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홀로그래피(Holography),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나뭇잎숨결 2021. 1. 15. 05:42

홀로그래피(Holography),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프랑시스 잠)

 

 

 

 

 

1. 엔트로피의 증가(에너지 고갈)가 왜 데카르트(철학)의 책임인가?
2. 홀로그램, 우주의 감추어진 질서와 드러난 질서는 무엇인가?
3. 인간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 사이의 초월은 가능한가?

4. 세례의 완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1. 엔트로피의 증가(에너지의 고갈)가 왜 데카르트(철학)의 책임인가?

 

먼저, 울라부 하우게의 시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를 읽어본다.

 

눈이 내린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내가 대신 눈을 맞을 것인가/저녁 정원을/막대를 들고 다닌다/도우려고/그저/막대로 두드려 주거나/가지 끝을 당겨 준다/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온 몸에 눈을 맞는다/얼마나 당당한가 어린나무들은/바람 아니면/어디에도 굽힌 적 없다/바람과의 어울림도/짜릿한 놀이일 뿐이다/열매를 맺어본 나무들은/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어떤 시들은 삶은 무거움이 아니라 눈처럼 가벼워지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나무로 상징되는 자연과 교감하는 하우게의 시도 그런 맥락에서 의도하지 않은 영성의 시에 해당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의 삶이란 자연과 교감을 너머 공존하는 것인데 그 공존의 사슬을 끊는 것을 엔트로피 증가로 보았고, 그 엔트로피의 증가(에너지의 고갈)에 대해 뉴턴, 베이컨, 데카르트(철학)에게 책임을 물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신중심주의와 선험주의를 벗어나 인간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합리주의의 세계를 열었다는 것이다.

 

①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데카르트)

 

데카르트가 1637년 쓴 『방법서설』 제4장 첫 문단이다. 이 한 문단이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데 일조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제레미 리프킨, 한 사람의 철학적 명제가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인류가 쓸 가용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가 열평형 상태에 이르게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사람의 사유가 인류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신 중심의 세계를 마감하는 인간중심주의의 서막을 연 철학자다.

 

데카르트가 철학의 제1원리를 만들게 된 배경은, 우리의 감각은 때때로 우리를 속이기에, 나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합리적인 사람도 종종 오류에 빠지기 때문에, 또한 잘못된 논리에 빠지는데 이를테면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사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종종 오류를 저지르는 나로서는 여기에 제시된 모든 합리를 거짓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가 깨어있을 때 경험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사상을 꿈속에서 겪는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나는 내가 깨어있을 때 내 마음에 들어오는 모든 대상 역시도 내가 꿈속에서 보는 환상과 마찬가지로 진리가 아닐 수 있다고 가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찰에서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모든 것을 거짓이라 생각한다는 것이고, 이처럼 생각하는 내가 어딘가에는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진실을 발견한 바에 따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터무니없는 회의주의적 의심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참이다. 따라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를 철학의 제1원리로 결정할 수 있다.1644년 데카르트는 『철학 원리』에서 코기토 에르고 숨은 1부 7장에서 다시 명료화한다.

 

우리가 즐길 만한 최소한의 의심까지도 모두 거부하는 동안,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라고 상상하는 동안, 우리는 쉽게 신이나 하늘, 신체까지도 없다고 가정할 수 있으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손이나 발, 그리고 마침내 몸 자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가정할 때 이러한 것들이 진실일까에 대해 의심하는 동안, 매 순간 그러한 의심을 하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러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지식은 철학에서 주어지는 가장 확실한 제1의 지식이다.

 

데카르트는 책의 각주에서 위의 문단에 대해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주어진 철학에서 얻는 제1의 지식이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의심, 사랑의 반대는 의심이다. 이 의심하는 나는 우리의 모든 영감과 첫생각을 비판하고, 재단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게 만든다.

 

이렇게 데카르트의 사유는 이성과 합리주의 전통을 세우게 되고, 경험론의 바탕이 되어준다. 제레미 리프킨 같은 사회학자들은 이 사유가 뉴턴과 베이컨, 세 사람이 트라이앵글을 이루어 이성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경험론을 낳게 되며, 향후 인류는 기계주의로 질주, 물신주의와 자본주의가 행복의 중심이라는 허위의 행복론을 인류에게 심어주었다고 본 것이다. 인류의 정신사가 형성되는 청년 시기에 인간의 조건을 이성과 합리와 경험으로 국한시켜 기계주의를 정당화하였고, 그 이후 인류의 정신사를 끌어가는 사유의 폭을 소비와 물신주의로 제한시켰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인류의 정신적 편향성의 기초를 철저히 다졌다는 것이다.

