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인문학, 말(언어)의 윤리학
- "말하는 말"(la parole parlante)에 대한 "말해진 말"(la parole parlee)의 우위성
[연중 제20주(가해)2020.8.16. 마태오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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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테라스
참 고
1. 마태오 15,21-28
2. 김욱동, 『대화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1988
3. 아우구스띠누수, 『아우구스띠누스』, 교부문헌총서, 성염 역, 분도출판사, 1989
4. 앨런 스윈지우드, 『문화사회학 이론을 향하여』, 박형신/김민규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4
5. 가톨릭굿뉴스-「성경의 세계:티로와 시돈」
6. 알렝 핑겔크로트, 『사랑의 지혜』, 권유현 역, 동문선, 1998
7. 임마누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역, 민음사, 2003
1.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던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진은영)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분명하게 보일 때까지,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떠나보낸 말, 우리에게 도착한 말에 대해 성찰 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사건, 혹은 사람을 경험한다는 것은 실재전체를 경험한 것이 아니고 항상 실재의 부분만을 경험하는 것이고, 항상 제한된 국면(局面) 하에서 인간 유한성에 대한 체험을 더 할 뿐이다. 유한한 인간이 경험한 또 다른 유한한 인간, 혹은 유한한 실재에 대한 앎이자, 그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인간과 교차하며 만든 사건 안에서 결국 유한성에 대한 인식을 두텁게 할 뿐이다. 그래서 ‘존경하는 스승 곁에 가까이 가지 마라 너는 스승을 경외의 눈으로 보는 순간 스승의 유한성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뿐이다’ 라는 말들을 하곤 한다.
유한한 세계의 운동장에서 우리는 다시 어떤 카테고리를 설정해 인간 윤리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신의 몫인 은총과 축복까지도 그 범주 안에서 재단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것이 유한한 인간이 유한한 세계를 유한하게 유지하려는 유한한 몸짓일 것이다. 그에 반해 인류의 모든 스승들은 끊임없이 이 삶이라는 트랙을 확장해 카테고리를 없애려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통찰은 우리에게 손실과 실망과 기만과 단절감만을 주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자신의 체험이나 앎이 유한성에 근거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앎을 절대화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람은 유한성의 경계 앞에 서게 되고, 그것이 초극되어야 할 것임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때 그 원함의 ‘간절함’이 무한한 실재의 체험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게 만든다. '사랑'은 바로 무한에 대한 간절함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유한성을 통과해야 하는 문 앞에 서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무한에 속한 세계이므로 사랑 앞에서 유한의 옷을 벗어야 한다. 유한의 옷을 벗는다는 것은 ‘오늘’ ‘지금’ ‘현재’ 안에서 과거와 미래가 통합된 ‘오늘’을 사는 것이다. 한 인간이 걸어온 역사의 총체를 바라보는 것이자, 그가 앞으로 그릴 시간의 궤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문화적 충격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타자를 사랑하면서 받게 되는 '자기중심적 모습', '자기위주의 모순', ‘이해할 수 없음’, '규정할 수 없음' ‘낯설음’등은 ‘상처’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①타인은 하나의 상처이다. 타자는 내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에 비하여 언제나 넘치거나 차이가 있다(알렝 핑겔크로트)
②사랑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한, 사랑 할 때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감수해야 한다.(레비나스)
두 사회철학자가 간파한 타자의 낯설음에 대한 간격을 좁히는 도구가 대화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세계의 말에는 어떤 우열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사회계층에 우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만 말에도 우열이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가 살아온, 역사가 그의 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입에서 발설되는 말은 바로 그의 마음과 정신세계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말하는 말’ 과 ‘말해진 말’로 ‘말의 윤리학’을 거론한 철학자다. 전자의 말은 실재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말이라면, 말해진 말은 카테고리로 재단된 말이자 학습된 말이다. 전자가 무한한 세계를 지향하는 위로와 창조의 말이라면 후자의 말은 유한한 세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기득권이 주입시킨 노예의 말이라고 보았다. 그는 ‘말하는 말에 대한 말해진 말의 우위성’이 이 세계를 끌고 간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하나마나한 말, 옳바른 포장에 족쇄인 말들이 말해진 말들의 운동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바로 ‘말하는 말에 대한 말해진 말의 우위성’을 빌려 말의 위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말의 정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말이 말의 자리를 찾았기에 그 말은 말씀이 되고, 그 말씀은 기적을 낳게 되고, 그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
마태오 15,21-28에서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대화의 정석, 기도의 정석을 보여주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면에 해당한다.
