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코나투스Conatus, ‘amor naturalis 자기보존의 본성적인 사랑’

나뭇잎숨결 2021. 1. 21. 22:15

코나투스Conatus, ‘amor naturalis 자기보존의 본성적인 사랑’

-우연과 운명의 갈림길 위의 순례를 위하여

 

 


1.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에 바라보게 되는 것들
2. 사물들에게도 자연본성적 사랑인 ‘운명’이 있을까?
3. 사도 요한과 안드레아에게 ‘오후 4시쯤’은 어떤 시간인가?(요한 1,35-42)

 

 

 

 

 

1.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에 바라보게 되는 것들

 

우연과 운명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운명을 알아볼 수 있을까? 이 주제를 바라보기 위해 먼저, 네편의 시를 읽어본다.

 

박용하의 「견자見者」

 

누가 자꾸 삶을 뛰어내리는가/누가 자꾸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그렇다면 네 영혼은?/네 손목은? 네 발목은?//누가 자꾸 지구를 뛰어내리는가/누가 자꾸 햇빛과 달빛을 뛰어내리는가/눈물도 심장에서 뛰어내린다//그렇다면 네 슬픔은?/네 진눈깨비는? 네 고통은?//너의 심장은 발바닥에서부터 뛴다/너의 노래는 머리카락에서도 자란다//그렇다면 네 피는?/네 시선은? 네 호흡은?//물에 빠진 사람은 물을 짚고/허공에 빠진 사람은 허공을 짚을 때처럼/빠지는 것을 계속 짚을 때처럼//누가 계속 죽음을 뛰어내리는가/누가 계속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한강의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나에게 말을 붙이고/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오래 있을 거야./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잘 모르겠어.//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라고 말하게 될까./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라고.//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당신은/내가 말하지 않아도/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내가 무엇을 사랑하고/무엇을 후회했는지/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끝없이 집착했는지/매달리며/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때로는/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그러니까/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그 윤곽의 사이 사이,/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어리고/지워진 그늘과 빛을/오래 바라볼 거야/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거기, 당신의 뺨에,/얼룩진.

 

나희덕의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그 무수한 길도/실은 너에게로 향한 것이었다//까마득한 밤 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사랑에서 치욕으로,/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나의 생애는/모든 지름길을 돌아서//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오규원은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라는 시에서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라고 자기 죽음의 순간(수목장)을 바라본다.

 

인용한 위의 시들은 모두 상처에 대한 보고서이자 부재의 미학이다. 다른 말로 운명에 대한 목격. 그에 관한 고백이다. 자기 운명에 대한 해석이고 자기 운명을 바라본 자의 독백이다. 이런 고백들은 오규원 시에서처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오후’에 바라보게 되는 적나라한 현실 직시에서 비롯된다. 자기 손에 들려 있는 패가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바라볼 수 없는 지점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운명’이란 말이 너무나 진부해진 현실 앞에서- 우연과 운명이 뒤섞여버린 현실 앞에서- 운명이란 단어를 쓰기를 가급적 피한다. 『채식주의자』라는 소설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라 불리는 한강은 운명이란 단어를 성큼 집어든다. 운명이란 말이 진부해졌다면, 그것은 피할 것이 아니라 운명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가보겠다는 당찬 선언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것이 한강 소설과 시가 지닌 강력한 파토스가 아닐까 싶다.

 

시인이 운명이란 단어를 쓰지 않으려 하듯, 우리도 우리 앞의 일과 사랑을 운명이라고 절대화하여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스쳐지나갈 수 있는 우연의 항목에 집어넣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체가 가진 본능적인 자기보전본능의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본능적으로 운명에 투자하게 될 그 시간이 두려워서, 우연에 방점을 찍으며, 운명적인 것들에 백기를 던지며 항복한다는 것이다. 마치 운명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기회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는 사물조차도 운명이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절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자기 운명을 살지 않는다면 들에 핀 장미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럭저럭 살다 가는 유한한 삶, 그것이 우리 순례의 목적일까?

 

 

 

 

 

 

 

 

2. 사물들에게도 자연본성적 사랑인 ‘운명’이 있을까?

