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1)
-시간 안에서의 하늘나라, 시간 밖에서의 하늘나라
[연 중 제 28 주 일 (가 해) 2020. 10. 11. Matthieu. 22,1-14]
참고
1. 이사야서 25,6-10ㄱ/ 마태오.22,1-14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박찬기 역, 민음사, 1999
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피게니에.스텔라』, 박찬기 역, 민음사, 1999
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헴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안삼환 역, 민음사, 1999.
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정서웅 역, 민음사 1999.
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기행』, 박찬기 역, 민음사, 2004
7. 요한 페터 에크만, 『괴테와의 대화』, 장희창 역, 민음사, 2008
8.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1995.
1.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전문을 읽어보면서 오늘 성찰의 주제를 열어보기로 한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를 기울였으리라./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금방 학교를 졸업하고 머지 않아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으리라./아니, 그런 것들은 잊어 버렸으리라./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에는/신경쓰지 않았으리라./그 대신 내가 가진 생명력과 단단한 피부를 더 가치있게 여겼으리라./더 많이 놀고 덜 초조해 했으리라./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데 있음을 기억했으리라./부모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알고/또한 그들이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었으리라./사랑에 더 열중하고/그 결말에 대해선 덜 걱정했으리라./설령 그것이 실패로 끝난다 해도/더 좋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었으리라./ 아, 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더 많은 용기를 가졌으리라./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면을 발견하고/그것들을 그들과 함께 나눴으리라./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입맞춤을 즐겼으리라./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분명코 더 감사하고,/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지금 내 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는 정말 아름다운 시고, 어떤 행도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 없는 시다. 그럼에도 저 시만큼 잔인한 시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 주제로 바라보면 그렇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회한을 통해 <오늘>을 바라보았다는 것, 이보다 자신에게 준 더 큰 벌이 있을까? 더욱이 회한이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때,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자꾸 지난 시간이 오버랩 될 때 혹자는 그것은 천형(天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모님의 상을 치를 때 가장 처절하게 울음 끝이 긴 사람이 효자인가? 울음 끝이 짧은 사람이 효자인가? 이별하고 사랑이 끝났을 때 뒤끝 작열하는 사람이 그동안 연애에 충실했나? 아닌가? 생각해 보면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 얼마나 생의 아픈 단면을 말하는 시인지 알게 된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해! 라는 말은 상대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나의 회한을 없애라는 말이기도 하다.
『파우스트』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1832년)가 23세에 시작해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인 82세에 끝맺은 작품이다. 60여 년에 걸쳐 완성한 12,111행의 대작으로, 전 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를 지닌 인간 파우스트의 생애를 그려낸 장엄한 드라마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파우스트』에 대한 해석은 지식과 학문에 절망한 노학자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빠져 영혼을 담보로 현세의 모든 것을 맛보려 하다가 마침내 천상의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문학, 철학, 종교, 정치, 전쟁 등을 아우르며 다양하고 폭넓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버킷리스트에 속하는 고전 중의 고전이며, 괴테가 완성한 독일정신의 총체인 동시에 인간정신의 보편적 지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파우스트는 인간이 통과하게 되는 5개의 비극을 통과하고 생을 마친다. 어떤 학문과 지식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삶의 본질에 대해 절망하는 ‘학자의 비극’,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인간의 운명을 그린 ‘그레첸 비극’,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쥔 파우스트의 불만족과 신하들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긴 실권 없는 황제의 운명이 서술된 ‘황제의 비극’ 이상적인 세계인 헬레나에 대한 동경과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헬레나 비극’ , 시력을 잃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만든 땅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비로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다룬 ‘지배자의 비극’이 나온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번뇌를 108가지로 바라본다. 어떤 인간이 108가지의 번뇌를 다 경험했다면 그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일까? 그 맥락에서 파우스트가 통과한 5개의 비극은 가장 불행한 인간 파우스트를 말하고자 함인가? 아님 다르게 읽어볼 수도 있는가? 파우스트의 마지막 독백을 들어보면 괴테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분명히 드러나고, 그것이 괴테가 60년동안 고민한 삶에 대한 궁극의 지점인 듯하다.
