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자기소여성(Selbstgegebenheit), 내 안의 ‘인류’로부터의 자유

나뭇잎숨결 2020. 11. 11. 13:50

자기소여성(Selbstgegebenheit), 내 안의 인류로부터의 자유

- Self-preservation (Selvestgebenheit), Freedom from Humanity in My

 

[연중 제32주일(가해) 2020. 11. 8. Matthieu. 25,1-13]

 

 

참 고

 

1. 마태오 22.34-40/ 마태오 25,1-13

2. 프란치스코 교황, 『사랑의 지혜』 , 박영호 역, 생활성서사, 2019.9.2.

3. 톨스토이, 『인생독본』, 박형규 역, 문학동네, 2020.

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상상 동물 이야기』, 남진희 역, 민음사, 2016

5. 미셸 파스투로, 『파랑의 역사』, 고봉만 역, 민음사, 2017

6. Eckhart Tolle, 『Practicing the Power of Now』 , Penguin Books., 2006

7. 파스칼, 『팡세』, 이환 역, 민음사, 2003

8. 헨리 테이비드 소로, 『윌든』, 김주헌 역, 현대문학, 2011

9. 파리드 우딘 아타르, 『새들의 회의』, 류시화 역, 예하, 1991.

 

오타수정중인 글입니다---------------------------

 

 

1.

 

11월은 시적으로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고 읊은 ‘레미 드 구르몽’의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의 위대함을 신록의 여름에서 보지 않고 나목의 가을에서 그 절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낙엽은 어느 시간에도 그 추락의 장렬함을 자랑함직 하지만 투명에 가까운 블루,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한꺼번에, 가차없이 떨어져내릴 때, 거의 비정에 가까운 놓아버림 앞에서 나무의 한해는 돌연 인생의 한 단면으로 치환된다.

 

낙엽을 나무의 절정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은 나무 자체이기도 하고 나무의 배경, 무연한 하늘의 투명한 블루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투명한 블루는 낙엽뿐 아니라 가을의 모든 존재들의 소멸과 사라짐조차도 어떤 미학적인 사건으로 끌어올린다. 봄에 모든 것이 소생함에도 사람들이 몸이 마르는 춘수를 겪어내는 것과 반대로 가을은 가차없는 소멸앞에서 어떤 충족을 발견한다는 생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왜 그럴까? 하늘의 푸름과 바다의 푸름은 모든 사물들의 배경에서 주체와 배경을 무화시킨다. 모든 것을 그냥 존재함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청색이라는 색감도 하나의 존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색의 우열이 사라지고 색의 모든 고유성을 인정받는 데에는 파란색의 역사가 있었다.

 

“성모의 베일에서 리바이스 청바지까지, 어떻게 파란색, 청색은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미셜 파스투로) 그리스와 로마인들에게 파란색은 겔트족이나 게르만족의 눈빛을 떠올린다하여 야만적인이고 추잡한 색으로 평가절하되었던 시간이 있었다. 하늘이나 산의 색깔도 파랗다 내지 푸르다는 형용사를 쓰지 못했다. 청바지의 파란색이 노동자들의 옷이라 하여 청색을 하층민의 상징으로 불리다, 인디고불르라 불리는 선명한 파란색 염료가 유럽에 전래되면서 12세기 중반 프랑스의 생드니 성당과 샤르트르 성당에서 스텐이드글라스에서 성모 마리아의 의상이 검은색에서 청색으로 바뀌면서 특히 프랑스왕실이 성모마리아에 대한 열렬한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 청색 방패위에 백합꽃이 흩뿌려진 문양을 사용하면서 파란색은 귀족, 고귀함, 평등, 거룩함의 상징적인 색이 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색이 되었다.

 

이렇듯 낙엽과 하늘의 대비는 무한과 유한의 대비임에도 사라지는 것조차 그 존재성을 각인하는 반면 복음에서 <슬기로움과 슬기롭지 못함>의 대비는 <문이 닫혔다> <나는 너를 모른다>는 극단은 어떤 시간의 끝을 보여준다. 그 단호함은 어떤 위로없음의 위로를 내포하고 있는가를 바라보기 위해 대비적인 글 몇 편을 더 읽어 본다.

