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un amour inexprimable)
-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정신을 다하여
[연 중 제 30 주 일 (가 해) 2020. 10. 25. Matthieu. 28,34-40]
참고
1, 마태오 22,34-40
2. 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 김희영 역, 문학과자성사, 2004
3. 요한네스 로쯔, 『사랑의 세 단계』, 심상태역, 서광사, 2005
4. 김훈, 『풍경과 상처』, 문학동네, 2009
5.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문학과지성가, 2007
6.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윤종국 역, 성바오로출판사, 2010
7. 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 성바오로출판사, 1985,
8. 마르셸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희영 민음사, 2016
오타수정중인 글입니다-------------------------
1.
가을에 읽기 좋은 글, 세 편을 먼저 읽어보기로 한다.
①“가을의 마른 산하에 내리는 빛은 살아 있는 것들의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 그 핵심부의 빛깔을 사정없이 드러낸다. 그렇게 드러나는 색깔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속에서 개별적으로 고유한 운명의 색깔이다. 가을에, 익어가는 것들의 익음은 이룸이고 죽음이다. 그리고 그 이룸과 죽음은 순결한 빛이 폭로하는 무한수의 색깔 위에서 펼쳐진다. 습기가 빠진 투명한 대기 속을 날아오는 가을의 빛은 맑은 시간의 지속적 파장 위에 실려 있다. 빛과 시간은 순간의 미립자들 위에서 명멸하는 것들이지만, 빛은 시간 속을 통과해 나오면서 경험되지 않은, 닥쳐올 빛의 미립자들을 일련의 지속으로 연결시키면서 흩어지려는 색깔을 감지할 수 있는 실체로 자리잡게 한다. 그 지속이 사람의 터전이다. 가을에, 살아 있는 육신의 눈으로 익어가는 것들의 색깔을 ‘놀 수 있다’는 은총은 그렇게 이루어지나. 빛과 교접해서 색을 이루어내는 시간은 죽음과 무상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내닫는 일방통행의 시간이 아니다. 빛과 교접하는 시간은 그 흐름 위에서 태어나야할 것을 태어나게 하고, 살아야 할 것들을 살아가게 하고, 멀고 희미한 가능성 혹은 감지할 수 없는 잠재의 늪 아래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현존의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비옥한 시간이고, 사라진 것들의 꼬리를 무는 순환적인 시간이다.”(김훈 풍경과 상처)
김훈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 인격이다. 김훈은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라고 말한다.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자신 속에서 살아가기에,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키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라고 말한다. 상처를 가진 존재만이 세계의 풍경, 그 깊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이 가을 봉평군을 온통 메밀밭으로 바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②"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조선달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은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 하나를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듯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한 사내가 있다. 여자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 사내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달밤, 딱 한 번의 기막힌 사랑을 하게 된다. 그 사내는 딱 한번 한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장에서 저 장으로 장돌뱅이의 애환을 기쁘게 살아낸다. 오늘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의 힘이다. 누구나 한번쯤 읽어보았을 소설, 일제 강점기 때 저항문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카프계열의 작가들로부터 반영론적 관점에서 비판받은 적도 있었지만 오늘, 봉평군의 메밀밭은 한국인이 가보고 싶은 가을 여행 코스 베스트 10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 곳이다. 이 소설은 한국인의 어떤 감성을 건드렸다고 볼 수 있다.
‘홍차’와 ‘마들렌’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던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③“(마들렌)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그 순간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 시절의 주일 아침 (그날은 언제나 미사 시간 전에 외출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내가 레오니 고모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가면 고모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꽃을 달인 물에 담근 뒤 내게 주던 그 조그만 마들렌의 맛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푸르스트는 코르크로 문틈을 막고 천식과 싸우며 14년에 걸쳐 써낸 이 작품으로 20세기 최대의 문학적 사건으로 회자된다. ‘나’라는 화자의 성장과 시선에 따라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온갖 사유를 담아낸 소설로,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라는 프루스트의 말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우리가 ‘소설’을 통해 얻고 바라고 체험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그 누구도 프루스트를 읽지 않고는 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훈, 이효석, 프루스트의 글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 도착한 가을 편지와 같다. 그 편지는 감성과 지성이 결합하여 밖이 어떻게 내부와 연결되는지, 세계는 어떻게 재편성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①, ②, ③은 공통으로 인간은 이 세상에 단독자로 던져진 존재이지만 독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 매개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이다. 또 그들은 타자라는 세계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세계 안에서 소멸되지 않는 <자기에로의 귀환>을 지향하는 <세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존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을 감성의 차원에서만 국한시키지 않는 어떤 지성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세상을 독자적으로 재편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익주교님과 심상태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인문학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의 산맥, 그 한축을 담당하는 심상태 신부님이 쓰신 『익명의 그리스도인』에서는 이를 인간이 지닌 두 갈래의 인격 <세계에로의 개방성과 인간의 자기귀환성>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이자 세계 초월적 존재Menschen sind Welt- und Welt-Übergangs>라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 일반에 대한 질문 뿐 아니라 존재 전체와 함께 자기 자신마저도 질문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보았다.
