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렌트talents, 내가 ‘나인 것’이 너무 행복해서, 네가 '너인 것'이 너무 행복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연 중 제 33 주 일 (가 해) 2020. 11. 15. Matthieu. 25,14-30]
참고
1. 마태오 25, 14-30/ 루카 19.11-28
2. 구스타프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조성기 역, 김영사, 2007
3.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조대경 역,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4. 자크 라캉, 『세미나1』, 맹정현 역, 새물결, 2016
5. 데카르트, 『방법서설』, 김붕구 역, 박영사, 1974
6. 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김치수&송의경역, 한길사, 2001
7. 롤랑 바르트 , 『사랑의 단상』, 김희영, 동문선, 2004
오타수정중인 글입니다-----------------
1.
우리는 언제 ‘나인 것이 행복하고 너인 것이 행복한가’
오늘의 주제를 풀어가기 위해, 먼저 행복한 이들의 코기토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의 철학적 명제이다. 이 명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생각하는 나만이 신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신을 증명할 수 있다는 신학의 출발점으로 보았다면, 데카르트는 신으로부터 독립된 주체로서 이성을 통한 합리론을 수립하여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만이 고유한 주체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가능태로 보았다. 라캉은 인간은 결핍과 욕망의 무의식적 존재로 주체의 자리에는 타자를 모방하는 ‘틈’을 가진 사이비 ‘나’가 존재할 뿐이라고 바라보았다.
‘탈렌트talents’와 연결해서 인류의 자기이해의 매트릭스(자궁, 모체, 행렬, 바탕matrix)는 크게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라캉의 범주로 나뉘어진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만이 나를 알 수 있고 그 때만이 신을 알 수 있다고 보는 관점, 인류가 던진 모든 명제의 진리치를 의심하는 주체만이 진정한 주체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관점, 인간은 결코 타자를 초월해 온전한 주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는 욕망이론의 관점. 나라는 주체가 어떤 주체이든 자기능력(한계)을 안다는 것은, 자기실현의 실마리이자, 이것은 생명이해의 출발점일 것이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탈렌트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이에 대해 ‘악’, ‘게으름' '바깥 어둠 속에 내 던져진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인구분포도(70억~75억)를 활용해 인류의 5%는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90%는 자기 탈렌트를 어렴프시 알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으며, 5%만이 자신의 탈렌트를 분명히 알고 실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데이비드 호킨스 같은 영성가들은 인류의 0.4%만이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탈렌트란 궁극에 사랑의 능력이므로) 이 0.4%가 인류의 자멸을 막고 있다는 추론까지 하고 있다. 탈렌트는 한 인간의 자기실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운명과 연결되는 공존의 에너지라고 바라본 것이다.
누가 얼마나 큰 탈렌트를 받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왜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에 선물로 주어진 탈렌트를 실현하지 못하는가는 인류 공존의 숙제라 할 수 있다. 탈렌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고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유성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탈렌트의 장애물을 적시하고 있는 몇 개의 관점들은 읽어보기로 한다.
①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 까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을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한다.(롤랑 바르트)
②사랑에서 우리의 행복한 연적은, 말하자면 우리의 적은 우리의 은인이다. 그는 우리에게 무의미한 육체적 욕망만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거대한 가치를 부여하게 하는데, 우리는 이 가치를 육체적인 욕망과 혼동한다. 모든 욕망은 간접화된 욕망이다.(르네 지라르)
③한 인간의 역사는 (인류라는)집단 무의식의 정체를 보여준다. 우리는 어릴 때의 기억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가 전해준 기억과 인류가 전해준 기억에 의해 페르소나(persona를 만든다. 그러므로 나의 생애는 집단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칼 구스타프 융)
④누구든지 사랑하게 되면 겸손해진다. 말하자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자아도취증의 일부분을 저당잡힌 것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깊이 바라보고 먼저 자신에 대해서 배워라. 자기 영혼에게 배우기 위해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꿈의 해석은 무의식의 세계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그 무의식 속에는 리비도의 억압기재가 있다.(지그문트 프로이트)
⑤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며,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존재한다. (자크 라캉)
①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질투의 심리학>은 카인과 아벨의 형제의 비극 그 원천에 대한 문학적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프루스트, 괴테, 휠덜린 등의 문학에서 질투는 대타자의 상실에 대한 어떤 두려움에서 그 원천을 보고 있다. 사랑을 독점하려는 배타성에 기반을 둔 질투는 열등감의 외적 투사에 속한다는 점에서 자기 긍정의 탈련트와 대척점에 있는 심리적 기재라 할 수 있다.
