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베아트리체즘Beatriceism,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나뭇잎숨결 2020. 8. 9. 21:26

베키오다리 위에서  단테와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즘Beatriceism,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는 최초의 언어를 찾는 이들에 대한 헌사

 

[연중 제19주일(가해) 2020. 8. 9. 마태오14,22-33]

 

 

 

참 고

 

1. 열왕기상권19,9ㄱ.11-13ㄱ/ 마태오14,22-33

2.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박갑성 역, 성바오로출판사, 1980

3.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최승자 역, 까치, 2010

4. 에크하르트 톨레, 『고요함의 지혜』, 진우기 역, 김영사, 2004

5.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La divina commedia』, 진형준 역, 살림, 2019

 

 

1.

 

횡[橫]의 길을 걷는 사람을 ‘치열한’ 현실주의라고 부르고, 종[縱]의 길을 가는 사람을 ‘지독한’ 낭만주의라 부른다면 종횡[縱橫]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을 ‘부유[浮遊]하는’ 화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주의자는 소유의 문제로 인생 전부를 승부하느라 늘 자기 안의 낭만을 제거하는 치열한 내전[內戰]을 치러야 한다면, 낭만주의자는 누군가의 노동으로 자기 식탁에 놓여 있는 빵을 하나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하는 수사학을 만드느라 날마다 더 지독해 져야한다. 제3의 길, 종횡[縱橫]을 가로질러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애매모호함으로 착지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심장 연구실에서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종횡[縱橫] 가로지르며 산 사람이 누구일까?

 

세상의 모든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할 버킷리스트에 들어 있는 책, 마음을 풍요롭게 다스리고 날카롭게 자신을 마주하고 싶을 때 읽는 책, 우리의 시야를 무한하게 넓혀주는 책, 인생의 목표를 한껏 드높이고 넓힐 수 있게 해주는 책, 비상하는 독수리의 날개를 닮은 책,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 더 높은 목표를 갖게 해주는 책, 죽음과 같은 좌절을 겪었을 때 절망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책, 본질을 바라보게 하는 책, 단테의 『신곡』에 붙은 세간의 평들이다. 서사시로 쓴 복음으로 고전 중에 고전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지옥-연옥-천국편’으로 나눠진 『신곡』의 주제는 ‘사랑’과 ‘구원’이다. 단테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베아트리체는 바로 ‘사랑’과 구원‘의 상징적 인물이다. 베아트리체는 피렌체 귀족의 딸인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라로 시모네 데 바르디와 결혼했다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단테는 서정시를 덧붙인 산문 〈새로운 인생〉에서 베아트리체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연대기를 쓴 뒤 〈신곡〉에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베아트리체는 이 작품의 〈지옥편〉에서 그의 중재자가 되고, 〈연옥편〉을 통해서는 그가 닿고자 하는 목표가 되며, 〈천국편〉에서는 그를 이끌어주는 안내자로 등장한다. 정신적으로 승화한 이러한 사랑의 표현은 단테가 완전히 영적인 존재에 몰입하는 것으로 끝난다.

 