<길 위의 미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믿기 위해서 알고(intelligo ut credam)' 안셀무스 주교의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화두는 신앙의 여정에서 누구나 한번은 신적 대면의 상황 앞에 서게 될 때, 앎과 믿음에 대한 열망을 가질 때 나오는 간절한 목소리다. 이 상황은 종교인들에게만 주어지는 의지가 아니라 인간 모두 고귀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심상태 신부님이 보신 광의의 의미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상황이자 목소리라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서 묻고 고뇌하는 것은 신에 대해서 묻고 고뇌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근원이 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확연히 다 아는 것 같던 시간을 살다 돌연 자신에 대한 본질적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시간 앞에 설 때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문제 삼는 시간이지만 실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 절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질문의 심층에서는 ‘사랑’을 문제 삼는 우리 내면의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과 내 영혼에 대해서만 알고 싶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도무지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독백Solioquia>)라고 절대적인 시간에 맞선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고 있다. 이 고백은 열정적인 신앙인의 고백으로 들을 수도 있겠지만, 실은 우리 모두 그런 근원적인 질문 속에 던져져 있을 때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우리는 그 상태를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거나, 그 질문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
현상적인 삶은 문제가 없는듯한데도 어떤 깊은 충만을 느끼지 못하는 빈지대를 경험하는 인간은 그 자체속에 <세계 내적 존재이자 세계 초월적 존재Menschen sind Welt- und Welt-Übergangs>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가 살만한 세계인가에 대한 질문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도 모르게 던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 대한 앎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자신의 것이지만, 우리를 넘어선 곳에 있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는 근원적 앎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인간이 어떤 본질적인 것을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사랑’이라는 지위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핍을 모른다면 질문을 할 수 없다. 모든 결핍의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을 느낄 줄 아는 어떤 감성으로부터 실존의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서, 혹은 그 느낌을 타당한 방향으로 완성시키고 싶어서 결핍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완성시키고 싶다는 갈망은 인간이 지닌 고귀한 지위이자 품격이고 그것은 애초에 우리가 지닌 생명성이지만, 그것은 저절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생명 혹은 사랑의 노마드라 할 수 있다.
강론과 복음은 우리의 이런 상황에 대한 어떤 길을 제안한다. 예비자 교리를 배울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그 질문의 심층을 바라보기로 한다.
하느님과 나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 생명이 주어진 그 순간에 이미 주어진 그 사랑의 힘, 우리가 사랑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조차도 사랑의 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것이라는 직관.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찾아내는 그 길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제언은, 복음에서 <마음, 목숨, 정신을 다하여> 그 사랑을 하라고 당위명제의 길을 제시한다.
⑤“‘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목숨, 정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사랑에 대한 포기나 사랑에 대한 절망은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이 들어서 안다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결핍을 모르는 그 삶을 이미 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한국어 문장의 구조는 주어-목적어-서술어의 구조이고, 대부분 우리는 서술어에 초점을 맞추어 어떤 문맥을 이해한다. 때론 그 순서를 바꾸어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후반부를 먼저 묵상하기 보다는, 전반부인 인간의 어떤 조건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 즉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가진 나란 도대체 누구인가? 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바라본다면, 강론에서 제언하는 ‘내 안에 있는 사랑의 힘’을 찾을 수 있는 어떤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서든 강론이든 1차적으로 마음에 어떤 느낌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질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 마음과 정신을 나눴는지? 목숨은 어떤 목숨을 말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솟아나는 모든 질문에 우리 스스로 답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말씀을 풍부하게 만드는 길이고 사랑의 노마드인 우리가 순례의 여정 중에 마셔야할 물이다.
⑤“‘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다섯 개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심상태 신부님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요한네쯔 로쯔의 『사랑의 세 단계』를 참고하여 그 답을 찾아가기로 한다.
