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통찰력in-sight,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나뭇잎숨결 2020. 10. 5. 15:27

통찰력in-sight,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샤프츠베리의 아름다운 것Schöne, 선한 것Gute, 참된 것Wahre을 중심으로

 

 

[연 중 제 27 주 일 (가 해) 2020. 10. 4. Matthieu. 21,33-43]

 

 

참 고

 

1. 마태오. 21,33-43/ 루카.10,25-37

2. 샤프츠베리, 『도덕감-윤리학The Moralists, a Philosphical Rhapsody, Being a Recital Certain Conversations on Natural and Moral Subjects』(1709)

3. 레드윈 호더, 『샤프츠버리의 생애와 업적 The Life and Works of the Seventh Earl of Shaftesbury』(1886)

4. 존 로렌스 해먼드 & 바버라 루시 해먼드 『샤프츠버리 경 Lord Shaftesbury』(1936)

5. 제프리 A. F. 베스트의 『샤프츠버리 Shaftesbury』(1964)

6. 박찬구, “도덕감 윤리학에 대한 연구”, ?삶ㆍ윤리ㆍ예술?, 이문출판사 1997.

7. 사하키안 ?윤리학의 이론과 역사?, 송휘칠ㆍ황경식 역,박영사 1986.

8. 진교훈, ?철학적인간학연구(1)?, 경문사 1981.

 

 

 

1.

 

추석 명절 잘 보내셨지요? 저도 잘 보냈습니다. 잘 보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가족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행복하다는 것이겠지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전 가족들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만들었고, 가족들도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을 다해 만들어줘서 음식으로 추억을 쌓으면서 행복해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1일1식을 하는 사람이라 음식을 많이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먹든 가족 혹은 지인에게 주든 음식을 만들 때,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져봅니다. 마음가짐이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는 데 방점을 찍습니다.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비결은 마치 그 음식을 만들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처럼 하는 것, 그것밖에 없는 듯합니다. 집중력, 정성, 그것은 세상 어디에서나 통하는 만병통치약이라 생각이 든 명절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볍게 첫 단락의 문을 열었으니, 오늘도 좀 무거운 주제를 바라보려 합니다. ---

 

왜 <하느님>을 그토록 좋아하는 데, 삶은 <하느님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성서에 등장하는 수석사제들, 백성의 원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를 너무나 쉽게 지나쳐서 예수님의 부활로 넘어간다. 마치 <수학의 정석>에서 집합을 공부하지 않고 곧바로 미적분이나, 확률통계 문제를 풀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

 

신앙인의 궁극적인 지점은 단연코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 궁극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거치고 지나가야할 터널이 성서속에서 늘 예수님과 대척점에 있던 이들에 대한 깊은 이해다. 예수님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그들을 더 깊이 끌어안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속에서 내가 수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어떤 면이 있을거라는 전제로부터 수용은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식구조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로 가기 위해서 땅을 알아야 하고, 땅의 삶을 뜨겁게 살아야 한다.

 

그들의 의식구조가 신앙생활에 어떻게 작용을 하고 있는지, 먼저 그들의 의식구조가 어떤 매트릭스에 갇혀 있었는지, 그 장애요인을 유심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빛에 대해 말하기 전에 어둠을 알아야 하는 논리와 같다. 또 그들의 의식구조를 바라본다는 것은, 역사속의 그들이 아니라, 오늘 나의 의식구조를 성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주류 담론의 핵심 축이었던 그들의 ‘무엇이’ 예수님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나? 그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하느님 나라’는 왜 절대로 ‘하느님적인’ 것이 아니었나?