 

"에너지는 한 가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갈 때마다 “일정액의 벌금을 낸다” 이 벌금은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손실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일로 전환될 수 없는 에너지의 양을 측정하는 수단이다. 인류에게 이런 물질중심주의 기계주의를 심은 사람은 뉴턴, 베이컨, 데카르트라고 할 수 있다".(제레미 리프킨)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를 시작으로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3차 산업혁명』, 『수소혁명』 등 줄이은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인류에게 물질주의의 경도, 철학적 바탕을 만들어 준 데카르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사회철학자다. 인류는 데카르트를 몰라도 그가 주창하는 이성중심주의 합리주의 경험론을 의식, 무의식으로 아무런 반성없이 체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과거와 미래를 종과 횡으로 왔다갔다하는 시간여행자로 현재 진행형의 과학-기술 혁명의 진보와 발전, 그리고 사회현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국제관계를 정확하게 기술 하고 있다.

 

②"Puisque je doute, je pense; puisque je pense, j'existe.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앙투안 레오나르 토마가 1765년 소논문에서 데카르트의 사유를 지지한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이후 인류의 정신사를 끌어가는 사유의 방향은 그것이 관념론이든 경험론이든 합리론이든 실존론이든 ‘신은 죽었다’는 당위명제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이후 인류의 지성사는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낮은 의식의 소유자로 낙인찍기에 이르렀다.

 

③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가 보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가 듣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가 걷는 것을 자각하고, 여타의 모든 사람의 행위를 자각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④그렇다, 내가 실수한 것이라고 하여도, 나는 존재한다. 사람은 언제나 진실하지 않을지라 하더라도 실수와 오류도 함께 겪으면서 존재한다.(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보다 먼저 자기 존재성, 정체성을 고민했던 인류는 ②와 ③을 통해 사유하는 인간을 추구했고, 신에 매몰되었던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또 물었다.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자가 누구인가를 사유하게끔 하는 그 최초의 존재에 대해 묻고 있었다. 제레미 리프킨의 지적처럼 기계주의가 인류의 삶의 양태를 기형적으로 몰고간 것을 사실이나 인류의 기형적인 정신사의 궤적을 뉴턴, 베이컨, 데카르트를 그 원흉으로 국한시킬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흉은 기형적인 것, 한쪽으로 치우친 사유의 습관을 길들인 데카르트 이전 혹은 그 이후로 소급되어야 한다. 그 때만이 <이분법에서 하나를 집어드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발원지가 어디이며, 무엇인가, 그것이 인류에게 어떤 고통과 비극을 안겼는가, 지금도 안기고 있는가>에 대한 실마디를 찾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예수의 세례 사건의 의미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이 질문은 예수의 세례를 인간 앞에 머리를 숙인 <겸손>이라는 단어로 치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겸손>은 위계적인 인식 속에서, 위계란 다시 세계를 양분하여 바라보는 이분법에서, 즉 신과 인간을 제한하는 분리의 원인이 된다. 예수의 세례는 무엇보다 인간과 신의 경계를 허무는 구약의 종식이자, 신의 개념을 바꾼 대 사건이다. 그 사건은 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같아진 신이라는 개념의 재정립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랑하는 아들이기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아들이기도 한 것이다. ‘마음에 든다’는 것은 초월과 거룩함, 인간과 신의 경계를 허무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지폐의 홀로그램

 

 

 

2. 홀로그램, 우주의 감추어진 질서와 드러난 질서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21세기에 인류가 고민하는 키워드는 무엇인가? 여전히 목마르고,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바람앞에서 깜빡거리는 등불이자, 여전히 상한 갈대인 인류, 끊임없는 진화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늘 어떤 위기의 상황 앞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고민의 이름을 홀로그래피(Holography)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지폐와 신용카드를 생각해 보자. 홀로그래피(Holography)란, 두 개의 레이저광이 서로 만나 일으키는 빛의 간섭 현상을 이용하여 입체 정보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또한 홀로그램(Hologram)은 그 기술로 촬영된 것으로 '완전함' 혹은 '전체' 라는 뜻의 'Holo'와 '메시지', '정보'라는 뜻의 'Gram'이 합쳐진 말이다. 홀로그래피의 원리는 1947년에 데니스 가보르가 고안하였다. 가보르는 수은등 빛을 핀 홀(아주 작은 구멍)에 통과시킴으로써 되도록 간섭성이 좋은 광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얻어진 상은 매우 희미한 이중상(二重像)일 뿐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코히런트한 광원이 얻어진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서 T. 메이먼이 레이저를 발명한 후의 일이다. 이어서 레이저 광을 연속적으로 발진하는 헬륨 네온 레이저가 개발되었다. 오늘날 신용카드에 사용되는 홀로그램이 바로 레인보우 홀로그램이다. 1983년 마스터카드(MasterCard International)가 처음으로 홀로그램을 사용해 신용카드의 위조 방지 장치로서 도입했고, 그 이듬해에 Visa도 비둘기 문양 홀로그램을 선보였다.

