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니체)
Amor fati: das sei von nun an meine Liebe!
[대 림 제 3 주 일 ( 나 해) 2020 12. 13. 루카1,46/요한 1,6-28 ]
참 고
1. 이사야61,1/테살로니카1서5,16. 루카1,46/요한 1,6-28
2. 정지용, 『정지용 시집』, 1935년 시문학사, 더스토리, 2016
3.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정동호 역, 책세상, 2005
4.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입문』,서석연 역, 범우사, 2017
5. 쥘리아 크리스테바, 『사랑의 역사』, 김인환 역, 민음사, 2008
6.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조재룡 역, 길, 2010
7. 알렝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권유현 역, 동문선, 1998.
8.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선집』, 이부현 역, 누멘, 2009
9. Jan van 로이스부르크, 『선집』 & 『영혼의 결혼 Die Chierheit der gheesteliker Brulocht〉(1350)』
10. J G FRAZER, 『아도니스의 정원, The King of the Wood-The Gardens of Adonis』, 뉴가출판사, 2019.
11. 자크 라캉, 『세미나. 1: 프로이트의 기술론』, 맹정현역, 새물결,
1.
부재와 현존(Abwesenheit und Präsenz) 앞에는 언제나 ‘앎/모름’이라는 이중의 문이 있다. ‘앎/모름’을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자신의 운명애(Amor fati)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전제로부터 이 글을 시작해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의 “믿기 위해서 알고(intelligo ut credam),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고백은 ‘운명애’의 전적인 투신 앞에서 ‘앎/모름’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집약한 말이기도 하다.
복음에서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but there is one among you whom you do not recognize,” 에서 다시금 ‘앎/모름’의 문제가 언급된다.
부재와 현존(Abwesenheit und Präsenz)을 이해하는 것은 ‘앎과 모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고, 그 역으로 ‘앎과 모름’은 ‘부재와 현존(Abwesenheit und Präsenz)’을 어떻게 바라보는 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재와 현존’, ‘앎과 모름’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함께 다닌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운명애’가 무엇이지 희미하게나마 알게 될 것이다.
①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헤메로스(Himeros)가 있다.(테티엔느의 아도니스의 정원)
흔히 포토스(Pothos)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히메로스(Himeros)는 그 대상과의 육체적 합일에 대한 욕망이라고 번역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포토스의 상태에서 히메로스의 상태로 넘어가도 즉 부재에서 현존과 합일을 경험하고도 욕망의 결핍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욕망의 대상이 부재하든 현존하든 무엇을 욕망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결핍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의 결핍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을 엿볼 수도 있다. 다르게 표현해서 우리가 ‘모르는 분(사랑)’은 우리의 욕망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결핍을 다르게 표현한 학자가 라캉이다.
②욕구는 실제적인 대상과 관계되지만 요구에서의 대상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그것은 사실상 사랑의 요구이다. 욕망은 이런 욕구와 요구의 틈 사시에서 생겨나는데, 실제적인 대상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욕구로 환원되지 않으며, 언어나 타자의 무의식을 고려함 없이 자신을 강요하고 또 타자에 의해 절대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요구로도 환원되지 않는다(라캉)
라캉이설정한 ‘욕구-(욕망)-요구’, 이 스크럼은 대상이 현존하지만 실제 대상에게서 결핍을 느끼므로 대상은 부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욕구불만은 현존의 문형으로, 부재는 결핍의 문형으로 드러나는데, 욕망이 욕구에 짓눌린 상태이므로 실제 내 앞에 대상이 있지만 그 대상에게서 결핍을 느낀다면 현존은 부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욕망이 요구에 짓눌렸다는 것은 요구는 오직 사랑만을 원하므로, 사랑이라는 무한은 인간의 유한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공리를 낳게 한다.
②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Amor fati: das sei von nun an meine Liebe!
라캉과는 반대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철학이 ‘운명애’를 말한다는 것은 부재하는 대상이 현존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신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는 누구보다도 신이 원하는 지점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부재와 현존의 역설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또는 운명애(運命愛)는 "운명의 사랑",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다. 고통, 상실, 좋고 나쁜 것을 포함하여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운명이며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을 뜻하며, 아모르 파티는 이에 대한 태도를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다. 운명애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 가운데 하나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운명을 감수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오히려 긍정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키울 수 있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자신의 운명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사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라캉이 바라본 욕망과 욕구와 요구와의 관계에서 욕망은 요구에 짓눌려 사랑을 요구해도 채워지지 못했다면, 삶의 모든 것이 운명애라고 바라보았음에도 바로 그 삶과 사랑의 주인인 신은 죽었다고 고백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2.
