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다마스커스’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 What is Damascus' name for?

나뭇잎숨결 2021. 2. 5. 03:00

 

‘다마스커스’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 What is Damascus' name for?

-사랑은 스스로를 사유하지 않는다(알랭바디우)

 

 

 

 


1, 왜 DNA는 나선형 구조인가?
2. 사랑은 스스로를 사유하지 않는다(알랭바디우)
3.‘다마스커스’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 What is Damascus' name for?
   마르코1,21ㄴ-28/사도행전 9장 1~30

 

 

 

 

 

1. 왜 DNA는 나선형 구조인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단으로 불리는 바티칸의 브라만테가 지은 나선형 계단과 오스트리아 멜크 수도원(10만여권의 장서와 1,800권의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는 이 도서관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모티브가 된 곳)의 나선형 계단은 모두 달팽이처럼 나선형 구조를 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홍영남 역, 을유문화사, 2010)와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최돈찬 역, 궁리, 2006)에서 인간진화의 결정적 키는 우리가 갖고 있는 불멸의 코일, 혹은 이중나선이라고 부르는 DNA로 규정한다.

 

아름다운 것들, 불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은 왜 직선 구조가 아니라 점층적이고 반복적인 나선형 구조를 지니고 있을까? 이 질문은 다시 왜 우리가 하는 사랑은 직선이 아니라 돌고돌아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는 것처럼 그런 느린 구조를 지닐까? 왜 나의 심장과 타자의 심장이 만나는 것이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왜 사랑은 안전하지 않고 늘 위험을 수반하는가? 왜 사랑은 십자가와 죽음 너머에서 비로소 자신을 현시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이근화는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에서 반어적인 고백을 한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나를 사랑한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하얗게 비듬을 떨어뜨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아직 건너보지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 보지 못한 돌멩이들/아직도 취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이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는 거리를 운명의 거리라고 본 泰戈尔타고르는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世界上最遥远的距离」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생사의 거리가 아니라/내가 네앞에 서있어도/내가 널 사랑하는지를 네가 모른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내가 네 앞에 서있어도 내가 널 사랑하는지를 네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너를 미치도록 사랑함을 네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너를 미치도록 사랑함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참을 수 없는 갈망이 일어도 그것을 마음 속에 묻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참을 수 없는 갈망이 일어도 그것을 마음 속에만 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로 사랑함에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사랑하면서도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사랑에 저항할 수 없을 때조차도 전혀 관심이 없는척 위장해야 한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두 나무 사이의 거리가 아니라/그것들이 같은 뿌리에서 자랐음에도/바람이 불 때 서로에게 가지를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가지들이 서로 의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두 개의 별이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두 별 사이의 궤도가 아니라/두 궤도가 만난 순간에도 아무 곳에서도 서로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만나는 순간에도 찾을 곳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그들이 만나기도 전에/함께 있지 않도록 운명지워졌다는 사실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물고기와 새의 거리다.//하나는 하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금희는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소설에서 이 머나먼 거리, 타자와의 관계를 마치 중력파처럼 ‘시공간의 잔물결(Ripple)’이 도달하는 것만큼, 마치 1억3000만 광년 떨어진 은하(NGC 4993)에서 중성자별 2개가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빠르게 충돌하면서 발생한 중력파重力波Gravitational Wave를 감지하는 것처럼 느리고 느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 나날의 일상 역시 관계의 충돌이나 비껴감(그리고 기타 등등) 속에서 미세하게 시공간을 진동하고 왜곡하는 모종의 파波를 생성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그 파장의 미세한 누적이 임계치를 넘길 때 우리의 몸을 기울이고, 삶의 좌표를 슬그머니 옮겨놓는다”

 

 

김금희는 ‘아주 없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는 기억들, 그로부터 흘러나온 미세한 파장이 건드리는 ‘보통의 시절,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중력파가 십삼억 광년 전에 생성되어 지금의 우리 눈에 띄었다는 사실처럼, “우리 나날의 일상 역시 관계의 충돌이나 비껴감(그리고 기타 등등) 속에서 미세하게 시공간을 진동하고 왜곡하는 모종의 파波를 생성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라고, 그 파장의 “미세한 누적이 임계치를 넘길 때 우리의 몸을 기울이고, 삶의 좌표를 슬그머니 옮겨놓는다”고. 그것이 존재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즉 삶의 자리를 형성하는 비의(秘義)라고 바라보았다.