[...] 내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내 이제 최고의 순간을 맛보노라.
[...] möchte ich [...]Auf freiem Grund mit freiem Volke stehen. Zum Augenblicke dürft' ich sagen: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Es kann die Spur von meinen Erdetagen Nicht in Äonen untergehn. -Im Vorgefühl von solchem hohen Glück
Genieß' ich jetzt den höchsten Augenblick.
『파우스트』에서 명문장 가운데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되는 문장을 꼽으라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일 것이다. 그 문장은 바로 앞에 나오는 ‘순간을 향해’ 속에서 태어난 말이다. 영원 앞에서 우리의 삶은 순간에 비유할 수 있다.
『파우스트』를 ‘구원의 책’이라 일컫는 이유는 그 구원의 이유가 선악의 저편에서 끊임없이 추구하고 방황하던 절망적 예외인간 파우스트의 비극적 결말이 하늘의 일방적 '시혜'가 아니란 점에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의 영혼을 담보로 한 계약 조건과는 달리, 천사들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라고 하며 파우스트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이끌어간다. 파우스트 구원의 이유가 최후의 순간까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였다는 것이 오늘 이 글이 바라볼 주제이다.
①“자아 로테,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차갑고 무서운 술잔을 손에 들어 죽음의 도취를 다 마셔버리렵니다. 당신이 이 잔을 내게 손수 내어주셨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②처음으로 세상에 나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굉장한 존재로 생각하고 많은 재능을 습득하려고 하며 무엇이든지 다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의 교양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 보다 큰 집단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을 익히며 의무에 따라 활동하는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할 줄 아는 것이 유리합니다.( 『빌헴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③이탈리아 기행『이탈리아 기행』은 괴테가 1786년부터 1788년까지 약 20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독일의 지인들에게 보낸 서한과 일기, 메모와 보고를 다시 엮은 것이다. “현명한 자는 모든 산만한 요구를 거부하면서 하나의 분야에 자신을 제한하고 그 하나 속에서 유능해진다네. (『이탈리아기행』)
④“가장 분별 있는 행동은 언제나 스스로 지니고 태어난 일, 자기가 배워서 익힌 일에 힘쓰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그들의 직분을 다하는 걸 방해하지 않는 것이네. 구두장이는 언제나 자기의 구두골 앞에, 농부는 쟁기 뒤에 있으면 되고, 군주는 나라를 통치하는 법을 알면 되는 것이겠지. 왜냐하면 정치라는 것도 배워야만 하는 직업의 하나이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주제넘게 개입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네.” 요한 페터 에크만, (『괴테와의 대화』)
『파우스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피게니에.스텔라』, 『빌헴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이탈리아기행』을 통해 집약된 괴테 인생의 총체적 비전이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는 한순간에 문학적 재능으로 태어난 문장이 아니다. 인류 역사의 기록문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저 문장을 꼽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라는 희망의 전언에 있을 것이다. 세상에 전시(과시)할 수 있는 어떤 결과물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열망하며 자신이 걸어야 할 그 길을 걸어갔다는 것! ④의 요한 페터 에크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를 보면 이 점은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2.
류시화 시인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에서 회한을 통한 삶의 본질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가 온갖 구구절절한 인생 편력을 통해 결국 삶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나 그들이 바라본 것은 같은 지점이 아닐까 싶다. 언제나 열망하며 <오늘>을 살아라, 라는 문장으로 집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밖에서 천국이 아니라 시간안에서의 천국을 살아라, 라는 말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마태오.22,1-14에서 <예복>이라는 말로 집약하고 있다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수석사제들이나 백성의 원로들, 율법학자, 바라사이파, 사두가이파 그들이 놓친 부분은 바로 <열망하며 살아낸> <오늘>이 아니었을까?