먼저, 가나안 여인이 처해 있는 상황(그녀의 역사)을 이해해야 할 거 같다. 가나안 여인이 살고 있는 티로와 시돈 지방은 페니키아지방이라고도 하는데, 페니키아문자를 만들 정도로 문화의 요충지이자 해외무역이 활발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이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바알, 몰록 같은 이방신(시편96,5에는 "민족들의 신은 모두 헛것이어도"란 구절이 있다.)을 믿는 곳이었다. 레위18,21에는 "너희는 너희 자식을 몰록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서는 안된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몰록은 '수치의 임금'이란 뜻인데 암몬인들의 신 '밀콤'과 메소포타미아의 신 '말릭'을 연상시킨다.
한편 카르타고에서는 ‘몰크’라는 용어가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희’를 가리켰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라는 외침은 자신의 딸을 마귀(몰록,바알)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 퍼져있던 잘 알려진 형벌처럼 들리기도 한다.(가톨릭굿뉴스-성경의 세계:티로와 시돈 참고)
가나안 여인은 이미 그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딸이 그런 죽음의 상황에 몰린 원인이 자신이었음을 고백하는 표현이기도 하고, 병의 원인을 죄로 돌리는 유대인의 사고체계를 빌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대화의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 보면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표현은 그녀의 깊은 통회의 시간 속에서 나온 말이었을 것임에 더 무게중심이 실린다. 그녀 역시 이방의 신을 믿었을 확률이 높다. 이 성찰과 통회의 과정에서 신이라면 인간의 불행을 매개로 인간에게 축복을 돌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나안 여인은 바라보았을 것이다.
①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②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①, ②를 통해서 보면 대화의 주체는 가나안 여인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호명하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여인의 ‘주님’이라는 호칭은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 부르는 그 ‘주님’과 같게 된다.
③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④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3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③, ④는 레비나스가 통찰한 ‘말하는 말에 대한 말해진 말의 우위성’을 보여주는 유대인의 언어다. 예수님의 말하는 방식은 상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으로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것과 같다. 이때 대화의 상대는 표면적으로는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과 제자들이지만, 그 심층에는 당대의 ‘말’을 점유한 유대인, 카테고리에 묶여 있는 제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⑤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⑥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⑦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⑤에서 ‘자비’의 청함에서 ‘도움’으로 구체적으로 넘어간다. ⑥, ⑦은 대부분의 복음 해설서들이 언급하는 것처럼 자신을 낮춘 가나안 여인의 ‘강아지론’을 통해 “겸양이 낳은 믿음”의 기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강론에서는 "은총의 부스러기론"을 통해 “간절함이 지킨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간절함’이란 어휘는 어휘 자체가 이미 ‘간절함’을 담지하고 있다.
‘간절함’이란 ‘말하는 말’이다. 이 간절함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간절함이란 극한상황에 처한 사람의 소망의 절대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간절함은 의지가 아니다. 이것은 즉물적인 생존 언어다. 인간의 이성에서 걸러진 말이 아니다. 심장의 박동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가나안 여인의 ‘사랑의 절박함’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인격모독, 자존심, 이런 어휘는 생의 절박함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떠오르지 조차 않는다. 제3자의 입장에서 여인이 입장을 추론할 때 나온 말일 뿐이다.
사랑의 대상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자존심이 문제고 모욕, 모독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래서 사랑에 대한 절실함, 절박함, 간절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것이다. 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딸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여인이 받을 정신적인 수모는 여인의 관심사가 아니다. 간절함에는, 은총에는 , 부스러기든 통째든 크기가 없다.
⑧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 때문에 예수님도 위로를 받으셨을 거라는 강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은 다시 우리에게 위로로 확산된다. 위로는 위로를 낳는다. 그것이 위로가 지닌 무한증식의 원리다. ‘말하는 말’에 대한 ‘말해진 말’의 우위성을 뒤집는 역설이다.
3.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우리는 J의 언명에서 인문학 독서를 하는 이유, 그 목적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문학은 언어카니발리즘을 체험하는 장이다. 언어를 통해 <말하는 말에 대한 말해진 말의 관계>를 성찰하며 말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가나안 여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낙담하고 체념하고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런 위로의 복음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역사, 문화, 종교적 환경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내야하는 문제 상황 앞에서, 그녀의 딸에게 죽음과 같은 상황이 초래되었고, 그녀는 그런 딸을 지켜보고 있을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딸을 구해줄 분이 누구인가를 미친 듯이 찾아 헤메야 했을 것이다. 미친듯이 찾아 헤멨기에 그분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녀는 온몸으로 소리질러야 했을 것이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고, 짜증나게 하고, 귀찮게 하는 말들은 누군가에겐 생존의 비명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기서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의 그 과정을 그녀를 통해 낱낱이 바라 볼 수 있다.
