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는 자의 모나드(Monad)는 창이 없다(있다)
-내가 무엇 ‘일지’, 내가 무엇 ‘인지’, 내가 무엇 ‘이었는지’
[대 림 제 2 주 일 ( 나 해) 2020 12. 6. Marc. 1,1-8]
참고
1. 마르코 1,1-8
2.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3. B.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역, 서광사, 1990
4. 에피쿠로스, 『쾌락』, 오유식 역, 문학과자성사, 1998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천병희 역, 숲, 2016
6. 노자, 『도덕경』, 감하풍 역, 문예출판사, 2014
7. 라이프니츠(1714) 『모나드론』; Nicholas Rescher 영역,
1991. Latta의 온라인 영어 번역; 라이프니츠의 원고 프랑스어, 라틴어, 스페인어 판
8.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역, 분도출판사, 1989
9. 한우진, 『모나드의 운동과 상호작용에 대한 고찰』(서울대논문)
http://blog.daum.net/m-deresa/12389704
1.
“주일미사 혹은 예배 한 번 빠졌습니다” 이것이 어떤 공동체의 천편일률적인 죄의 고백이라면 그 공동체의 영적상태가 과연 어떠한지 알만하다고 한 어떤 신부님은 ‘신이 없다고 부정하는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신이 있다고 말하는 무신론’일 것이라는 일침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고백할 것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자,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복합적으로 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고백은 행위의 결과들을 토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위의 원인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알고 있는 만큼 고백하고, 알고 있는 만큼 산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앎은 행위에 선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앎만큼 살기 때문이다. 그 정도만 알았기 때문에 그 정도 밖에는, 그만큼 밖에는 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앎의 차원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앎도 사랑이나 용서처럼 한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배우는 학생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앎이 절대적 앎에 도달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수많은 앎이 수많은 행위의 반복을 추동하고 그것이 과잉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백에 선행하는 것은 자신의 어떤 행위 그 밑바닥에 있는 원인을 바라보고 안다는 것이고, 반복되는 원인의 패턴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이 고백하는 자의 첫 번째 자세일 것이다. 고백은 무엇보다 자기이해, 자기해석의 차원인 것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울은 각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에 도달했어야 했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질 들뢰즈)
들뢰즈는 이 세계를 끌어가는 행위의 궤적 안에는 언제나 대자(한계)에서 즉자(본질)로 넘어가려는 차이와 반복이 있는데, 세계가 흘러가는 어떤 패턴과 개개의 삶이 이끌어지는 패턴에는 묘하게도 친연성, 어떤 비슷한 틀이 있는데, 그 틀이 다름 아닌 ‘이분법’이라는 매트릭스가 리좀처럼 가지치고 있다고 보았다. 이분법이 둘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는 닫힌 이분법인지, 둘 다를 선택하는 열린 이분법인지에 따라 '상투적' 혹은 '신성한' 이분법으로 넘어간다고 보았다. 이분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이분법을 어떻게 자기화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나 자신 안에서 반복되는 것들의 그 차이를 바라보는 것이 자기 삶을 이해하고 자신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가는 행위라고 보았다. 차이가 없는 “습관은 이것이 계속되리라는 우리의 기대이며” 이는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응시(바라봄)에서 시작되며,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습관들이 서로 얽고 조여 매고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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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간파는 인간의 존재이유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방향제시에 해당한다. 이는 우리 사고의 틀, 그 고질적 측면인 이분법적 시선의 종식을 의미하며, 그 이분법의 중심엔 에피쿠로스와 아우렐리우스의 시선이 있다.
