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데비치를 위한 사랑의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한 시론(試論)
-우리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정신분석학적 삶을 위해(최승자)
1. 마태오 1, 19/ 마태오 2. 22-23/ 루카 1장 2장/요한 19, 26-27
2. F.L 핍립스 『성 요셉 공경의 본질과 역사적 전개』 & 『의로운 요셉』
3.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의 강론에서 (Sermo 2, de S. Ioseph: Opera 7,16.27-30)
4. 라이너 마리아 릴케, 『소유하지 않는 사랑』
5. 안트베르프 하데비치, 「모든 것들」
6. 로이스부르크, 『영혼의 결혼』 & 『선집』
7. 라 로슈푸코, 『Reflections』 ,
8. S. 스탕달, 『아르망스』 임미경 역, 시공사, 2018
9.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김희영 역, 동문선, 2004
10. 자크 라캉, 『세미나』, 맹전현 역, 새물결, 2016
11. 질 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이찬웅, 문학과자성사, 2004
12. 장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변광배 역, 살림, 2006
13,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민음사, 1992
14. 헤겔, 『법철학강요』. 백훈승 역, 서광사, 2016
15. 알랭 바디우, 『행복의 형이상학』, 박성훈 역, 민음사, 2016
16. 리처드 월하임, 『프로이트 서간문』, 조대경 역, 민음사, 1989
17. 장 보드리야로. 『시뮬라시옹』, 하태환 역, 1992
1. 사랑하는 것과 사랑에 빠진 것은 같은 것인가?
사랑은 결코 사유(철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사랑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성에 대한 타진이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사랑은 어떤 범주화가 가능하지 않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오늘 77억의 인류가 있다면, 그 77억의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사랑은 다 다르고. 사랑이라는 총론에서는 같으나 사랑의 각론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A와 B 조차도 다른 사랑의 궤적을 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사랑하는 것'과 '사랑에 빠진 것'은 같은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 '사랑을 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사랑에 빠진 것'인지 쉽게 구분을 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인류 모두가 사랑을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이 사랑의 본질에 닿아있는가와 상관없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성가정 축일>, 성 가정의 보호자 요셉성인은 어떤 사랑을 하였을까를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교회에서 규정하고, 바라보고, 정의하는 성 가정의 수호자라는 흔들림없는 불굴의 사랑인가? 아님 한 사람의 인류로써 오늘 우리처럼 사랑의 기승전결을 다 맛본 그런 치열한 사랑인가?
먼저, 사랑의 합일을 고민했던 사랑의 담론을 일곱개의 주제로 읽어보기로 한다.
①욕망이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결핍이요, 자기가 가지지 않는 것을 주는 것이다.(라캉)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대상과 완전히 ‘하나’라는 합일에 이르고 싶다는 갈망을 갖게 된다.
롤랑 바르트의 모든 저서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사랑하는 이(세계)와 <하나>가 되었다는, 완전한 합일에의 꿈에 대해 그 가능성(불가능성)을 타진한다. 그것은 유일하고도 단순한 즐거움이자, 흠도 불순물도 없는 기쁨이자, 꿈의 완벽함이며 모든 희망이 종착역이요, 신과 같은 찬연함이며, 분리되지 않는 휴식이자, 소유권의 충족이며, 결실의 결합이자, 열락의 향유라고 보아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다. 자신의 마음에서조차 분리되지 않아 지성마저도 사라지고, 기억마저도 텅 비며, 의지마저도 무력해져, 세속의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주술일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사랑에 빠졌다”라는 표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어렴프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캉은 사랑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합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상상된 타자의 모습이 실제 타자의 모습과 부합되면 사랑은 촉발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상상의 모습과 실제 모습이 일치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가 자신의 상상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상상속에서 계속 집착할 때, 사랑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처럼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그때 ‘사랑에 빠졌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은 사랑은 욕망과 같은 구조로 그 '결여'를 전제로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대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결핍된 기관을 찾는 것이지, 결핍된 반쪽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바라보았다.