단테는 40년에 걸쳐 완성한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 베아트리체를 구원의 여신으로 찬미한다. 단테는 아홉 살 되던 해에 한 살 아래인 귀족 베아트리체를 만나 그녀를 단번에 사랑하게 되고, 9년 후 우연히 아르노 강변 베키오 다리에서 다시 스치듯 만난다. 베아트리체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으니 그들 사이에 오고간 구체적인 사랑의 추억이 별로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단테하면 베아트리체를 떠올릴 만큼 두 사람은 세기의 연인으로 회자되고, 지금도 베키오 다리에서 바라보는 아르노 강의 풍경이 아름다운 데다가, 세기의 연인인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만난 곳이기 때문에 더욱 낭만적인 장소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다리와 주변에는 영원한 사랑을 원하는 연인들의 자물쇠가 많이 채워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단테는 『신곡』을 쓰면서 스승 베르길리오스와 베아트리체를 서사시의 주요 인물로 끌어들이면서 조국에서 추방당한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만나 ‘영혼’ ‘불멸’ ‘사랑’ ‘영원’ ‘진선미’ 등 지고한 숭고미를 체험하였고 그 힘으로 『신곡』이라는 작품을 인류에게 헌사 할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즘Beatriceism‘은 바로 단테의 문학적 기행에 대한 집약적인 표현이다. 그는 이탈리아를 새로운 세계로 개조하고파 했던 이유로 추방당한 현실적인 정치인이자, ‘베아트리체즘Beatriceism’이라는 ‘주의(ism)’를 만들 정도로 극도의 낭만주의자이기도 했다. 서두에서 언급한대로 그는 종횡[縱橫] 을 가로지르며 살다간 부유하는 심장의 소유자이자 사랑과 열정을 연구한 문학의 화학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베아트리체와 단테의 그 짧은 만남, 그 안에 어떤 힘이 있었기에 단테의 영혼을 최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한 인간을 최고의 상태로 고양시키는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그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를 묵상할 필요가 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각자의 배우자가 있었고 단명한 베아트리체 사이에 오고간 사랑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언어를 통한 대화적 상황으로 둘의 사랑이 완성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베아트리체라는 한 존재의 힘이 단테의 전 인생을 좌우했고 단테의 영혼 안에서 최고의 진선미를 체험케 했으며 언어를 통해 후세의 우리에게도 그것이 전해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을 연결한 끈이 언어 이전의 다른 근원적인 힘, ‘침묵’ 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언어는 침묵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묵이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키며 사람과 삶을 연결하고 침묵이 죽음 너머 차안과 피안까지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침묵은 고유한 독자성을 가진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멂과 가까움, 멀리 있음과 지금 여기 있음 그리고 특수와 보편이 그처럼 한 통일체 속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현상으로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이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단테와 베아트리체 사이에 오고간 <침묵의 힘>, 막스피카르트가 통찰한 <침묵의 본성> 토마스 머튼이 직관한 <침묵의 소중함>, 에크하르트 톨레가 제안하는 <침묵과 고요>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언어 그 너머 그의 침묵과 나의 침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우리의 인격적 대화 상황에는 항상 침묵이라는 관찰자가 함께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중재하고, 우리를 반성케 하는 양심은 바로 침묵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신앙한다는 것 역시 침묵으로 존재하는 그분께 침묵으로 다가가는 경외(전례와 기도)의 행위일 것이다.

 

이로 인해 침묵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힘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주고받은 대화적 상황에서 발화된 말의 근원을 바라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즉 발화된 언어가 침묵으로부터 온 말인지 즉물적으로 발설된 말인지를 가늠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람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침묵과 무관한 존재란 없다는 사실까지 바라볼 수 있다.

 

예컨대, 스위스의 갈렌 수도원 도서관, 오스트리아의 플로리안, 또는 melk 수도원 도서관, 독일의 metten 수도원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 또 어떤 공간에 들어섰을 때 근원적인 힘을 체험할 때가 있다. 그 근원적 힘은 그 공간이 지닌 힘의 근원, 침묵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이런 근원적인 힘을 수치화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책들은 어떤 사람이 내면의 힘을 최고로 집중시켰을 때, 즉 침묵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과 상관없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 언어를 많이 접한 사람에게는 특유의 어떤 신비로운 힘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신비로운 힘의 연쇄반응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어떤 글에서는 그런 신비로운 힘들이 존재하는데, 막상 그 글을 쓴 사람을 현실에서 보게 되면 글에서의 신비로운 아우라와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의 낙차를 보고 적잖게 놀랄 때가 있다. 침묵은 항존하지만 인간은 항존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기재가 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침묵이 그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가 침묵을 떠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현상에 대해 괴테는 자신의 일기에서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ngua Fundamentum sancti silentii.) 라고 말한다. 또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은 하나의 독자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침묵은 말의 중단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결코 말로부터 분해되어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독립된 전체이며,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존립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침묵은 이름 할 수 없는 천 가지의 형상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막스 피카르트는 ‘소리 없이 열리는 아침 속에, 소리 없이 하늘로 뻗어있는 나무들 속에, 남 몰래 이루어지는 밤의 하강 속에, 말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 밤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달빛 속에, 금실로 연결된 별빛 속에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의 침묵 속에’ 침묵은 하나의 세계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어떤 공간, 자연, 사물, 사람에게서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감지한다는 것은 언어와 말의 진원지가 어디인가를 우리에게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도착한 말, 우리가 세상에 떠나보낸 말들의 진원지를 대략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 그 말들이 침묵에서 떠오른 말인지 에고를 반영하는 말인지를...

