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섭리(攝理 la Providence de Dieu)의 옷자락에 손을 대며

나뭇잎숨결 2020. 11. 5. 04:27

 

섭리(攝理 la Providence de Dieu)의 옷자락에 손을 대며

-행복(eudaimonia)과 행복주의(eudemonism)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지평을 희망하며

 

 

[모든 성인 대축일(가해) 2020. 11. 1. Matthieu. 5,1-12.]

 

 

참고

 

1. 사무엘상 3.10-11/ 마태오 5,1-12ㄴ/요한 21.6/ 루카 8.43-48/I고린토 2, 9)

2. 달라이 라마, 『행복론』, 류시화 역, 김영사, 2001

3. 플라톤, 『필레보스』 , 박종현 역, 서광사 | 2004

4.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명관 역, 서광사, 1990

5. 헤르만헤세, 『행복론』, 박환덕 역, 범우사, 2017

6. 앨랭, 『행복론』, 김병호 역, 집문당, 2015

7. 버트런드 러셀, 『행복론』,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2001

8. 제레미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고정식 역, 나남, 2011

 

 

오타수정중인 글입니다------------------

 

 

1.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 이것은 전 세계의 많은 대학에서 교훈으로 쓰는 대학의 보편적 방향성이다.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의 실체적 구현에 가깝다.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모든 대학은 동문을 통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사업을 벌인다.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신앙인이라면 여기서 멈춰 서서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돈은 수단이다, 진리는 목적이다. 목적은 거룩한데 수단은 더러울까? 그대는 통장에 잔고가 없을 때, 왜 행복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의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대척점에 서 있을까? 하느님의 섭리는 언제나 고통이나 희생, 혹은 번제물을 요구하실까? 이 두 주제를 생각해 보기 위한 글이다.

 

행복은 윤리학에서 인간의 최고선으로 삼는 자아실현설의 하나로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마음속에 내재된 훌륭한 정신이나 관상, 지복직관의 상태'를 말한다. 반면, 행복주의(eudaimonism, eudemonism)는 ‘어떤 행동을 동반하는, 덕과 일치하는 행동을 목적화하는 것’으로 목적론적 윤리설의 한 측면으로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아타락시아(Ataraxia)'의 상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추구한다.

 

먼저 '행복' 하면 떠오르는 이들의 <행복론>을 읽어보기로 한다.

 

①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내면의 수행이 뒤따르지 않는 한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편안한 환경속에서 지내더라도 당신은 자신이 바라는 기쁨과 행복을 절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반면에 당신의 내면이 고요하고 평화롭다면 행복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갖가지 편리함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변함없이 행복하고 즐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큰 만족감을 갖고 있다면. 어떤 것을 소유 하는가 아닌가는 문제가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은 변함없이 만족할 수 있습니다(딜라이라마)

 

②그대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대가 소망을 버리고 이미 목표도 욕망도 없고 행복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세상의 거친 파도는 그대 마음에 미치지 않고 그대의 마음은 비로서 휴식을 안다. 휴식은 행복이다.(헤르만헤세)

 

③첫째 먹고 입고 살기에 조금은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엔 조금은 부족한 외모, 셋째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 넷째 남과 힘을 겨루었을 때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했을 때 듣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 박수를 치는 말솜씨. 행복은 채워지기 직전의 충만감.(플라톤)

 

④“우리의 생에 대하여 결정적인 힘을 가진 것이 활동이라고 한다면, 행복한 사람치고 비참하게 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행복한 사람은 가증하고 비열한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선하고 현명한 사람은 인생의 모든 변화를 훌륭하게 겪어나가며 또 언제나 그가 당한 처지를 가장 잘 이용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확실히 미래란 우리에게는 분명치 않은 것인데, 행복은 하나의 목적이요, 모든 점에서 궁극목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그리고 또 앞으로도 갖추게 될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⑤“자기 행복의 원리가 있다는 것은 가장 혐오스런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 원리가 틀렸기 때문만도 아니고 잘사는 것이 언제나 선량한 태도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 경험과 상치되기 때문만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 선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다른 문제이고, 또한 그 사람을 영리하고 자신의 이익에 밝게 만드는 것과 그를 덕스럽게 만드는 것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 행복의 원리가 도덕성을 확립하는 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 원리가 배척되어야 하는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도덕성의 토대를 허물어뜨리고 도덕성의 모든 숭고함을 무화(無化)시키는 그런 동기를 도덕성의 기초에 놓기 때문이다.(칸트)