Q1. 마음(heart)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이든 사물이든 이 세상에 어떤 생명체로 왔다는 것은 어떤 물질의 세계, ‘질료적’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엄마를 알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엄마에게 의존적인 생명체가 되면서 어떤 ‘타자성’을 경험한다. 엄마는 아이가 경험하는 1차적인 타자성의 모델이다. 성장하면서 실존의 공간과 시간인 국가나 사회나 문화가 전해준 것들을 학습하면서 경험이 확장되고 감성적 측면이 발달하면서 미적인 감수성으로 인해 행불행을 느낀다. 고아가 불쌍한 것은 최초의 사랑의 경험인 <마음을 다하여>를 사랑하는 그 최초의 타자인 엄마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는 인간이 질료적 상황, 사람과 사물, 자연, 문화를 통해 감성과 경험이 확장되며 질료와 형상의 내부와 연결하는 어떤 힘을 발견하는 통로이다. 사랑은 이 마음으로부터, 이 느낌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렇듯, 마음은 사랑이 발아하는 최초의 발원지인 셈이다. 그런데 감성적 측면의 사랑만을 추구하면 에로스의 함정에 빠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느낌은 어떤 새로운 느낌을 요구하고 더 자극적인 느낌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마음공부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의 회로를 바라보는 것이다. 성서에서,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한 단계는 이 단계를 거치고(넘어선)난 후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규정 <세계-내-존재>의 경험적, 감성적 측면이다.
⑥인간이 세계-내- 존재라고 할 때, 인간은 수동적으로 세계를 수용하게 된다. 인간은 특정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질료적이며 감성적이며 육신적이며 경험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의 인식은 생득적이지 않고 취득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실재는 질료이자, 타자적 존재 실재라고 할 수 있다.(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
Q2. 정신(mind)을 다하여는 무엇인가?
창조성의 발원지, 생각, 사유, 자유의지, 자기의식, 자기정체성, 자기실현이라 불리는 인간의 지성적 측면이다. 혹은 이성이라 부르는 이 영역은 감성으로 경험하고 느끼게 된 사랑의 방향성을 제공한다.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은 세계로의 확장만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자 하며, 경험된 감성을 통제하고, 자기완성에의 의지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살만한 세계인가를 질문하는 동시에 나는 나를 온전히 실현했는가? 라는 이중의 질문 속에서 자기 고유의 실현태를 찾게 되고, 자신의 질문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게 되며, 알게 된 것은 살게 되는 지성의 한 측면이다. 자기정체성을 갖게 되는 부분이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기자신으로 완전히 돌아감>, <자기귀환>이라고 부른다.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인 너, 그라는 타자성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기애를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정신은 마음을 컨트롤하는 컨트롤박스라는 점에서 요한네쓰로쯔가 바라본 사랑의 두 번째 단계인 <필리아>적인 사랑을 추구하게 된다. 가장 완벽한 연인은 가장 좋은 친구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그런데 이 정신적인 사랑은 자기 몰아적인 함정인 자기애의 극단으로 치우치면 자기 유폐적 성격을 드러낼 수 있다.
⑦인간은 존재 일반에 대한 질문 속에서 자기 자신마저 질문의 대상으로 삼는다. 여기서 답은 감성의 힘으로 성취되지 않고 정신적 실재인 지성을 통해 성취된다. 감성적으로 체험된 대상으로 멈추지 않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게 되면서 자기 실현을 하게 된다. 자기 자신으로 귀환을 성취하는 이 능력은 감성에 대한 지성의 결정적인 탁월성이다.(심상태, 『익명의 그리스도인』)
Q3. 목숨(soul)을 다하여는 무엇인가?
여기서 목숨은 <영혼과 육신>을 포함한 바로 그 목숨이다. 육신과 영혼의 이원성이 단일성으로 정리하는데 교회는 1500년을 소비했다. 1512~1517년까지 열린 제5차 라테란 공의회까지 치열한 사유의 전쟁을 치러내야 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의 철학적 이원론에서, 오늘날 많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영혼의 우월성 측면의 영지주의적 입장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의 마니케이즘적인 문제설정과 사고형식의 영향에서의 단일성의 규정을 넘어- 즉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했을 때의 그 모상은 영혼을 일컬으며, 영혼은 하느님의 예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실체로 보았다는 점에서 영혼과 육신의 단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사도신경의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에서 천명하듯,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체적인 영혼과 육신의 단일성을 통하여 인간의 전인적 인격을 규정하면서 사목헌장 14항의 근간을 만든다.
여기서 <영혼과 육신>을 하나의 목숨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는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어떤 결정적 방향성을 제공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결절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나 <목숨을 다하여> 하는 사랑은 <신적-은총적>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사랑이다. 또한 이 <목숨을 다하여> 하는 사랑만이 자기실현의 결정적 향방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영혼과 육신의 단일성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의 궁극인 완성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교회가 1500년이나 이 부분에 대해 고민했던 이유일 것이다.