 

홀로그래피와 인공지능은 4차산업혁명을 이끄는 쌍두마차에 해당한다. 인류는 기계문명을 여기까지 발전시켰다. 이것이 왜 21세기 인류 고민의 현주소일까? 물질문명과 의식의 괴리, 인간은 물질 안에 인간의 지능을 결합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은 끊임없는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여전히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물질을 인간화하려는 그 필사적인 노력의 이면에는 인간은 물질만으로도, 혹은 인간만으로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간접으로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셜 맥루한과 장 보드리야르는 인간의 이 딜레마. 발전하면 할수록 그만큼 정신의 허기도 커지는 이유를 매스미디어나 이미지, 즉 인류의 문화코드에서 그 이중적 욕망을 읽어낸다.

 

⑤디지털 컴퓨터가 숫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기 기술은 말과 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기는 의식 그 자체의 과정을 세계적 규모로, 전혀 언어화시키지 않은 채 확장하는 길을 열어 준다. … 이런 의식은 베르그송이 꿈꿨던 집단적 무의식과 매우 흡사할 것이다. 생물학자들이 육체의 불멸성을 약속해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무중력’ 상태는, 집단 간의 조화와 평화를 영원히 가져다줄 무언어(無言語) 상태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마셜 맥루한)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를 인간의 지각과 인식을 바꾸거나 혹은 왜곡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모든 테크놀로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모든 미디어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대응, 즉 “중요한 것은 미디어들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다”라는 식의 대응은 기술에 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이 보여 주는 감각 마비 상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내용’이란, 도둑이 집 지키는 개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사용하는 육즙이 흐르는 고깃덩어리처럼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전체 비즈니스는 ‘배우는 것’과 ‘아는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모든 형태의 고용이 ‘급료를 받아 가며 배우는 것’이 되고, 모든 형태의 부가 정보의 이동에서 생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각적 정보의 시대가 되면 인간은, 파편화하고 전문화하는 데 몰두하던 자신의 직업에 종언을 고하고 정보 채집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오늘날 정보 채집은 “문화”라는 포괄적 개념을 다시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꼭 원시 시대의 식량 채집자가 자신의 모든 환경과 완전히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일을 했던 것과 일치한다. 이 새로운 유목적이고 “노동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절박한 관심사는 인생과 사회의 창조적 과정들에 대한 지식과 통찰이다. 인쇄가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 두기와 관여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이는 곧 반응 없이 행동하는 힘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르네상스 시대 이래, 과학은 이 선물을 높이 찬양해 왔다. 그러나 이 선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배고파지는 곤혹스러운 선물이 되고 말았다.

 

장 보드리야는 이를 시뮬라르크, 시뮬라시옹이라고 부르는 <이미지의 대량생산>으로 바라본다.

 

⑥시뮬라르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는 것을 말하며 그 결과물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시옹은 현실을 모사할 뿐만 아니라 대체해 버리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 체계 전체가 기능성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색깔·형태·재료·배열·공간, 이 모든 것이 기능적이다. 모든 체제가 민주주의적이 되고자 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은 기능적이 되고자 한다.(장 보드리야르)

 

장 보드리야르 대중과 대중문화 그리고 미디어와 소비사회에 대한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미디어 이론가이다. 1968년 『사물의 체계』, 1981년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발표하면서, 보드리야르는 뒤르켐의 지적 전통과 미디어 이론과 관련해서는 캐나다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의 영향을 받으며, 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미지 과잉의 시대가 인류를 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손이자, 실재와 비실재의 경계를 허물어 인간의 삶 자체가 이미지화되었음을 바라보았다. 사물이 인간의 삶을 끌어가므로, 파편화 사물화의 경향은 필연적 산물인 셈이다.

 

이렇듯, 인류는 인간이 빵만으로도 살 수 없고 빵이 없어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그 중에 하나만 집어들게 만드는 편향적 사고의 습관이 고질화되었고, 이런 고민과 선택의 반복은 인류의 출현만큼이나 그 역사가 유구하다. 이미 어떤 정서로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류의 그 고민을 역추적해보면,

 

⑦‘좋은 상태'의 실현이 아니고서 이 우주 안에서 존속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물질의 안정에는 적어도 대칭이 아닌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자연의 원리가 숨어 있다.(플라톤)

 

플라톤은 『국가』에서 '좋음(善)의 이데아'를 인식론적, 존재론적 원리로 내세우고는 있으나, 그것이 왜 궁극적인 원리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티마이오스』에서 답한다. 우주 창조에 있어서도, 자연 및 자연 속의 모든 사물에 있어서도, 인간의 모든 기술적 창출이나 행위에 있어서도 그 이루어짐의 궁극적 목표가 되는 것은 '좋음'(善)이니, 결국 '좋음'이 그 원리가 된다고 보았다. '좋은 상태'의 실현이 아니고서 이 우주 안에서 존속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고 그는 묻는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칸트는 ‘아 프리오리(a priori, 선천적先天的)라는 개념으로 바뀐다. 밭터 벤야민이 바라본 아우라는 개념과 어떤 접점이 있지만 칸트는 예술작품을 너머 존재의 근원까지 이 영역을 확장한다.