2. 소통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대상과 <합일>에 이르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는 대화냐 침묵이냐의 갈림길이 아닐까? 합일은 사랑하는 이들안에서 관계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대화나 침묵은 모두 소통의 한 방식이다.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은 엄밀히 내적인 논리이다. 이 내적인 논리에는 특별한 소유의 의미가 함께 내재해 있다는 것이며 두 사람만이 아는 소통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②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결코 사랑하지 않았을 사람도 많다.(라 로슈푸코)
③난 내 편지가 항상 회답을 받지 못한 채 그냥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소. 당신이 회답을 보내지 않는다면 난 그 즉시로 당신에게 편지보내는 일을 중단하겠오,(프로이드)
라 로슈코프와 프로이드는 바흐친처럼 인간의 언어는 사랑을 만드는 언어카니발이라는 선상에서 침묵은 관계의 치명적인 거리라고 거부했다. 반면, 토머스 머튼은 모든 사랑의 궁극은 침묵으로 수렴된다고 바라보았다.
가령, 두 사람이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계속 말하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은 더 깊은 침묵 속에 잠기는 것을 택한다고 생각해 보자.. 계속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최소한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고(말은 몸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말로는 결핍의 깊이를 더 가중한다고 보기 때문에 아예 말을 보류하는 것이다.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말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침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말도 잘하고 농담도 잘 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원 앞으로 들어 왔을 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노출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더욱이 사랑하는 이의 정보를 뉴스처럼 들어야 할 때가 있다면. 결국 두 사람은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말과 침묵> 의 조율에 실패해 이별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대해 라 로슈푸코와 프로이드는 사랑은 <담론>을 먹고 자란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사랑의 대상, 마땅한 발설의 대상을 찾지 못했을 때, 익명의 대상을 향해 벼랑 끝의 발언을 쏟아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란 소설에서 이 사회는 세 가지의 거짓말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말은 자신을 속이고, 상대를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것, 그 궤적이라고 본 것이다. 말은 사랑을 담기엔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지막으로 느낌도 생각도 체험도 모조리 실패할 때, 나는 말을 쓴다. 사실 말은 가장 비효율적인 전달자이다. 말은 너무나 빈번하게 잘못된 해석이나 오해를 낳곤 한다”(닐 도날드 윌시)
3. 사랑은 고통인가?
사랑에 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인가? 고통은 사랑의 필연적 산물인가? 우연적 상황인가?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어려움과 고통에 직면하여, 더 이상 고통에 짓눌려 어떻게 처리할지 모를 때, 비소유의지, 사람들은 사랑의 취소를 선택한다고 보았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로테를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자살한다.
③사랑은 고통으로 죽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순간에 벌써 죽었을 것이다(스탕달)
④내 힘은 내 약함에 있다...당신을 결코 붙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다오(릴케)
스탕달과 릴케는 아가서에서처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바라본 이들이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닿아 있고, 죽음과 같은 상황을 통과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비소유의지만'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탱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고통의 이름이 소유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이 구원이라면, 그 구원은 사랑하는 그나 그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사랑하므로써 사랑자체에서 구원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고통을 피할 수 없으며, 사랑을 사랑하는 자만 고통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언이다.
4. 사랑은 기쁨인가?
사랑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있게 마련이다. 그 기쁨의 출발은 상대에 대한 앎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앎은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앎으로 넘어간다. 그 때만이 사랑은 고통을 넘어서 기쁨이 될 수 있다, 이때 내가 안다는 것을 당신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며, 당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나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⑥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나는 당신에 대해 당신에 관해 절대적인앎을 갖고 있다.(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는 사랑하면 할수록 당신에 대해 절대적인 앎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그 앎이란 대상에 대한 앎뿐만 아니라 사랑이 추구하는 그 궁극의 지점, 당신이 지금 하고자 하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당신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그 모든 총체적인 앎을 의미한다. 당신의 가능성, 기쁨, 고통, 좌절, 욕망, 스트레스, 고독, 절망, 소망, 외면...그 모든 것...이것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자살하면서 외친 말과 같은 맥락이다. 로테가 누구와 결혼 생활을 하든 로테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확신이었다. 로테의 자살은 그 앎을 로테처럼 끌어안고 죽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⑦가우디움(gaudium)은 현재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거나 장차 소유할 것이 확실시 될 때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이라면, 래티시아(laetitia)는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을지라도 인격적으로 명랑한 상태를 유지하여 즐거움을 조절하려는 것을 말한다.(라이프니치)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가우디움'과 '래티시아'로 사랑의 기쁨을 분류한다. 사랑할 때 두 가지 기쁨을 체험하는 것인데, 상대를 온전히 소유한데서 얻는 기쁨(가우디움)과 상대에 대한 소유를 포기하면서 얻는 기쁨(래티시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소유를 포기한 후자의 기쁨은 베르테르처럼 자살에 이르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일 수도 있겠지만, 그 고통의 이름은 엄밀히 기쁨이 내재된 고통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사랑에서 비롯된 고통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물질을 얻기 위한 실존의 고통이 아니라서 다른 고통과 구별되는 모든 고통을 떠받치는 고통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고통이자 기쁨인 것이다. 최승자 시인의 시에서 나오는 사랑과 빵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을 때 빵을 집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이들에게 <빵과 장미를>과 다른 상황 같은 맥락의 처방전에 해당한다.
