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사랑,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
-‘근원으로 되돌아감(Rückkehr in den Ursprung)’ 혹은 ‘근원으로 다가감(der Nähe zum Ursprung)’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2020. 9. 20. Luc. 9,23-26]
참 고
1. 루가 9.23-26
2. 김훈, 『바다의 기별』, 생각의나무, 2008
3.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01
4. 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http://blog.daum.net/m-deresa/12389337
5. 오쇼, 『사랑이란 무엇인가』
http://blog.daum.net/m-deresa/12387153
6. 칼린 지브란, 『예언자-사랑에 관하여』
http://blog.daum.net/m-deresa/12388647
7. 데이비드 호킨스,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는 사랑」
http://blog.daum.net/m-deresa/12387212
1.
이 글은 <사랑>에 관한 것이고, <루카9,23-26>에서 말하는 <사랑>과 <부끄러움>의 관계를 성찰해보기 위한 것이다. 먼저 사랑에 관한 두 편의 시와 다섯 편의 <사랑>의 담론을 읽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獻花歌 (헌화가)」다.
紫布岩乎邊希 자줏빛 바위 끝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 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
吾힐不喩慙힐伊賜等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花힐折叱可獻乎理音如 꽃을 꺾어 받치오리다.
『삼국유사』의 <수로부인>편에 전하는 「獻花歌 (헌화가)」는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에 바닷가에서 쉬고 있을 때, 길 옆 벼랑에 철쭉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공의 아내인 수로 부인이 꽃을 꺾어 달라고 하니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소를 몰고 가던 노옹이 위험을 무릅쓰고 꽃을 꺾어다가 부인에게 바치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獻花歌 (헌화가)」는 흔히 아름다움과 예술이라는 유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사랑과 부끄러움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랑에 대한 통찰로 읽어볼 수도 있다. 견우노인이 천길 절벽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꺾어다 건넨 <꽃>은 자신의 전 재산인 암소와 계급과 신분, 나이를 초월한 오직 <사랑> 그것을 수로부인에게 드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한낮의 사랑>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사랑의 대척점에 놓여있는 어떤 심리적인 방어기제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시 한 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를 거쳐 미국에 정착하는 망명의 과정에서 ‘마가레테 스테핀’이라는 한 여인에게 헌정한 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 내게 말했다 / 당신이 필요해요 / 그래서 나는 조심한다 / 걸어가는 길 위를 살피며 / 빗방울이 나를 죽일까봐 두려워하면서."
브레히트는 흔히 혁명가라는 칭호가 붙지만 그의 삶 전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대상은 정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 ‘마가레테 스테핀’이라는 여인이었다. 브레히트시 “빗방울이 나를 죽일까봐 두려워하면서."에 이르면 우리의 일상, 나날의 모든 순간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지향하는 것임을 바라볼 수 있다. 이미 우리 곁을 스쳐간 사람, 오늘 함께하는 사람들,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오늘(빗방울)’을 정성스레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
여기서, 견우노인이나 브레히트의 시에서 사랑은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아주 ‘최소의’것에 담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 유교에서 말하는 ‘최소주의’와 맥락이 닿아 있다. 사랑이라는 저 무한을 “최소의 것에 담음(contineri a minimo)”이라는 것으로 바라 볼 수 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어떤 순간들을 돌아다보면 알 수 있다. “삶의 가장 큰 행복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우리자신을 위해 사랑받는, 아니면 우리자신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사랑이라는 저 지고의 경지가 ‘나’를 향하고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주가 한 방울의 이슬에 담기는 것처럼,
사랑에 대한 담론을 조금 더 읽어보기로 한다.