그녀는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해 그녀의 절박함과 절실함을 토로했어야 했고 J 라는 실재 세계는 그것에 당연히 반응했어야 했다. 절실함으로 인류를 구해야 하는 분이 간절함으로 사랑하는 이를 구해야 하는 그 절박한 언어를 못 알아들으셨을 리가 없기때문이다. 인류 역사가 아무리 질곡(桎梏)과 척박(瘠薄)함으로 점철된 역사라 해도 절실한 언어에 반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언어는 1차적인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어령(語靈)이기도 한 것이다.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 바흐친은 이를 ‘대화주의’ ‘카니발리즘’이라 명명했다. 진정한 축제는 말들의 말, 언어의 소통이라고 본 것이다. 바흐친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언어와 나의 언어를 교환하는 것으로, 사랑이라는 내적으로 경험된 모든 것은 타자의 말과 마주하기 위해 외부를 지향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아는 그 자신의 의식과 타자의 의식, 즉 자신의 말과 타자의 말 간의 경계 위에 존재하며, 자아가 타자를 성찰하고 타자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해주고 그리하여 타자의 담론이 자신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언어의 축제라고 보았다.
바흐친의 표현으로, 우리는 두 번 태어난다는 것이다. 한번은 엄마의 몸에서 그리고 한번은 타자와의 언어의 교환에서 태어난다고 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 자신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고, 자아-타자 관계는 자아가 고정되고 완성되고 완결된 주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활동의 상태에 있다는 점에서 인간실존을 완성하는 것이 언어카니발, 대화적이라고 본 것이다.
바흐친의 대화주의(dialogoism)와 독백주의(momologism)의 구분은 그의 자아이론에서 중핵을 이루는 것으로 독백주의는 타자를 완성되고 완결된 것, 즉 의식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반면, 대화주의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열려 있는 미완성된 의식을 지향한다. 독백주의가 내부 지향, 자아의 봉쇄, 분리와 고립을 이끈다면 대화주의는 봉쇄를 거부하고 외부를 지향하여 타자들의 의식과 조우하고 반응한다. 이렇듯 대화주의는 타자성(alterity)에 기반한다. 즉, “존재한다는 것은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자아가 사회생활에서 대화적인 요소와 독백적인 요소 간의 긴장을 수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 그 자체도 두 개의 기본적인 지적 경향 간의 투쟁으로 이론화된다고 보았다. 문화는 언어를 매개로 체계관념(철학, 미학, 사회학의 특정 형태들) 내에 사회-문화적 세계를 봉쇄함으로써 그것을 폐쇄하고자 하는 구심력과 연관된 경향으로 카테고리를 만들고, 이는 실제적으로 사회-문화적 세계를 메마르게 만드는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체계와 경계의 관념을 거부함으로써 개방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원심력과 연관된 경향으로 문화를 이론화하는 것은 풍부성, 다양성, 유동성, 변경(border) 유목적 사유를 장려하는 것으로 카테고리를 부단히 허무는 작업이라고 보았다.
개인적으로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은,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읽고 또 읽은 책이 사도신경 해설서 <그리스도신앙 어제와 오늘>이다. 1974년판이라 글씨도 작고 거의 종이도 닳아서 바스라질 거 같아, 아끼고 아껴서 읽는다. 그 책의 번역자인 장익 주교님께서 지난 5일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http://blog.daum.net/m-deresa/12389369
우리가 번역서를 읽을 때, 원저자와 번역자간에 어떤 어령이 오고갔는지, 그 번역서를 읽으면 대략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번역서를 읽으면서 <원저자-번역자- 독자>의 트라이앵글을 형성하며,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흘러넘치는 '언어의 카니발'을 경험하게 된다.
신앙생활에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생각이 들 때, 뭔가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를 느낄 때, 나만의 골방에 칩거해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을 필사하면서 읽는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이후에 최고의 인문학자였던, 어떤 카테고리에도 얶매이지 않으려하셨던, 인문학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예리하게 간파하셨던, 장익 주교님의 영면을 슬퍼하며, 며칠동안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을 다시 읽었다.
“사물들을 온전하게 보는 사람은 의롭게 거룩하게 보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이치에 맞는 사랑을 품은 사람으로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일 없고, 덜 사랑할 것을 더 사랑하지 않고, 더 사랑해야 할 것과 덜 사랑할 것을 동등하게 사랑하지 않고, 동등하게 사랑할 것을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는 일 없다.”(아우구스띠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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