5. 사랑은 자유인가?
비혼론자가 대세인 이 시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 벤야민과 아랴라시스의 사랑에서 사랑 앞에 놓여 있는 자유(선택)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나의 자유를 온전히 타자에게 맡기는 것인가? 여전히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하는 질문이다.
⑧만약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써 자유로이 선택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라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사실 사랑애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기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타자가 나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는 언제든지 그 사랑을 철회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있음을 간파했다. 사랑과 자유 그 모두를 충족할 수 있는 것, 그는 보부아르와 제도적 결혼이 아니라 자유결혼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제도권의 결혼이 아니라 제도권을 벗어난 자유결혼만이 둘의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 것이다. 사랑도 자유도 다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본 사랑의 속성에는 본질적으로 자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사랑에는 헌신이 아니라 자유가 있다는 것. 그들에게 사랑과 자유 두 개를 선택하는 길은 자유결혼이라는 길밖에 없었다.
사르트르가 바라본 것은 사랑과 관련된 중요한 난점은 타자로 하여금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사랑에 빠지자마자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타자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된다고 본 것이다. 사랑에 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두 사람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⑨사랑하는 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연인의 변덕이나 약점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얼굴의 주름살과 기미, 낡아버린 옷이나 기우뚱거리는 걸음거리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오래 사정없이 그를 사로잡는다...우리의 느낌은 사랑하는 연인의 그늘진 주름살과 ㅍ위를 잃어버린 몸짓, 눈에 안 띄는 육체의 결점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감각은 은신처인양 안심하며 움츠린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말하자면 결함 많고 흠 있는 곳에 사랑을 경애하는 자의 화살처럼 빠른 동요가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발터 벤야민)
우리가 타자와의 사랑만 아니라 자유에 대해서도 바라보게 만드는 그 시점,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게 하는 이 특별한 타자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 사랑은 우리가 특정한 타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느끼고, 그 타자가 우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타자를 어떻게 만났는가?
서두에서 라캉은 상상(이미지)속에서 우리가 지닌 결여 때문에 그나 그녀를 사랑한다고 보았다. 자기 자신에게서 결여를 느끼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그 결여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상상임신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라고 결여의 이름에 대해 말해준다.
발터 벤야민은 이 특별한 사랑의 관계는 객관적일 수 없고 결여일 수도 없고 시뮬라크일 수는 더더욱 없고, 순전히 내적이고 주관적인 그러나 그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는 아예 주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신비한, 순전히 불가항력적인 끌림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마치 일방통행로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본 것이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당신이거나 당신이 아니거나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사랑에 빠졌다는 자체가 자유를 무화시켰다고 본 것이다. 타자를 사랑하는 그 순간 사랑의 제단에 고스란히 자유를 봉헌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 범주화도 가능하지 않으므로 철학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6. 사랑은 하나인가, 둘인가
그렇다면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인가? 아님 영원히 둘인 것인가? 아니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의 완성일까? 헤겔은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면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끝까지 둘의 사건이라고 보았다.
⑩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헤겔)
헤겔은 사랑의 첫 번째 조건으로 타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나는 더이상 홀로는 완전해 질 수 없다는 고백이라고 보았다. 두 번째 조건으로 타자 역시 그 마음 안에 내가 깃들어 있다고 바라보게 된 동시적 사건으로 보았다.