 

 

 

 

 

오스트리아 멜크 수도원의 나선형 계단, 도서관에서 성당으로

 

 

 

 

2. 사랑은 스스로를 사유하지 않는다(알랭바디우)

 

존재의 거리, 혹은 삶의 비의(秘義)를 알랭바디우는 『사랑예찬』(조재룡 옮김,길, 2010)에서 그동안 인류가 추구했던 사랑을 크게 Ⓐ융합적 사랑, Ⓑ희생적 사랑, Ⓒ상부구조적 사랑으로 보았고,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 “사랑은 스스로를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도출한다.

 

이를 바라보기 위해 “하데비치를 위한 사랑의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한 시론(試論)” http://blog.daum.net/m-deresa/12389757에서 인용했던 사랑의 담론들을 다시 읽어본다.

 

 

①욕망이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결핍이요, 자기가 가지지 않는 것을 주는 것이다.(라캉)

 

②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결코 사랑하지 않았을 사람도 많다.(라 로슈푸코)

 

③사랑은 고통으로 죽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 순간에 벌써 죽었을 것이다(스탕달)

 

④내 힘은 내 약함에 있다...당신을 결코 붙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다오(릴케)

 

⑤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장 보드리야로)

 

⑥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는 속담은 거짓말이다. 사랑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뜨게 하며 명석하게 만든다. 나는 당신에 대해 당신에 관해 절대적인 앎을 갖고 있다.(롤랑 바르트)

 

⑦가우디움(gaudium)은 현재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거나 장차 소유할 것이 확실시 될 때 영혼이 느끼는 즐거움이라면, 래티시아(laetitia)는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없을지라도 인격적으로 명랑한 상태를 유지하여 즐거움을 조절하려는 것을 말한다.(라이프니치)

 

⑧만약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써 자유로이 선택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라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사실 사랑애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기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

 

⑨사랑하는 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연인의 변덕이나 약점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얼굴의 주름살과 기미, 낡아버린 옷이나 기우뚱거리는 걸음거리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오래 사정없이 그를 사로잡는다...우리의 느낌은 사랑하는 연인의 그늘진 주름살과 품위를 잃어버린 몸짓, 눈에 안 띄는 육체의 결점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감각은 은신처인양 안심하며 움츠린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말하자면 결함 많고 흠 있는 곳에 사랑을 경애하는 자의 화살처럼 빠른 동요가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발터 벤야민)

 

⑩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헤겔)

 

⑪사랑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결합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알랭 바디우)

 

⑫가장 감미롭고도 취하게 만드는 최상의 포도주여...마시지 않고 또 결코 마시지 않을 것에 취해 버린 영혼이여!(로이스부르크)

 

⑬이 세상의 모든 것들, 나를 사로잡기엔 너무나 작디작은 이 모든 것들/ 나는 이 모든 것들에 비해 너무나 위대합니다./하느님의 그 무한함 가운데 나는 창조되지 않은 것에 이릅니다./ 나는 그것에 다가가 만져봅니다./ 그것은 나를 이 세상의 어느 광대함보다다 더 광대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다른 모든 것은 나에게 그저 좁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잘 아십니다. 당신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사랑의 광기여!/그 축복받은 운명이여!/만일 이를 알아차렸다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을 겁니다./이것은 나누어진 서로 다름도 하나이게 합니다./진리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사랑의 광기는 쓰디 쓴 것도 달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의 광기는 낯선 이도 벗으로 만들어 버립니다./사랑의 광기는 작고 초라한 이도 높이 올려 자랑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하데비치)

 