②쾌락이 삶의 출발점이자 끝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쾌락이 원초적이고 태어날 때부터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하거나 회피하는 모든 행위를 쾌락에서 시작하며 우리의 쾌락 경험은 모든 좋은 것의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쾌락으로 되돌아간다...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토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에피쿠로스)
③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부분에게도 해롭지 않다. 전체는 그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②의 에피쿠로스는 “현재 이루어진 단독적인 삶을 향유하라”며 쾌락을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생명성으로 표방하고 있다면 ③의 아우렐리우스는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영위하라”는 아파테이아의 상태를 공존의 원리로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존재 이유를 쾌락과 평정심이라는 대척점으로 바라본 것으로 평가되지만, 이들의 인간 이해는 동적인 구조와 정적 구조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이두 학파를 통합해 바라보는 것이 인간이해의 또 다른 길일 듯하다.
들뢰즈의 시선으로 쾌락이나 평정심은 편향된 인간이해를 바탕으로 하므로 필연적으로 결핍을 내재하고, 본질적인 생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반복을 통해 이 둘이 통합되는 지점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2.
그렇다면, 우리의 사고의 틀 안에 인간에 대한 존재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믿든 안 믿든 <신>에 대한 어떤 관념도 있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 <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설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④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정서를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더 신을 사랑한다...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신이 그를 사랑하게끔 노력할 수 없다.(스피노자347)
⑤하나의 단자(모나드Monad) 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그의 내부에 영향을 받거나 변화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자들은 어떤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라이프니츠)
④의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라고 보았으며 ⑤의 라이프니츠는 “타자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타자와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점은 타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있는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조건인 정서는 신을 사랑하는 어떤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대로 신이 그를 사랑하게끔 노력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어떤 정서(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것들까지)가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의 크기를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행위의 결과물을 신에게 돌릴 수 없고, 고스란히 자신에게만 돌려준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스스로 자기 원인을 갖고 있으며” 그로인해 무한, 영원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단자들은 어떤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보았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 는 라이프니츠의 관점은 신과 인간에 대한 필연적 존재이유를 완전성에서 본다. 모나드에 창이 없다는 것은 모든 존재자의 필연적 완벽함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에게 모나드(단자)인 인간 개개인은 어떤 내적인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지, 이 세계의 인과적인 영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설정의 전제가 <신>이라고 보고 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인류가 신중심의 시대에 회의를 품고, 이성의 시대를 꽃피울 때,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어떤 물길을 열었지만, 스피노자를 창이 있는 모나드로 보았다면, 라이프니츠는 창이 없는 모나드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모나드엔 창이 '없다' 혹은 창이 '있다'는 것은 인간을 신과 '동일자'로 볼 것인가 '종속자'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종속자'로 보는 견해는 겸손이라는 외피로 자기 실현의 상한선을 미리 정하고, 여차하면 언제나 '죄'로 자신을 도피시킬 배수진을 친다는 것이다. '죄'는 한계라는 이름의 윤리적인 울타리치기로 본 것이다. 신을 앞세워 죄책감과 두려움을 팔지 말라는 것이다.
모나드엔 창이 없다고 한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물질세계에서 더 쪼갤 수 없는 입자를 원자라고 부른다. 라이프니츠는 정신세계에서도 그런 입자가 있다고 상상하고 이를 모나드라고 불렀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닫힌 모나드’라 부른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모나드가 모여서 어떻게 질서 있는 세상을 구성할 수 있을까? 이를 고민한 라이프니츠는 문이 없는 모나드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조화설’ 즉 신의 의지를 도입해야 했다. 서로 다른 모나드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처음부터 신에 의해 조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가 맞물리는 부분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존재자는 구체적으로 개별자들이며 각 모나드 안에는 신이 미리 배려한 조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나 모나드 사이의 상호작용은 단지 감각적 현상일 뿐이며, 모나드는 이미 자기완결성을 지닌 존재로 보았다. 여기서 모나드(단자)는 '단일의 본질'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인간 개개인이라는 모나드가 지금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떤 영적 초기 상태를 사는 듯 보일지라도 그것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본 것이다. 현상과 실재는 다르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신>을 '자기원인'으로 본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스피노자는 정서와 의지를 지닌 유한의 운명에 놓인 인간은 자기원인이라는 신을 알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영적 진화의 상태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정했다. 종교 안에서의 신에 대한 이해와 같은 맥락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인간은 그 자체로 신을 닮은 완결체로 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신의 모상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신이 준 선물을 신이 제한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을 신이 그것을 회수라거나 제한한다면 신은 자기모순을 겪는 것이므로) 신은 자기모순을 겪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 신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스피노자의 입장에서는 선악으로 나눠질 수 있는 '과정의 실재'지만, 라이프니츠에게는 오직 모나드의 자기변화의 운동으로 보았다는 '실재의 실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많은 영성가들은 놀랍게도 라이프니츠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서 상처투성이인 이 세상과 인류를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빛과 어둠을 같은 것으로 바라본다. 빛과 어둠, 빛과 그림자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 아름다음과 추함이라는 이분법을 마음(에고)에서 내려놓는 순간, 신이 창조한 이 세계는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역설이다.