②에서 탈렌트를 실현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간접회된 욕망’이라고 진단한 르네 지라드는 이를 형이상학의 질병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욕망의 대상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와 가까이 있을 때 그 전염성이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 병은 암처럼 자신이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불치병이자 전염성이 강해서 인류의 집단무의식으로 확산된다고 본 것이다.
③융은 인류의 두려움의 기저를 담당하는 것이 <페르소나>인데, 이 페르소나가 사회화를 시키는 요인이자 집단 히스테리를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융은 자신의 저술들은 자기 생애의 정류장이라 여겨질 만하다고 자평하며 그것들은 자신의 내적 발달의 표현이자 인류정신사의 궤적이라고 보았다. 무의식의 내용을 탐구하는 일은 삶을 만들고 그에게 변환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보았다.
④프로이트의 관심은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인간의 정신에는 무의식이 있으며 무의식 속으로 깊이 억압된 것이 도착증과 신경증 같은 병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대까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중요시하여 데카르트적 사유가 압도하던 시대에 인간 무의식의 탐구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든 혁명적 사건이었다. 인간의 정신체계는 <이드-자아-초자아>라는 3중 체계가 있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기쁨과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사회화를 명분으로 본능을 억압했을 때, 인간은 삶의 본능과 죽음에 대한 본능이 뒤섞인 상태를 표출된다고 보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라고 보았다.
⑤라캉은 데카르트와 융과 프로이트를 동시에 뒤집으며 스승 프로이트의 단자화된 무의식 이론을 받아들였으나 인간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었다는 점에서, 욕망을 사회적 구조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라캉의 욕망 이론은 융처럼 집단무의식은 아니지만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며,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일 뿐으로 인간은 영원히 ‘주체’의 자리를 그리워할 뿐 다가가지 못한다고 보았다.
위의 이론들은 모두 인류가 자신을 고유한 <주체>로 인식하는 데 장애를 초래하게 만든 그 원천을 인간의 내적 원인과 인간의 외적 원인에서 동시에 찾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 원인의 공시적 측면(욕망의 구조화)과 통시적 측면(집단무의식)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이해에 대해 충돌하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탈렌트는 개인에게 주어진 능력인데 이 능력이 집단의 무의식이나 구조적 힘에 의해 실현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2.
탈렌트는 인류 모두에게 획일적인 능력과 같은 크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탈렌트를 바라볼 때 인간을 개별화된 <주체>이론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런데 탈렌트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가 개인의 각성에 영향을 주는 ‘두려움’이고 그에 대한 평가가 ‘악과 게으름’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았다면, 탈렌트는 개별적으로 주어졌지만 그 실현여부는 집단무의식으로부터 벗어나야지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정신의 탈출기Exodus라 할 만하다.