벤야민의 제자인 알랭 바디우는 헤겔의 합일에 대한 관점을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 둘 너머에 설정 될 수 있을 뿐이며,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인 조건 안에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라고 본 것이다. 차라리 비-관계, 탈-관계라고 보는 것이 관계의 실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견해다. 사랑은 끝끝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 하나를 주장하는 것에는 하나여야만 한다는 망상, 융합이데올로기에 갇힌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바디우는 “사랑은 스스로를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도출해, 네 가지의 전제를 제시한다. Ⓓ경험에 대한 두 입장이 있다Ⓔ두 입장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제3의 입장은 없다Ⓖ오로지 하나의 인류가 있다, 라는 이 전제들은 우리가 왜 직선으로 사랑의 순례를 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어떤 단초를 제공한다. 마치 중력파처럼 먼 거리까지 방해없이 전파될 수 있지만, 그만큼 측정이 어렵다는 것, 이는 결론적으로 사랑은 ‘전유되지 않고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다름의 하나라는 점이다. 당신이 침묵할 때 나는 말하고 싶어하고, 내가 침묵할 때 당신은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우리는 늘 조금씩 비껴있고,  자주 어긋난다는 것이다.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격, 성향이 우리를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우리 각자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성격이 운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씨줄과 날줄처럼 피륙을 짜는 노동과 같으며, 그 피륙의 무늬는 같지 않고 색도 같지 않다. 바디우는 우리는 결코 동일자로써의 하나가 될 수 없음에도 사랑이라는 원 안에서 두 사람이 편입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랑이 지닌 자유의 혁명적 성격임을 강조한다. 이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종교적 지침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의 본원의지에 해당한다. 이때 우리는 사랑은 ‘전유되지 않고 동일자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그토록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으로 ‘오늘’을 살지 못하게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바라보게 한다. 동일자의 '하나'가 아니라 다름의 '하나'를 원하기까지, 사랑의 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성서에서는 '더러운'으로 번역된 형용사 '아카타르시아'(akatharsia; uncleanness; impure)와 '거룩함'으로 번역된 명사 '하기아스모'(hagiasmo; holiness)의 거리에서 보여준다. 인류는 전자의 상태에서 후자의 상태로 이동하는데 마치 중력파重力波Gravitational Wave를 감지하는 그 만큼 느린 영적진화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다마스커스’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 What is Damascus' name for?

 

 

마르코복음사가가 전하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과 강론에서 전하는 ‘오늘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공통으로 ‘새로움’이 상징하는 ‘창조성’과 ‘권위’가 상징하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가파르나움의 이 전언은 바오로사도의 회심사건이 일어난 다마스커스 혹은 다마스쿠스의 체험과 연결되어 있고, 오늘 우리, 믿음의 여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복음의 의미를 더 확장해 본다면 성전정화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코복음은 모든 복음의 시작이자, 1장은 예수의 공생활 시작의 첫 포문에 해당한다. 특히 복음사가는 종군기자처럼 사건에 형용사와 부사를 배제한 단문 서술을 지향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묵직함이 전해진다. 

 

여기서 초점은 ‘말’과 ‘말씀’ 으로 나누어진 사건이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에 해당하는지, 그 분리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란 분리가 극복된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마스커스’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 What is Damascus' name for?>

 

이 질문은 복음에서 전하는 가파르나움의 다섯 주체- 예수님, 율법학자, 군중들, 더러운 영이 걸린 사람, 복음사가-의 시선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고, 이 다섯 주체가 궁극엔 어느 주체로 수렴되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이를 바라본다는 것은 곧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이 다섯 주체는 다름 아닌 ‘오늘’ 우리 인생 순례의 다섯 행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이 지구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살게된 이후, 인간의 문제는 언제나 ‘사랑’이냐 ‘분리’냐에서 파생된 것들이었다. 매너리즘, 멜랑콜리아, 매트릭스, 동어반복, 두려움, 이런 방어기제들이 분리를 공고히 했고, 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체적 대상인 바라사이파나 사두가이파로 통칭되는 율법학자들과 ‘더러운 영’이라고 칭해지는 것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성서에서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는 그 어떤 대상들과도 우리는 무관하지 않다는 출발선에서 성서를 묵상해야 한다. 이것이 성서를 읽는 기본자세일 것이다.