 

⑥현재에 전념하라. 시시각각 전진하고 있는 자신의 인생에 전념하라. 이 순간 뒤에는 다음 순간이 있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살고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당신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는 지금의 당신에게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의 괴로움도, 당장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가벼워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모든 것은 사라진다.’ 이 격언은 슬픈 기분이 들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알랭)

 

⑦“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나를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러셀)

 

⑧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에게 지배받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일은 물론이요 무엇을 행해야 할까 짚어내는 일은 오로지 이 두 주인을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옳음과 그름의 기준이, 또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두 주인의 왕좌에 고정되어 있다. ··· 공리성이란 이익 당사자에게 이익, 이득, 쾌락, 선, 행복을 낳거나 손해, 해악, 고통, 악, 불행이 발생하는 일을 막는 경향을 지닌, 어떤 대상에 들어 있는 성질을 뜻한다. ··· 공동체는 마치 그 구성원들인 양 여겨지는 개별 인간들로 이루어진 허구적인 실체다. 그렇다면 도대체 공동체 이익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구성하는 구성원 이익의 총합이다. 개인 이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서 공동체 이익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어떤 것이 한 개인의 쾌락 총합을 부가시키는 경향이 있을 때, 그것을 그 개인의 이익을 증진시키거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쾌락과 고통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동일한 절차는 양자에 똑같이 적용된다. 좋은 것, 이익, 편리, 이득, 유리함, 취득, 행복 등은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쾌락에 대하여 적용된다. 나쁜 것, 불편, 불리함, 손실, 불행 등은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 고통에 대하여 적용된다. (벤담)

 

 

 

①의 달라이라마와 ②의 헤르만헤세가 바라보는 행복은 내면의 명상이나 수행 속에서 떠오른 충만감으로 현대 영성가들이 직관하는 존재론적 행복론에 속한다. ③의 플라톤과 ④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행복관의 창시자로 최고선이 행복이라는 관점으로 ⑤의 칸트에 의해 “그 동기는 덕을 향한 동인(動因)을 악덕을 향한 동인과 같은 줄에 놓고 오로지 계산을 더 잘하는 것만을 가르치며, 둘[=덕과 악덕] 사이의 종류상의 차이를 아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이라고 행복을 하나의 ‘ism’으로 변형시킨 행복주의(eudaimonism)로 비판 받는다. 이들의 행복론은 존재론이냐 목적론이냐에 따라 행복과 행복주의로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들과 달리 행복을 순전히 정신적인 측면인가 아님 물질을 수반하느냐에 따라 ⑥의 알랭과 ⑦의 러셀 은 행복의 정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반면, ⑧의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자본주의의 성취여부에 행복은 달려 있다고 보았다.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은 ‘고통이 없는 상태와 쾌락’으로 보았으며, 그들과 대척점에서 프로이드와 러셀은 행복이 ‘육체적이지 않고 정신적이며,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며, 감정적이지 않고 이성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쾌락과 구별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죽기 전까지는 행복하다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넓은 의미의 행복은 사람의 생애 전체에 관계한다고 보거나 행복도 사랑처럼 생명성 안에 이미 내재된 어떤 잠재태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행복을 어떤 관점에서 보든 행복론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변증법적 사상의 토대위에서 구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시대가 어떤 행복론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 모두에게서 인간은 행복해 지고 싶다는 본능에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행복론은 어느 시대에도 좌우되지 않는, 어떤 절대적인 행복론을 우리에게 제시하는가?

 

 

 

 

 

 

2.