⑧ 영혼이 육신의 유일한 형상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었다기 보다는 영혼과 제1질료로 구성된 존재이다. 영혼은 형상으로서 제1질료 안에서 자신을 실체적으로 표현하고 자기 본연의 구체적 실재가 된다. 육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세상적 ‘자기 소여성(自己 所與性;Selbstgegebenheit)’을 나타나고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과 육신의 단일성은 육신은 더 이상 영혼의 감옥이 아니요 영혼의 방해물이나 단순한 도구적 질료가 아니라고 보았다. 육신 없이 영혼은 인격체일 수 없으며 도대체 존재에 이를 수 없다고 보았다. 창세기에서 “숨을 불어 넣었다”에서 숨(nephesch)은 영혼(soul.anima)과 육신(soma)을 통합하여 번역된 것이라고 보는 단일성이다.
<목숨을 다하여>의 관건은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바,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에 그 육신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지닌 육체와 육신은 어떻게 다른가? 육신과 영혼을 단일성으로 바라볼 때도 육신은 도구적 단일성인가? 실체적 단일성인가는 아가페적 사랑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초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바오로 서간문에 자주 나오는 표현들, 육신(soma)과 구별되는 육체 혹은 살(사르크스)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뜻과 멀어진 인간의 어떤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라는 고백 속에는 우리의 육체를 <사르크스>의 상태로 몰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이 바라보는 금욕주의와는 다른 관점이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함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지닌 사랑의 조건인 <마음과 목숨과 정신>은 이렇듯 온 정성을 다한 섬세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을 다하여>라는 표현으로 성서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Q4. ‘너희’가 아니라 왜 ‘너’인가?
사랑은 우리가 개별자이자, 단독자의 입장에서 선택하는 <자유의지>의 실현이다.
사랑은 우리 고유의 자기 실현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인류가 일괄적으로 같은 크기의 사랑을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닌 감성과 지성의 고유한 영역이 다름을 의미한다. 어떤 이는 감성적 측면이 어떤 이는 정신적 측면이 더 강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사랑의 깊이는 아인슈타인만의 사랑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이라는 실존 상황에서, 삶과 사랑을 구체적인 대상들을 통해 경험한다는 특수한 인격을 지닌 존재임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성부성자성령이라는 보편적인 사랑을 고유한 인격체로 체험하고 실현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너 자신처럼>이라는 우리 각자의 고유의 경험이 이웃 사랑의 어떤 준거가 된다는 점이다.
Q5. 마음-목숨-정신은 어떻게 하나의 사랑으로 통합되는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의 사랑이 있듯, 우리 역시 <마음-목숨-정신>의 삼위일체가 하나의 사랑으로 통합하려는, 사랑을 완성하려는 사랑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지위이자, 자기실현의 가능성이다.
요한네스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에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에로스-필리아-아가페>의 관계를 통해 하나로 통합시킨다. 마음은 에로스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정신은 필리아와 목숨은 아가페와 관련되며 이 세 사랑의 방식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하나의 사랑이 에로스(질료적, 감각적, 경험적, 가시적), 필리아(정신-인격적 사랑) 그리고 아가페(신적-은총적)의 세 가지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 세 양식들은 다시 하나의 사랑 안으로 삼투한다. 이 삼투를 통해서 사랑이 비로소 계발된 전체로서 드러나고 이 전체 속에서 오직 사랑이, 온전한 사랑 자체가 된다고 본 것이다.
⑨한 사람이 이 삼각형 속에서 직관화되는 사랑의 충만 속에서 깊이 생활할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시여(absolutes Geben)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수혜(absolutes Empfangen)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에로스에 대한 모든 부당한 편견을 없애고 꼭 필요한 생산적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중심 역할은 필리아가 수행한다. 필리아는 한편으로는 에로스를 정화하고 에로스의 온전한 인간적 면모를 보전시키며 인격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를 위한 길을 마련한다. 인간으로부터 상승하고 자체적으로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에로스와 필리아라는 이 두단계의 사랑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내려오는 아가페가 유대된다. 이 아가페는 다른 두 단계의 사랑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사랑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요한네스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
인간은 사랑의 세 단계 속에서만 비로소 사랑의 충만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사랑의 단계란 매 단계가 다른 두 단계들을 배제하거나 또는 한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단계를 희생해야하는 그런 의미의 단계가 아니다. 이 단계들은 오히려 하나요, 동일한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 국면들은 서서히 계발되고 서로 보완함으로써 성숙되며, 이 성숙의 정도에 따라 서로 더 내적으로 깊이 침투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을 전면적으로 사랑하는 자가 된다.