 

 

 

그렇다면 사물 thing(사물이란 심리적 실체, 물리적 실체, 혹은 그 양자의 혼합물 자연 일반을 총칭한다)에게도 운명이 있을까? 모든 사물에게도 자기보존의 법칙이 있다. 우리는 사물의 자기보존의 법칙을 코나투스conatus의 의미 변천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①영혼이 물체로 향하는 움직임이나, 거기에 따른 물리적인 운동의 결과를 코나투스라 부른다.(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②사람이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그것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의 욕망의 동기는 코나투스 즉 ‘노력’의 원리에 따라서 육체가 스스로를 증대 시키려는 본성적인 경향이다(아리스토텔레스,)

 

③코나투스는 자연 본성적인 상하의 운동, 즉 중간의 위치에서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운동이다.(아우구스티누스)

 

④ 모든 물체를 오르내림을 하는 이 힘은 ‘amor naturalis 즉 자연 본성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다.(유다 레옹 아브라바넬)

 

⑤ 사물의 운동은 운동하는 물체를 감싸는 매체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특성, 즉 운동하기 시작하면 물체에 심어진 ’코나투스 Conatus‘에 의해서 유지된다(요하네스 피로포노스)

 

⑤임페투스 impetitus는 본성상 직선적으로만이 아니라 원적으로도 일해, 천체와 같은 물체에 일해 원운동을 시킨다.(쟌 뷰리단)

 

⑥신의 힘을 나타내고 있는 물질이 움직이려는 적극적인 힘 혹은 경향으로 코나투스 아 켄트로(conatus a centro)와 코나투스 레케덴디(conatus recedendi)가 있다. 코나투스 아 켄트로는 즉 중심으로 향하는 경향 원심력이자, 코나투스 레케덴디, 즉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가는 경향은 원심력을 나타낸다. (르네 대카르트)

 

 

⑦ 마음의 체인지 기능은 코나투스의 ‘노력’의 다양성에 있다. 감정을 운동의 시작으로, 의지를 감정의 총체이며. 이 ‘의지’는 물체의 ‘코나투스 Conatus’를 형성해, 그 물리적인 현상은 ‘사는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생물은 번창하기 위해서 평화를 요구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것과는 싸운다. 시간의 추이 중에서 운동하는 물체에 이용되는 ‘코나투스 Conatus의 척도’라고 하게 된다. 용수철 등의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예를 들면, 축소하거나 확장하는, 복원성의 힘이다.(홉스)

 

 

⑧코나투스 Conatus는 유한의 시간 안에 존재한다. 물체가 존속하는 한 코나투스 Conatus도 존속한다. 무엇도 외적인 원인이 없으면 파괴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다. 활동이 자유라는 것은, 그 활동이 실체의 본질이나 코나투스 Conatus로부터 생기고 있는 경우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이나 선택을 포함한 자연적 세계의 모든 사건은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에 따라서 결정되므로, 무조건으로 절대적인 자유 의사는 존재할 수 없다. 행복은 인간의 자기를 보존하려는 능력에 귀착한다. 코나투스 Conatus는 미덕의 기반이라고 특징지워지고 있다. 사람은 자신의 코나투스 Conatus에 반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슬퍼진다.(스피노자)

 

 

⑨나의 기본적인 생각 전체에 의하면, 이것은 모두 진정한 관계를 뒤집은 것이다. 의지는 제일의, 그리고 근원적인 것이다. 지식은 의지에서 비롯되고 의지의 현상의 도구로서 부속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아르투르 쇼펜하우어)

 

⑩신체에 관한 경우와 영혼에 관한 경우로 코나투스 Conatus를 구별할 수 있다. 신체에 관한 코나투스Conatus는 자력으로는 직선적인 운동을 할 수 있을 뿐이고, 한편 영혼에 관한 코나투스Conatus는 보다 복잡한 운동을 기억하는 것이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⑪인류는 상승하는 생명체들과 하강하는 생명체들이 풀 수 없게 서로 단단히 얽혀 있는 하나의 다양성이다. 나의 이론은 힘, 권력 의지Wille zur Macht가 제1의 원동력이고, 이 권력 의지에서 다른 모든 동기들이 나온다는 것이다.(니체)

 

 