⑥“세 번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악’하다고 언급한 부분에 주목하게 되는데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25절)라며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종을 과연 ‘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유의해서 보면 심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받은 한 탈렌트를 그냥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24-25절) 이 대답은 현실에 대한 부정적 판단과 왜곡이 ‘악’임을 알려줍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사실과 다른 거짓과 오해가 모든 문제를 발생시킨 악의 근원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완고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심지 않고 뿌리지 않는) 인색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고, 동시에 그러한 왜곡은 근거 없는 공포로 이어집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이기적 보신(保身)주의가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게 하는 무능함과 비굴함을 갖게 한 것인데, 이처럼 불합리하고 부당한 공포가 유혹과 유감의 실체가 됨을 알려줍니다.“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탈렌트를 모르는 이들에 대한 김혜윤 수녀님의 통찰에서 “주인에 대한 왜곡은 근거 없는 공포로 이어집니다/ 주인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이기적 보신(保身)주의가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게 하는 무능함과 비굴함을 갖게 한 것인데/ 이처럼 불합리하고 부당한 공포가 유혹과 유감의 실체”라고 하였을 때,
우리는 마태오 25, 14-30/ 루카 19.11-28에서 말하고자 하는 탈렌트나 미나에 관해 네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⑦‘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탈렌트에 대한 첫번째 왜곡, 그 중심에는 탈렌트를 주신 분에 대한 뿌리깊은 '두려움'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구약과 신약이 갈라지는 기점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두려움의 하느님, 공포의 하느님에 대한 집단무의식은 ③에서 구스타브 융의 통찰대로 인류에게 전수된 신의 모상에 대한 왜곡으로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해당하는 진선미에 대한 공포에서 유추될 수 있다. 또 ⑤에서 자크 라캉이 바라본 대로 인간에게는 언어처럼 구조화된 가짜 욕망이 내재한다는 것이다. 공포와 가짜 욕망은 주체의 자리에 <나>를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자기의 탈렌트를 수락하고 안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무엇인지 안다는 데 그 출발점이 있다. 이것은 주체의 문제이자 믿음의 문제로 넘어간다. 공포와 주체의 상실이 표출되는 것이 ①에서 롤랑바르트가 바라본 <질투의 심리학>이자 ②에서 르네 지라트가 바라본 <간접화의 욕망>을 필연적으로 낳는다는 점일 것이다. 하느님을 담지 않은 그 마음에 다른 것이 담기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카인과 아벨의 비극이다.
⑧‘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의 달렌트를 쓰지 않은 것에 ‘악과 게으름’라는 평가가 붙는 이유에 대한 성찰이다. 자신의 탈렌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왜 악이고 게으름인가? 달렌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과 주님의 관계가 무엇인지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을 고백하고, 그 고백대로 사는 것과 같다고 했을 때, 고백은 했는데 고백대로 살지 못했다면 그것은 주인의 이름은 알지만 그대로 살아내지 못한 것과 같다는 이름 사칭의 의미일 것이다.
많은 영성가들은 인간에게 악과 죄가 있다면 그것은 <경험하지 않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관념론에 대한 지적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사랑을 아는 것과 사랑을 사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라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칠죄증’에서 말하는 영적 게으름에 기인한다는 지적이다. 우리 모두는 집단이 전수한 그릇된 가짜 진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영적으로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가진 존재다. 탈렌트의 수락은 영혼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영혼의 소리를 듣는 것에 장애를 주는 것들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 게으름이 현실세계의 고리대금업자보다 더 나쁜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온다는 신랄한 지적일 것이다.
⑨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알고, 그 능력을 발휘하며 이 세상 순례를 했을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가에 대한 비유의 이 말씀은, 달렌트는 바로 그분이 우리 생에 주신 큰 선물임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순례는 빈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은 탈렌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이 삶에서 실감하는 바로 그 충만한 기쁨에 관한 것이다. 내가 나인 것이 너무 행복해서, 네가 너인 것이 너무 고마워서, 그 무엇도 질투하거나 가짜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삶, 그 기쁨과 행복이 넘쳐서 표정관리를 해야 할 정도까지 이르렀음에 관한 상찬이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주었는 데 행복하지 않은 자녀를 두었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할까? 나는 나의 두 자녀가 그들의 삶이 너무 행복해서 나를 잊고 살기를 바란다. 나도 내 삶이 너무 행복해서 그들을 까마득히 잊고 살기를 바란다.
⑩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대부분의 성서저자는 인류 스스로 초래한 삶의 결과들을 주인의 심판으로 치환해서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라캉이 바라본 대로 우리의 욕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맥락과 같이한다. 우리가 탈렌트를 받아들이고 살지 못한 결과는 사실 이 세상 순례에서 지옥체험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데 그 행복이 온전하겠는가? 나와 그분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데 행복하겠는가? 늘 누군가의 욕망을 모방하는, 욕망조차도 선택하지 못하는 이들이 자신의 탈렌트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삶은 ‘바깥 어둠에서 내던져진 존재’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렌트는 이 세상 순례의 여정에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 자산, 기쁨과 행복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예외없이 자신의 탈렌트를 알고 있으며, 그래서 삶이 풍요롭다. 퐁요의 비결은 내가 나인 것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너도 너인 것이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행복이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삶으로 초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에 끌리고 행복에 끌린다. 그래서 삶은 그 자체로 초대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내게로 끌려온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복음 전파는 그냥 받은 탈렌트대로 사는 그 삶일 것이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탈렌트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첫 걸음이다.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네게 사람이 몰려올 것이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탈렌트는 데이비드 호킨스나 디펙 초프라 등 인류의 선각자들이 바라본 <풍요로움의 법칙>, <끌어당김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3.