 

<모든 성인의 축일>에 <산상설교 혹은 진복팔단>이 복음으로 주어진 것에서 우리는 어떤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절대론적인 행복론>의 지침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먼저, 강론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어떤 제안을 하고 있다.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본 이들이고 그 섭리에 기쁘게, 무엇보다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수락한 분들이라는 점에서 절대론적 행복론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산상설교 혹은 진복팔단은 ‘애주애인愛主愛人’의 8계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을 바라보고 듣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애주애인愛主愛人, 8가지 행복론은 묵주의 알처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서, 완벽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애주[愛主] 할 수 있을 때에만, 애인[愛人]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Ⅰ. 먼저 성서의 순서를 바꾸어 애주[愛主]하는 삶-마음이 가난한 사람,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마음이 가난한 것은 진복팔단 전체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가난은 내적 포기, 내적 정화, 내적 자유, 비움, 내려놓음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치의 전환, 전인격이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들음’의 가장 기본적인 갖춤에 해당한다. 회개가 죄에서 돌아섬이라면 이 돌아섬은 광의의 돌아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갈릴레아로 돌아간 제자들의 상태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제자들의 대부분은 세례자 요환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연이어 목격한 이들이다. 세속의 언어로 머피의 법칙에 걸린 사람들이다. 인생에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즉 살아서 자기 무덤을 목격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때로 이 상태는 현실세계에서 무엇을 빼앗기거나, 무엇에서 추방당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철저하게 이해할 수 없는 시간 속에 놓여진 자신. 그것은 현실세계의 가치 체계위에 하느님 나라가 서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게 되는 과정이기에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단절되는 격절을 목격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는 저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데, 그렇다고 이 세계가 충만히 채워진 상태도 아닌 빈 지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 세계가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에도  얶매이지 않겠다는 의미의 비움이다. 예컨데 부자도 돈에 매이지 않을 수 있지만 가난이 돈에 매이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물질을 거룩함의 대척점으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갈릴레아로 돌아간 제자들처럼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그분의 일성을 들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오직 J의 음성만을 ‘듣겠다는’ 준비의 시간이다. 그래서 내적 가난이나 내적 자유에 도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富)에 참여하게 된다. 어떤 가치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풍요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하게 가난한 자만이 철저하게 풍요로울 수 있다는 풍요의 역설이기도 하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Blessed are they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satisfied.

 

단적으로, 이 세상은 상생의 질서가 철저하게 파괴되었는데도 이 가을은 어찌하여 이토록 아름다운가?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의로움(righteousness)에 주리고 목마든 사람들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걸어가며 느끼는 그런 시간 속을 걸어가는 시간과 비슷하다. 또는 십자가의 성요한의 직관처럼 영혼의 어둔 밤의 그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다, 마음이 비워진 상태에서 바라본 이 세계는 정말 중요하지 않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투쟁하는 아비귀환의 전쟁터로 보인다. 이 세계를 한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는 그 시간이다. 상생과 공생이 깨어진 세계. 동물의 양육강식이 난무하는 세계. 그렇다고 그러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조차 자신에게는 없다. 그 무력감 앞에서 체험하는 주림과 목마름의 시간이다.

 

