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영원한 황금 노끈, 뫼비우스띠와 클라인병

나뭇잎숨결 2020. 8. 25. 15:28

타지마할. 하늘과 땅과 사람

 

영원한 황금 노끈, 뫼비우스띠와 클라인병

-'믿기 위해서 알고(intelligo ut credam)'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연 중 제 21 주 일 (A) 2020. 8. 23. 마태 16,13-20]

 

 

참 고

 

1. 마태오 16,13-20 / 요한1서 4. 7-21

2. 플라톤, 『파이돈』, 『파르메니데스』, 『티마이오스』, 『국가』

3. 에리 프롬,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4.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모스,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

http://blog.daum.net/m-deresa/12388883

5. 떼이야르 드 샤르뎅, 『인간현상』, 한길사, 1997

http://blog.daum.net/m-deresa/12388887

6.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박여성 옮김, 까치, 1999

7.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현정준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1

 

 

 

1.

 

 

 

코로나판데믹을 성찰하며http://blog.daum.net/m-deresa/12388541 참고할 책이 많아서 힘들게 쓴 글입니다.

 

뫼비우스 띠는 독일의 수학자 페르디난트 뫼비우스가 발견한 것으로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도형으로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적 도형이다. 이 2차원 도형을 도넛형태로 묶으면 시작과 끝이 맞물린다. 클라인병은 독일의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이 두 개의 뫼비우스띠의 경계를 붙여서 만든 2차곡면으로 방향을 정할 수 없어 바깥은 있는 데 안이 없는, 자신이 자신을 관통하면서 클라인병을 따라가다보면 뒷면으로 갈 수 있는 4차원의 도형이다.

 

이를 네델란드의 화가 모리츠 코르넬리 에셔는 뫼비우스의 특성에 따라 끝없이 돌거나 반복하거나 멀어지는 다층판화를 만들지만 그것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현상, 이는 바흐의 음악에서 <무한히 상승하는 캐논>에서 무한히 상승하던 화음이 다시 원래의 음으로 돌아오는 음들의 엉킴과 연쇄,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다층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이 이상한 고리들이 서로 엉켜 있는 듯 하지만 최상과 최하위는 서로 이어져 있어 원점회귀로 돌아가는 현상을 예술화하고 있다.

 

이를 괴델은 <불완전성의 정리>에서 <자기 지시>의 개념이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자기지시가 다층구조의 엉킴의 출발점이자 회귀점으로 언어가 대상을 가리킬 때 그 층위들 간의 위계적 관계가 엉키면서 “스스로가 참이면 증명불가능하며, 스스로가 거짓이면 증명가능하다”는 명제를 낳는다.

 

괴델은 사람의 의식은 본래부터 높은 층위의 현상으로서 낮은 층위의 뉴런으로부터 창발 하기는 하지만(창발론) 높은 층위의 의식은 낮은 층위의 현상적이고 생리학적 개념들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총체론)는 명제를 도출하였다. 높은 층위와 낮은 층위가 엉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그것이 분명히 참임을 알지만 그 참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괴리가 있다고 보았다.

 

이것을 호프 스테터는 사랑 혹은 의식과 같은 창발적 현상들은 정신(이성)/뉴런과 같은 차원에서만 설명될 수 있으며,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언어로는 설명될 수 없지만 이 세계를 끌어간다는 점에서 인간 역사의 불가사의(不可思議)를 바라보는 ‘황금노끈’이라고 보았다.(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박여성 옮김, 까치, 1999)

 