코나투스는 통상 ‘노력하는, ~하려고 한다’라고 번역되는 동사 conor에서 유래하였다. ‘노력’이라는 개념을 스토아학파는 ‘임페투스’라는 말로 사용하고, 영혼이 물체로 향하는 움직임이나, 거기에 따른 물리적인 운동의 결과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했다. ‘코나투스 Conatus’의 동의어로서 토마스 아퀴나스나 스코투스 같은 신학자들은 라틴어 ‘우르트 vult’ ‘웨레 velle’ ‘압페티트 appetit’를 사용해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실제, 이 네 개의 단어는 모두 원래의 그리스어 역어로서 사용된다. 후에, 그 개념을 확장해, 생물 무생물에 관계없이 모든 물체에 적용했다. 원의, 노력, 충동, 경향, 성향, 약속, 의지를 의미하는 코나투스는 일찍이 심리학이나 형이상학에서 사용된 서술어로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을 말한다.

 

여기서 ‘사물 thing’이란 심리적 실체, 물리적 실체, 혹은 그 양자의 혼합물을 가리킨다. 특히 ‘코나투스 Conatus’는 생물의 본능적인 ‘사는 의지’를 가리키거나 임페투스 impetitus처럼 운동과 관성에 관한 여러가지 이론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자주 범신론자의 자연관에서 신의 의지와 묶어서 쓰기도 한다. 이 개념은 정신과 육체를 분할하거나 원심력과 관성에 대해 논의할 때에 분할되기도 한다. 코나투스는 ‘amor naturalis, 생명체의 자기보존 본능, 사물의 운명애, 자연의 본능적 사랑, 삶에의 의지에 해당하는 다양한 의미 변화를 낳지만, 공통적으로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의지 일반을 가리킨다.

 

 

 

 

 

 

3 .사도 요한과 안드레아에게 ‘오후 4시쯤’은 어떤 시간인가?(요한 1,35-42)

 

 

코나투스의 다양한 쓰임을 통해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에게 그 운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에게 운명이란 자기보존의 ‘amor naturalis 즉 자연 본성적인 사랑’ 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기 운명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우리는 요한, 1,35-42에서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이 장엄한 문장이 말하고자 하는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뜨겁고, 가장 치열하고, 가장 처절하고, 가장 첨예하고,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존엄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거룩하고, 절대 흠숭이라는 어휘가 제헌될 바로 그 운명을 받아들인 이들을 만나게 된다. 세례자 요한, 사도 요한, 안드레아, 베드로 그리고 예수님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사후적 추론이지만 알 수 있다.

 

서술어 중심으로 복음을 읽어보기로 한다.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눈이 독수리의 눈이 아니었다면, 그는 장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례자 요한은 걸어가는 예수님을 “눈여겨본다” 이 복음에는 두 번의 ‘눈여게 본다’는 서술어가 등장한다. 여기서 ‘눈여겨 본다’는 동사는 영혼의 깊이까지 간파해 어떤 이의 본질을 통찰하는 바라봄을 가리킨다. 이 ‘눈여겨 보는’ 행위 앞에는 ‘걸어가다-페리파테인’이 존재한다. 서 있는 세례자 요한과 걸어가는 예수님의 대조, 예수님의 저 걸어감은 골고타산을 넘어 아버지의 집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요한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제자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아는 스승의 말을 ‘듣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간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아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두 제자가 스승을 떠나 새로운 스승을 따라가는 신구약의 갈림길이자, 비정한 구세사의 여정을 보여주는 이중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던 제자들이 진짜 스승을 따라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세례자 요한의 퇴장은 그분의 죽음과 함께 복음에서 가장 비장한 장면에 해당한다. 여기까지가 세례자 요한이 구세사의 두루마리에서 담당할 운명이었다.