마태오.22,1-14 의 세 주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이 세 주제를 바로 시간 안에서 오늘이라는 하늘나라, 천국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초대해 놓고 예복을 준비하지 않아서 내쫒김을 당했다는 이 양극단의 부르심에 내포된 의미가 무엇일까?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땅히 자기정립이 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가끔, 개신교신자였던 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는 경우에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언제나 세가지 였다. 첫째 질문은 왜 성모님을 예수님보다 더 공경하느냐? 두 번째 질문은 왜 죄를 사제를 통해 고백성사를 해야지만 사해진다고 생각하는가? 세 번째 질문은 왜 죽으면 즉천당이지 연옥을 상정하느냐? 앞에 두 질문은 가톨릭 교리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데 세 번째 질문은 질문이 질문의 꼬리를 물어서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분들이 쉽게 수용하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정립이 필요할 것이다. 이 부분이 마태오복음의 저자가 말하는 <예복>에 대한 이해와 겹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몇 개의 질문으로,
Q1 왜 연옥이 필요한가? 왜 즉천당이 아닌가?
우리는 두 가지의 하늘나라 중 하나를 살고 있다. 하나는 이 세상의 삶이 끝나서 보상으로 주어지는 하늘나라를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시간 밖에서). 또 다른 사람들은 삶이라는 선물이 주어지는 그 순간부터 오늘이라는 하늘나라가 주어진 것으로 보고 오늘이라는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시간 안에서).
Q2 이 두 하늘나라 가운데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하늘나라를 살려고 했던 것일까?
이 세상에서(시간 안에서) 하늘나라를 살았던 사람은 이 세상 삶이 끝나는 그 다음에도 의심의 여지없이 하늘나라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이 펼져지는 오늘 여기가 하늘나라 였다가 아니였다가 혹은 절대로 하늘나라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는 그 즉시 하늘나라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가 하늘나라를 하늘나라로 알 것 것인가? 혹은 살 것인가? 연옥은 그런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적응하는 빛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탄광이나 매몰사건으로 오래 빛을 보지 못하고 갇혀있던 사람들이 구출되었을 때 그들의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눈을 가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빛은 빛으로 곧바로 수렴되지만 어둠은 빛으로 가는 준비기간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어떤 것을 바꾸려 하거나 개과천선은 수직상승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 고 있다.
Q3 어떤 성당에선 십자가 대신 자비의 예수님 상을 파격적으로 걸어놓은 성당도 있다. 연옥을 상정한다면 예수님의 자비란 어떤 사람들에게 선택적으로 혹은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자비인가?
예수님 자비는 절대 선택적이지도 차별적이지도 않다. 십자가 상의 좌도와 우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예수님의 자비를 누가 수용하고 '믿는냐'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 있을 뿐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모든 결과들은 예수님이 하늘나라가 아닌 곳으로 추방 혹은 쫒아 보낸 것으로, 서술되어 있어, 인간은 마치 피동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선물이 주어져 있다. 이 선물은 유효기간이 있는 선물이 아니다. 삶과 죽음에 의해 소멸되는 선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태란 본인의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불행은 인류가 자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Q4. 그렇다면 예복은 무엇인가?
모든 인류는 예외없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부르심을 받은 순간에 삶이라는 선물도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들 스스로 하늘나라를 유보한(거절) 것이다. 인류는 수락과 거절 사이에 놓여 있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이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자기 회한의 천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파우스트의 마지막 외침은 우리 삶의 어떤 궁극적인 지점을 적시한다고 할 수 있다.
[...] 내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내 이제 최고의 순간을 맛보노라.
[...] möchte ich [...]Auf freiem Grund mit freiem Volke stehen. Zum Augenblicke dürft' ich sagen: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Es kann die Spur von meinen Erdetagen Nicht in Äonen untergehn. -Im Vorgefühl von solchem hohen Glück
Genieß' ich jetzt den höchsten Augenblick.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늘이라는 하늘나라를 사는 사람이고, 하늘나라를 시간 안에서 수락한 사람이다. 그는 하느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예복을 갖추어 입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는 그 언젠가 주어지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회한이라는 천형에서 벗어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3.