여기서 헤겔은 쉽게, 당연히, 사랑에 빠졌다면 타자와 하나라는 변증법적 합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헤겔은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라는 결합이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에게서 낭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부부사이에서 사랑은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결국 부부는 자녀를 통해 그 객관성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안에서 두 사람의 사랑의 합일을 목격하게 되므로 그는 끝끝내 사랑은 ‘하나’라는 것을 고수했다. 사랑에 대한 이런 낙관적인 견해에 대해 수많은 학자들이 헤겔의 관념론이 세계를 변증법으로 통합하려다 사랑마저도 자유를 간과한 채 변증법으로 통합하려는 기계론적변증법에 갇혔다고 지적한다.
⑪사랑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결합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알랭 바디우)
벤야민의 제자인 바디우는 헤겔의 합일에 대한 관점을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 둘 너머에 설정 될 수 있을 뿐이며,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인 조건 안에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라고 본 것이다. 차라리 비-관계, 탈-관계라고 보는 것이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견해다. 사랑은 끝끝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 하나를 주장하는 것에는 하나여야만 한다는 망상, 결혼 이데올로기에 갇힌 것이라는 지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두 사람이 만나 씨줄과 날줄처럼 피륙을 짜는 노동과 같으며, 그 피륙의 무늬는 같지 않고 색도 같지 않다.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에도 사랑이라는 원 안에서 두 사람이 편입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랑이 지닌 자유의 혁명적 성격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랑과 자유를 결혼과 가족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결혼제도로 편입함으로써 사랑과 자유가 지닌 고유한 혁명성을 훼손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종교적 지침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의 지침이라는 주장이다.
7. 다시 합일은 가능한가?
그렇다면 처음 논제로 돌아와 사랑의 합일은 불가능한 소망인가?를 묻게된다. 이 질문은 인간은 언제 하느님 사랑으로 온전히 넘어갈 수 있나? 아니 하느님 사랑으로 넘어가지 않고도 합일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님 인간의 사랑을 경험하지 않고도 곧바로 보편적 사랑으로 수직 상승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과 닿아 있다.
그에 대한 답을 로이스부르크와 하데비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3세기 비승비속(非僧非俗)이었던 신비가 하데비치의 영적 계보는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하데비치-로이스부르크-토마스 아 켐피스- 이냐시오...이런 영적인 계보로 이어진다.
하데비치는 귀족의 딸이었지만 교부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느님 사랑 그 가운데 ‘자유’에 대한 본질을 바라본 아웃사이더 신비가에 해당한다. 그녀는 자서전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름에서조차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일까. 그럼에도 여러 책에서 인용되는 그녀의 영가를 종합해 본다면 그녀에게서 사랑의 합일은 ‘자유’에 대한 바라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합일이다.
⑤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해 버린 영혼이여!(로이스부르크)
⑫이 세상의 모든 것들, 나를 사로잡기엔 너무나 작디작은 이 모든 것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비해 너무나 위대합니다./하느님의 그 무한함 가운데 나는 창조되지 않은 것에 이릅니다./ 나는 그것에 다가가 만져봅니다./ 그것은 나를 이 세상의 어느 광대함보다다 더 광대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것은 나에게 그저 좁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잘 아십니다. 당신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하데비치)
사랑의 광기여!/그 축복받은 운명이여!/만일 이를 알아차렸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이것은 나누어진 서로 다름도 하나이게 합니다./진리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사랑의 광기는 쓰디 쓴 것도 달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의 광기는 낯선 이도 벗으로 만들어 버립니다./사랑의 광기는 작고 초라한 이도 높이 올려 자랑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하데비치)
안트베르프의 하데비치(Hadewijch van Antwerpen)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을 살았다. 중세에서 수도자도 아니고, 수도자가 아닌 것도 아닌 그들을 베긴네(Begine)라 불렀다. 교회안팎 어디에도 보호받지 못했던 그들이 영적으로 최고의 기쁨을 누렸다는 데서 사랑의 합일에 대한 갈망은 인간과 신의 결합에 대한 갈망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영가에서 “그녀는 하느님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데비치의 영가에서 드러난 합일은 제도권 교회가 아니라 지상의 나그네가 거주하는 물질적 우주와 천상교회를 동시에 살아내는 법을 발견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보았고,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통찰했다. 교회가 확장되는 곳 어디서나 하느님과 인류는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녀에게서 사랑의 확장성이 곧 그분과의 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수많은 인류가 사랑하는 이와의 합일을 꿈꾸었지만 정작 그것이 가능하다고 체험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에 의해서만 이룰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랑하는 이와 합일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이스부르트와 하데비치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런 영적인 기쁨에 도달했는지 추론할 수 없지만, 로이스부르크의 저서나 하데비치의 영가에서 그들이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어떻게 하나로 체험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요셉성인의 사랑을 어렴프시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8. 