라캉의 욕망이론을 빌려 말하자면 ‘욕구’의 차원에서 구체적 대상이 있을 때, 부재와 현존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③멀리서 나의 사랑을 회상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에로티시즘을 넘어서는 이 흥분은 순수한 고통이자 엄청난 행복이다. 그 고통과 행복은 말들을 정염으로 탈바꿈한다. 사랑의 언어는 직설적으로 옮기려 하면 부적절하고 즉시 암시적이며 불가능한 것이 되어 수많은 은유들로 흩날려 간다.(쥘리아 크리스테바)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멀리서 대상이 부재 할 때가 지금 내 앞에 현존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보다 쉽다고 말한다. 현존하는 사랑에게는 결핍을 메꾸려는 가차없는 욕망이 작동하지만 부재하는 사랑에게는 채워주었던 정서를 드디어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경험이 사실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경험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부재하는 것들을 윤색하고 각색하고 과장하고 미화하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다. 부재하는 과거를 놓지 못하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 미련, 사실의 기억이 아니라 윤색된 기억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현존과 부재의 왜곡이 사랑의 역사라고 본 것이다.
④“만남은 전적으로 불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며, 실재세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결과들을 통해서만 오로지 현실성을 갖게 될 뿐입니다. 사랑은 나를 높은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더구나 그 나머지 것들을 낮은 곳으로 데려가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실존적인 제안일 뿐입니다.”(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사랑이 진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성찰한다. 그는 사랑은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라고 단언한다. 그는 사랑에 대해 지극히 냉정한 성찰을 수행하며, 사랑은 만남이라는 사건이며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건'은 주어진 상황을 지배하는 법칙성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오로지 우연의 형식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그래서 사건은 늘 돌발적이며, 구조적 필연과 어떤 인연도 맺지 않는다고 본다. '하나'를 벗어난 두 개의 인격은 '둘'(un Deux)이 된다. 이 '둘'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둘'은 결국 최초의 다수이다. 다시 말해, 만남은 유아론적인 주체에서 벗어나 '둘'이라는 최초의 다수를 만들어낸다. 최초의 다수가 출현하는 지점, 그것이 바로 만남이라는 사건이며, 사랑이 시작되는 구체적 지점인 것이다.
이것은 그저 분리된 둘, 주어진 것으로서의 둘이다. 우리가 흔히 커플이라고 부르는 쌍쌍의 연인은 밖에서 바라본 무차별적인 둘이지 결코 분리된 둘이라고 볼 수 없다. 결국 이렇게 분리된 둘의 만남으로 엮이는 것이 바로 사랑의 사건이다. 그것은 만남을 통해 진정한 둘을 도래하게 한다. 만남, 이 우발적인 얹어짐은 하나의 선언, '사랑한다'는 선언을 통하여 고정되며 공백을 호출한다. 그 공백은 다름 아닌 둘의 분리라는 공백이다. 공백으로서의 둘은 사건과 함께 도래하는 사건이다. 그 사건적 언표는 확실히 하나를 파괴하고 '둘'을 상황 속에서 성립시킨다. 이제 바디우는 분리를 넘어 분리의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둘의 성립에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선언은 둘을 위해 하나를 파괴하는 언표로서의 사랑을 상황 속에 유통시킨다. 바디우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사랑한다는 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⑤"사랑의 지혜, 즉 사랑받는 사람은 항상 부활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둘러싸기 위해, 또는 아예 그를 농락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써보지만, 사랑받는 사람은 거기에서 또 다시 일어선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망아의 사랑만이 타자를 부른다......타자는 높은 곳에서 개괄적인 파악방식에 의해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의심쩍음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맞아들이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환대야 말로 바로 사랑의 형이상학적 의미인 것이다." (사랑의 지혜-알렝 핑켈크로트)
알렝 핑켈크로트는 알랭 바디우보다 <현존>하는 대상에 대해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면서 나아간다.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머뭇거림은 사랑은 타자를 결코 알지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도 있다. ‘(나)는 타자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괄호 쳐진 (나)는 바로 사랑이다. 즉 자기애이다. 사랑의 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항상 당신으로부터 도망가는 사람으로부터, 막상 당신은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타자는 내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에 비하여 언제나 넘치거나 차이가 있다. "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을 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레비나스의 말과 상통한다. 사랑해서는 안 될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들과, 그럼에도 사랑은 할 만한 가치가 하나라도 더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관계이다. 이때 부재와 현존은 타자를 수용하고 선택하는 나의 인식에 달려 있다.