 

⑧ 미美는 아 프리오리(a priori, 선천적(先天的))라고 부른 사고범주(思考範疇)에 속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도덕을 대상으로 한 상징이다. 도덕상 본질로 인간의 현존은 스스로 최고 목적 자체이다. 신 개념을 발견은 이성의 도덕상 원리이며, 신 현존의 내부상 도덕에 적합한 목적 규정은 최고 원인을 사유할 일을 지시하고 자연 인식을 보충한다.(칸트)

 

모든 물질과 진선미 속에 순수 균형과 조화의 원리가 내재해있다는 것을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정리한다. 양자역학의 기수인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에서 플라톤 철학과 칸트의 미학에서 <부분과 전체>의 조화, 자연의 안정성과 균형감각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정리한다.

 

⑨당신은 공자(孔子)의 격언이라는 실러의 시를 알고 있으며, 특히 내가 그 중에서 「충만만이 명석에 통할 수 있으며 심연 속에 바로 진리가 숨어 있다」라는 구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여기서 말하는 「충만」이란 경험의 충만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현상을 말할 때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다른 개념들의 충만도 의미하고 있습니다.(하이젠 베르크)

 

칸트의 철학에서 인과율이란 경험에 의해서 기초가 설정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그러한 경험적 주장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경험을 위한 전제이며, 칸트가 아 프리오리(a priori, 선천적(先天的))라고 부른 사고범주(思考範疇)에 속하는 것.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감각인상은, 그 인상이 선행하는 과정에서 결과되는 어떤 법칙이 없다면, 어떤 객체도 대응할 수 없는 감각의 주관적 유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이 법칙 즉 원인과 결과의 일의적인 연결은 사람들이 어떤 지각(知覺)을 객관화하려고 할 때에, 또 사람들이 어떤 것―사물이 아닌 과정―을 경험하였다고 주장하려 할 때에는 이미 이 법칙을 전제하여야 한다는 것. 또 한편에서는 자연과학은 경험을, 바로 객관적인 경험을 취급하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제어될 수 있는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일 수 있는 경험만이 자연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모든 자연과학은 인과율을 전제해야 하며, 이로부터 인과율이 성립되는 한에 있어서 자연과학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결론이 불가피하게 내려진다. 그러므로 인과율이란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의 감각인상의 소재를 소화하여 경험에 이르게 하는, 말하자면 사고의 도구라고 보았다.

 

이를 다시 우주의 ‘홀로그램’이라는 이론으로 정립한 사람이 2차세계대젼 당시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축출된 데이비드 봄이다. 하이젠베르크와 데이비드 봄은 2차세계대전 당시 핵무기를 만드는 일에 소환되거나 축출된 물리학자들이다. 데이비드 붐은 간첩혐의로 미국에서 추방당한 후,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의 거시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을 연결하여, 이 우주는 드러난 질서와 감추어진 질서가 있다고 본 물리학자이다.

 

⑩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감추어진(implicate, 접힌 enfolded) 질서’라고 하고, 우리의 존재차원을 ‘드러난(explicate, 펼쳐진 unfolded) 질서’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류의 의식은 깊은 차원에서 하나다”라고 한다. (데이비드 봄)

 

베이비드 봄은 상대론을 뛰어넘는 우주의 질서를 찾아서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space)라는 이 가설로, 우주와 경험적 현상 세계는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며, 우리가 보는 부분의 모습은 홀로그램의 간섭 무늬처럼 질서가 결여된 모습이고, 실제 의미를 가진 전체는 더 깊고 본질적인 차원의 현실에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레너드 서스킨드를 비롯한 일부 끈이론학자들은 홀로그래피 원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봄의 기존 양자역학에 대신한 홀로그램 우주 가설은 그는 EPR 역설에서 양자역학의 측정 결과를 빛의 속도보다 빨라야만 측정할 수 있다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의문을 제기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전자가 상호연결되어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봄은 버클리 방사선연구소에서의 실험을 통해 플라스마 속에 전자들이 들어왔을 때 전자들이 개별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의 일부처럼 조직적인 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고, 이것을 플라스몬이라고 명명했다. 마치 퍼진 잉크방울처럼 홀로그램 필름에 기록된 간섭무늬는 알아볼 수 없는, 무질서한 모습이지만, 실린더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퍼진 잉크방울이 다시 한 방울이 되는 것처럼 홀로그램의 이미지가 제대로 보일 때에는 그것의 질서가 갖춰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홀로그램의 간섭무늬처럼 무질서한 환영이고, 더 깊은 차원에 모든 사물과 물리적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본질적인 차원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이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우주이다. 그는 우주를 홀로그램보다는 홀로무브먼트(holomovement)라 불렀다.