 

그들과 우리가 무관했다면 이 세상은 이미 천국이었어야 하고, 우리가 들은 말이나 했던 말들은 늘 새로운 변화를 수반했어야 했다. 성서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감도 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율법학자는 물론이거니와 더러운 영 조차도 우리의 인생행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과 무관했다면, 어떤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어야 했다. 나 역시 변한 게 없고, 누군가도 바꾸지 못했다면, 전례나 기도 중에 하는 말들은 동어반복의 말을 했을 뿐이지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종교인이지 신앙인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율법학자나 더러운 영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전제하에서만 우리는 나 자신에게 필요한 변화가 무엇인가를 묻게된다고 할 수 있다. 변할게 없다면 무엇을 질문하고 성찰하고 묵상하겠는가? 변할 것이 없다면 신앙은 왜 필요한가?

 

이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진리를 전하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아니 왜 자주 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단적으로 율법학자들은 진리를 알지도 못했고 진리를 전하지도 못했다면, 더러운 영은 적어도 진리는 알았으나 그 진리를 전할 수는 없었다. 전자와 후자는 모두 그분과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율법학자들에게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이미 율법학자가 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된다. 성서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와 무관하다면 굳이 성서를 묵상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추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1장에서 성전, 즉 회당에서 일어난 더러운 영에 관한 사건을 5장에 이르면 성전 밖, 세상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의 존재를 ‘떼’로 비유하여 제시한다.

 

가파나움의 사건은 왜 모든 믿는 이들의 사건이라 할 수 있을까?

 

바오로 사도 역시 다마스커스의 체험 전에는 마르코복음에서 전하는 율법학자들처럼 하느님을 알지도 못했고 하느님을 전하지도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그 누구보다 열절했고 열렬했다. 그 열절함과 열렬함이 하느님 나라와 너무나 무관하다는 것, 우리는 여기에 멈춰서야 한다.

 

나의 열절함과 열렬함이 하느님과 무관한 것은 아닌가?를 물어야 한다는 엄중함이다.

 

성서에서 '더러운'으로 번역된 형용사 '아카타르시아'(akatharsia; uncleanness; impure)는 하느님에게 속한 이들에게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부정을 가리킨다. 그 반대의 단어 '거룩함'으로 번역된 '하기아스모'(hagiasmo; holiness)는 하느님께 속한 모든 존재의 기쁨을 가리킨다.

 

이는 사도행전 9장 1~30에서 바오로의 회심사건 안에서 더러움이 거룩함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확인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게 된다. 바오로 회심 사건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진리를 전하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어떻게 나란히 동행하게 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표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사울로는...길을 떠나 그가 다마스커스에 다가가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빛이 쏟아져 내려 그를 두루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지면서 자기에게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니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도시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하일을 네게 일러 줄 것이다” 사울로는 땅에서 일어나 자기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마르코복음 1장과 사도행전 9장은 4개의 대응구조로 전개된다

 

(1)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A)-----------------당신은 누구십니까?(B)

(2)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십니까(A)------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B)

(3)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A)----네가 할 일을 일러 줄 것이다(B)

(4)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A)--------

                                      ---그는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B)

 

(1)은 예수님의 신원의식에 대한 앎/모름의 상황이다. (2)는 예수님이 존재 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 영적관계론이다. (3)은 인간 각자가 지닌 소명에 관한 것이다. (4)는 영적인 사건들을 왜 몸으로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1)의 상황에서는 앎/과 모름은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진리의 진리‘값’에 관한 것이다. 진리는 말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에네르게이아energeia’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 하더라도 그 앎이 진리일 수 있는 것은 진리값을 가질 수 있을 때 뿐이다. 말이 아니라 이루어내는 힘, 어령,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권위를 찾는,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일에 불리움을 받은 것을 직업이 아니라 소임,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훔볼트(Humboldt)는 언어의 에르곤(ergon) 정적인 측면보다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 언어의 동적인 측면이 더 중요한 연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본 언어학자다. 『훔볼트(하)(대학고전총서 22)』, 신익성,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2)는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와 시간에 관한 근원의식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들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주재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신앙한다는 것은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유는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유는 언변이 아니다. 사유는 바라봄이다. 믿음은 사유를 전제로 한다. 관계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빛과 어둠,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누구에 속한 것인가?를(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박찬국, 그린비, 2014)

 

(3)은 진리값과 생명주재성을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소임들이 있다. 소임은 타자에게 하는 봉사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는 수락의 행위다. 그 소임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말과 말씀이 분리되었을 때다. 마음에 끊임없이 소음을 야기하는 것들, 마음과 몸과 영혼을 분리시키는 것들에 우리가 매여있을 때이다.