⑥자신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보다 덜 중요한 것도 의심할 수 있으며, 아니 차라리 의심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을 때만큼 고통에 무방비 상태가 될 때도 없다...누구든지 사랑을 하게 되면 겸손하게 된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자아도취증의 일부분을 저당 잡힌 것이다....(프로이트)
프로이트에게 부재와 현존을 오직 사랑이라는 차원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사랑만이 부재와 현존을 가늠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자신이 하는 사랑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현존이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부재라고 본 것이다. 현존과 부재는 오직 자신만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가 앞에 있는지 없는지와 상관없는 순전히 자신의 사랑으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3.
다시,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그렇다면 ‘요구’는 어떻게 채워지는가?
⑦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나-타자-신’이라는 스크럼에서 타자가 나와 신을 매개하는 사랑의 매개자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신의 사랑은 타자를 통해서 온다고 보는 견해다. 우리가 타자를 나만큼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신을 알지 못한다는 통찰이다. 그런데 타자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시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문제로 회귀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경험하는 관상(觀想)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적(靜寂)과 무(無)의 경지에 이르러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생각했다. 에크하르트에게 하느님은 이성으로도 감각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황야 같은 분이며 무한 자체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페르소나(神格)을 초월한 하느님, 곧 '신성(神性)'으로서 모든 특징을 통합 해소한 일자이다. 이러한 신에게 몰입할 때 핵심이 되는 것이 인간의 영혼의 '작은 불꽃'이며 영혼의 성(城)이다. 자기를 무(無)로 돌려 하느님의 무와 합일하면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드디어는 하느님까지도 버리고 최고의 덕을 달성한다고 보았다.
⑧인간 깊숙이에 열려져 있는 것은 쉽게 닫혀지지 않는다...생명의 뿌리가 머무르는 골수는 상처의 중심부이다...추락은 최면의 한 순간이다. 거기에 추락의 부드러움이 있는지 모른다. 죽는 행위는 내 임무가 아니다. 나는 내 자신을 맡기고 양도한다.(Jan van 로이스부르크)
로이스부르크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처럼 신비가로 불리면서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집필된 『준주성범』에서 보여주듯 그 신비의 방향이 사뭇 다르다. 로이스부르크는 십자가신학의 핵심을 사랑과 현존의 핵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고통과 절망과 죽음을 ‘추락의 부드러움’이라고 표현한다. 죽음에 내 자신을 양도하는 것이 사랑의 지고지선한 행위라고 바라본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의 앞에 놓인 죽음에 맞먹는 상황들을 어떻게 수락하느냐에 달려 있다.
로이스부르크는 그룬엔달에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을 창설하여, 그곳에서 수많은 저서를 저술한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은 신비론자 하데비치(Hadewijch)에게서 나온 것으로, 아가서처럼 하느님에 대한 영혼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로이스브루크의 신비신학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학의 내성적인 성격과 대조된다.
⑨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말라 …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것에도 발을 멈추지 말라(십자가의 성 요한)
십자가 성요한은 어둠이 어둠을 밝히었다, 는 저 어둠으로 상징되는 무와 결여 혹은 결핍의 상태를 최고의 풍요와 앎의 상태로 바라본 신비가이다. 그는 삶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깨달았고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소명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았다. 또 이 소명에 충실히 응답하는데 모든 영혼들을 인도하기 위해 영적인 가르침들을 펴고자 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이 인간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소명이라는 사실과 사랑이 인간 실존에 총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 또 사랑이 인간의 실존을 하느님을 향한 점진적인 여정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을 드러냈다. 특히 「어둔 밤」 등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찾고 사랑하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것이 그분의 운명애였다.
4.
위의 참고문헌들을 종합해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적어도 세 번의 ‘모른다’를 통과한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한 것과 다른, 그러나 확연히 다르지 않은 그 ‘모른다’를 통과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확연히 다르지 않다는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모를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종교를 갖고 있는 신자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의 생명 안에 사랑하고픈 혹은 사랑받고픈 욕망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모른다’는 세 가지로 Ⓐ니체적 모름이 있다. 니체적 모름은 삶과 사랑을 알고 살면서도 굳이 신은 죽었다라고 인류의 모든 비극을 신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그 무신론적 모름이다. 그 다음 Ⓑ는 베드로적 모름이다. 종교적, 신학적, 성서적으로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을 따르는데 온전히 그분만을 따르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모름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취하고 싶은 혹은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모름이다. 세번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모름은 모든 신비가, 영성가들이 마주하는 영적 어둔밤의 그 모름으로,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넘어가는 무명의 어둠에서 신은 인간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영적 모름이다.