이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반드시 체험하는 시간들이다. 사랑함에도 채울 수 없는 목마름과 주림의 시간이다. 영적인 사막 여행자로 자신을 인식하는 시간이다. 이 고독한 사막 여행이 언제 끝날지, 우리 생애에 끝나기는 할 것인지 알 수 없다. 앎(지)이 사라진 시간이다. 저것은 분명 아닌데,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무력감, 그 주림과 목마름의 변곡점에서 힘이 기진한 채 쓰러진 어떤 시간, 또는 걸어가기는 하지만 걸어간다는 의지조차 인지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은총의 시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 바꿔진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시선만 바뀐 것이다. 돌연 이 삭막한 세상을 신뢰하게 된다. 그것이 만족이고 흡족이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이 만든 법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배우는 시간이다. 권능(Power)에 대한 대전환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권능은 사랑이자 용서였던 것임을 드디어 알게 되는 시간이다. 한없이 용서받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 인간의 현 상태와 상관없이 이 세상을 끌어가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함께한다는 것을 바라보는 감사의 시간,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그분을 바라보게 되는 시간,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묵시록 7, 16).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Blessed are they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슬픔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는 임마누엘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깊은 슬픔만이 깊은 위로를 만나게 된다는 위로의 역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준 막달레나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처음 그녀는 자신의 죄 때문에 울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자기 죄를 울면서 씻었다면 그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슬픔은 하나의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어느 순간 다른 이의 죄를 씻느라 울게 되고, 그 다음에 인류의 죄를 씻느라 울게 되었을 것이다. 울다가 울음의 끝에 이르러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슬픔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고통과 죄의 개념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윤리도덕보다 더 큰 죄는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하느님과의 분리가 유일한 죄이고, 이 분리가 세상과의 분리를 낳았다는 것에 대한 통한과 통찰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 어떤 죄도 사랑을 덮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분리가 죄의 근원이고 고통의 근원이었음을 바라보는 시간으로 자신이 자주 느낀 그 슬픔의 근원을 드디어 보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울 수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

 

사실 슬픔은 슬픔의 이유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슬프지만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 조자 모른채 슬퍼한다. 그러다 슬픔도 의로움과 마찬가지로 어떤 주림과 목마름의 쓰러짐 속에서, 슬픔의 깊은 수렁 속에서 위로를 만나게 된다. 그분과 ‘함께’하고 있다는 내적인 깊은 위로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그분과 내가 같이 울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그분의 타는 듯한 심장인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시고, 더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묵시록 21, 4).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Blessed are the clean of heart, for they will see God.

 

 

 

마음의 가난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가 마주한 시간, 진정한 슬픔의 시간을 통과한 이들이 도달한 상태, 그 마음은 가을하늘처럼 투명할 것이다. 이들에게 어떤 행복이 주어지는가? 마음의 깨끗함, 그 자체가 사실 위로이다. 영적인 시야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영적인 투명성을 가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다. 모든 앎에 대한 깨달음, 가린 것이 없는 상태이다.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희망으로 넘어선 시간이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시간과 계획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자, 그분의 섭리를 보게 되는 지복직관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구약에서 하느님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하느님을 볼 수 있으려면 살아서 자기 무덤을 봐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믿음과 희망은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시간이다. 갈릴레아로 돌아간 제자들처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인류역사의 최대의 추문이라고 회자된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자기 무덤을 목격한 자가 누릴 최고의 상급은 바오로 사도의 직관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토전서13장.12)

 

그 다음의 행복론은 분류상 이웃사랑이라고 칭했지만, 실은 사랑의 확장성에 관한 것이다. 자유의지의 실현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고, 행복한 자는 행복을 나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자비, 온유, 평화, 의로움에 대한 재정의에 해당한다.

 

 

Ⅱ. 애인[愛人]하는 삶-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이웃사랑의 지침들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Blessed are the meek,for they will inherit the land.

 

온유함은 생존의 두려움 때문에 갖게되는 온갖 종류의 내적,외적인 폭력의 근원인 방어기제를 놓아버린 상태를 의미한다.(http://blog.daum.net/m-deresa/12384279) 분열의 종식을 의미한다. 온유함은 영적인 부드러움, 공격성 없음 안에 내재한 힘이자, 세상을 평정하는 힘의 원리를 살아내는 일이다.

 