①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모든,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김훈, 『바다의 기별』)
②진정한 사랑에 좌절은 없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하지 않은 사랑은 충족감이란 없다. 그 안에는 뿌리 깊은 기대감이 있어서 무엇이든 부족하게 느끼지 때문이다. 기대감이 너무 커서 아무도 충족시킬 수 없다. 따라서 진실하지 못한 사랑은 언제나 좌절을 부른다.(오쇼, 『사랑이란 무엇인가』)
③사랑은 그대를 정화시켜 순결하게 하는 것, 사랑은 그대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대를 반죽하는 것, 그리하여 사랑은 그대를 사랑의 성스러운 불에 넣어, 그대를 신들의 거룩한 향연을 위한 성스러운 빵이되게 하리라, 사랑은 사랑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사랑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할 수도 소유당할 수도 없는 것, 사랑은 오직 사랑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것임을(칼린 지브란, 『예언자-사랑에 관하여』)
④무조건적인 사랑은 타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상태에 있으면 타인에게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으며 사랑받기 위해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타인이 어떻든 간에 사랑한다. 사랑이 무조건적이며 애착과 기대와 숨은 의도가 없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마음에 적어두지 않는다. 그냥, 존재 자체가 사랑임을 가슴이 알려준다(데이비드호킨스, 『내려놓음』>
⑤아무르amour는 말을 하는 입이라기보다는, 배가 고파 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본능적으로 젖을 빠는 입 모양에 더 가까운 단어다...그런데 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사랑의 순수성, 그것은 침묵하는 초라한 나체가 맨 앞쪽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 사랑하는 것은 이미 피할 수 없는 뻔뻔스러움이다. 사랑이란 언어에 선행하는 것의 벌거벗음, 언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사회가 망각하고자 하는 벌거벗음이다 ……사랑은 위선적이고, 수다스럽고, 선명하지 못한 인간의 사회에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동물적인 순수성이다"(.(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
①에서 김훈은 ‘모든 닿을 수 없고, 품을 수 없는 모든 것들,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감각과 삶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이다. 그 부재하는 것들로 인해 그는 글을 쓸 수 있고 문학을 할 수 있는 어떤 근원적인 힘, 시원(始原) 같은 것들이라 할 수 있다.
②,③,④ 오쇼, 칼린지브란, 데이비드 호킨스는 현대 영성의 아버지들이다. 그들의 영성의 주제는 언제나 사랑이다. 그들은 영성의 대가들답게 사랑의 절대성에 주목한다. 사랑 그 자체의 사랑에 대한 담론들이다.
⑤에서 파스칼 키냐르는 『은밀한 생』에서 스탕달 이후 탄생한 또 하나의 매우 독창적인 사랑의 담론으로 사랑은 비언어적이고, 비사회적인 것으로 단 하나의 육체와도 같은, 단 하나의 책, 세계와 비밀을 담지하고 있는.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는, 선명하지 못한 인간의 사회에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동물적인 순수성’ 으로 바라보고 있다.
2.
그렇다면, 루카9,23-26에서 말하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어떤 사랑을 말함인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이 말씀은 너무나 귀에 못이 박히듯 들어서, 너무나 잘 아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말씀으로 그러나, 결코 살아내기 쉽지 않는 삶의 자리에 해당한다.
반복하는 차원에서, 신앙인에게 ‘십자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요셉 라칭어 추기경님의 통찰을 다시 바라보기로 한다.
에우카리스띠야(Eucharistia 감사), 십자가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는 움직임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하느님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것을 선사로 받고, 받음으로써 하느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알아 모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봉헌은 우리가 드리지 않으면 하느님이 갖지 못할 그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받은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차지하도록 하는 데 있다.
제물, 제의적 수락(acceptance), 하느님께 모든 것이 속하여 있고, 인간에게는 가부- 선택의 자유의지 속에서 사랑과 거절의 자유가 주어져 있다. 사랑에서 나오는 <네> 소리만이 인간이 하느님으로서 기다려야하는 유일한 것이며, 그것만이 의미 있는 숭배고 제물이다.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유일한 수락 (受諾)으로, 자기 이상도 아니고 자기 이하도 아닌 것을 드리는 것.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신의 사랑을 인간의 육신을 통해 보여준다는, 십자가에서 백주대낮에 낱낱이 찟져짐, 마지막 물과 피한방울까지 땅에 쏟아 부음, 최소의 것(인간)에 의해 포괄되고, 압도됨에 있어 자신이 신임을 입증하는 저 여유를 실현하는 하느님!