 

또한 물이 자정작용을 하듯, 우리 각자에게도 자기 치유 능력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할 때, 자기 치유 능력의 근원이 바로 침묵이라고 할 수 있다. 막스피카르트가 언급하였듯 침묵은 말의 대체물이 아니라 독자적인 세계이다. 말이 잠시 멈춘 순간이 아니다. 침묵은 언어를 잉태하는 근원이라고 봄이 마땅하다.

 

즉 신성에 접근하는 통로라고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나 제자들을 통해 어떤 하느님 체험이 나올 때 표면적인 사건과 사건을 휘감고 있는 어떤 영적인 힘이 그들을 감싸고 있음을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오늘 제1독서에서 바람 속에도, 지진 속에도, 불 속에도 계시지 않고 ‘고요’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 복음에서는 풍랑이 잔잔해졌을 때,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아보게 되는 제자들의 체험이 나온다. 엘리야, 베드로와 제자들의 이 하느님 체험은 사건 자체만을 보면 헐리우드 영화만큼이나 스펙터클한 장면들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내면은 들여다보면 모두 <침묵>과 닿아 있는 고요한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

 

제1독서에서 바알신을 믿는 예언자들과의 가르멜산에서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엘리야는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된다(1열왕 17,3). 이교도 출신 이세벨 왕비가 자기 휘하의 예언자들을 죽인 것에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시종을 브엘-세바에 남겨두고 자신은 광야로 나가 하느님과 대면한다. 사막은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엘리야는 지금 지쳐있고 자신의 소명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저는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1열왕 19,4). 그때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구운 빵과 물 한 병을 머리맡에 갖다놓았다. 그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 사십 주야를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였다.

 

①“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②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③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④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①~④격정의 시간을 살아온 엘리야에게 이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는 무척이나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죽음의 끝에 서 있었고,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내려놓았기에 그는 고요와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⑤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산에 오르셔서 홀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산, 혼자, 기도...이 어휘들은 모두 신성성의 근원 ‘침묵’을 담지하고 있는 어휘들이다. 세상의 소음에서 물러났을 때 만나는 세계이다. 이 고요와 조금 있으면 죽음을 경험하는 제자들의 대조적인 상태가 등장한다.

 

⑥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⑦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⑧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⑨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⑩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⑪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⑥~⑪에서는 극한 상황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의 예수님 체험이 담겨 있다. 성서에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366번 나온다고 한다. 오늘 베드로도 성서에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모든 이들도 이 ‘두려움’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유령이다” “두려워졌다”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제자들이 겪는 ‘두려움’ 자체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믿음’과 ‘의심’의 문제와 연결하신다. 두려움의 심부[深部]에 관한 것이다. 특히 베드로의 경우, ‘두려움-극복- 두려움-극복’의 과정을 겪어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두려움은 예수님의 존재성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두번째의 두려움은 현실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의 대상과 이름은 다르지만 두려워하고 있다는 그 상태는 동일하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 제자들의 체험. 그 신적 체험 앞에 놓여 있는 두려움이란 무엇이며, 신앙의 여정 중에 우리가 두려움이라고 적시할 수 있는 상황적 두려움과 우리 내부의 인지하지 못하는 심리적 두려움 무엇이고, 그것을 넘어 어떻게 신적체험으로 바꿀 수 있는지가 관건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이른 인류의 많은 스승들은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를 공통적으로 신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과의 싸움으로 바라본다. 존재와 비존재와의 싸움, 실재와 비실재와의 싸움이라고 보고 있다. 근원적인 실재와의 분리체험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두려움은 의심이고 믿음의 결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방향을 잡으면 사실 두려워할 일이 없다. 조폭이나 사무라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부분부정이나 부분긍정에서 두려움은 생긴다.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부분부정과 부분긍정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이쪽과 저쪽 두 세상의 소리를 다 들으려는 것이 인간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분리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사태화 된다. 사실의 세계와 사태는 다르다. 사태는 사실이 될 가능성의 세계이다. 두려움은 가능성의 세계를 기정사실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두 세상의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없다. 애석하게도 그런 길은 없다. 사실 신앙은 ‘All or Nothing’이다. 만약 우리에게 한순간에 이 상테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아마 모두 존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긴 순례의 여정은 은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겪어내는 고통을 평정심과 거래하지 않는다면, 고통만큼 한쪽으로 확실히 방향을 잡게 만드는 것도 없다. 여차하면 빠져나갈 차선책, 배수진을 치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과 동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어떤 고통의 상황에 왜 나일까? 라고 바라보면 그 고통은 배가된다. 그러나 왜 나이면 안되나?라고 바라보면 우리는 어떤 쓰라림도 지고가게 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을 하느님체험의 전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제1독서에서의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과 복음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의 하느님 아들에 대한 체험, 그리고 순례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의 신앙 체험이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독서와 복음은 구체적인 대화적 상황이지만 우리는 전례와 기도의 상황이기 때문에 다른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 기도나 전례 역시 대화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화적 상황이든 기도의 상황이든 신적 체험은 반드시 통과해야할 어떤 과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이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되었다'는 사건은 사실 인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침묵에서 생기는 언어는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는 최초의 언어같이 근원적이다. 이 근원적인 언어는 신의 신비에 대해 말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침묵은 언어에 근원적인 힘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엘리야)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베드로)