“분열(splitting)은 모순된 감정이나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분리해버리는 무의식의 과정이다. 대상에 대한 이미지에서 선함과 악함, 쾌감과 불쾌감, 사랑과 증오 등을 분리한다. 그래서 대상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와 부정적 이미지를 분리해낸다. 이런 분리가 통합되는 것이 성장인데 분열이 계속되면 성숙을 가로막는다. 분열은 행동과 태도로 나타나는데 모순된 행동을 교대로 나타낸다든지,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든지, 상대를 이상화하거나 비하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것은 경계선 인격 장애의 주요 방어 기제로 알려져 있다. 투사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는 무의식 속에 있는 자신의 어떤 특성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동일시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치는데, 첫째 단계는 자신의 어떤 이미지인 표상을 상대에게 투사하고, 둘째 단계는 무의식적인 투사가 된 대상이 자기의 표상인 것처럼 행동하게 되고, 셋째 단계는 투사된 것이 그 대상 속에서 변형되어 투사한 사람에게 되돌려준다. 이것을 재함입이라고 한다. 이렇게 투사된 표상이 변화하는 것 때문에 대인관계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전이 현상과도 관계가 있다.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는 전이를 말하고 셋째 단계가 의식적으로 처리되면 전이라고 할 수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처리되고 투사된 대상도 모르고 행하게 되면 그것은 전이다. 이 경우는 무의식적인 것이 치료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미쳐 치료 효과를 발휘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서 무언가를 강하게 느끼는 경우처럼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투사하는 사람이 투사된 대상을 조정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기도 한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어떤 표상을 없애려고 할 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투사된 사람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내부에서 없애려고 한 것을 원하는 대로 통제한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온유함은 정신의 무장해제를 의미한다. 생의 긴장감에서 무장해제 된 자만이 생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다. 폭력을 쓰는 사람이나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강자(强者) 앞에서, 온유한 사람은 마치 무기력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모든 외적인 힘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모든 폭력을 피하기 때문에 얼핏 보아 약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온유한 자의 힘은 외적인 힘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치는 힘이다. 온유한 자는 가장 깊은 내면에까지 변화를 체험하기 때문에 강한 내적 힘을 지니게 되며, 다른 이에게는 평화와 인내, 너그러움과 안전함을 전할 수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다. 모든 이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이 온유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온유함은 필연적으로 평화를 낳는다. 평화에 대해 예수님은 부활이전과 이후에 상반된 말씀을 하신다.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지르러 왔다’ 부활하신 후에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 상반된 말씀의 바탕에는 평화의 어떤 상태를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과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제자들 입장에서 모든 것을 불에 태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가치관, 메시야관의 처절한 붕괴를 말한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때 평화를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데이비드 호킨스는 『놓아버림』(판미당, 박찬준 역, 2013, pp. 232-242)에서 모든 것을 불태운 후의 상태인 평화를 이렇게 기술한다.

 

“평화의 수준에서는 갈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랑하는 상태를 평정과 고요, 영원, 완성, 완수, 정적, 만족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내적침묵과 내적 영광, 일체감, 통일성, 전면적 자유가 있다.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있다. 이때 활동은 힘이 들지 않고, 자연발생적이며 조화롭고 사랑을 베푸는 효과가 있다. 우주에 대한 지각이 바뀌고, 자신과 우주관계에 대한 지각도 바뀐다. 내면에서 내적 큰 나가 세를 얻는다. 개인적 자아는 그에 딸린 감정과 신념, 정체성, 관심사와 함께 초월되었다. 무한과 접촉하는 내적평화를 경험하면서 대단히 강해진다. 전면적 평화의 에너지 장은 난공불락이다. 내적평화를 찾은 사람은 더이상 세상에 협박받거나, 통제되거나, 조종되거나, 프로그래밍되지 않는다. 평화의 상태에서 우리는 세상이 가하는 위협에 상처를 받지 않으며, 세속적 삶을 통달한다. 평화의 상태가 자리잡으면 평범한 인간적 고통을 겪는 일은 더이상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취약성이 생기는 기반자체를 전적으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무언의 전달, 평화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켜 "깨달음"을 얻었으며 은총상태에 있다고 표현한다”

 

평화에 이른 사람들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어떤 액션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가 평화의 아우라가 된다. 무언의 비언어적 혜택이 존재한다. 어떤 스승의 오라 속에 놓이기 위해 추구자들은 장거리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이다. 평화의 상태는 이 세상의 물질과 에너지를 통제하고 재편성하는 힘의 원천이다.