 

보이는 세계를 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 어느 시대든 주류 패러다임을 뒤집기란 쉽지가 않다. 인류는 미학과 철학과 사회학과 물리학모든 분야에서 이 우주와 세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은 물질을 초과하는 질서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중세의 종교적인 도그마,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신의 섭리라는 말을 아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낮은 하등동물이 하는 행위쯤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신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정작 인류로 하여금 결정적인 통찰의 순간에도 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예수의 이름을 부끄럽게 만들었는가? 누가 사랑을 죄라고 말 하는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Library of Alexandria)

 

 

 

 

3. 인간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 사이의 경계, 초월은 무엇인가?

 

지나치게 물질주의로 경도된 것이나 지나치게 영적으로 치우친 것은 실은 같은 이름의 이분법이다. 편향성, 치우침, 이분법은 모든 전쟁의 이름이자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이름이다. 이것은 인간은 인간적 현실만으로 살 수 있는지 아니면 로고스적 현실로 살 수 있는지, 아님 두 조건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산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갔다. 이는 마치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 라고 아이에게 묻지말라는 말과 같다. 제한과 편향은 자유의 말살이다.

 

자유는 시간과 사고의 운동 범주 안에서 존재하지 않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며, 의식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완전한 자유는, 시간과 인식의 범주 안에서 자유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는 나중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부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⑪자유는 어떤 권위의 추종 사이에도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목적이 자유라면 시작 자체가 자유스러워야 한다. 끝과 시작은 하나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권위를 받아들이게 되면, 거기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제임스 오펜하임은 인간의 편향성, 자유의 박탈에 대해 이런 시를 썼다.

 

⑫"우리는 몸과 함께 마음도 굶주린다네/우리에게 빵을 달라. 그러나 장미도 달라"(제임스 오펜하임)

 

“빵과 장미bread and rose”는 흔히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쓰인 말로 일반화되었지만, 실은 인간 현실에 대한 기장 정확한 적시이자 세례란 무엇인가에 대한 함의가 담긴 화두에 해당한다.

 

요셉 랄쓍어 추기경은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⑬인간은 “인간적(동물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 사이의 경계를 결정적으로 초월하고, 인간은 무한히 초월할 수 있기에 인간이고, 따라서 자기 안에 덜 갇혀 있고 덜 제한되어 있을수록 인간이다.”(요셉 랄쓍어 추기경)

 

여기서 초월이란 무엇인가? 물질주의를 벗어나는 것을 말함인가? 동물적 현실을 폄하하는 것을 말함인가? 초월은 거룩함이다. 인간적 조건과 로고스적 조건을 동시에 살아내는 것이 진정한 초월이라 할 것이다. 그때 초월은 거룩함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르멜 수도원에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급자족하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이루고 그 같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통찰한 바오로 사도는 서간문에서 드러난 깊은 영성에도 불구하고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파했다. 사실 기도하고 관상하는 것에는 어떤 희열이 있다. 아멘, 아멘, 하는 그 희열에 안주하지 않는 희열의 반납, 아니 오히려 희열의 확장이라 말해야 하는,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것이 바오로 사도가 만난 예수였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관념론과 경험론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⑭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준 바와 같이/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사도행전 20:28-35/ 데살로니가후서 3:6-15)

 

인간은 ‘동물적 현실(빵)과 로고스적 현실(장미)’ 두 경계에서~무한히 초월하고, ~덜 갇혀있고, ~덜 제한 될수록 인간이다, 언뜻 이 문맥은 빵을 떠날수록 로고스적 현실에 다다를 수 있다고 바라봄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현실의 기형과 파편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세례란 기독교인이 되는 관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 두 현실을 어떻게 동시에 살아내고 있는지에 대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엄밀히 세례를 받지 않아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어도,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우리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임이 분명하다. 굳이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 교회의 일원으로 이 순례를 해야하는 이유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이 맘에 드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행복이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종교는 이성의 시녀라고 폄하되던 시대에 인간 조건에 대해,

 