이 글 서두에서 전제하였듯, 부재와 현존(Abwesenheit und Präsenz) 앞에는 언제나 ‘앎/모름’이라는 이중의 문이 있고 앎/모름을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자신의 운명애(Amor fati)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성서에서 ‘모른다’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⑩“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but there is one among you whom you do not recognize”
이론적으로 분명히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고백한다.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고백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과 모든 자연과 모든 사물과 모든 것의 모든 것 안에 그분이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름의 모름이 아니라 앎의 모름이다.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그분의 현존이 왜 우리의 삶과는 괴리되어 있는 것일까와 관련된 모름이다.
예수님 공생활3년 동안, 당시 종교인들의 태도, 광야에서 외쳤던 세례자요한의 태도, 십자가 앞에서의 제자들 의 태도, 부활이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태도, 박해에 앞장섰던 바오로의 태도, 그리고 오늘 우리의 태도..,에서 앎의 모름은, 모름의 모름과 무엇이 다른가를 시사한다.
앎의 모름은 그리스도의 현존은 ‘사랑’으로 드러난다는 진리를 모른다는 고백이기에 모름의 모름과 구분된다. 관념으로 배운 사랑은 사랑을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른다’는 것은 교리나 지식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체험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그 모름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니체가 말한 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 Amor fati: das sei von nun an meine Liebe! 이 문맥은 ‘운명애: 사랑이 사랑이 되게하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사랑을 자신의 운명으로 바라본 이들의 특징은, 사랑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표현은 기쁘다는 데 있었다. 이사야예언자, 성모님의 마니피캇, 바오로 사도의 서간문에서 한결같이 그분의 사랑을 알고 있는 이들의 특징은 영적으로 큰 ‘기쁨’을 체험했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늘 감사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⑪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이사야 61,1-2ㄱ.10-11)
⑫내 영혼이 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루카 1,46ㄴ-48.49-50.53-54)
⑬ 형제 여러분,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테살로니카 1서 5,16-2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앎의 상태가 기쁘고 감사한 상태로 변화될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헤르만헤세는 그것은 ‘당신’이라는 구체적 대상이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⑭내가 사랑에 대해 안다면 그것은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헤르만 헤세)
그렇다. 그것은 교리적, 성서적, 신학적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경험에서만 알 수 있는 그 사랑이다. 당신이란 한 사람은 나에게 사랑을 알려주려 이 세상에 파견된 구세주(사람)인 셈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바로 그분의 현신이 ‘당신’인 셈이다.
그런데, 당신이 보여준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또 내가 당신에게 보여준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설레는 당신, 빛나는 당신, 어여쁜 당신, 아름다운 당신, 존경하는 당신, 고마운 당신, 침묵하는 당신, 친절한 당신, 배려심 많은 당신, 멋있는 당신, 섬세한 당신, 용기 있는 당신, 온유한 당신, 인내심 많은 당신, 절제심 많은 당신, 맑은 당신, 투명한 당신, 천진난만한 당신, 상처를 치유하는 당신, 고귀한 당신, 애무하는 당신, 풍요로운 당신, 이타적인 당신, 헌신적인 당신, 일관성 있는 당신, 계획성 있는 당신, 겸손한 당신, 너그러운 당신, 고결한 당신, 순결한 당신, 외로운 당신, 가엾은 당신, 무정한 당신, 쓸쓸한 당신, 고독한 당신, 차가운 당신, 냉정한 당신, 바보같은 당신, 미련한 당신, 어리석은 당신, 교만한 당신, 거친 당신, 비굴한 당신, 비겁한 당신, 말이 많은 당신, 의리 없는 당신, 용렬한 당신, 상처주는 당신, 음침한 당신, 무절제한 당신, 포악한 당신, 잔인한 당신, 옹졸한 당신, 찌질한 당신, 천박한 당신, 가난한 당신, 변덕많은 당신, 잘난척하는 당신, 이율배반적인 당신, 즉흥적인 당신, 자기중심적인 당신, 이기적인 당신, 심장마비나 뇌졸증을 유발하는 당신...사랑하는 당신...