 

①어느 날 대천사 가브리엘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신의 소리를 들었다. 신은 지상의 누군가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었다. 대천사는 그 축복받는 존재를 보기위해 지상으로 내려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오! 주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시골로 가 보아라. 그곳의 작은 사원에서 불꽃을 보게 될것이다. 천사는 사원으로 내려왔고 그는 우상 앞에서 기도하는 한 사람을 보았다. 오! 주님! 어째서 우상을 받드는 자를 지켜보십니까? 나는 그가 잘 못 이해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의 지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의 마음은 나를 찾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가까운 사람이다(파리드 우딘 아타르)

 

②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신과 자신이 하나라고 인식하는 인간은 결코 불행하지 않다. 삶은 멈추지 않는 기쁨이어야 하고, 그런 기쁨일 수 있다.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신의 이름을 사칭하는 가짜를 믿기 때문이다.(톨스토이)

 

③모든 진리의 근원은 신이다. 진리가 인간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이 진리를 비추는 거울 같은 본성,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정한 본성을 잃어버리면 아무것이나 그의 본성이 될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리면 아무것이나 그의 행복이 되어버린다(파스칼)

 

④ 참된 여가를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땅을 가는 시간을 갖는다. 나는 그다지 가난하지 않다. 사과 익는 냄새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미래는 없다. 사랑은 오직 현재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사랑이 없다면 한 아이도 자라지 못하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만 듣는다. (헨리 테이비드 소로)

 

⑤그는 가슴을 찢고 피로 자기 새끼들을 구한 펠리컨처럼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옆구리에 창상을 입으셨기 때문에 펠리컨이라고 불린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⑥저는 상대방의 사랑의 진가를 알려면 그 사랑이 완벽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능력껏 최선을 다하여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랑이 거짓이라거나 참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서툴러도 사랑입니다.(프란치스코교황)

 

⑦자신에게 자주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다. “현재의 순간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 해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밖에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하나의 장애물로 여기는가? 나는 그것을 하나의 적으로 몰고 있는가? 지금 이 순간만이 당신이 소유할 수 있는 전부이며, 삶은 지금 이 순간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따라서 그 질문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Eckhart Toll)

 

①,⑤,⑥은 자비와 관련된 글이라면 ②,③,④,⑦은 지혜로운 이들의 직관이다. 전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무한한 사랑이다. 후자는 자신을 갈고 닦아 하늘나라의 사랑받는 백성이 된 이들의 직관, 현대판 지혜서들이다. 지혜있음과 지혜 없음, 이것은 한 사람에게서 확연히 나눠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한 사람 일생 안에 있는 두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②의 『인생독본』은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와 함께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할 인생 필독서 버킷리스트에 해당한다. 지혜있음과 지혜없음의 그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엔솔러지다.

 

『인생독본(人生讀本)』은 톨스토이가 구상에서 집필까지 십오 년에 걸쳐 동서고금 성현들의 인생철학을 집대성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인생 후반에 이르러 톨스토이는 세계의 경전과 문학작품을 비롯해 소로, 에머슨, 파스칼,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칸트, 니체, 고골에 이르기까지 300명에 가까운 사상가, 철학자, 종교가 등의 사색과 통찰이 깃든 말과 글을 자신의 글과 함께 일기 형식으로 구성했고, 방대한 이 작업으로 “수세기의 지혜를 한 권에 모으는” 오랜 꿈과 함께 생애 마지막 업적을 이루었다. 머리말만 백 번 넘게 퇴고하며 완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톨스토이는 눈감기 전까지 늘 이 책을 곁에 두고 다시 읽었고 “내가 쓴 모든 것이 잊힌다 해도 이 책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대문호이자 실천하는 사상가로서 톨스토이가 인간과 세계를 탐구하며 깨우친 진리에 대한 신념과도 같은 이 책은 하루, 한 주, 한 해 사계가 순환하듯 밝아지고 깊어지고 영그는 독서의 고리를 통해 가장 본연적이고 소박한 인생의 지혜를 전한다.