⑮영혼이 육신의 유일한 형상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었다기 보다는 영혼과 제1질료로 구성된 존재이다. 영혼은 형상으로서 제1질료 안에서 자신을 실체적으로 표현하고 자기 본연의 구체적 실재가 된다. 육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세상적 ‘자기 소여성(自己 所與性;Selbstgegebenheit)’을 나타나고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과 육신의 단일성은 육신은 더 이상 영혼의 감옥이 아니요 영혼의 방해물이나 단순한 도구적 질료가 아니라고 보았다. 육신 없이 영혼은 인격체일 수 없으며 도대체 존재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창세기에서 “숨을 불어 넣었다”에서 숨(nephesch)은 영혼(soul.anima)과 육신(soma)을 통합하여 번역된 것이라고 보는 단일성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는 바,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에 그 육신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지닌 육체와 육신은 어떻게 다른가? 육신과 영혼을 단일성으로 바라볼 때도 육신은 도구적 단일성인가? 실체적 단일성인가는 아가페적 사랑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초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바오로 서간문에 자주 나오는 표현들, 육신(soma)과 구별되는 육체 혹은 살(사르크스)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뜻과 멀어진 인간의 어떤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는 고백 속에는 우리의 육체를 <사르크스>의 상태로 몰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 바라보는 금욕주의와는 다른 관점이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⑯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예수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인류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의 존재이다. 그는 인간일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미래로 인간을 이끌어 들이는 결정적인 인간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⑰신학자 칼 바르트는 “ 예수는 전적으로 한 직능을 맡은 자다. 예수는 자신과 자신이 말씀을 하나로 한 나머지 ‘나(인간)’와 ‘말(로고스)’이 불가분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말’이다”라고 말한다.

 

기원 30년경에 팔레스티나에서 사형된 한 사람의 개인, 역사적 인간 예수가 성유로써 축성된 그리스도일뿐더러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며 모든 인간 역사의 중심이고 결판이라는 고백이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말씀(Logos)과 육신(Sarx)의 결합, 모든 존재를 받쳐주는 의의가 바로 육신이 되었다는 이 사실, 역사 안에 들어와 역사 한 가운데를 관통하며 역사를 초월한 한 절정, 시.공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힘,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건에 대해, 라씽거 추기경은 이를 종합해,

 

⑱“실존의 사랑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사랑이라면 이 실존은 홀로 사랑 자체인 신과 동일하지 않을까? 자신을 잃으면서 온전히 되찾은 자라면 가장 인간다운 인간, 인간현실의 성취가 아닐까? 예수의 본질적 말씀은 실상 그 자신이다... 인간의 완전한 인간화란 신의 강생에 있어... 동물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 사이의 경계를 결정적으로 초월하고...인간은 무한히 초월할 수 있기에 인간이고, 따라서 자기 안에 덜 갇혀 있고 덜 제한되어 있을수록 인간이다.”

 

⑲이를 테야르 샤르뎅은 생물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보면 중심을 가진 개인이지만, 즉 한 인물인 동시에 어떤 새롭고 더 높은 종합과의 관계에서 보면 하나의 요소가 아닐까... 그러기에 인간은 홀로 있기를 그쳐야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된다”라고 말한다,

 

샤르뎅은 진화의 근본법칙을 우주가 하나의 방향을 갖고 발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보았다. 테야르는 이를 '정향진화'(orthogenesis)라고 칭한다. 정향진화는 종과 계통의 모든 변화에는 목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변화의 과정이 곧 지향적이다. 방향감각을 산출하는 부분은 물질 안에 있다. 그래서 테야르는 '진화란 알고 보면 '얼'에너지 또는 '방사' 에너지의 끊임없는 증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은 점점 복잡하고, 조직화되며, 의식화된다고 본 것이다. 정향진화의 정점인 오메가 점에 하느님 문제가 등장한다. 침묵하는 하느님에서 지금도 일하시는 하느님, 왜냐하면 하느님은 진화의 추진력이며, 진화를 모으는 분이시고, 그분만이 진화의 보증인이며, 진화의 몸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화의 정점인 오메가 점은 '만물을 충만케하고'(에페서1;23), 그 안에서 ‘만물이 성립하는’ (골1:17) 것으로, 창조는 오래 전에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창조는 더욱 놀랍게 진행중이며, 세계의 가장 고양된 영역에서 진행 중이라고 보았다.