 

지난주, 이번주, 다음주까지 복음 사가는 거의 융단폭격에 가까운 예수님의 직설어법으로 그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하는 하느님나라가 가장 하느님적인 것이 아니라고 거듭 역설하고 있다. 이 직설어법은 십자가형으로 그대로 예수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도 아는 그 사실을 당시의  예수님은 예견하지 못하셨을까? 십자가형 아니 그 이상, 죽음을 무릎쓰고라고 그들의 무엇인가를 벗겨내고 싶어하셨던 그 마음, 우리는 그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죽음을 무릎쓰고라도 그들에게 끝끝내 알려주고 싶어하셨던 그 마음, 우리는 그 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성서는 역사서가 아니다. 그들은 오늘, 우리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적인 것으로 완전히 기쁘지 않다면, 자아도취에 빠져 혼자 흥겨울지 모르는데, 우리의 신앙이 어떤 확장력을 잃고 있다면 신앙의 ‘혈’은 어딘가가 막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나? 그들의 ‘그 무엇’은 단지 그들의 그 무엇이 아니다. 그들의 그 무엇은 바로 오늘 우리의 그 무엇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는 말은 유치원생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땅한 일이다. 우리가 하는 말을 대학생이 못 알아듣는다면 참 답답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말을 대학교수가 못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땅을 칠 일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이 몇 번의 분노를 가감없이 드러낸 부분들이 있다. 그 분노의 현장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분명 분노조절장애가 아니었다. 자비와 연민의 그분이 그들의 ‘무엇’을 보고 그토록 분노했을까?

 

먼저, 오신부님의 강론에서 인용한 마더 데레사의 통찰을 인용해 본다.

 

①“생각을 조심하세요. 언젠가는 말이 되니까요. / 말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행동이 되니까요/ 행동을 조심하세요. 언젠가는 습관이 되니까요. /습관을 조심하세요. 언젠가는 성격이 되니까요. /성격을 조심하세요. 언젠가는 운명이 되니까요.”

 

‘생각이 운명까지’ 갔다. 여기서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라볼 수 있다. 생각은 바로 그 사람의 의식구조를 드러낸다. 그 의식구조는 그 한 사람의 의식구조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 의식구조를 지닌 사람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그 의식구조의 확장성은 중대하다 하겠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생각이 그 무엇을 만들기 전에 해지기 전에 모든 이들과 화해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생각에는 어떤 창조하는 힘이 있다는, 이 글의 논의를 좀 더 심화시키기 위해 미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정치학자이자, 윤리학자라는 수많은 평가가 덧붙여지는 <샤프츠베리Shaftesbury>의 <도덕감>을 읽어보기로 한다.

 

②외적인 형식 또는 형태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워진(‘beautified’) 것으로서, 애초부터 아름다운(‘beautifying’) 내적인 형식에 언제나 종속된다. 자연, 육체나 사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은, 본래적이며 고도로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환기하는 동시에, 여전히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 개인과 우주의 조화에는 전체의 지배를 받는 복종이 함축되어 있다. 세계의 조화에 이바지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아름다운 것Schöne, 선한 것Gute, 참된 것Wahre은 세계의 조화에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같은 이름이다. 인간의 내적인 형식은 세 가지 방식으로 외적인 형식을 구성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의 형태에서, 즉 육체적인 현상의 아름다움과 조화는 ‘아름다운 영혼shöne Seele’을 암시한다. 그 다음 그의 행동에서, 즉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는 아름답다. 그 다음 예술 작품의 창조에서. 아름다움의 가장 고귀한 등급은 ‘죽은’ 형식뿐만 아니라, 정신과 형성 능력이 있는 형식까지 산출하는 활동적인 자연의 신적인 본질에 있다. 즉 정신마저 구성하는 그것은 그런 정신을 통해서 구성되는 저 모든 아름다움을 자기 안에 포함하며, 모든 아름다움의 원칙이자, 원천이자, 근원이다. ‘내적인’ 혹은 ‘정신적인 시각’은 자연의 개별 부분뿐만 아니라 전체에서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과 참된 것의 동일성을 인식하고 향유한다.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혹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감’이 있는가라는 윤리적인 논의를 할 때 항상 거론되는 학자가 영국의 샤프츠베리Shaftesbury(1661년~1713년)다. 계몽주의적인 사유와 케임브리지 학파의 플라톤주의를 결합한 샤프츠베리는 18세기 영국, 독일, 프랑스의 정신Geistesleben에 막대하고 강력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화이트헤드처럼 유기체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연, 정치, 철학, 종교, 미학 등 인간의 총체적 삶 속에서 아우르고 있는 진선미의 생득적인 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윤리의 보편론자에 속한다.