 

그럼에도 『인생독본』을 쓴 톨스토이는 만년에 부인과의 행복하지 않은 관계, 특히 경제적인 문제로 오늘날 막장드라마같은 평탄하지 않은 말년을 보냈다. 문학사적 평가와 인간적 평가의 양극단에 놓인 작가들의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작가들에게는 글을 쓰는 행위가 그 모든 현실의 평가를 넘어서는 어떤 희열이 내재된 칩거(蟄居)라 할 수 있다. 작가들 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에서 타인이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기쁨을 맛보는 것은 후천적인 본인의 노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선천적으로 기쁨의 씨앗이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일에는 선천적인 주어짐, ‘소여성(所與性)'이 있다는 것이다.

 

 

2.

 

마태오 25,1-13의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어리석은 다섯처녀의 비유는 지난 주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정신을 다하여 애주애인하라’(마태오 22.34-40)는 기독교적 황금율과 다음 주 탈렌트의 비유(마태오 25. 14-30)와 연결해서 묵상해야 예수님의 단호함의 그 의미를 더 분명히 바라볼 듯하다.

 

 

마태오 25,1-13은 <문이 닫혔다> <나는 너를 모른다> 로 모아진다.

 

슬기(지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혜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기름을 준비한 자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 자기 몫의 등을 밝힌 자와 자기 몫의 등을 밝히지 못한 자, 이 대비에 대하여 혼인잔치의 <문이 닫혔다>는 것에 대해 복음해설서들은 일률적으로 기회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바라본다. 또한 어리석은 처녀들이 준비하지 못한 <기름>은 성령의 은사, 혹은 신망애 삼덕 등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어떻게 바라보든 <문이 닫힌 이유>는 <나는 너를 모르기 때문이다>로 모아진다.  <나는 너를 모른다는 >는 문장은 글의 도입부에서 바라본 청색의 역사처럼 수없이 많은 관계의 현주소를 일별하는 말로 변형되어 씌어졌다.

 

혼인잔치는 기쁨의 자리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신앙하는 것을 혼인잔치에 비유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쁨이고 행복이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것이 기쁨이 아니고 습관이고 관성이라면, 그것이 행복이 아니고 십자가의 고통뿐이라면 그것은 <문이 닫혔다>와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나는 너를 모른다>는 <네가 너를 모른다>의 의미의 변형임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관계의 단절을 느꼈을 때 <나는 널 잘 모르는 거 같애>라고 그 주체의 자리를 우회적으로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엄밀히 그 의미는 <네가 너 자신을 몰라도 참 모르는 거 같애>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너라는 사람이 이젠 더이상 감당이 안 되고, 감당하기조차 싫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치 내가 너를 상대하는 것이 너에게 얼마나 영광인지는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거야! 라는 절교의 선언이기도 하다.

 

반면 진실로 축복받은 관계들은 어떤가? 상대가 보여준 것보다 더 크게 상대를 보고 더 많이 본 이들이다. 이는 단순히 상대만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또 상대는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관계의 본질적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과 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이유까지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한 관계를 원한다면 네 시계범위를 넓혀라! 네 전망을 깊게하라!는 조언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모든 충만의 원칙이고 끌어당김의 원칙이고 존재의 원칙이다.

 

신앙에서 이 충만의 원칙을 토마스아퀴나스나 철학자들이 말한 ‘자기소여성(Selbstgegebenheit)’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소여(所與)는 “사고의 대상으로 의식에 직접 주어지는 내용”으로 자기소여성은(Selbstgegebenheit)은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후설 등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그 의미는 추구하는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선험적’ 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자기소여성’ 앞에는 ‘선험적(先驗的)’ 이라는 관형어가 자연스럽게 붙는다. ‘선험적(先驗的)자기소여성’이란 "인식의 주관적 형식이 경험이전에 인간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고 바라보는 사유의 지평이다.