 

평화는 어떤 액션이라기 보다는 존재성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은 무언의 전달을 기본으로 한다. 논리나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비언어적 에너지 현상이다. 진보한 스승의 오라속에 있는 진동은 스승이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반송파로 기능한다. 그러나 촉매작용을 하는 것은 에너지의 파동이지 말이 아니다. 무언의 전달을 통해 진보한 스승이나 성인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는 우리의 오라와 뇌기능, 존재 전체의 일부가 된다. 인류가 아직까지 생존하는 것은 이 같은 평화의 에너지가 밖으로 송신되어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평화의 에너지가 인류의 부정성을 상쇄하지 않았으면 인류는 오래전에 자멸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내적 진화가 전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이유다. 자신의 내면에서 높은 사랑과 평화의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그는 진실로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Blessed are they who are persecuted for the sak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화 쿠오바디스의 한 대사,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쿼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이 영화는 박해에 대응한 베드로 사도의 자유의지의 실현, 선택적 차원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행복론의 전체적인 틀이 흔들린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설을 뒷받침해주는 클레멘스가 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Letter to the Corinthians〉(96경, 5:1~6:4)이다.

 

"다른 사람들의 몹쓸 시기심 때문에 한두 번이 아니라 숱하게 고난을 당하고 증인의 일을 해낸 베드로는 마땅히 영광스러운 곳으로 갔다(5:4).…… 거룩하게 살았던 이 사람들(베드로와 바울로)은 타인의 시기로 인해 수 없이 많은 고문과 끔찍한 일을 당하고, 우리들 가운데 모범이 된 수많은 선택받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6:1)."

 

베드로 사도의 순교에서 보듯 의로움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갈망이다. 자유의지의 가장 적극적인 실현이다. 이는 순교자들의 삶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평화는 내적임 힘이지만 확산의 에너지로 인해 세계 전체를 가장 평화로운 곳으로 만들려는 에너지의 분출이다. 그리하여 평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내적 힘으로 박해의 상황에 이르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걸어감이다. 그들에게 박해는 더 이상 박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의로움은 두 가지를 증거하는 행위이다.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과 이 세상은 결국 하느님 나라라는 선취적 의식이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자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자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와 그 의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자가 실현태라면 후자는 잠재태의 양상에 가깝다. 잠재태가 실현태로 넘어간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박해받는 자에게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앞서 모든 것을 통해 주어졌거나 "깊은 곳으로 가는 길"을 통해서 온 인격 안에서, 타자의 인격으로 흘러넘쳐 이루어진 사건이고 구체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섭리에 자신을 기쁘게 수락한 것이기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로 을 수 없습니다"(요한 6, 44)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Blessed are the merciful,for they will be shown mercy.

 

자비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자비(慈悲)의 기본의미는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불교에서는 ‘중생들에게 즐거움과 복을 주고, 고통과 괴로움을 없게 함’이라고 한다. 협의의 자비는 죄에 대한 용서일 것이다. 광의의 자비는 잃어버린 ‘은총지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자비의 성녀라 불리는 파우스티나 성녀는 자비에 대해 이렇게 기도한다.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 당신의 성심은 사랑 자체이니, 당신 자비심의 위대성을 공경하고 특별히 들어 높이는 자들의 영혼을 당신의 지극히 동정심 많은 성심의 거처 안에 받아 주소서. 이들이야말로 바로 하느님 친히 발휘하시는 능력으로 힘 있는 자들입니다. 온갖 고난과 반대 세력 가운데서도 그들은 당신의 자비심을 믿고 의지하여 전진함으로써 당신과 일치하였습니다. 오, 예수님, 그들은 자기들의 어깨에 온 인류를 짊어졌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당신의 더없이 광대하게 베풀어 주심과 헤아릴 수 없는 자비심을 공경하고 찬양하며 또한 예수님의 지극히 동정심 많은 성심 안에 감싸여 있는 그들 영혼 위에 당신 자비의 눈길을 보내 주소서. 그들은 살아 있는 복음입니다. 그들의 손은 자비의 행위로 가득차 있으며 그들의 마음은 기쁨에 넘쳐 지극히 높으신 당신께 자비의 찬가를 노래합니다. 오, 하느님, 간청하오니 당신께 의탁하는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심을 보여주소서.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 뿐 아니라 특별히 죽을 때에 그들에게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이 자비심을 공경하는 영혼들을 예수님 친히 당신 영광처럼 보호해 주소서. 아멘.“

