지 않은 것도 선택한 것이다.
나는, 우리는, 인류는, 예수님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는 순례의 여정에 있다. 순례의 여정 중에 우리가 지닐 힘은 <진실>밖에 없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진실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선택과 행동의 결과를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서다. 내가 지금 오른쪽을 갈망하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금씩 옮겨가는 중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용기, 가슴으로 사는 것이 부족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용기, 그로인해 너와 나는 하나가 아니라 여전히 <분리>라는 것을 시인할 수 있는 용기. 머리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아집으로 주님을 부르면서 주님은 늘 밖에 서있게 했다는 고백. 나를 아프게 만든 것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고백, 사랑을 간절히 원하면서 여전히 사랑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고백.
분리(分離)와 망아(忘我) 사이, 우리 사랑은 그 어디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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