글을 마무리하며,
고통불간섭의 원칙이란 게 있다. 아무리 사랑해도 공유할 수 없는 고통이란 게 있다. 고통은 각자의 몫이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누군가의 고통에 간섭할 수 없다. 위로조차 할 수 없다. 다만 그의 마음에 내 마음을, 그의 영혼에 내 영혼을 연결하는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고통은 신과 일대일 대면을 하고 있는 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있다. 가족들은 모두 각자의 힘듦 때문에 자기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정식으로 밥을 차려서 혼자 남김없이 먹고 있을 때(강의를 하려면 먹어야 하기에), 이렇게 생존본능에 철저해도 좋은 건가?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라고 중얼거려 보기도 하지만...그 중얼거림이 얼마나 징그럽고 공허한지 진저리가 쳐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이 말은 우리가 언제 외치게 되는가? 이 문장은 즉물적인 문장이다.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문장이다. 심장에서 튀어나온 절규처럼 솟구친 외침이다. 파우스트가 인생의 모든 것을(희.노.애.락.애.오.욕) 다 맛보고 죽으면서 외친 마지막 절규에 가깝다. 이 외침은 사실 자기의 입으로 외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외치지 못한 채로, 실은 외치고 있는 상태일 때가 더 많다.
살다가 자신의 삶을 무(無)로 인식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 자신의 ‘빈손’만 보게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한 거 같은 데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거 같은 빈손. 너는 모든 것을 잃은 자다, 너는 사랑하는 이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 빈손이다, 라고 우리에게 속삭이는 내면의 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파우스트박사도 모든 지식을 설렵했으나 궁극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해 자신을 무(無)로 인식하는 순간에 메피스토펠레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원하는 모든 삶을 다 맛보라는 계약 조건 ,그대신 모든 것을 다 맛보고도 삶의 본질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계약.
여기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인간에 대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맛본다는 것은 그에게 열정(파토스Pathos)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서 나오는 <로고스-에토스-뮈토스-파토스>는 모두 사랑의 하위개념에 속한다. 그들이 사랑의 하위개념인 것은 그 어휘의 모어가 고통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파토스는 열정 혹은 고통이라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열정이 고통과 한 쌍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열정은 사랑과 동의어란 이야기다. 여기서, 악마, 어둠, 사탄, 마귀...등등 무엇으로 불리든 '사랑'과 '열정'을 모르는 존재는 그것을 아는 인간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죽을 듯 살 듯 열심히 산 사람들이 맛보는 마지막 강, 무(無)의 강. 자신이 살아온 삶을 빈손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더 아픈 시간이 있을까? 그런데 무(無)는 파토스의 결과이다. 파토스를 통과한 인간만이 무(無)를 체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 무(無)의 강을 건너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예수님은 돌아가시자마자 부활하시지 않고 사흗날에 부활하셔야 했을까? 3일. 그 숫자는 성서저자의 작위적인 배열일까? 이 글도 직관해 의지해 쓴 글이고, 무(無)와 파토스의 관계도 불교에서 말하는 무(無)와는 별개의 직관이다. 그리고 3이라는 숫자에 대한 해석도 직관이다. 이 3은 무(無)의 시간, 사람으로 하여금 본질적 세계로 넘어가는(바라보는) ‘씻음의 시간’이 아닐까. 여백(餘白). 하늘의 문양은 이 '여백' 위에 씌어진다.
그러하오니! 무(無)를 바라보며 신열을 앓고 있는 아름다운 이들이여!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괴테가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고, 피로 쓴 문장이다. 언제나 열망하며 산 이들에게 선물로 준 문장이다. 시간 안에서 하늘나라를 이미 살고 있는 이들은 오늘 모든 삶의 순간들이 '너 참 아름답구나!'일 것이 분명하다. 빈손마저도, 무(無) 조차도 귀하고 귀하다. 그것이 가슴을 찢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열망은 가득하나 무엇하나 마음껏 이룬 것이 없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가 바로 오늘 우리가 입고 있는 옷, 하늘나라의 예복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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