 

샤프츠베리는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도덕감>이 존재하고 이 <도덕감>은 전체 세계를 지향하며 마치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의 향유가 배제된 참된 선한 것’도, ‘선한 것이 배제된 아름다움의 참된 향유’도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아름다운 것을 직관적으로 인식하자마자, 정신적으로 보자마자, 선하고 아름다운 영혼은 더 없이 고귀한 행복에 빠진다”고 보고 있다.

 

샤프츠베리의 <도덕감>은 의식의 본질적 존재성에 대해선 설명 될 수 있을지언정, 인류의 역사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전쟁을 방불케하는 현 세계의 상황맥락을 짚어내지는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강론에서 인용된 마더데레사의 통찰을 샤프츠베리의 <도덕감>에 대입해 보면, 그 발현의 명암은 인간의 선택여부 즉 자유의지의 행사 여부에 달려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은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다. 선택 혹의 의지는 우리 자신을 어떤 삶으로 추동하는 힘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샤프츠베리의 <도덕감>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최고선을 선택한 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2.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그 사회를 주도하던 그들, “수석사제들, 백성의 원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는 윤리적으로 무장한 채, 왜 '하느님적'인 것을 바라보는 데 그토록 힘들었을까? 샤프츠베리의 <도덕감>으로 그들의 윤리를 바라보면 그 윤리는 전체사회의 조화와 멀어진 기득권의 차단벽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항상 '하느님적'인 것을 외치는 예언자들을 그들 사회에서 가차없이 처단했다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냥 거부가 아니라 처단/차단이었다.

 

마태오. 21,33-43/ 루카.10,25-37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수석사제들, 백성의 원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그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조금 추론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③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오. 21,33-43)

 

④“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10,25-37)

 

 

④를 보면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애주애인>의 그 황금률을 결코 모르는 것이 아니었음 알 수 있다. 율법학자들이 알고 있었다면 율법준수를 목숨처럼 생각하던 당시 주류의 입장에 있던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은 당시의 최고 인텔리계급에 속한다. 예수님이 성서의 어떤 부분을 언급할 때 그들 역시 다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하지 않는가? 그들이 알고 있는 계명이나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계명이나 한 획도 다르지 않음에도 왜 그들은 사랑을 거부했을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여기서 두 가지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그들도 오늘 우리만큼 사랑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을 좋아할 뿐 사랑을 알지 못했다. 사랑을 안다는 것과 사랑을 좋아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들은 관념으로 사랑을 배운 것이지, 경험으로 사랑을 배운 것이 아니었음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사랑 앞에서 범하는 오류와 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관념으로 사랑을 배운 것은 사실 사랑을 안 것이 아니다. 알지 못하면 살지 못한다. 그들의 행위를 보면 관념으로 사랑을 배운다는 것이 인간역사에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 우리에게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인가? 사랑이다. 구체적 경험적 사랑이다.

 

관념적 사랑은 사랑을 확장하지 못한다. 이런 독백을 할 때가 많다. 나는 늘 사랑에 대해 고민한다. 사랑의 고민이 깊어질 때 이렇게 내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내 사랑이 정말 모든 것을 팔아서 살 정도의 귀하고 값진 진주인가? 또 내 사랑을 받아줄 상대는 사람인가? 사랑을 알고 있는 심장이 있는 사람인가?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면 상대에게 도착하지 못할 것이고, 상대가 사랑을 모른다면 즉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랑은 내게 다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내 사랑이 진주에 가까운 사랑인지 아닌지 그것부터 점검하자....또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자. 우리의 사랑이 예수님이 말하는 그 사랑이라면 경계도 한계도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하늘을 보고도 땅을 보고도 저 바다를 보고도 저 산을 보고도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추론은 <삼국유사> 「구지가(龜旨歌)」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건국 신화에 삽입되어 있는 시가로, 왕의 강림을 기원하는 4구체 한역시(漢譯詩)로 전하는 집단 무요(舞謠)이다. 이 노래를 부르던 가락국 사람들은 왕이 없으면 생존의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거북아 거북아 龜何龜何(구하구하)