 

이제 구세사의 운명의 바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넘어간다. 스승의 말을 듣고 사도 요한과 안드레아는 곧바로 예수를 따라간다. 무엇을 찾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내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누구인가? 라는 지엽적 질문을 넘어 ‘신적인 사람의 특징’을 묻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헤메는 자이자, 찾아다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지가 그의 영혼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이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라고 묻는 이 질문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대화의 질적 깊이란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이에 와서 보아라.” 그래서 그들은 그분과 함께 묵었다

 

‘눈여겨보는’ 것만으로도 그분은 한 인간의 영혼의 상태를 간파했다면, 그분과 함께 묵었던 그 시간에 그들이 무엇을 바라보았을까 추론이 가능하다. 사도 요한은 그 감격을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라고 기술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우연히 만났던 시간, 장소, 나뭇잎의 흔들림, 물소리, 피어있던 들꽃들, 바람의 색깔, 하늘의 구름, 그날 입었던 옷과 두르고 있던 머풀러까지 기억하는 그런 운명적 각인의 때를 기술하는 사도 요한이 보인다. 그들이 운명의 결말을 알았더라면 그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저 오후 네시쯤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하늘과 땅이 닿아 있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 하루가 요한과 안드레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베드로에게 우리는 ‘구세주’를 만났다고 전한 그 부분에서 예수님의 두 번째 신적 정체성이 천명된다. 이 선언이 베드로를 예수님 앞으로 이끌게 되고 베드로로 하여금 인류의 교회. 그 수장이 될 운명이 맡겨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짧은 장 안에 구세사의 운명이 모두 담겨 있다.

 

운명이 없다고 생각해서 우연에 자기의 생을 의탁해 적당히 살다, 적당히 죽을 수도 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물보다도 더 나은 삶은 분명 아닐 것이다.

 

반면, 이것이 내 운명이구나, 라는 각성에 이르면 그것은 분명 장밋빛 인생은 아니란 것을 복음에서 보게 된다. 운명의 시작은 그렇게 낭만과는 거리가 먼 실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세례자 요한, 사도 요한, 안드레아 베드로, 심지어 예수님까지 그들 운명의 길을 걸었듯, 우리 역시 모두 우리 운명 앞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운명 앞에서 우연이라 스쳐갈지, 어떤 피땀을 흘릴지, 이를 갈며 칼을 갈지, 도를 닦을지, 아가페로 넘어갈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폭과 깊이에 의해 선택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부활의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운명을 수용하는 것이 죽음에 맞먹는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부활이 주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이자, 마음에 드는 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첫 제자인 사도 요한과 안드레아 사도에게서 확인하게 된다. 한사람은 예수님의 제자 중 천수를 누린 유일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엑스자형의 십자가형에 처하게 된 사람이다. 그럼, 단세포적으로 천수를 누린 요한 사도는 참 좋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안 사람이 자기 스승과 동료들이 모두 십자형에 처하는 상황을 낱낱이 지켜보면서,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이미 죽기 전에 죽은 사람이다. 죽음의 강을 건너간 사람이다. 더욱이 성서에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기질적 다혈질을 ‘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인의 기질적 측면, 다혈질을 가라앉히고 더할나위없이 냉정하게 빛과 피의 기록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눈여겨본다는 것은 사실 사람만 눈여겨본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운명을 눈여겨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저분이 구세주다, 라고 고백한 혹독한 대가를 그는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니체가 말한 대로 쓰려면 피로 써라, 라고 한 그 피로 쓴 기록에 해당한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자기 인생을 피로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기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매일 밤 ‘주님! 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는 임종기도를 하루의 마지막 기도로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시는 내일이 주어지지 않을 것처럼 사는 것, 그것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가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게 되는 것, 이것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운명이라고 선택한 것이 있다면, 아름답지만 사랑스럽지만 내려놓았어야 하는 다른 삶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우연과 운명이라는 말로 나눌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연과 운명이 나눠진다는 것은 엄중한 선택을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연중 2주 강론에서 오신부님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삶을 살다가(추종)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예수님의 만남을 우연이 아니라 운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은 사랑을 향한 운명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우연이 아니라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라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 되는 길이란 다름 아닌 ’사랑을 향한 운명‘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많은 우연 속에서 ‘사랑을 향한 운명’을 알아보는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 되는 것은, 그 운명이 ‘사랑을 향한 운명’이 되는 것은, 요한 사도가 즐겨 쓰는 각인의 시간, 오후 네시 쯤, 우리의 시야가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리지 않았을 때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우연의 산들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만남과 운명의 시작은 언제나 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바라봄의 시작은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우리가 진정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우리가 무엇을 진정 찾아야 하는지를 말해 준다. 우리가 그 찾고자 하는 것을 찾지 못했을 때, 우리는 영원히 찾아 헤메는 자, 목마른 자일 뿐이다.