십자가는 감사이고, 수락이고, 최소에 것에 담긴 신의 여유라면, 십자가는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말로 대체가 된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십자가를 나에게 주어진 숙제라는 말로 표현하곤 하는데,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숙제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유일하고 당연하고 마땅히 내게 주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즉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살아내는 일이고, 그것을 날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을 통해 확장하는 일이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이라고 말하는 그 <목숨>은 무엇인가? 그 <목숨>은 생물학적인 생명을 넘어 <목숨>의 궁극을 바라봄이라 할 때, 여기서 ‘잃는다’혹은 ‘구한다’라는 표현은 생명의 근원, 시원을 바라보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생물학적 <몸>의 현실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매개에 우리의 <몸>이 소환된다는 점에 십자가의 곤궁이 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사랑은 <몸>이라는 현실 너머에 있지만, 그 사랑을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바로 그 <몸>으로 그 너머를 실현한다는 사태에 사랑은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시 <몸>이라는 최소에 담길 수 밖에 없는 무한한 사랑의 역설이다.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의 기원은 창세기의 낙원추방 설화에서일 것이다. 루가복음 사가가 다시 이 <부끄러움>을 거론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순례가 결국은 낙원귀의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함인가? 근원으로 돌아감, 우리의 본질적인 순례의 목적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때 <그분의 말이나 그분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의 이 전제는 그분의 행적 특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전적인 초대에 부응하지 않는다면으로 읽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의 첫 번째 특징은 ‘숨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베드로적 부끄러움과 유다적 부끄러움으로 대별해 바라볼 수 있다. 베드로적 부끄러움은 사랑에 대한 바라봄이 아니라 전능에 대한 바라봄에 방점이 찍혀 있다. 사랑에 대한 바라봄이 있을 때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날마다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다. 그분의 십자가 밑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의 숨어버림은 바로 사소한 것, 최소의 것에 담긴 사랑을 바라볼 수 없었기에 일어나는 숨어버림의 부끄러움이라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의 두 번째 특징은 자비를 믿지 않는 단절 혹은 차단의 부끄러움이다. 이것은 유다적인 부끄러움에 해당한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한, 공공연히 마리아 막달레나나 앞에 붙은 일곱마귀가 들렸던. 혹은 죄많은 여인이라는 주홍글씨를 넘어서는 그 지점에서 자신을 돌려세움에 대한 초대다. 그 어떤 죄보다 사랑이 큼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다.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무엇인가? Ⓐ에서 말하는 감사하고, 수락하고 최소에 담긴 그 사랑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또 Ⓑ에서 말하는 목숨을 넘어 진정한 목숨의 시원적 생명성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분이 그를 <부끄럽게> 여겨서 그가 그분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추방한 대가가 그분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랑의 자기추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끄러움>은 사랑의 자기 추방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3.
나는 오랜시간 사진에서 보는 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저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워킹우먼, 지식노동자의 삶을 질주하며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로써는 실로 치열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저 곳은 순례의 여정 가운데 잠시 지나가는 곳, 혹은 설레는 땅의 예표에 해당한다. 내가 돌아갈 곳은 그 분의 '사랑'이다. 저 땅이 나를 그토록 설레게 했다면 하느님 나라는 얼마나 더 설레는 곳일까?
사랑은 우리가 온 근원이자, 돌아갈 시원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근원 가까이에 이르는 길은 우리들 인간에게는 언제나 가장 머나먼 길이고, 따라서 가장 힘든 길” 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깊은 사유(das besinnliche Denken)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유란 우리가 일부러 생각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 속에서 우리 자신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유는 응답이자 반향이자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고향을 다시 찾아 되돌아오는 ‘귀향(Heimkunft)’이며, ‘근원으로 되돌아감(Rückkehr in den Ursprung)’ 혹은 ‘근원으로 다가감(der Nähe zum Ursprung)’이라 할 수 있다.
이 사랑(근원)으로 돌아가는, 다가가는 행위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십자가를 져야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아름답지만 불가능한 초대일 것이다. 그분의 초대는 최대의 것을 최소에 담는 초대이다. 사랑은 이벤트가 아니다. 들꽃 한 송이를 요구하는 초대라 할 수 있다.
<한낮의 사랑,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에서 사랑 앞에 붙은 ‘한낮의’ 라는 관형어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랑을 의미한다. 한낮에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사랑, 백주대낮에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으면서 보여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을 만천하게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또 그 사람이 나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이 시대의 사랑은 두 가지의 부끄러움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의 배우자보다 멋있는 사람을 수없이 만나게 된다. 그때 심미적으로 멋있는 사람이, 곧 내가 해야 할 사랑이라는 동의어가 아님을 우리가 간과한다는 것과,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정당한 사랑을 무자격의 사랑으로 소외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우리를 부끄러운 사랑으로 밀어넣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라틴 속담에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스러워져라(ut ameris, amabilis esto)” 또 <인형의 집>을 쓴 입센은 “한 사람도 사랑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인류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 역시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 바로 그 사랑이다. <나>라는 최소에 <신>의 사랑이 담기는 것이라면,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그 사랑에 대한 초대의 핵심은, '날마다'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질 때에만 알 수 있는 계시에 해당한다. 여기서 내가 지고갈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나>의 십자가라면, '나' 를 지고 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분의 '자비'에 희망과 믿음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소의 것에 담김(contineri a minimo);최소의 것(인간)에 의해 포괄되고, 압도됨에 있어 자신이 신임을 입증하는 저 여유를 실현하는 하느님!" 이 경지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자비가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될 수도, 납득할 수도, 바라볼 수도 없는 지점이다. 자비 안에서만 우리는 <사랑>에서 숨지 않을 수 있다. 자비 안에서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저 무한한 <사랑>을 담을 수 있는 작은 그릇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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