이처럼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 원점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수학, 미술, 음악, 문학, 철학, 신학에서는 다르게 설명한다.  그 설명방식은 다르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결국 한곳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의 행불행을 좌우한다는 데 초점이 놓여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그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의 전반부를 읽어본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그를 타자와 구별되는 고유성으로 불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꽃>이 되었다는 표현 속에서는 인간에게는 물리적 세계의 변화와 다르게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보편적 ‘이데아’가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모든 이에게는 본질적으로 생득적으로 진선미의 근원을 담지하고 있다고 보았다.(플라톤, 『파이돈』, 『파르메니데스』, 『티마이오스』, 『국가』)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바로 그의 본질적인 국면, 그라는 타자 안에 있는 진선미의 총체, <빛깔과 향기>를 바라보았다는 것으로 그때 그의 ‘이름’ 은 ‘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정서를 드러내는 서정시가 아니라 철학적 사유를 매개로 하는 주지시로 김소월의 <산유화>와 함께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로 감상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를 이해하는 자는 또한 그를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그럴수록, 사랑은 더욱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황문수역, 문예출판사, 2006)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해 모두 알고 싶어 한다. 사랑론의 고전에 해당하는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지식-보호-책임-확장”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상대의 본질에 대해 <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그를 보호하려는, 그에게 책임을 다하려는, 그와의 사랑을 확산시키려는 의지가 작용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소유와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상대의 물리적인 환경이나 취향, 외적 요소에 국한하지 않는다. 상대의 인격적 측면, 더 나가가 그의 <본질적 측면>에 대한 앎을 의미한다. 플라론의 용어로 그의 이데아를 나의 이데아가 알아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떼이야르 르 샤르뎅은 “사랑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중심은 인격 안에 있는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인격 안에 있는 사랑이란 최소한의 외적요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필연성 없이 충만한 자유로 사랑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한다고 바라보았다. “인격 안에서의 사랑이란 자유 안에서의 사랑이요, 사랑 안에서의 자유”라고 본 것이다. 이 사랑은 우주의 창조에 가까우며, 사랑을 자유롭게 거부하는 자에게조차 사랑하는 자를 놓아주는 행위와 속죄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까지를 포함된다. '그것은 만물의 양적 충만과 질적 완성으로 그것은 신비적 충만(pleroma)인 바, 거기서 실질적 유일자와 피조물 다수는 아무 혼란 없이 전체 안에서 再合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안다>는 문제 앞에 서게 되고 우리 순례의 여정 전체는 바로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알려고 하는지 그 <안다>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기 신을 신앙한다고 할 때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안만큼 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고통이라고 할 때 그 고통 역시 <안다>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에서도 이 <안다>는 문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신원의식과 관련해 수많은 갈등을 촉발시켰던 지난한 교회사의 여정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믿기 위해서 안다(intelligo ut credam)'라고 했으며, 성 안셀무스는 거기에 덧붙여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명제를 덧붙일 정도로 우리가 갖고 있는 이성을 총 작동하여 <안다>에 도달해야 무신론과 교회분열에 대항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성 안셀무스는 ‘이성은 종교의 시녀’라고 폄하되던 시대에 이성으로 우리는 그분을 총체적으로 <안다>고 증명할 수 있다는 신존재증명이라 부르는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모놀로기온(Monologion)』을 쓰신다.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모스는 예수냐? 그리스도냐?의 교회의 오랜 소모적 논란을 종식시키고 <예수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론의 초석을 놓는다.

 

요셉라씽어, 베네딕토 추기경님은 이를 “존재에 있어서는 시초에 서는 신이, 역사에 있어서는 종국에 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마지막 인간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종합한다. 이것을 생물철학자인 샤르뎅은 인간이 신을 믿든 부정하든 <오메가포인트>로 인간 진화는 결국 모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통과하는 지금 이 시대의 이름을 누군가는 코로나19라 불리는 바이러스와의 3차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산다는 것이 혹독하고, 생존, 실존의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치열한, 처절한, 절박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의 발생 원인이 있을 것이다. 코로나판데믹, 그 원인은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한 즉 우주의 상생원리, 그 창조질서를 파괴한 것이 주원인이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의 시간들은 천재가 아니고 인재라 할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해결의 실마리를 지니고 있다. 문제를 만든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 결자해지의 방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초한 문제, 인간이 해결할 결자해지의 열쇠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특정 종교인을 위한 신앙현주소를 바라보는 바로미터가 아니다.

 

이는 마치 뫼비우스띠와 클라인병처럼 인간역사의 엉킴 속에서도 그 엉킴을 푸는 유일한 열쇠가 되는 황금 노끈으로 인류의 초심, 인간의 영적 감수성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 꼬였을 때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한다. 인류의 초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2.

 

인류의 초심,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 <코로나판데믹>,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의 이름, 그것을 해결하는 열쇠임을 성찰해 보기로 한다.

 

마태오 복음의 시작은 다윗의 자손이며 예수그리스의 족보로 시작하여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로 시작하여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종말론적 선언으로 마무리된다.

 

그 중심에 마태오 복음서의 절정이 되는 부분으로서(마태 16,13-20)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예수님의 신원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전반부(13-16절)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신원을 고백하는 것으로, 후반부(17-20절)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새 이름을 주시며 그의 신원을 알려주시는 내용으로. 전반부가 그리스도론적 고백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반부는 종말론적 관점으로 집약되어 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마태오 26장에는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베드로의 <안다>와 <모른다>의 이 충돌은 마태오 복음의 기저, 믿는 이들의 역사를 총괄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으로 모아진다고 할 수 있다. 너의 실존의 근거 앞에 누가 있으며, 너의 생의 여정 중에 누가 함께 하고 있으며, 너의 생의 끝에 누가 있는가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①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②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축복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는 이 대화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푸는 열쇠를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베드로의 고백은 인류가 가진 초심이었다. 무신론자 칼세이건이 쓴 <창백한 푸른 점>에 지구가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 잘 보여주는 수많은 사진들이 있다.

 

인류가 지구라는 별에서 생명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신의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신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생명>의 신비를 아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를 알 때 상생의 질서는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중요한 창조질서다. 신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일이자 인류가 회복해야할 초심이다. 신의 말은 듣는다는 것은 성당에 다녀라, 교회에 다니라는 전교용어가 아니다.