 

생물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의 근원'(Jacques Monod)이 될 것이라는 그의 견해는 많은 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비유기체의 단계에서의 목적 지향적 발전이나 정신의 단계에서의 목적 지향적 발전에는 많은 물음이 남아 있음에도) 테야르가 오메가 점이라고 말한 절대적 중심이 우주의 진화에 대하여 책임적인 답안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것을 인간의 내면화와 인격화의 법칙에서 추론 할 수 있는데, 절대중심은 최고로 내면화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충만한 의식일 뿐 아니라 자기 밖에서 존재하는 가능한 모든 사물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이 법칙은 제한없는 자발성과 창조성과 자유를 유도한다. 개별화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 중심은 진화의 중심들에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의 중심들과 철저하게 차이 짓고 구분한다. 절대 중심과 개별적 중심들 사이의 통일성이 크면 클수록 양자 사이의 상이성 또한 크며 각자의 자기 존재됨과 자유도 크다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중심은 인격 안에 있는 사랑이다. 인격 안에 있는 사랑이란 최소한의 필연성없이 충만한 자유로 사랑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한다. 인격 안에서의 사랑이란 자유 안에서의 사랑이요, 사랑 안에서의 자유이다. 이 사랑은 우주의 창조이며, 사랑을 자유롭게 거부하는 자에게 사랑하는 자를 놓아주는 행위와 속죄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까지 포함된다. '그것은 만물의 양적 충만과 질적 완성이다. 그것은 신비적 충만(pleroma)인 바, 거기서 실질적 유일자와 피조물 다수는 아무 혼란없이 전체 안에서 再合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역사적 예표가 예수그리스이므로 ‘그’라는 예수는 “현존하는 미래의 인간, 오메가 포인트”라고 말한다.

 

위에 거론한 5명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본다면, 인간은, 역사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신앙이든, 사랑이든,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취소할 수 없는 길 위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인류는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어떤 방향성을 갖고 발전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신론자는 이를 생물진화의 법칙으로 도출하겠지만, 신앙인들은 이를 예수그리스도라는 한 중심으로 인류가 모아지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간의 전 역사가 이미 신앙인만의, 혹은 특정종교의 카테고리에 머무르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닌 새로운 인류, 개방된 인류, 초월된 인류라는 도상으로 넘어가는 중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4. 세례의 완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렇다면 이 글의 주제 세례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그분의 나이 30으로 추정한다, 그 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그분이 12세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종교지도자들과 토론을 할 정도였다면 그분은 이미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간파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스무살 쯤 그분은 공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였을까? 흔히 공생활 전 예수는 인도에 가서 부처의 가르침을 공부했다고 추정하는 이들이 있다. 12세에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그분이 인도에 갔었을 수도 있겠지만 갔다면 그것은 굳이 무엇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배웠다면 그 역시 참 좋은 일이다. 하느님 안에서 부처와 예수가 갈라졌다면 둘은 다 결핍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기에 그렇다. 나아가 그 이유는 신적정체성을 전능이 아닌 사랑으로, 인간의 육신과 영혼이 하나라는 것을, 인간의 삶과 하느님의 길이 다르지 않음을 마리아와 요셉으로부터 배우고 살고 있었다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의 세례는 신이 인간 앞에 머리를 숙인 겸손의 사건이 아니게 된다. 그분이 요한복음 1장에서처럼 이미 빛이었고, 그 빛이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분리되지 않았음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가정의 일원으로 살았던 그 30년의 시간이 이미 대체할 수 없는 공생활인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으로 넘어가 보자.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사랑만이 죽음을 이긴다는 불멸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인간 역사에 개입하는 신의 행동은 아주 범속한 것과 아주 초월적인 것이 동시에 결합하는, 땅과 하늘의 결합, 인격과 위격의 결합으로 세례의 장면에서 주목할 부분은 서술어를 중심으로 크게 네 부분으로 묵상할 수 있다.

 

Ⓐ갈릴레아로부터 오시어-Ⓑ세례를 받으셨다-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보셨다-하늘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부분은 다시 인간적 체험Ⓐ와 Ⓑ-신적체험 Ⓒ와 Ⓓ로 나뉘어지며,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철저히 인간이셨고 철저히 신이셨던 그분의 모습에 대한 축약된 표현을 낳는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 14장과 연결하여 읽으면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 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필립보가 예수님께 “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토마스는 인간 예수에게 초점이 놓여 있다면 필립보는 전능한 하느님에 초점이 놓였다. 이 둘을 통합하는 것이 예수 세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통합이다. 이 사건은 종교적 사건이 아니라 인류의 사건이다. 인류 역사는 이 두 개의 현실 중 하나만 옳다고 집어든 시간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우리가 어떤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인성과 신성이 분리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인격과 위격이 분리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모든 전쟁과 고통의 이름은 이 분리에서 파생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 역시 철처히 인간이면서 철저히 신적인 삶으로 넘어가겠다는 자유의지의 선택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적인 것을 포기하고 신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인격과 위격의 결합이 바로 초월이고 세례의 완성일 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갈등은 이 두 분에서 하나로 치우쳐서 있을 때이다. 토마스이거나 필립보이거나,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예수의 세례는 그분의 신적정체성이 형성되는 모멘트라는 의미일 뿐 아니라 인간 실존의 역사적 현실을 무한히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세례의 완성이란 인격과 위격이 하나가 된다는 것에 인류의 모든 문제의 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충: 우리가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삶은 산다면,  둘을 통합하는 삶보다 상대적으로 쉽다. 그래서 인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인격과 위격을 결합시키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세례는 십자가의 예표라고도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사유가 물질의 고갈을 끌어냈다고 주장하는 제레미 리프킨의 현실직시나, 하이젠베르크가 바라본 물질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불확정의 원리나, 데이비드 봄이 본 홀로그램 우주나, 요셉 랄씽어 추기경이 바라본 인간적 현실과 로고스적 현실의 통합이나, 샤르뎅이 말하는 진화의 정점 오메가 포인트는 우리에게 인격과 위격의 통합을 요구한다.