종교 안에서, 종교 밖에서 신을 바라보는 관점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 나눠지는 결절점이자, 바로 인류의 어떤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는 진단키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의 본성, <단일체, 통일성, 자율성, 운동성, 완전성>이라는 개념에서 도출된 ‘모나드엔 창이 없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고귀한 헌사 혹은 선취의식에 해당한다. 되어질 것을 이미 된 것으로 바라보는 선취의식! (상호텍스트적인 글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스피노자를 읽은 다음, 들뢰즈를 읽고, 그 다음 라이프니츠를 읽으면 좋을 듯하다)
우리 고백의 과정도 에피쿠로스와 아우렐리우스처럼 이분법으로 나눠진 상태로 자신을 바라보거나, 그들을 결합한 인간으로 바라보거나,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인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현상과 실재를 다른 차원으로 라이프니츠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고백의 현주소는 바로 이 가운데 어떤 단계를 밟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위의 논의들을 종합해 본다면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고백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자비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을 고백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백한 것에 대한 포옹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영성가들은 죄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화하는 것이 인간의 자기족쇄라고 바라본다. 신앙인들은 죄가 실재한다고 말한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영성가들이나 죄가 있다고 말하는 신앙인들이나 그 결과는 하느님과의 분리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분리를 다르게 표현하는 노자와 아우구스티누스,
⑥ 성인은 항상 만물을 아끼므로 버리는 일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홀연한 밝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 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일거리가 된다.(노자 도덕경)
⑦사물들을 온전하게 보는 사람은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이치에 맞는 사랑을 품은 사람으로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일 없고, 덜 사랑할 것을 더 사랑하지 않고 더 사랑해야 할 것과 덜 사랑할 것을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고 동등하게 사랑할 것을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는 일 없다. (아우구스띠누스)
노자와 아우구스띠느스는 ‘홀연 밝아진’ '습명(襲明)'을 경험한 이들이다. 종교 안이든, 종교 밖이든 그 중심엔 절대자의 본질에 대한 사랑이 있다.
고백의 두 번째 자세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습명을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고백, 그것이 그분의 길을 닦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뛰어난 각자들만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일까? 아닐 것이다.
⑧마르코 1,1-8에서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에서
주님의 길이 무엇일까?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는 길이 무엇일까? 깨달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길은 크게 세 가지의 양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소유하기(Having) - 행하기(Doing) - 존재하기(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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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갈등은 소유하기 단계와 행하기 단계에서 벌어진다고 본다. 무엇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을 행할 수 없었고, 무엇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으로 존재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존재하기의 상태를 살지 못한다. 즉 신과의 분리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는 주님을 <길>이라고 부른다. 그분의 삶 안에서 그 <길>을 발견하면 된다. 그 길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는 길과 반대의 길을 사셨다는 점이다. 우리가 드리는 <고백의 기도>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우리는 자기 고백의 정석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위 앞에 나 자신과 신에 대한 앎이 있다. <내가 무엇 ‘일지’, 내가 무엇 ‘인지’, 내가 무엇 ‘이었는지’>를 물을 수 있을 때, 생각의 시작을 물을 때, 존재의 차원에서 행함과 소유가 무엇인지 이끌어낼 수 있다.