 

원시종교부터 인류가 그토록 신을 지향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에는 특정 종교를 떠나 신을 추구하는 <모상>이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모상>이 무엇인가가?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기름>의 의미일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영혼의 충만에 관여하는 ‘모상’이라는 이 소여성은 인간이해의 제1원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오늘, 그분을 신앙하는 우리의 자세, 그분을 신앙하면서 우리의 소망이 채워지지 않음에 대한 정직한 자기 이해,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어떤 답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겠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이를 인간이해의 척도, 영혼과 육신의 자기소여성으로 직관한다. “인간이 형상적으로 영혼을 통해서 자신을 구현하게 되는 제1질료 또한 비형상적인 사물적 실재가 아니라 영혼처럼 내적 존재라는 점이다. 육신은 영혼의 세상적인 자기소여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라는 두 개의 실재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요, 전체적 영혼실재이며 영혼은 육신을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이 알듯 모를 듯한 아퀴나스의 통찰-영혼과 육신이 하나라는 사실-을 마리아의 수태고지,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 에서, 내 '마음'이 주님을 찬미하며가 아니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 영혼으로 주님을 찬미한 적이 있는가?

 

자신이 영혼이라는 사실을 신앙인들은 언제 경험하나. 아니 경험하기는 하나? 우리는 육체와 마음을 경험하는 데서 삶을 종식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연옥이 필요하고 일부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마음과 정신은 영혼과 구별된다는 것을 알지만 언제 영혼을 체험했나? 영혼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영원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영혼을 모른다면 무한을 어떻게 경험하나?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되돌려야 한다.

 

여기서 어리석은 처녀가 준비한지 못한 그 <기름>은 자기영혼을 경험하지 못한 인류에 대한 알레고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처녀는 예수를 간절히 원하나 결코 만날 수 없는, 만나지 못하는 인류의 이름이다. 지혜로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고 혼인잔치에 들어갔다는 비유는 자기안의 인류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j의 <나는 너를 모른다>는 언명은 <너는 너를 모른다>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린 안의 인류로부터 해방되는 길, 진정한 자유에의 길, 진리는 나의 빛일 것이다.

 

진리는 분명 나의 빛이다. 그러나 진리가 나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사실 앞에서 기쁨을 느낌 때, 그것이 마음의 즐거움인지 영혼의 즐거움인지를 질문에 붙여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음식에서 미각을 느낄 때, 그것은 혀의 어떤 부분의 느낌이지 우리 몸 전체가 느끼는 것은 아니다. 미각을 느끼고 싶으면 음식을 천천히 먹으라고 권하는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결정이 중요하고 이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총체적 인격을 동원해 진리라고 바라볼 때, 가끔 마음이 시무룩한 것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 내 마음에게 묻는다.

 

마음이여! 너는 진리 앞에서 왜 즐겁지 아니한가?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삼중의 존재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단적으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체험하는 기회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몇 개의 단계적인 과정을 체험하는 것이지만 그 궁극엔 영혼을 체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고 부른 노래—마니피캇을 생각해 보자. 마니피캇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 된 상태의 노래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언제 자명하게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가된 상태를 경험하나? 영적인 기쁨은 왜 드물게 주어지나? 왜 그럴까? 몸의 체험과 마음의 체험에 비해 영혼의 체험이 왜 어려운가?

 

영혼의 기능은 자신의 바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 비젼이다. 마음의 기능은 여러 가지 대안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몸의 기능은 그 선택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몸과 마음 영혼은 조화롭게 하나가 되어 함께할 때 신은 현실 속에서 우리 안에서 구현된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에 이른다. 그럴 때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럴 때 하늘과 땅은 크게 기뻐할 것이며 하늘과 땅이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

 

Ⓑ영성가들이나 깨달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자꾸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와 같은 맥락의 그 지점, 그 내려놓으라는 것이 육체인가? 마음인가? 영혼인가?

 

육체가 경험하는 고통과 마음이 경험하는 고통과 영혼이 경험하는 고통이 같을까? 육체가 경험하는 죽음과 마음이 경험하는 죽음과 영혼이 경험하는 죽음은 같은가? 영혼을 체험하다는 것은 고통없이 사랑하고, 고통없이 떠나보내고, 고통없이 창조하고, 고통없이 울며, 고통없이 고통스러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피에타의 성모>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아들의 수난현장에서 그 모든 상황을 낱낱이 바라본 한 어머니는 어떻게 그 참척의 상황을 죽지 않고, 혼절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을까? 그 어머니를 지키고 있는 그 영혼!