 

인류의 오랜 고민, 이것은 세례의 완성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시사한다. 인간에게만 매몰되지도 신에게만 매몰되지도 말라는 것이자, 둘 중 하나만 집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인격과 위격을 동시에 산다는 것, 그것이 세례의 완성이자,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길일 것이다. 영혼은 우리에게 늘 그 길을 안내한다. 굽이치는 바다(인간적)와 백합의 골짜기(로고스적)는 동시적인 것이지 선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때, 세례는 축제이자. 춤이자, 노래이자 합일이라 할 수 있다.

 

세례는 삶의 중력으로부터 눈처럼, 혹은 꽃잎처럼 가벼워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십자가를 가볍게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십자가 아닌 것을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는 자신과 신이 하나임을 아는 것이자, 내가 원하는 것을 신도 원한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자, 신의 의지가 곧 내 의지가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죄가 아닌 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으며, 더욱이 사랑을 죄라고 부끄럽게 말하지 않음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적인 모든 행위를 거룩하게 들어 올리는 법을 아는 것이다. 겸손, 희생, 봉사, 이별 이런 단어들을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유, 감사, 수락, 사랑, 희망, 믿음, 이런 단어들을 심장 가까운 곳에 놓아두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위의 위대함을 바라보는 것이자, 부재의 미학을 알게 되는 것이자, 불가시와 가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을 알게 되고, 에너지 재분배의 법칙, 기적의 원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될 수 있는 신비를 알게 되며, 물질과 영혼의 이분법을 통합하는 것이다. 신비나 섭리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며, 오직 선택이 사랑임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77억과 한 사람이 같다는 것을 바라보며, 수량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죄로 도피하는 자신의 눈을 씻어 죄의 개념이 바꾸는 것이다. 죄라고 말하는 어떤 카테고리가 죄임을 드디어 알게 되는 것이다. 용서에 한계가 없듯 사랑에도 한계가 없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선물임을 바라보는 것이자, 올바른 자유의지를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룩함의 개념이 바뀌고 안식일의 개념이 바뀌는 것이자, 성전의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사랑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자유자재로 사는 것이다. 연민과 자비와 용서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온 존재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이다. 뜨거운 눈물과 환한 웃음이 같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죽음을 원하지는 않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이기는 것이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바라보는 것이자, 분리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부재의 미학을 완성하는 일이다. 실재와 비실재를 혼동하지 않고.,.끝까지 걸어간다는 것은, 별을 따라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 동행함을 아는 것이자, 존재하기가 소유하기와 행하기를 이끌어가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이를 프랑시스 잠의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

늙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참 고

 

1, 마르코 7-11

2. 데이비드 봄, 『전체와 접힌 질서』, 이정민 역, 시스테마, 2010

3. 마이클 텔보트, 『홀로그램 우주』, 이균형 역, 정신세계사, 1999년

4.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정현종 역, 물병자리, 2002

5. 플라톤, 『티마이오스』, 박종현 외, 서광사, 2008

6. 데카르트, 『방법서설』, 『철학 원리』

7.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하태환, 민음사, 2012

8. 장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12

9.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김상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10.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11, 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

12. 칸트, 『판단력비판』 이석윤 역주, 박영사, 1978년

13. 요셉 라씽거 장익주교역,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분도출판사, 1974, pp.149~189

14. 토마스 아퀴나스, ?존재와 본질에 관하여?, 『신학대전』

http://blog.daum.net/m-deresa/12388881

15. 아우구티누스, 『신국론』

16. 정의채, 「가브리엘 마르셀의 사상」, 논단1974년 5월호

http://blog.daum.net/m-deresa/12388886

17. 칼 바르트, 『로마서 주석』, 손성현 옮김, 복있는 사람, 2017

18. 떼이야르 드 샤르뎅, 『인간현상』, 한길사, 1997

http://blog.daum.net/m-deresa/12388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