요셉 성인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요셉은 히브리어로 ’하느님께서 더하신다’이란 뜻이다.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에 관한 내용은 마태오 복음 1~2장, 루가 복음 1~2장의 예수 탄생 기사에서 발견되는 것이 성서상의 근거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 성인하면, 동정녀 마리아의 배필로 예수를 기른 아버지. 교회 전체의 주보, 노동자, 가정, 동정녀, 환자, 임종하는 자의 주보이자, 교황 비오 11세는 요셉을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자들의 주보로 정하였고(1973년), 비오 12세는 노동자 성 요셉의 축일을 공포했으며(1973년), 요한 23세는 성 요셉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보호자(1961년)로 제정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셉성인에 대한 상찬에서 교회 전체의 주보성인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의 강론에서 (Sermo 2, de S. Ioseph: Opera 7,16.27-30) 소명과 은사는 동시에 주어지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요셉성인의 소명은 교회의 주보, 즉 사랑의 사랑이 되는 소명이었다. 즉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이자 그것을 보호하는 소명이었다.
⑬“충실한 양부이시며 보호자이신 성 요셉, 하느님께서는 어떤 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다음과 같은 일반 법칙에 따라 하십니다. 즉 특별한 은총을 주시려고 또는 특별한 위치에 올리시려고 어떤 사람을 택하실 때, 그 사람에게 자기 직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사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소명을 알게 될 때, 그것은 자동적으로 우리한테 체화되지는 않는다. 소명은 본능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이자 각성의 문제이자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늘이 준 소명이라면 분명히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주어진다. 소명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체험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일이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을 먼저 체험해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 사랑이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⑭“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것은 우리를 그저 우연이나 운명에 맡겨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사랑에 빠지셨기 때문입니다...함께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고 고통은 잊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는 것입니다”(성탄 강론 중에서)
우리와 사랑에 빠진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우리를 우연이나 운명에 맡기지는 않으신다는 것, 우리의 소명은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체험하고 살아내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인류와 사랑에 빠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먼저 사랑의 인류인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 구체화 되어야 했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의 네!라는 수락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마리아 역시 구체적 사랑을 체험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목적은 그 수단도 사랑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때에 고통은 망각되는 것이 아니고 이기는 것일 수 있다. 마리아가 수행할 사건은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인류가 체험하는 일이었기에 마리아 역시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마태오 1,18-19)
요셉성인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 1장은 그분의 인격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분의 내적갈등도 서술하고 있다. 그분 역시 인과적이고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바라보았던 것이고, 그것을 설명해준 마리아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때까지 그분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상태였다. 그런 요셉을 마리아 역시도 이해시킬 수는 없었다.
진리가 진리의 길을 가듯, 사랑이 사랑의 길을 가는 행로, 이때 요셉성인은 인류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들이는 어떤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네!라는 사랑의 수락 앞에 엄청난 갈등이 내재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수락 역시 소명을 주신 그분의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윗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마태오 1,20-24)
인류의 구원사에서 마리의 네!, 요셉성인의 네!의 상황은 같지 않았다. 그들의 네! 앞에는 하늘의 메신저가 있었다. 그 메신저의 말은 이루어내는 힘이 있었다. 인간의 의지를 추동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 이전에 그분의 개입이었다. 그러기에 사랑의 네!는 인과적 세상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분 역시도 인과적 세상을 뛰어넘어 사랑이 되는 체험을 경험했어야 하는 것이다.
갈등하던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믿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꿈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자, 자기영혼을 믿는다는 것이다.(이를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의 투사라고 말한다) 이후 성서에 요셉이 등장하는 것은 12세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사건까지 이다. 요셉은 성가정의 보호자로써 그가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그 행동의 지침을 늘 꿈에서 천사로부터 듣는다.
요셉성인의 사랑의 행로는 성서에서 다름과 같이 짧게 기술되어 있다. 그 짧은 문맥 속에서 우리는 요셉성인의 사랑의 행로를 따라가 볼 수 있다.