 

18절에 나오는 <교회>는 특정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특정 공간을 포함한 광의의 의미다. 영적 감수성을 생의 황금노끈으로 믿고 있는 익명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교회>에 맡겨진 <열쇠>는 창조질서를 바라보는 직관의 열쇠이자, 상생하는 힘의 열쇠이자, 축복의 열쇠다.

 

우리가 직면한 고통의 이름 <코로나판데믹>은 창조의 질서, 상생의 질서가 파괴되었다는 인류 전체에 대한 위기의  시그널이다. 설사 코로나19를 가라앉힐 어떤 신약이 발명되었다고 해도 제2, 제3의 코로나19는 언제나 우리 곁에 상존한다고 보아야 한다. 근본적인 치유를 외면하고 지금 당장의 위기만 모면하려 한다면 우리는 임시방편, 사상누각이라는 고사성어를 실감나게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열쇠는 무엇입니까?과연 지금 내가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늘 나라의 열쇠는 어떤 모습의 열쇠인가? 나는 어떤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어느 반석 위에 나의 신앙을 키웠는가? 즉 나의 신앙을 받쳐주고 있는 반석은 어떤 반석인가? 열쇠는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다. 복이다. 따라서 이 복은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복은 본래 받아들이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할 때 하느님이 그곳에 당신 은총을 채워 주시는 것이지 내가 복음 담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만 만들고 그 그릇에 복을 담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 담아주시는 것이다"

(유광수 신부http://blog.daum.net/m-deresa/12389408)

 

 

“그러므로 혹독한 생태적 위기 속에 숨죽이며 혼란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삶의 열쇠는, 전우주의 창조질서와 그 비밀에 대한 직관,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절대적 신앙과 충실함입니다.”(김혜윤수녀)

 

마태오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안다>와 2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른다>, 이 상반된 태도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기독인에게 한정되는 말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이름 앞에서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인류에게 어떤 초심을 가져야 하는가를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안다>는 것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면 <모른다>는 것은 살과 피, 즉 현실적인 물적 세계, 욕망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판데익은 인류의 삶의 모토가 후자였다는 것이고, 그것이 표출된 것이 코로나19같은 생태계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승자박, 인류가 마땅히 알고 있어야할 것을 모른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을 아는 데 너라는 타자를 모를 수 없다. 신을 아는데 소유의 노예가 될 수는 없다. 신을 아는데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만을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을 아는 데 환경을 파괴하고 불결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을 아는데 술취하고 흥청거리며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을 안다면 사람에게 내린 축복을 바라보지 못할 수는 없다. 신을 안다면 사랑을 모를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런 맥락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믿기 위해서 안다(intelligo ut credam)'라는 말이나 안셀무스의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명제는 <믿음>은 곧 <안다>는 것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3.

 

이제 나의 구체적 영적 감수성의 현주소를 고백하면서, <코로나판데믹>이라는 고통앞에선 인류를 바라보는 나의 아픔의 글을 마무리해야 할 거 같다.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에

“당신은 사랑이십니다”(요한1서 4. 7-21)라고 대답하겠다.

 

나도 사람이니까, 나로 인해 혹은 타자로 인해 수많은 문제에 봉착하고, 홀로 무인도에서 사는 것이 아니니까, 또 많은 일이 주어진 워킹우먼이고, 또 어느 정도 워크홀릭에 걸린 사람이니까, 수많은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의 수만큼 어떤 예측할 수 없는 고통 혹은 문제에 늘 직면한다고 할 수 있다.

 

왜 강남의 수많은 유명 먹거리집 옆에 타로점을 보는 집들이 그렇게나 많을까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사람들은 그렇게나 먹을 것에 탐닉하면서 또한 그렇게나 행복해 지고 싶다는 양면적인 소망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먹는 것에 탐닉하지 않으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다.

 

문제 상황앞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준 '열쇠'를 떠올린다. 이것이 내 신앙의 여정 <안다-모른다>를 반복하면서 얻은 답이다. 피땀을 흘리면서 얻은 답이다. 다른 사람에게 답을 구할 필요가 없는 답이다. 이미 답은 언제나 내가 갖고 있다.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진 축복의 열쇠는 교회의 지체인 나에게도 맡겨진 열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하는 소임이 분명히 있음을 바라보는 것이고, 나의 영적 감수성의 근원인 ‘사랑’으로 그 일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런데도 남아 있는 고통은 감수하는 것이다.

 

한때 나는 사랑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사랑 그대로의 사랑>(유연석http://blog.daum.net/m-deresa/12386436) 에서 처럼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라는 애닮음으로 힘든데 힘든 시간들을 가중시켰던 거 같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사랑의 산을 넘어야 했던 시간을 통해 오늘은 그 가사를 바꾸어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로 바꾸어 바라본다.

 

그 맥락에서 하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면, 이 지구의 문제, 코로나펜데믹이라는 오늘의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 사도에게 물었던 세 번의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은 인류가 회복해야할 영적 감수성에 대한 것이다. 그 감수성만이 우리가 만든 얽히설킨 문제들, 반복되는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의 열쇠 황금 노끈이라 할 수 있다.

 

요한1서 4. 7-21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