존재하기(Being)-행하기(Doing)-소유하기(Having)
그분은 사랑으로 존재하셨기 때문에 사랑을 행할 수 있었고,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배고픔을 채워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일반적인 삶의 패러다임을 그분은 반대로 사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삶의 패턴을 바꾸면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이제 드러난 셈이다.
우리의 고백은 지금 소유하기 차원인지, 행하기기의 차원 그 어디쯤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분을 부르면서 삶의 방식은 세상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자, 신이 있다고 하는 무신론의 함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우리의 삶의 지향점이 어딘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존재하기는 모든 행위의 출발점이자 모든 소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존재하기가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 우리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을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글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신이 없다고 부정하는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신이 있다고 하는 무신론’이라는 매트릭스에 갇히지 않는 길은, 존재하기의 상태로 우리 삶의 방향키를 잡는 일일 것이다.
그 상태에서 아직도 그분과의 분리를 겪고 있는 그 원인을 바라보게 되고(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결과를 유발한 생각의 덩어리들) 그 원인을 바라보는 것이 고백하는 자의 두 번째 자세일 것이다.
성경에는 구약에서 8가지 신약에서 12가지 정도의 죄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죄에 해당하는 ‘챠타(Chata)’는 '표적을 벗어난 것(to miss the mark)'으로 헬라어 하말타노(hamartano)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로 '표적을 벗어난 것'은 '다른 표적을 쏜 것'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신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고백의 방향으로 죄란 '하느님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것(that it is directed against God)'이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고 하는 그 길은 영적인 미망에서 벗어나 그분의 방향으로 돌아서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분의 방향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사랑’, ‘애주애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님, 주님 부른다고 그분과 방향을 일치 시킨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고백 앞에서 늘 행위를 문제 삼지만 실은 행위의 모태인 생각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 이전에 앎의 문제에 해당한다.
예컨대 우리가 누군가와 갈등관계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우리는 단순히 갈등관계에 있는 그 사람과 나의 행위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는 한 그 고백은 반복되는 고백을 낳게 한다. 갈등 대상만 바뀐, 매번 비슷한 고백을 하게 된 그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행위의 그 원인은 더 근본적인 문제에서 파생했다는 점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결핍을 겪고 있거나 상대 역시 어떤 결핍을 겪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우리는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가 어떤 결핍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나의 입장에서만 이 갈등의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나의 결핍을 한 걸음 더 들어가 바라보면, 거기엔 그분에 대한 결핍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존재의 문제 앞에 서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해도 존재의 배고픔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고백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결국은 내가 고백하게 되는 것은 나와 그분과의 관계로 즉 존재의 문제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나에게 있어 고백할 모든 문제는 그분과의 관계정립에 있었다.
복음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예수님' 이라는 고유명사가 지워지고 '사랑'만 남았구나, 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사랑'이 제 갈길을 가고 있구나, 저 '사랑'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분과의 관계 정립이란, 그런 사랑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으로 표현된 사랑'이라는 신성한 이분법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사랑으로 야기된 빛과 어둠을 같은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베드로의 배신과 베드로의 순정을 같은 차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다시는 옛 삶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 하는 그런 시간속으로 우리도 흘러가게 된다. 죽음이 죽음의 길을 간다면, 사랑은 사랑의 길을 갈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이분법을 신성의 시간으로 바라보는 그 '사랑'이다.
그런 맥락에서, 고백의 상황에서 <내가 무엇 ‘일지’, 내가 무엇 ‘인지’, 내가 무엇 ‘이었는지’>에 대한 성찰, 그 방향이 고백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즉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행했는지 ‘실존’의 현주소가 아니라, 실존의 현주소를 야기한, 나는 어떤 존재인지 ‘존재’의 현주소를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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