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이미' 그러나 ‘아직-아닌-존재(des Noch-Nicht-Sein)’

나뭇잎숨결 2020. 9. 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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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러나 ‘아직-아닌-존재(des Noch-Nicht-Sein)’

-뼛속에 가두어 둔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연 중 제 22 주 일 (가) 2020. 8. 30. 마태 16,21-27]

 

 

 

참고

 

1. 예레미야 20,7-9 / 로마서 12,1-2 / 마태오 16,21-27

2,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역, 민음사, 2012

3. 존 로크, 『인간 지성론』, 추영현역,동서문화사, 2011

4.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역, 민음사, 2012

5. 플라톤 『파이드로스』. 박종현역, 서광사, 2016

6. 요셉라씽어, <그리스도신앙어제와오늘>. 장익번역, 분도출판사, 1974

7. 에른스트 블르호 『희망의 원리』 박설호 역, 솔, 1993

 

1.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나의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김현승, 「가을의 기도」

 

 

9월이다. 가을이다. 시인이 아니어도 우리는 가을에 온몸으로 시를 쓰게 된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라는 시에는 세 가지 존재의 조건 <기도, 사랑, 고독>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가을은 내면이 더 깊어지는 시간이다. 화자는 1연에서 가을에 내적으로 성숙한 시간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낸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2연에서는 가을에는 아름다운 삶의 결실을 맺기 위한 사랑의 시간이 되기를 갈망한다.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바람에는 사랑을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3연에는 가을이 삶의 궁극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시련과 역경의 시간인 ‘굽이치는 바다’와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정화된 시간인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절대고독의 경지인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르기를 바라고 있다. 이 가을의 기도는 시인 한사람의 바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김현승, 「가을의 기도」 2연에 나오는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와 연결해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8.6)>라는 조금 무거운 주제를 생각해 보려한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이 글에서 온전히 다 풀어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9월이니까 가을이니까, 사랑에 대한 성찰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번역되고 있는 데리다의 책 『우편엽서(La Carte Postale/The Postcard)』의 절반을 차지하는 1부 발송(Envous/Sending)편에는 두 연인 사이에 주고받은 우편엽서를 모아놓은 것들이 나온다. 두 연인이 사귀다가 사이가 안 좋아져 서로 소통한 내용물들을 다 태워버리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편엽서들을 모두 태우고 남은 잔여물들이 있었다. 끝끝내 없앨 수 없는 시간의 흔적, 재. 의미가 소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태워버렸음에도 남아있는 것들. 데리다는 모든 텍스트는 문자로 기록하지 못하는 흔적을 남기듯, 사랑은 이 세상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유일한 텍스트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사라져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사랑,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8.6)”라고 말하는 그 사랑은 선험적인가? 경험적인가? 아님 데리다식으로 독약인가? 또 사랑을 논하는데 선험인가 경험인가가 왜 중요할까? 사랑이 선험이라면 생성도 소멸도 없을 것임으로, 즉 스스로 자존하는 것임으로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경험적이라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선험과 경험에 대한 사유의 흔적을 읽어보기로 한다.

 

⒜타불라라사tabula rasa: 정신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칠판에 비유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 De anima〉가 처음이다. 그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와 마찬가지로 스토아 학파도 정신의 본래상태는 <빈서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두 학파는 정신이나 영혼이 감각을 통해 관념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단지 잠재적이거나 활동하지 않을 뿐이며, 지적 과정에 들어서면 관념에 반응하고 이 관념을 지식으로 바꾼다고 강조했다. 타불라 라사를 새롭게 강조한 철학자는 영국의 경험론자 존 로크였다. 로크는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정신은 원래 '아무 글자도 쓰지 않은 백지'와 같아서 경험을 통해 '이성과 인식의 모든 원료'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로크 자신은 주어진 '원료'를 이용하는 마음의 힘인 '반성'을 매우 중시했지만 그가 옹호한 타불라 라사는 그후 철학자들이 더욱 급진적인 입장으로 나아가는 신호탄이 되었다.

 

⒝파르마콘pharmakon: 그리스어 ‘파르마콘 Pharmakon’이 지닌 중의성은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Phaidros)' 에서 나오는데, 파르마키아(Pharmakeia, 제약술)의 이중성과 연관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더위를 피해 아테네 교외의 일리소스(Ilissos)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치유의 효능을 가진 샘을 뜻하는 요정을 '파르마키아'라 부른다. 이 말에서 약과 독을 의미하는 '파르마콘(pharmakon)'과 지금 약국을 의미하는 'pharmacy'란 단어가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의 대화편에서 진리란 영혼의 말(logos)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지, 결코 외적인 흔적을 빌려서 표시하는 문자(grammatology)를 통해 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리는 인간의 '숨결'처럼 선험적이라고 본 것이다.