 

자비의 기도 핵심은 자비는 <살아 있는 복음>을 사는 일로 보고 있다. 진복팔단에서 자비를 맨 나중에 묵상한 이유는 위의 모든 행복은 하느님의 섭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앞서 바라본 7개의 행복은 이 자비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자비는 은총지위를 회복하는 일이다.

 

은총지위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조차도 은총의 선행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인 것이다. 은총은 “높은 이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혜와 사랑”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은총은 분배정의와는 관계없이 순수한 호의와 자비로서 거저 베풀어진 혜택을 말하는데, 은총, ‘카리스’(charis)란 단어는 원래 아름다운 자태를 의미했지만 성서에서 호의, 자비 그리고 혜택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계시는 그대로를 계시하셨기에 은총은 인간에 대한 자비로우신 태도나 호의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놓으시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성서 전체는 ‘은총사’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계획 뿐 아니라 인간이 누릴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완성될 신인(神人) 상봉(相逢) 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바라봄이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도달한 그 상태의 확장이다.

 

 

 

3.

 

글의 서두에 언급한 단락이다.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 이것은 전 세계의 많은 대학에서 교훈으로 쓰는 대학의 보편적 방향성이다.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의 실체적 구현에 가깝다.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모든 대학은 동문을 통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사업을 벌인다.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신앙인이라면 여기서 멈춰서서 무엇인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돈은 수단이다, 진리는 목적이다. 목적은 거룩한데 수단은 더러울까?

 

이 글의 대답은, 목적은 수단을 왜곡하거나 변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목적은 그 수단조차도 사랑이어 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더 큰 사랑도 더 작은 사랑도 없다. 사랑은 모두 같은 사랑이다. 

 

산상설교에서 말하고자하는 행복은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그 행복과는 상관없는 어떤 대척점에서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신앙인들은 ‘희생’ 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도출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희생을 간절히 원할 거라는 어떤 희생양 모티브가 출현한다.

 

진복팔단은 신망애의 밑그림에 해당하고, 그런 맥락에서 산상설교는 인류가 원하는 모든 행복, <행복(eudaimonia)과 행복주의(eudemonism)>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인류가 말하는 그 어떤 행복도 배제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이 원하는 그 행복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행복의 방향성을 정교화 한 것이기에(정교한 것만이 모든 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평등함이기 때문에) 산상설교는 절대론적이면서 동시에 포괄적 행복론이라 할 수 있다.

 

신이 인간이 누리는 행복을 반대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신이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생각할 수가 없다. 자식을 낳아 길렀다고 원가상환을 요구하는 부모가 있는가? 예컨대,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거나 순교한 것은 행복의 확장성을 이루기 위한 자발적이고 불가피한 인간의 선택이고 자유의지인 것이지, 희생의 요구에 답한 것이 아니다. 신앙인의 행복은 모든 것을 포기한 이들이 누리는 그 행복이 아니다. 모든 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행복일 뿐이다.

 

시간성으로 말하자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에 대한 청사진이다,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완성될 신인상봉(神人相逢)만이 영원한 행복인 것이기에, 산상설교는 행복의 잠재태와 실현태에 대한 포괄적인 방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들음’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들음’은 몇 가지의 전제 속에서 가능하다.

 

Ⓐ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사무엘상. 3.10-11)

 

Ⓑ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복음 21.6)

 

Ⓒ 눈으로 본적도 없고 귀로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두셨다( I고린토 2, 9).