 

Ⓒ우리는 여기서 영혼이 마음을 끌어가는 어떤 패턴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아니 마음이 우리를 지배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말-행동>의 패턴으로 산다, 그 패턴을 뒤집는 것이다. 먼저, 행동하라. 이것은 주님공현대축일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에서 그 모형을 찾을 수 있다. 별의 존재를 아예 몰랐던 헤로데, 별의 존재를 알았지만 별을 따라가기를 망설였던 당시의 유대인들, 그리고 무조건 별을 따라 동방까지 온 그 박사들, 누가 별을 보고 누가 별이 되었는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섭리와 뜻과 별 앞에서 자주 망설인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지 영혼의 소리를 듣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안의 인류, 유대인처럼, 바리사이처럼, 율법학자처럼, 사두가이파처럼, 우리안의 인류, 그 망설이는 실체가 누구인가? 육체인가? 마음인가? 영혼인가? 를 바라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도는 왜 항상 이루어지지 않나? 여기서도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가운데 누구에게 지배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의 기도이지 영혼의 기도가 아니다. 영혼의 기도는 기도와 결과가 함께 있는 기도다. 결과가 이미 이루어졌음을 깨닫는 데서 놀라운 결과들이 만들어진다. 흔히 이를 기적의 원리라고 부른다. (기적에 대한 수많은 오해가운데 기적을 허황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열심한 신앙인 가운데 많다. 사실은 기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이어야 한다. 자신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혹은 기적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때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인류에게 베푸는 기적에 왜 환호하는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앙은 예수님의 박수부대가 아니다. 우리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예표이다.

 

신앙은 죄와 고통에만 집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만 따라하는 것이 신자의 모토는 아니다. 예수님 전 생애를 우리는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마테오14장 13-21)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기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기적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 감사했다.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과 아버지가 어떤 관계인지를 알 때 진정한 감사가 나온다. 영적 충만에서 나오는 감사다. 예수님 공생활 3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부터 시작된 기적의 원리는 간단하다. 이루어졌음에 대한 감사! 였다. 감사는 자신이 영혼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에 대한 인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기적의 원리이자 기도의 원리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얻는 것이 아니라 걸어간 만큼 얻는다”(주님공현대축일, 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 강론 중에서) 걸어간 만큼이 무엇인가? 동방박사처럼 영혼의 소리에, 마리아처럼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마음의 소리는 우리를 망설이게 한다. 원하기만 하게 만든다. 그래서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끝내 자신을 알지 못하므로 혼인잔치에 참석하지는 못한다. 네가 너를 알지 못하므로 나는 너를 모른다, 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별을 따라 여행하는 순례자, 노마드다. 그런데 그 여행에 우리가 갖고 있는 조건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다. 영혼은 몸과 마음을 강제로 컨트롤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는다. 영혼은 어떤 비젼, 신의 마음이다. 마음이 영혼의 비젼을 수락하면 몸은 자연히 따른다. 마음이 영혼의 비젼을 거부하면 몸은 마음을 따른다. 몸은 중립적이다.

 

그런데, 이 순례가 영혼의 진화과정임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더 이상 몸의 생존이나 마음의 갈등 상황을 넘어선 사람들이다. 세속적인 성공여부는 주요관심사가 아니다. 이 때 마음은 기꺼이 영혼의 비젼을 따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어떤 외상도 경험하지 못한다. 오히려 큰 행복감에 젖어 있다. 따라서 영혼의 자기실현에 온 생을 걸게 된다. 오쇼, 나지니스, 톨레, 도날드 윌시, 헤크만, 호킨스 등의 현대 영성가들의 삶이다.