 

⒞파르마코스(pharmakos, 희생양): 데리다는 <파이드로스>를 통해 문자의 이중성과 파르마콘의 이중성을 비교하면서, 텍스트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폴리스는 본래 정결하고 완전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폴리스 안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누수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구성원들은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 경계를 더 삼엄하게 서면서 구멍과 틈을 메우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 왜일까? 문제의 원인이 폴리스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 원인을 덮고 감추기 위한 ‘희생양’을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파르마코스’다. 그 후 파르마코스는 균과 독을 끌어 들인 자로 간주된다. 마땅히 폴리스의 평안을 위해 파르마코스는 추방되어야 하지만 질서유지에 필요하므로 파르마코스를 일시적으로 허용한다. 파르마코스는 국적 불명의 외국인 노동자처럼 있지만 없는 자, 안에 있지만 밖에 있는 자, 혹은 안에도 밖에도 없는 자로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힌 존재를 의미한다. 모든 시대가 희생양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타불라라사(tabula rasa)는 경험론에 관한 것이고, 파르마콘(pharmakon) 선험론에 대한 것이다. 파르마코스(pharmakos, 희생양)는 경험론과 선험론을 해체하는 것이다. 선험론과 경험론과 해체론은 모두 <몸>과 <정신 혹은 영혼>의 관계에 관한 인류의 사유의 흔적(痕迹·痕跡)에 해당한다.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아가서8.6)” 라고 할 때, 사랑을 몸의 죽음에 비유한 이유는 사랑은 선험과 경험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지닌 몸이라는 현실은 경험을 요구하지만 영혼과 정신은 경험 이전에 선험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의 개인사도 <몸>과 <정신 혹은 영혼>의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세운 계획에서 육신의 안락이나 보호나 즐거움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있을까? 반대로 어떤 지난한 시간 속에서 평화에 이르게 되었을 때, 어둠의 밤을 통과하다 어떤 빛을 체험했을 때, 오랫동안 진행하던 일에서 어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전자는 지나치게 힘의 근원으로 몸을 숭배하고 있다면, 후자는 몸을 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전자는 경험론적 삶이라 본다면 후자는 선험적 삶의 자세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 순례의 여정은 형상(몸)과 말씀의 길항(拮抗) 과정을 살아낸다고 할 수 있다. 몸과 영혼을 대척점서 바라본 두 사람, ‘몸은 영혼의 감옥’(플라톤)이라고 보았다면, 반대로 ‘영혼은 몸의 감옥’(푸코)이라고 바라본 이 상반된 인식은 인류 역사의 변곡점breakpoint 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세계관을 대변한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라고 보던 시대는 형이상학이 시대를 끌어가는 <영혼>의 시대였다면, 푸코처럼 ‘영혼은 몸의 감옥’이라고 보는 우리의 시대는 형이하학이 세계를 이끌어가는 <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2.

 

그런 맥락에서 예레미야 20,7-9 / 로마서 12,1-2 / 마태오 16,21-27를 인간의 존재조건인 <몸>과 <영혼>의 길항(拮抗) 과정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완성하는 여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시사해 준다.

 

예레미야, 베드로, 바오로 이 분들은 누구인가?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하느님 사랑의 완성자였음을 우리는 이미 알기에 그분들의 순례의 여정 중에 하느님과 주고받았던, 혹은 예수님과 주고받았던 치열한 절규나 대화조차 우리에게는 선물이고 위로일 수 있다.

 

예레미야 예언자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과 시련을 겪던 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소명을 받은 구약의 인물들은 예외없이 고통을 당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이 시기에 당신 백성과 더불어서 고통을 당하신 하느님의 대변인 구실을 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대변인은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그분의 고통을 증언해야 했기에 그들의 삶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스러운 역사 안에서 가장 고통을 많이 당해야 했던 인물은 예레미야였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친구와 친척들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극도의 고독 속에 버려져 사면초가가 된 그는 자신을 낳은 날과 모태를 저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동족이 철저히 파멸되어 가는 처참한 모습을 예고하고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괴롭게 지켜보아야 했다. 더구나 그가 전한 신탁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토록 성실한 사랑을 쏟았건만 그들로부터 배반을 당한 하느님, 사랑하는 그들을 징벌하신 다음 그들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안쓰러워하시는 하느님의 고통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평과 원망과 항변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예레미야의 고백록(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은 자신의 고통과 동족의 고통과 하느님의 고통을 모두 안고 그 고통의 무게에 짓눌린 한 의인의 피맺힌 절규이다.(정태현 갈리스도 신부)

 

①“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만 되었습니다” 라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탄식은 BC586경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함락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나온 절규다.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에 해당하는 20장 후반부에는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저주를 받아라!”(14-18) 라고 토로할 정도로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예언자로서의 처절한 토로가 나온다.