Ⓒ마리아는 드디어 첫 아이를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가 2, 7)
Ⓓ여드레 때 되는 날은 아기에게 할례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날이 되자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루가 2,21)
Ⓔ그리고 모세가 정한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는 날이 되자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루가 2,22)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마태오 2,13)
Ⓖ"그래서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가서 살았다."(마태오 2,14)
Ⓗ그는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오 2,15)
Ⓘ헤로데가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이미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하고 일어 주었다. 요셉을 일어나서 아기와 아기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르겔라오가 자기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레아 지방으로 가서 나자렛이라는 동네에 살았다.(마테오 2. 19-23)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애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고 말하였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루가 2,48-51)
Ⓑ~Ⓙ까지 요셉을 이끈 것은 꿈에 나타난 천사의 계시였다. 주의 천사가 그의 내적갈등을 한 순간에 종식시켰고, 그 이후부터 그분은 나자렛-예루살렘에서-나자렛-예루살렘-이집트-나자렛으로 전전하면서 성 가정의 보호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게 된다.
소명을 다한다는 것은 사랑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분이 한 사람의 인류로써 할 수 있었던 사랑의 깊이와 크기를 다했다는 것이다, 나자렛에서의 목수로 성가정을 이끌었던 그분이 교회의 수호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자 옳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요셉성인의 사랑이 얼마나 크면 마리아와 예수님의 울타리가 되었을까를 짐작해 보게 된다. 성모님도 사랑이고 더욱이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인데 요셉 성인의 사랑은 도대체 얼마나 크기에 사랑의 사랑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흔히 요셉 성인은 성서에서도 교회의 전례에서도 신자들의 신심에서도 특별히 공경받지 못한다고 보는 견해들이 많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요셉성인의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랑은 그 크기를 확인할 수도, 수량화할 수도 없다. 또 사랑이 모두에게 드러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랑은 저 깊이 들어가야 가능한 사랑도 있다.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구세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포괄적인 의미를 재구해 볼 수 있다. 교회는 우리가 정의하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셉 성인, 그분도 우리처럼 사랑이라는 그 ‘무엇을’ 지키기 위해 온갖 것을 다 경험하셨던 분이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성가정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이 되어야 했다. 무엇을 보호한다는 것은 보호받는 것 그것보다 더 커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분이 늘 마리아와 ‘함께’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셨고, 지켰고, 보호했다면 그분들보다 커져야만 한다. 임마누엘을 알기 위해, 그분이 이미 임마누엘이 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요셉성인을 통해 보여준 교회의 희망이고, 성가정의 모범이고, 사랑이 지닌 희망일 것이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의 저자가 전하는 바, 갈등하고 애태우고 고생하며, 이집트로 예루살렘으로 나자렛으로 전전하던 그 길 위에서 사랑을 지켜내려는 그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랑을 지켜내는 것이 인류 모두의 소명이다.(각성되든 못하든) 교회는 우리가 다니는 성당, 교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광의의 의미이고, 지상과 천상을 아우르는 ‘합일된 사랑’의 의미이다. 따라서 교회의 수호자란 사랑의 수호자라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을 지켜내려는 모든 이의 수호자가 바로 요셉성인인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그렇다면 이 글은 요셉성인을 위한이 아니고, 왜 하데비치를 위함이었을까?
하데비치는 아웃사이더가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과 합일된 기쁨을 살 수 있는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요셉 성인은 사랑의 수호자이다. 하데비치가 아웃사이더 신비가로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체험했다는 것에는 요셉성인의 가호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데비치가 그녀 생애에 사랑을 알기 위해 갈등하고 고생하고 애타며 전전하던 그 순간순간에 요셉성인을 부르든 부르지 못했든 사랑하려는 자 모든 마음 곁에는 사랑의 수호자 요셉성인이 보호하고 지켜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소명은 지상의 생명으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하데비치는 바로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몫의 사랑을 하려고 갈등하고 고생하며 애타하며 전전하는 우리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와 합일의 가능성(불가능성)을 타진하고, 갈등하고, 고생하고, 애태우는 인류라 할 수 있다.
그 곁에는 교회(사랑)의 수호자 요셉성인이 늘 함께 하고 있다.
목수일을 하는 요셉과 그 일을 거들고 있는 소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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