 

여기가 참으로 위대함과 위험함이 공존하는 시간임을 자각해야 한다. 영혼을 경험하는 처음에  그렇다. 여기가 어디인가?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는 땅이다. 아직 하늘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노마드, 상대계를 살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몸과 마음과 영혼의 심각한 불균형 상태는 절대계에서도 불균형일 것이라는 점이다.(이 부분은 다른 주제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사도신경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에 천명되어 있음에서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과격하게 그런 광적인 영적홀릭 상태에 빠진 이들에게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자신의 몸도, 자신의 가족도 돌보지 않은 상태에 대한 강력한 충고다. 영적디오니소스들에게 이 땅에서 우리의 노동은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 영적인 직관 상태가 주는 그 즐거움 가운데 바오로 사도는 영적희열을 내려놓고, 메마른 일에 자신을 놓았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바오로의 직관은 영혼을 간과해서 영적 희열을 못 느끼는 인류와 영혼의 상태인 영적 희열에만 탐닉하는 인류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다. 바로오 사도는 자신의 식탁에 오르는 빵을 스스로 벌려고 일하면서 선교의 최일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급자족의 노동을 하는 이유다. 마리아는 어떠했을까? 마르타와 마리아는 분류된 것이 아니라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로 나뉘어지는 그 결절점은 토마스아퀴나스가 말한 영혼과 육신의 일체화이며, 이를 성서에서 구현한 사람이 마리아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니까 기도만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요셉성인이 하는 목수일을 거드느라 대패질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를 자기소여성(Selbstgegebenheit)’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준비할 기름은 몸과마음과영혼의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절대계로 넘어간 상태가 아니라 상대계에 살고 있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계를 살아내면서의 일체화란 점이다. 이 땅에서 영혼의 비전을 몸과 마음으로 구현하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너를 모른다>는 것은 <너는 너를 모른다>로 바라볼 때 우리가 이 순례에서 준비해야할 <기름>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고,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자기실현,  몸과 마음을 지닌 존제로 <영혼>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리의 순례도 마리아처럼 우리 인생의 마니피캇을 노래하는 중이고, 동방박사처럼 별을 따라 여행하는 여행중이자,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이들을 영적 기쁨에 초대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영적 기쁨을 보류하는 생을 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과정 중에 있는 순례자다.

 

 

 

 

3.

 

글을 마무리하며,

 

마태오 25,1-13과 마니피캇을 다시 읽어 보고, 아래 음악을 올린다.

Intermezzo from Cavalleria Rusticana - Pietro Mascagni - The Evergreen Symphony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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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MT 25:1-13

Jesus told his disciples this parable:

"The kingdom of heaven will be like ten virgins

who took their lamps and went out to meet the bridegroom.

Five of them were foolish and five were wise.

The foolish ones, when taking their lamps,

brought no oil with them,

but the wise brought flasks of oil with their lamps.

Since the bridegroom was long delayed,

they all became drowsy and fell asleep.

At midnight, there was a cry,

‘Behold, the bridegroom! Come out to meet him!’

Then all those virgins got up and trimmed their lamps.

The foolish ones said to the wise,

‘Give us some of your oil,

for our lamps are going out.’

But the wise ones replied,

'No, for there may not be enough for us and you.

Go instead to the merchants and buy some for yourselves.’

While they went off to buy it,

the bridegroom came

and those who were ready went into the wedding feast with him.

Then the door was locked.

Afterwards the other virgins came and said,

‘Lord, Lord, open the door for us!’

But he said in reply,

‘Amen, I say to you, I do not know you.’

Therefore, stay awake,

for you know neither the day nor the hour.“

 

 

Magnificat anima mea Dominum,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Et exsultavit spiritus meus in Deo salutari meo,

quia respexit humilitatem ancillae suae;

ecce enim ex hoc beatam me dicent omnes generationes,

quia fecit mihi magna qui potens est

et sanctum nomen eius;

et misericordia eius a progenie in progenies timentibus eum.

Fecit potentiam in brachio suo;

dispersit superbos mente cordis sui.

Deposuit potentes de sede, et exaltavit humiles.

Esurientes implevit bonis, et divites dimisit inanes.

Suscepit Israel puerum suum, recordatus misericordiae suae,

sicut locutus est ad patres nostros, Abraham et semini eius in saecula.

 

 

 

 

 

 

Intermezzo from Cavalleria Rusticana - Pietro Mascagni - The Evergreen Symphony Orchestra

Youtube |

 

 

 

 

 

(HD 1080p) Intermezzo from Cavalleria Rusticana, Pietro Mascag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