 

예언자로서의 외침이 늘 치욕이 되어 돌아오는 현실 앞에서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라고 외치는 예레미야의 탄식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선택이전에 자신에게 주어진 선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절규에 가까운 외침은 선험적인 그 사랑이 세상에서 현존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육체가 필요하다는 <몸>의 현실을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관념의 구체화가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예레미야가 외치지 않았다면 돌들이 외칠 것이란 사실을 예레미야는 절규의 시간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절규는 자기 목숨을 위하여 살아남기 위한 자신을 위한 절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것으로 세상의 현실에 대항하고 맞서고자 하는 호소였다. 사랑은 선험적이지만 우리가 그 선험적인 사랑을 나누는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을 보여준다.

 

②“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사의 예고 앞에서 보인 베드로 사도의 반응은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로 나눠지는 기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제자들의 혼란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위격에 대한 혼란이자, 전능과 사랑에 대한 <구세주론>에 대한 혼란이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일은 십자가의 그 사랑이다. 부활의 그 사랑이다. 사람의 일은 십자가가 없는 사랑이다. 우리가 가장 각성되기 어려운 부분이 사랑이다. 왜 그럴까?우리는 모두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자리잡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은 언제나 시간과 함께 움직인다.

 

베드로 사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수님이 오신 궁극의 이유를 베드로 사도는 아직 설득당하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육과 영의 상태가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는 시간이라고 봄이 마땅하다. 베드로 사도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자리잡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떤 글에서처럼  "사랑이란 나보다 내 마음이 먼저 도착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 내가 자리 잡기까지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미와 닿아있다.

 

모든 사랑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신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잡는 시간, 베드로 사도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자리잡는 시간,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자리잡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사람의 일에 몰두해 있던 인류가 하느님 일로 하루아침에 전이될 수는 없다. 기다림은 그 자체로 사랑의 깊은 속성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은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 길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걷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길이라는 뜻일 것이다.

 

③“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고 말한다. 예레미야 예언자나 베드로 사도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우리에게 강력한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듯한 표현이고, 이렇게 강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누가 그분을 따르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오로의 회심 사건을 생각해 보자.  사도행전에서 세 번씩(9,1-18; 22,3-16; 26,4-18)이나 회심사건이 나오는데, 세부묘사에서 조금씩 다르다. 9장의 기록은 바오로가 3인칭 단수로 등장하는 객관적 기록이다. 이에 반해 22장과 26장의 기록은 바오로가 1인칭으로 등장하는 자기 변론이다. 22장은 바오로가 자기를 고발한 유다 동족들에게 한 변론이고, 26장은 유다와 로마의 고위층 인사들 앞에서 한 변론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같은 사건을 이렇게 반복하는 이유는 독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전도사(傳道史)에 길이 남을 이 중요한 사건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정태현 갈리시도 신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뿐 아니라 바오로 사도에게 인생의 변곡점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하느님 일을 방해하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직접 개입, <몸>에 대한 강력한 경고, 그 맥락에서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라는 심층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1차적으로 적어도 하느님 일을 못할망정 하느님 일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몸>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몸>과 <영혼>은 플라톤이나  푸코의 상반된 인식처럼 대척점에 놓여 있는 선악의 대립은 아니다. 영적인 세상을 위해 <몸>은 그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수단과 목적의 차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몸>이 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레미야예언자, 베드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사랑에 관한 한 선험론자이자 경험론자들이다. 그분들 안에 사랑이 없었다면 그 사랑을 살지 않았을 것이며 그분들이 온몸으로 그 사랑을 살아내지 못했다면 오늘 우리는 그분들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들은 온몸 온 영혼으로 그분들에게 주어진 사랑의 길을 완성했다.

 

그분들은 하느님 사랑이 그분들 안에서 완성되어서 그 길을 걸어간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가면서 완성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에서 희망의 보류, 희망의 미완성에 대해 ‘아직-아닌-존재(des Noch-Nicht-Sein)’ 라고 표현한다. 희망의 원리란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 그 상태에 있는 우리 자신을 기다려 주는 것이다.

 

 

 

3.

 

글을 마무리하면서,

 

지난주, 면봉으로 귀를 후비다 귀 안 깊은 곳을 건드려, 그것이 염증을 일으켜 일주일동안 벽에 기대서 잠을 잤다.

귀와 연결된 뇌가 화농현상이 진행되는 통각을 쉴새없이 보내고 누우면 통증이 더 심해서 벽에 기대 있어야 했다.