 

<침묵의 힘>이 어떻게 죽음의 상황에서 체험되는가? 침묵이 죽음의 상황에서만 체험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의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체험된다고 볼 수 있다. 고통만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투명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도 없다.

 

침묵은 언어를 대체하는 대립물이 아니지만 언어가 사라진 곳에서 우리는 침묵이 존재하고 있음을 비로소 본다.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역설이다. 오직 나의 고통은 나의 몫이라는 확실한 인식 속에서 침묵은 우리 곁을 변함없이 지키는 힘이었음을 바라보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침묵은 단지 와글와글 아우성치는 마음을 갖고 ‘말해봤자 무슨 소용있냐, 차라리 말을 말자’라는 그런 상황,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엘리야나 베드로가 체험하는 저 죽음의 상황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그들의 생의 여정 중에서 죽음으로 가 닿게 되는 천로역정인 셈이다.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간’들이다. 그들이 아는 범주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그들을 죽음의 상황으로 몰고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침묵은 거룩한 신적경험을 하게 되는 통로라 할 수 있다. 침묵은 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세상이 일으키는 소음과 우리 마음이 일으키는 소음 때문에 침묵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뿐이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j의 사랑은 침묵으로 함께 한다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침묵을 알지 못한다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기도를 하다보면 청원기도에서 침묵의 기도로 옮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중요한 깨달음의 현장에는 언제나 예언자들이나 베드로나 제자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경험, 죽음에 맞먹는 추락을 통해 우리는 흔히 ‘바닥을 쳤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우리 자신을 한 가엾은 인류로 객관화 할 수 있다. 그분 안에서 ‘희망’은 나를 객관화 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바닥으로 추락한 고유명사 아무개가 아니고 추락한 한 나약한 인간, 자비가 필요한 한 가엾은 인류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3.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언어란 무엇이었나를 조금 더 성찰해 보면, 우리는 현실 속에서 자신이 이 세상에 떠나보낸 말들과 자신에게 도착한 말들을 떠올리거나,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인간관계의 심층을 떠올리거나, 또 신앙 안에서의 전례와 기도를 떠올려보면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 ‘침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언어에 대해 예민한 A와 B가 있다고 하자

 

A가 떠나보낸 말 가운데 A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말들이 있는데, A는 주로 중요한 말들을 문학적 수사를 동원해서 표현하는 습관이 있다. 주로 역설(찬란한 슬픔의 봄)과 반어법(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오늘’과 ‘현재’를 지우는 말로 발화자에게 말을 해도 힘들고 말을 하지 않아도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거나 또 상대의 심장을 향해 화살을 쏘는 행위로 심장파열을 유발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말들이 쌓이고 싸이자 B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화살로 상대의 심장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번쩍 들어서 A의 머리를 향해 던지게 된다. 그동안 참고참았던 앞으로 참아내야 하는 모든 상황을 단 몇 문장에 압축파일로 축약해 상대에게 보내는 것인데 이런 말들은 자칫 뇌출혈을 유발할 수 있다.