이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의 후반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명제가 무엇인지, 강론에서 '하느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프시 그 지평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마음-목숨-정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을 주신 그분에게 무엇을 돌려 드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그 조건들을 다하여 삶을 살아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 당위명제는 삶의 명제인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마음과 목숨과 정신은 사랑의 DNA라 할 수 있다. 그 사랑의 유전자(마음과 목숨과 정신을)를 주었으니 잘 사용하면 행복할 것이므로 부디 행복하게 살아라, 그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다, 라는 맥락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요한네쓰 로쯔가 바라본 사랑의 속성, ‘절대적 시여(absolutes Geben)인 것은 절대적 수혜(absolutes Empfangen)’이기에 가능하다. 우리가 순전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받은 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넘치고 넘치는 사랑을 우리는 경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경험했을 때 무엇을 생색내고 돌려드리고 종교적인 봉헌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도 그 자체로 돌려드린 것이다.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받은 자녀들이 그것을 잘 활용해서 행복하게 살 때, 부모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돌려받은 것과 같은 기쁨을 느끼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분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그런 사랑의 ‘숨’을 쉬는 것이고, 엄밀히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자,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글을 마무리하며,
하늘과 맞닿은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바닷가의 모래알을 세면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같은 바다지만 다른 경험의 바다일 것이다. 이 글은 바다와 맞닿은 그 일망무제의 바다를 바라보기 전에 바닷가의 모래알을 세면서 바다를 바라보자는데 초점을 맞춘 글이다.
즉,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어도 그 사랑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왜 못하는지에 대한 고백은 최대한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싶다는 갈망의 글이다. 내 사랑의 ‘혈’이 어디가 막혔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이다. 고백성사를 볼 때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고백하지 않은 것과 같을 뿐 아니라 고백했다는 그 가벼움만 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백소에 들어가기 전에 철저하게 성찰을 요구하는 이유는 바로 피상적, 관성적 고백을 하지 말라는 것이듯,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 이전에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랑을 못할 때 사랑의 어떤 ‘혈’이 막혔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심상태 신부님은 칼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과 다른 차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설정한 이유는, 모든 종교 속에 내재한 고귀한 사랑의 요소, 교회의 일원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가진 고귀한 사랑의 마음 역시 하느님에게서 온 같은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설정을 했다. 사랑을 추구하지 않은 인류란 없다. 사랑의 결핍을 느끼지 않는 인류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발원지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랑은 예수그리스도 즉 하느님에게로 나오고 그곳으로 수렴된다.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것이 목숨을 다한 사랑으로 안내될 때, 그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결핍을 해결하는 유일한 실재가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그 중심을 바라본 사람들이다. 그 중심이 흔들릴 때, 이 세계는 어디로, 나는 어디로 가고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사랑이고, 사람의 정체성 역시 사랑일진데.
우리는 정말 중요한 말, 혹은 하고 싶은 말은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un amour inexprimable)’이란 말은 괴테와 롤랑 바르트가 쓴 용어이다. 사랑은 말로 표현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멀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 글 역시 말의 범위를 넘는 그 ‘사랑’을 논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 할 수 없음에도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에로의 귀환의지일 것이다. 사랑 역시 자기 귀환 의지에 해당한다.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직관이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로의 완전한 귀환(Reditio completa in se ipsum)”이라면, 복음과 강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 사랑일 것이고, 그 사랑의 힘을 되찾는 길일 것이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한 사랑이 삼각형 속에서 직관화되는 사랑의 충만 속에서 깊이 생활할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시여(absolutes Geben)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수혜(absolutes Empfangen)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라는 요한네쯔 로쓰의 말은 그래서 자기귀환의 유일한 통로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모두 <마음-목숨-정신>이 있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올 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온 것이다. 그럼에도 그 사랑은 온전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un amour inexprimable)’이다. 말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곳에 있는 그 ‘사랑’이다.
‘훌쩍’ 넘어선 곳에 있는 그 사랑...
가을 산도, 가을 바다도, 가을 하늘도, 가을 바람도, 가을 들판도, 가을의 낮도 밤도..모든 것이 투명하다. 하나도 가린 것이 없다. 가을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모든 것을 투과할 것 같다. 모든 것을 가볍게 ‘훌쩍’ 넘어 설 것 같다. ‘훌쩍’ 넘어선 곳에 있는 그 사랑을, 얼굴을 대고 마주보는 거 같다.
글을 마무리하며,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을 읽어 본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어야겠지만/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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