 

(4)에서 그렇다면 대관절 왜 몸인가? “왜냐하면 몸만이 쓰러지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만이 만지거나 만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정신”은 단지 완전히 그 자신에게 닫힌 현존의 형식적이고 공허한 지표들만을 제공한다. 몸은 이 현존을 개방한다. 그것은 이 현존을 현재화하고 바깥에 내놓는다. 몸은 그것을 그 자신으로부터 떼내고, 그 사실을 통해서 다른 몸들과 함께 그것을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사라진 이의 진정한 몸“이 된다. 그때 우리는 세계와 떨어져서. 타자를 전유하려고 하지 않고 동일화하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 - 몸의 들림에 관한 에세이』, 이만형,정과리 공역, 문학과지성사,2015http://blog.daum.net/m-deresa/12388801)

 

그런 맥락에서 카파르나움(마르코1,21ㄴ-28)과 다마스커스(사도행전 9장 1~30)에서 일어난 사건은 동일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믿음의 사건도 동일 사건에 해당한다. 이 사건의 완성자는 그분이다. 즉 말이 아니라 말씀이 되는 사건이다. 말의 품위, 말의 권위를 되찾는 사건이다.

 

가파르나움과 다마스커스에서 일어난 사건이 왜 우리에게 일어나는 동일 사건일까? 우리에게 누군가가 종교적인 율법학자라고 한다면 분노하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엘리트집단이었으니까 그냥 넘겨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자라고 한다면 그 분노의 크기가 대단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온통 세상의 소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끊임없이 자기 마음에 이 세상의 소음을 계속 주입시키고 있다면, 누군가로부터 변화도 없고 누군가에게 변화도 줄 수 없는 그런 존재라면, 그로인해 몸과 마음과 영혼이 분리된 존재라면, 더러운 영에 지배당한 존재가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오신부님의 연중4주 강론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인지를 삶으로 보여준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안 사람들이고, 배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새와 같이 답답한 시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루하루가 바뀌면 삶 전체가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억 속에 묻어두어야 할 가르침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오늘 우리가 받은 일용할 양식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받을 수 있는 그 마음이 아닐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 행위들. 그 사랑은 우리가 완성하고 싶은 큰 사랑의 그림 중, 퍼즐 한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아주 작은 행위일 수 있다. 너무 작아서 나에게는 늘 목마름이고 상대에게는 전달되지도 않는 그런 사랑일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은 우리에게 무엇이고 ‘삶(사랑)’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이 우리 순례의 동반자인지도 모른다. 그때, 바오로 사도가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던 그 이유, ‘다마스커스’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 What is Damascus' name for?에 대한 그 답이 진정한 ‘사랑’ 이었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왜 그 사랑은 그렇게 큰 기쁨과 큰 고통이라는 모순에 쌓여있는가를.

 

참고.‘오늘’이라는 ‘언제’, 그 웜홀 awormhole 혹은 인터페이스 interface http://blog.daum.net/m-deresa/12389705 한낮의 사랑,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 http://blog.daum.net/m-deresa/12389508

 

 

글을 마무리하며 김승희의 「하나를 위하여」를 읽어본다.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살았던 것들 중 /그 중 아름다운 하나가, /슬펐던 것들 중 /그 중 화사한 하나가, /괴로웠던 것들 중 /그 중 순결한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많은 길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길을 버리고 싶고 /더 많은 꿈을 지우고 싶고 /다만 하나의 길과 /다만 하나의 꿈을 통하여 /물방울이 물이 되고 /불꽃들이 불이 되는 /그 하나의 비밀을 알고 싶을 뿐이다.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그 하나에 닿기 위하여 //나는, 하나 하나, 소등 연습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가로등이 다 꺼진 어둠 속으로 /솜처럼 착하게 다 적셔져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타오르는 /하나의 봉화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