머리를 내어라. 首其現也(수기현야)

내어놓지 않으면 若不現也(약불현야)

구워서 먹으리.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내어놓지 않으면 若不現也(약불현야)/구워서 먹으리.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이 부분에는 인간의 두려움이 어떤 형태로 표출되는지 잘 보여준다. 자신들의 절대적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들은 기원했던 그 상대를 가차없이 구워서 먹겠다, 처단하겠다는 선택의지를 드러내고, 그들이 그럴 것임을 알고 있다. 결과가 있기 전에 선택의지의 결과까지 이미 알고 있다. 구지가는 한국문학사의 첫 작품이다. 기원의 대상에 대한 이 괴물같은 논리는 무엇인가?

 

국가가 형성되기도 전의 고대인들의 의식구조가 예수님 시대나 21세기 인공지능을 말하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다, 두려움이다. 사랑은 두려움을 모른다. 사랑을 모르는 것은 사랑만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랑적인 것을 모두 제거해야만 하는 무서운 파괴 논리로 무장된다. 수많은 불행한 사건사고에서 보듯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은 그 사람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신을 부르면서 신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로인해 “수석사제들, 백성의 원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그들은 구세주를 간절히 원했지만 구세주를 죽이는 선택을 하게 된다. 왜? 그들이 사랑을 관념으로 배웠기 때문에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생은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그들을 위해서 자비의 기도를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 역시 예수님이 사랑으로 품어야 하는 인류이니까...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라고...사랑은 관념이 아니다. 경험이고 체험이다. 그들은 사랑을 좋아하고 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두려워했다. 그때 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패(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가 바로 율법준수라는 윤리의 가면이다.

 

성서의 많은 부분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전언은 인간의 무의식구조, 두려움의 상태에 놓인 인류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두려움이란 생각이 신을 죽일 수 있는 어떤 힘을 가졌다면, 두려워하지 않는 생각은 부활을 가져올 수 있는 힘도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의 힘과 사랑의 힘, 어느 것이 더 큰 힘이겠는가?

 

그렇기에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통찰력in-sight>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리고 자신이 이 시대의 주류에 속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세 가지를 매일 묻고 답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정말 사랑을 원하는가? 자신이 하는 사랑을 매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적은 예수를 믿는 이들이고 부처의 적은 부처를 믿는 이들이라는 말을 우리 생에 기록하지 않기 위해서다.

 

둘째, 정말 예수님이 말하는 그 사랑을 체험하기를 원하는가? 내가 말하는 그 사랑이 관념인가? 경험인가?를 처절하게 성찰할 일이다.

 

셋째, 정말 사랑하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오늘 누리는 삶의 모든 것, 모든 순간, 그 배려나 은총들은 어디서 왔을까? 사랑은 아주 작게, 최소의 것으로 체험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표현은 사실 사랑합니다! 라는 표현과 동의어다.

 

‘베풀어 주신 배려나 또 받은 은혜’를 ‘자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머리에서 감사함이라는 단어는 잊혀지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마음도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배려나 은혜’를 자신들의 권리로 착각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배려와 은혜’를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배려와 은혜’를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하느님과 자신들이 어떤 관계’ 인지를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이시고, 또 자신들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

 

그때, 우리는 이 글 앞에서 언급한 샤프츠베리의 통찰,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도덕감>이 존재하고 이 <도덕감>은 전체 세계의 조화를 지향하며 마치 예술 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의 향유가 배제된 참된 선한 것’도, ‘선한 것이 배제된 아름다움의 참된 향유’도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아름다운 것을 직관적으로 인식하자마자, 정신적으로 보자마자, 선하고 아름다운 영혼은 더 없이 고귀한 행복에 빠진다”는 말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Schöne이고 선한 것Gute이고 참된 것Wahre임을!

 

 

 

 

3.

 

글을 마무리 하면서

 

요한1서 4. 7-21을 다시 올려 본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