탈렌트는 사랑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도 두려움이 있다. 사랑의 시작은 감성과 정서적 차원이었지만 사랑이 깊어져 삶으로 넘어설 때 강한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완성시킬 수도 있다. 사랑도 탈렌트도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예컨대 한 엄마가 찻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자기 아이가 차에 치는 순간을 목격했다고 하자. 그때 그 엄마가 어떤 행동을 할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엄마는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그 한 생각밖에 없다. 평소에 자신이 다리가 아프다는 사실도, 자신이 달리기를 못한다는 사실도 잊는다. 오직 아이를 향해 차보다 빨리 돌진해 차쪽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 아이를 안고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아예 차를 밀어버린 엄마들도 있다. 두려움이 더 깊은 사랑과 닿을 수 있다는 극단적 예이다. (성서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이 365번 나온다고 한다. 두려움에 대한 고찰은 더 깊이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탈렌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자신의 탈렌트가 무엇인지 각성되는 시기에 강한 현실의 공허 혹은 좌절, 상실, 허무를 맛보기도 한다. 신에게 자신의 삶을 내 맡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는 시간이다.
Ⓑ그 과정 중에 열망의 정체와 열망의 방향을 잡게되는 몇가지 상징적인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자유의지로 탈렌트를 선택하게 되는 시기에 신이 준 암묵적인 싸인이다.
Ⓒ 이것이 자신의 탈렌트라고 어렴프시 인식되는 순간에, 어떤 액션에 대한 강한 저항이 주어진다. 주위의 반대를 비롯해서, 외적요인들에 의해 일의 중첩을 통해서...등등... 탈렌트라고 생각하는 어떤 일들, 해야할 이유와 해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공존하는 시간이다.
Ⓓ 그 시기를 거치면 '불가항력'이 무엇이지 알게된다. 하늘이 준 탈렌트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주변사람들까지 저것이 저 사람의 탈렌트라고 인식해주는 시간이 되면, 강한 내적 훈련이 시작된다. 탈렌트의 본질을 실현하려는 강한 열망을 갖게 되는 시간이다.
Ⓔ 탈렌트를 확장시키는 것은 영적 부지런함의 결과다. 그 부지런함의 결과는 엄청난 결과들을 이끌어낸다. 기적체험이다. 그래서 탈렌트를 사장시킨 사람에게 ‘악이고 게으름’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영적 성실함만이 본인이 받은 탈렌트를 지속시키고 확장시키는 힘이기 때문이다.
Ⓕ 이런 시기를 어느 정도 거친 후에 매너리즘이라는 자기 안의 복병을 만나게 된다. 휴식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 걸어가기 위해서, 끝까지 걸어가기 위해서 충천하는 시간이다. 총체적으로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점검하는 시간이고, 탈렌트를 가장 완벽하게 실현하는 방법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이고, 이 때 영원히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 휴식기를 거치면서 탈렌트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입장에서 탈렌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인류 공존의 의미까지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를 알게 된다. 자기실현을 위해서 뿐 아니라 감히 인류를 위해서라는 생각까지 들면서 소화데레서 성녀가 자기 소명에 응답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겠다는 것, <최소-최대 법칙>을 공감하게 된다.
Ⓗ 그 모든 과정 중에 어떤 탈렌트를 얼마나 받든, 그것은 결국 '사랑'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라는 표현은 사랑이 없는 상태의 삶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탈렌트는 사람과 삶을 사랑하라는 선물인 셈이다. 사랑할수록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사랑의 법칙이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어본다. 불가항력적인 시간을 통과할 때 파블로 네루다의 <시>만큼 위로를 주는 시는 없다. 여기서 네루다가 말하고자 하는 <시>는 사랑일 수도 있고, 탈렌트일 수도 있고, 시일 수도 있다.
시(詩)
-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流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 <네루다 시선>(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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