 

 

일단 Ⓐ의 사무엘처럼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자세가 신앙에게는 가장 필요하다. 행복은 누군가의 조언이나 충고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애주애인이나 진복팔단은 그리스도 신앙의 황금률이다. 이 황금률은 우리 인생의 총론이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어떻게’는 각론이다. 각론은 둘이나 셋이 모여서 마음을 모아야하는 것이지만 총론은 혼자 수행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마지막 겟세마니동산에서 제자들은 잠들어 있고 홀로 기도하는 그 모습은, 사실 홀로 기도하셔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제자들의 배신의 필연성을 설득하기 위해서 제자들의 잠든 모습을 부각하고 있지만, 사실 누구나 중요한 총론에 해당하는 결정을 내릴 때, 하느님의 목소리, 섭리는 혼자 듣는 것이다. 그분의 음성은 혼자 듣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선 세상의 소음 특히 내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소음에서 멀어져야 한다. 예컨대 두 사람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섭리’에 해당되는 결정을 내릴 때, 두 사람이 만나서 토론 혹은 토의, 대화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릴케는 ‘사랑할 때는 홀로가 되라’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섭리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는 일대 사건은 본질적인 음성을 듣는 것임을 시사한다. 철저히 홀로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홀로이기 위해서 홀로가 아니라, 진실로 함께하기 위해서 홀로인 것이다.

 

사무엘도 스승 엘리와 같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지도, 엘리를 통해서도 듣지 못한다. 세 번이나 사무엘을 불렀을 때에야 비로소 사무엘은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 또 스승도 그 들음에 관여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면 살게 된다. 살게 되면 행복하다. 행복은 엄밀히 살아야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행복의 99%는 사실 ‘들음’이라고 할 수 있다. 1%의 액션을 위해서 99%를 들어야 하는 목소리를 듣겠다는 수락이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들었을 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명하게 알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체험하고도 실의에 빠져 Ⓑ처럼 갈릴레아 돌아간 제자들의 일상의 삶 안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신앙인에게 신자이지만 비신자 마인드 인지의 결절점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환호하지만 자신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는 신앙인인지, 자신의 무덤을 목격하고 지키는 자인지, 여기서 제자들은 어떤 실의에 찬 상황, 살아서 자기 무덤을 보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적어도 들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질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는 바로 그 순간, 그분의 부활은 그들의 부활사건이 된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무덤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에서처럼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그분이 마련두신 사랑 혹은 행복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다. 나에게 힘이 나간 것을 나는 안다.”(루카 8.43-48)

 

겉으로는 불타오르는 거 같은 나의 신앙은 이 말씀에 겨우 의지해 버텨온 거 같다. 특히 오늘 산상설교와 강론을 묵상하면서 섭리에 ‘겨우’ 손을 대었던 날들이고 ‘간신히’ 손을 대었던 날들이고, 어떤 날은 그마저 하지 못해, ‘저만치’ 멀어지는 기차를 바라보듯 생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신열을 앓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시간도 행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얼굴로 웃은 근육의 미소가 아니다.

 

<섭리(攝理 la Providence de Dieu)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며>, 옷자락을 꽉 움켜쥔 것도 아니고 옷자락에 닿을락말락하는 그 찰라의 스침 ‘간신히, 겨우’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다. 나에게 힘이 나간 것을 나는 안다.”(루카 8.43-48)는 12년 동안 하혈을 하던 한 여인의 행복 이야기다. 이름도 기록되지 못한 이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 다가간다. 페니키아 여인처럼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도 못하고, 자캐오처럼 무화과 나무에도 올라가지 못한다. 군중 틈을 비집고 지나가는 예수님 뒤로 가서 옷자락 술에 간신히 손을 대었고, 그 순간 그 여인의 병을 나았다. 그 여인은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정도이다. 우리의 행복도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익명의 그 여인처럼 하느님의 섭리, 그 옷자락에 살짝 손을 댄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바친다.

 

사랑하는 이여!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에게 얶매이진 않습니다. 그냥 당신을 사랑했다는 그 자체로 매 순간이 행복합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한없이 사랑하시되 저에게 매이지 마십시오. 그냥 저를 사랑함으로 당신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서 그 어떤 희생제물도 바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저를 위해서 그 어떤 것도 바치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당신은 존재 자체로 이미 제게 다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