 

또한 이 본다는 것은 사도요한의 눈처럼 한 번에 완성되는 바라봄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의심과 두려움을 넘는 베드로처럼 오랜시간이 걸려 완성되는 수락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의 바라봄이 안드레아와 사도 요한의 바라봄을 낳았고, 그들이 본 것은 다시 베드로의 운명을 낳았다. 진정한 바라봄은 자기 안에서 그 어떤 운명을 낳게 된다. 나의 오후 4시쯤은, 다시 누군가의 오후 네 시를 낳게된다는 것이다. 운명의 연쇄고리다. 그러므로 한 운명만이 한 운명을 알아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운명인 것이 또 다른 한 사람에게 운명이 아니라면 그것은 운명이 아닌 것이다. 운명은 사랑처럼 설득하거나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다. 애원하는 것이나 구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희미한 느낌의 뉘앙스가 아니다.  짝사랑이 아니라 함께 하는 분명한 사랑이다. 그래야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운명은 십자가이자 아가페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문정희 시인의 시 <한계령의 연가>처럼 눈오는 날 한계령에 한번 갇혔으면, 하는 낭만을 꿈꾸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일탈이거나 추억만들기다. 운명은 '~ 했으면' 이라는 가정법이 아니라, 이것은 나의 운명, 혹은 이 일은 나의 운명, 이라고 명사형으로 딱 끊어지는 단어다. 예수님과 운명적 조우를 하는 제자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운명은 심장의 중심부에서 흘러나온 거역할 수 없는 엄중한 현실이다. 운명은 사도요한과 안드레아가 세례자 요한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처럼 비정하리만치 냉철한 선택이다. 이것을 본능적으로 많은 시인들도 알고 있고, 사람들도 알고 있기에 감히 운명이란 단어를 쓰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적 사랑이나 일만 사랑인가? 단연코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랑은 저 운명적 사랑으로 수렴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물 한잔 건넨 사랑도 사랑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랑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런 '운명적' 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하여도 그 역시 귀하고 귀한 사랑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수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본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긴 시간을 보내면서 '오후 네시'를 체험한 사도지만,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다. 인류는 안드레아와 사도 요한의 체험처럼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한다. '눈여겨봄'의 '눈'의 시대에서 누군가 전하는 '진리'에 '귀기울여 들어야' 하는 '귀'의 시대 속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운명'으로 만나야 하는 인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이 쌓여서 더 이상 내 생에 우연을 쌓을 수 있는 방이 없을 때, 아니 우연에 의해 내가 내 삶 밖으로 쫒겨나왔을 때, 내가 나의 생에 의해서 죽음 쪽으로 조금씩 밀려나갈 때, 더 이상 우연이 내 집 앞을 지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연도 한계효용법칙처럼 유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삶이 더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생의 항아리에 포도주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새 술을 새 푸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장석주 시인이 <다시 첫사랑의 시절이 돌아간다면>면, 혹은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이런 시들이 절절이 이해가 되었을 때, 다음 생을 기약하자라던가, 산다는 것이 모두 그렇지라든가, 청춘을 스스로 반납한 것을 인류 보편의 문제로 돌려야지만 거울 앞에 선 자신을 감당할 수 있을 때, 괴테는 파우스트를 80이 넘어서 썼다는 것은 예외적인 심장의 소유자나 가능한 일이라고 바라볼 때, 우연과 운명은 그 누구도 누구에게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연과 운명의 결절점이 무엇인지 어렴프시 바라보게 된다.

 