 

심장파열과 뇌출혈을 유발시키는 이런 언어를 쓴 그들이 만약에, 적어도 침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그들은 언어의 되먹임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이 세상에 떠나보낸 말들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정확히 돌아오는 언어되먹임 현상, 언어반추가 나타난다. 이때 두 사람은 너무나 지독한 말들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회의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 하이데거의 말에 경기를 일으키게 될 것이며, 그때 그들 곁에 침묵이 없다면 그들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온몸으로 절절하게 살아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관계는 침묵을 견딜 수 있는 관계만이 관계라고 보는 것이다. 침묵은 A와 B가 어떤 상황에서 그런 지독한 말들을 주고받게 되었는지 그 상황맥락을 각자에게 ‘고요하게’ 짚어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침묵 속에서 각자 들어야했던 말보다 뱉어버린 말들이 자신들을 더 아프게,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이제,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단테와 베아트리체로 다시 넘어가기로 한다. 단테는 어떻게 ‘베아트리체즘Beatriceism을 만든 것일까? 단테는 베아트리체가 살아생전에 그녀를 향한 질풍노도의 열병을 앓았을 것이다. 이 열병은 소유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욕망이다. 그런데 베아트리체가 죽은 후에 그 열병은 오욕칠정의 굽이치는 바다를 건너 그에게 백합의 골짜기인 고요한 세계로 다가왔을 것이다.

 

박정대 시인은 이런 열병을 “사랑이라는 극지//그대라는 대륙//목표도 없이, 계획도 없이, 그대를 여행하는 것이 이번 생을 횡단하는 나의 본질적 계획이었네”(「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라고 쓰고 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라는 극지, 대륙, 계획도 안한 우연이 본질적 계획이 되어버린 시간 속에서 베아트리체가 지상에 머문 그 햇수만큼 24년간 침묵 속에서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을 숙고했다(단테의 작품 구상기간) 그 후 16동안 베아트리체의 만남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신곡』을 쓰게 된다.

 

베아트리체의 부재를 단테로 하여금 견디게 한 그 힘은 바로 침묵이었고, 존재의 심연인 침묵 속에서 떠오른 언어들이 『신곡』이다. 문학적 상상력이나 재능만으로 씌어진 글이 아니다. 글 서두에 『신곡』에 대한 평가는 단테가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산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 표피적인 예찬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카프카가 어떤 사람의 머리를 강타하는 문장이 아니면 문장이 아니라고 한 말들은 바로 단테를 두고 한 말이었을 정도다.

 

같은 맥락에서 에크하르트 톨레는 <침묵과 고요Silence and Stillness>에서 “내면의 고요와의 접촉하는 법을 잃게 되면 그대는 그대 자신과 접촉하는 법을 잃게 된다. 그대 자신과의 접촉하는 법을 잃게 되면 그대는 세상 속에서 그대 자신을 잃게 된다. 존재의 심연에 있는 나의 자아는 고요함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이름이나 형상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나의 실체'”라고 조언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엘리야,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 단테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우리의 신앙 여정은 모두 ‘침묵과 고요’와의 동행이라 할 수 있다. 그 동행이 있기에 우리는 감히 인간이라는 유한성을 극복하고 거룩한 신적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사람에게서 위로를 구하지 않고 기도 할 수 있으며, 전례의 깊은 위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쓰디쓴 시간들을 꿀꺽 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글을 마무리 하며, 토머스 머튼의 <침묵의 소중함>을 덧붙인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마음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에게 맡길 때,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들어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용서할 때,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고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져 있을지라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더라도 타인에게 영광이 돌려지도록 내버려 둘 때, 침묵은 겸손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도록 침묵할 때, 주님이 현존해 있기에 세상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시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침묵은 신앙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欽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