한달만 아니 2주만 더 아팠어도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동안 나는 철저하게 식이요법으로 내 몸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게 아니라, 아예 병원에  갈 일을 만들지 말자는 게 내 철학이었다.

30년동안 병원에 다니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는 식이요법에 성공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 이름붙일 정도로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강박관념 비슷하게 건강을 지키려고 했던 거 같다.

사랑하는 이들이 병으로 너무나 쉽게 피안으로 떠나는 것을 많이 봐서 그런 거 같다.

생의 무게에 비해 떠남은 얼마나 가벼운가...

일종의 트라우마다.

 

누군가 병원에 간다고 하면 정말 많이 떨린다.

진짜 기도하면서 부들부들 떤다.

수술일정이라도 알면 거의 망부석이다.

이런 내가 나도 싫은데, 사랑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병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싶지 않다.

오히려 병원에 가는 사람은 담담한데 나는 지나치게 걱정한다.

병원은 의사 한 사람이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병일지라도 그 병을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동원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동원된다는' 그 사실이 두렵다.

그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병이라도 큰 병이 될 수 있다.

또한 수술 자체는 잘되었지만 수술이후에 완치되는 기간도 본인이 정할 수가 없다.

이래저래 병원 갈 일을 만들지 말자고 건강규칙을 지키지만, 가끔 나에게도 병이 찾아올 때가 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 인 거 같다.

내가 많이 아파보지 않았으니 <몸>이 아픈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가끔 이렇게 예측하지 못한 병이 나를 방문했을 때, 비로소 아픈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게 된다.

아픈 사람들을 위한 나의 기도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또 아픈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 생각, 말, 행동들을 뼈아프게 자책하기도 한다.

 

그동안 영혼을 통해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반대로 몸을 통해 내 영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영혼을 통해 몸을 바라보는 것과 몸을 통해 영혼을 바라보는 것 가운데 후자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비로서 알게 된다.

병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병을 통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을 때 나는 선험론자가 된다.

 

오늘 글의 주제 <사랑은 죽음과도 같다>는 것은 경험만으로는 결코 쓰지 못할 주제다.

사랑에 대해 쓴다는 것 자체가 선험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사랑이 되기 위해선 나라는 너라는 당신이라는 타자가 필요하다.

메신저가 필요하다. 메신저가 없다면 사랑이라는 메시지는 사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다시 경험론의 범주로 돌아온다.

삶을 사랑에 종속시키려는 그 자체는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이 선험이라면 스스로 생성도 소멸도 없는 “있음”그 자체로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레미야 베드로 바오도 사도의 통찰처럼 사랑은 끊임없이 부단히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봉헌해야 한다. 몸을 매개로 하지 않는 사랑도 물론 있다. 성인의 통공, 호킨스 박사같은 각자들이 나누는 에너지의 전파, 우리가 완전히 순수해 졌을 때 교감으로 전하는 사랑은 몸이 매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대부분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몸이 매개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건강은 그 자체로 이타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몸이 건강해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뼛속에 가두어 둔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는 특정 예언자에게만 주어지는 신탁의 말이 아니라 생명 일반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근원에 대한 통찰이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사랑의  신탁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있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사랑은 언제나 ‘이미' 그러나 '아직-아닌-존재(des Noch-Nicht-Sein)’ 인 길위의 나그네와 같다.

 

마치, 내가 한걸음 다가가면 상대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상대가 한걸음 다가오면 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늘 평행선이다. 그로인해 우리의 사랑이  ‘이미 그러나 아직-아닌-존재(des Noch-Nicht-Sein)’ 인 상태로 끝난다해도, 적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원하는 그 사랑을 하려고, 즉 '삶을 사랑에 종속시키려고' 뜨겁게 고민하는 그 원의原意 를 매일 봉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 <사랑이 죽음과 같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지 요셉 랑씽어 추기경님의 통찰을 덧붙인다.

 

“사랑은 무한을 갈구하고 불멸을 갈구한다. 사랑은 말하자면 그 자체가 무한을 찾는 외침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외침이 성취될 수 없고 사랑이 무한을 갈구하면서도 줄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면서도 사계에 잠겨 있고, 사계의 고독 및 파괴력에 갇혀 있다...부활은 그 자체가 죽음에 대한 사랑의 우세인 것이다. 사랑은 어떠한 것만이 불사불멸을 이를 수 있는가를 가리켜준다...사랑의 가치를 생명의 가치 위에 두는 사랑, 즉 사랑을 위해서는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용의가 있는 사랑의 경우에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더 클 수 있다...사랑이 죽음보다 우세해지려면 단순한 생명보다 더 커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