우선, 우연과 운명의 결절점은 ‘눈여겨 볼 수 있는’ 영안 혹은 심안이 열려있는가의 여부에서 시작한다. 모든 우연은 모든 운명을 내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수많은 우연 속에서 영안이 아니라 본능이나, 욕망, 두려움, 불안, 베이컨이 말한 우상에 갇혀서 우연을 스치거나 재단하거나. 계산하거나, 판단하느라 우연 속의 운명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연과 운명의 갈림길은 사랑에도 타이밍이 있듯, 운명은 시간과 관련있다는 것이 우리가 운명을 때늦게 알게 되는 또 다른 이유다. 모든 운명은 예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운명을 받아들이는 시간 앞에는 언제나 이전 시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과 같은 시간의 분절이 있다. 같은 일을 하여도 이 의식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을 떠나야 예수님이라는 운명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시간을 반드시 거쳐야지만 자신이 무엇을 찾아 헤메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시간은 모든 것을 씻어내는 시간이고 우상에서 벗어나는 시간이다. 운명을 운명으로 알아보는 전제에 해당한다. 사도 요한처럼 단 한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감지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수없이 운명에 저항할 만큼 저항해 본 다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운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자기 생에 반복과 차이, 그 과잉의 상태를 감당한 후에 자신의 운명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우연이고 어떤 것이 운명인줄 알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사랑이 충돌할 때, 일을 선택하자니 사랑을 포기해야 하고 사랑을 선택하자니 일을 포기해야 할 때, 누구처럼 둘을 다 선택하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왜 운명 앞에서 머뭇거리고, 도피하냐고 물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영혼의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누구의 영혼의 길도 단죄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미련과 망설임, 고민과 갈등 그 모든 것을 운명처럼 끌어안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와 닮아 있다. 그래서 십자가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의 십자가인 셈이다. 누군가는 쉽게 고드디오스의 매듭을 끊듯, 일도양단하는 길을 자신은 그럴 수가 없을 때. 그동안 걸어온 길 역시 사랑임이 분명할 때. 사랑과 사랑이 충돌할 때 어떤 사랑이 운명이라고 적시할 수 있는지? 이 답을 누가 주는 것인지?그렇기에 어떤 것이 자신의 운명인가는 천번만번 자신에게 묻고 되물어야 할 수밖에 없는 십자가이기도 하다.

 

내가 만나본 수많은 임종자들은 의식이 있던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을 가장 후회했다. 왜 그럴까? 결국은 우리가 선택하든 안하든, 못하든, 우리는 사랑이라는 운명으로 이 세상에 한 생명으로 왔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사랑을 향한 운명’이라는 공통의 운명앞에 서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앞을 지나가는 ‘오늘’ 바로 그나 그녀가 나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었다면, 내가 그토록 만나려고 했던 바로 그 예수님의 분명한 지체였다면? 그것을 알아본다는 것은 인류에게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했던 철학자들이 바라본 ‘코나투스Conatus’ 자기 보존의 법칙에서 연유된 ‘삶에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도 요한과 안드레아처럼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언가 찾고 있을 때, 비로소 찾아질 수 있는 '오후 네시쯤' 이자, 그 오후는 '낭만'이 아니라 물릴 수도 철회할 수도 없는 이 땅에서의 순례 '현실'이라는 점이다. 

 

글을 마무리 하며,

 

하인리히 하이네의 운명, 아그네스에게 바친 「고백」이란 시를 부기한다.

 

땅거미 앞세우고 저녁은 찾아오고/물결은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바닷가에 앉아 하얗게 부서지는/파도의 춤을 바라보고 있자니,/내 가슴은 바다처럼 부풀어올랐다./그때 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나를 사로잡았다, 너의 아름다운 모습,/그 모습 내 주위 곳곳에서 떠돌고/어디에서나 나를 부른다,/어디에서나, 어디에서나,/세찬 바람소리 속에서나, 거친 파도소리 속에서나,/내 가슴의 한숨 속에서도./나는 가벼운 갈대를 꺾어 모래 위에 썼다:/"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하지만 심술궂은 파도가/그 달콤한 고백 위로 덮쳐와/그 말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나약한 갈대야, 먼지처럼 흩어지는 모래야,/사라지는 파도야, 난 이제 너희를 믿지 않겠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내 마음은 더욱 날뛴다,/나 이제 이 억센 손으로 노르웨이 숲에서/가장 커다란 전나무를 뽑아/에트나 화산의 불타는 분화구에/담갔다가,/불에 적신 그 거대한 펜으로/캄캄한 하늘에다 쓰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그러면 매일 밤 그 하늘 위에서/영원한 불의 글자가 활활 타올라,/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환성을 지르며/하늘에 쓰여진 그 말을 읽으리라:/"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참고]운명애: 이것이 나의 사랑이 되게 하라!(니체) | 길 위의 미사(Missa)

http://blog.daum.net/m-deresa/12389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