당신이라는 사랑이 내게 알려준, 내가 당신에게 알려준 그 사랑의 이중적 속성을 '모두' 사랑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때, 우리는 당신이라는 구체적 사랑을 어렴프시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의 좋은 면만 취사선택했을 때 당신이라는 사랑은 끝끝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곤궁을 알 때만이 부활의 기쁨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을 때, 나와 당신은 어떤 사랑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와 당신의 ‘운명애’가 다름아닌 '사랑'임을 바라볼 수 있고. '사랑'이 나와 당신의 ‘운명애’일 뿐 아니라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 인류의 ‘운명애’가 '사랑'임도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을 모른다면 자신의 ‘운명애’는 결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진리를 자주 망각하는 것인가. 넘치도록 받은 은총을 사보타지sabotage 하는 것인가? 운명애에 목숨을 걸지 않고 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인가? 단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자주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몸과 마음과 영혼, 즉 전인격이 합치된, 영혼의 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글 서두에서 언급한 부재와 현존(Abwesenheit und Präsenz) 앞에는 언제나 ‘앎/모름’이라는 이중의 문이 있고, 앎/모름을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자신의 운명애(Amor fati)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전제했다. 앎과 모름은 한 쪽 문만 여는 것이 아니라 두 문이 동시에 다 열린다는 점이다. 그때, 우리는 사랑의 진짜 얼굴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마무리하며,
시인 정지용은 「그의 반」에서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랑이 우리 자신의 '운명애'임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다시 ‘모른다’는 벽에 부딪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 모름은 모름의 모름이지만, 그 다음의 모름은 앎의 모름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어찌하여 사랑은 사랑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얼굴을 숨기고, 가리는 것인가?
칼린 지브란은 우리게 이렇게 들려준다.
“사랑은 사랑이외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으며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 /사랑은 소유하거나 소유당할 수 없는 것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으로 족할 뿐.”
사랑이 인류 모두의 운명애인 이유는, 십자가의 성요한이 직관한 바, 사랑이 인간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소명이라는 사실과 사랑이 인간 실존에 총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 또 사랑이 인간의 실존을 하느님을 향한 점진적인 여정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이 신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유한한 인간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무한한 행위에 참여하는 신적 행위이다. 만약 한 사람의 인간이 최고의 사랑을 성취한다면 그것은 수백만의 사람들의 미움을 해소시키는데 충분하다.( M.K.간디)고 바라본 그 경지다. 인간 역사의 모든 성과물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거룩하고 신성한 행위에 우리가 다가가는 것이다.
그런데 거룩하고 신성한 땅, 신의 ‘있음’ 속에는 신의 ‘없음’도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다는 또 다른 모름 앞에 서게 된다. 무한이라는 신의 속성을 '있음'으로 규정할 때, 있음은 없음이라는 대립항을 전제하므로(이 부분은 신학적 논의이므로 다른 주제에서 다루어 볼 것임), 부재와 현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우리 앞에 또 놓이게 된다. 사랑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다는 것은 신의 있음과 없음, 유와 무를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타종교에서 종교의 궁극, 열반을 ‘무’라고 한 그 맥락과 닿아 있다. 파문을 당하다시피한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통찰한 ‘신을 알기 위해 최종적으로 신을 지워야 한다’(이 부분도 신학적 논의의 부분이므로 다른 주제에 다룸)고 말하는 그 경지에 우리가 드디어 진입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사랑이 ‘운명애’임을 알았다면, 우리는 결국 사랑을 '모른다'는 문 앞에 서게되고,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사랑을 놓아야 한다는 역설 앞에 서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지 선택해야 하는 어떤 기로에 선다는 것이다. 생의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마지막으로 움켜잡고 있던 ‘사랑’이라는 밧줄마저도 놓고, 깊이도 넓이도 모르는 저 푸른 바다에 그냥 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했던 사랑들이 바닷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푸른 잉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사랑일 것이고, 그 바다를 역류해 죽음을 맛보며 연어처럼 살아서 돌아와도 사랑일 것이다. 그 모두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그분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길인지도 모른다.
'마니피캇(Magnifica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데비치를 위한 사랑의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한 시론(試論) (0) | 2020.12.30 |
---|---|
본질의지Wesenswille와 선택의지Kurwille, 당신 자신을 바라보기! (0) | 2020.12.23 |
고백하는 자의 모나드(Monad)는 창이 없다(있다) (0) | 2020.12.09 |
‘오늘’이라는 ‘영원’, 그 웜홀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interface(1) (0) | 2020.12.02 |
그대라는 이름의 사랑, 분리(分離)와 망아(忘我) 사이 (0) | 2020.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