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지금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
-심연深淵 →심연深衍(넘침), →심연深延(덮음), →심연深羨(무덤)→심연深淵
<내용에 비약, 생략된 부분이 있어, 부연설명을 첨가했습니다.>
1.
나뭇잎은 어떻게 숨쉬나? 나뭇잎의 그 숨결은 광합성이 이루어져야지만 숨을 쉰다고 할 수 있다. 나뭇잎이 숨을 쉬기 위해선 물관부를 통한 수분의 흡수와 태양의 만남이 가능해야 한다. 한 잎의 나뭇잎도 외부의 도움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하물며 사람은 오죽하랴?
그럼 사람은 무엇으로 산다고 할까? 살아 있다는 것과 사는 것은 같은 것인가?
이 글은, 그런 본질적인 질문들에 대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지금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과연 우리 삶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생각해 보려한다. 또한 그로 인해 살아 있고, 살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해 보려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지금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 우리는 그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힘’은, ‘눈에 보이는 힘은 무엇인가’에서 도출 될 수 있을 듯하다.
하여, ‘일과 노동’에 대한 성찰부터 시작해 본다.
바오로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Ⅱ데살로니카 3,10)라고 말씀하셨다.
14세기 독일의 신비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올바르기 위하여 사람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해야 한다. 하나는 노동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를 배워야 하고, 그 곳에서 하느님을 꽉 붙잡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노동을 다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며 다양한 행위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하는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세상에 모든 일벌들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듯, 일 분포곡선을 그렸을 때, 세상에 77억의 사람이 살고 있다고 했을 때, 그 인구가운데 5%는 아예 일이 주어지지 않으며 이 세상에 온 자체가 고통이며 그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끊임없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고통이라는 짐을 지우게 하며, 상위 5%만 일과 휴식이 일치된 삶을 산다고 보고 있으며, 나머지 90%는 일과 휴식이 함께 하지 않으므로, 즉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므로 주기적으로, 일을 떠나 휴식을 필요로 하며 일에서 오는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는 보고서들이 있다.
그렇듯 일과 노동은 그 신성성을 논하기 전에 한 인간의 실존의 질을 결정짓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주어진 일과 노동이 자기 성전을 짓는 일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세상에 누가 일을 통해 성전을 짓는가? 일과 노동에서 멀어진 이들이 아니라, 일과 노농이 거의 하나이다시피 한 사람들일 것이다. 나를 포함해 우리가 일과 노동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 때에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그 시간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일을 통해 엄청난 자존감을 맛보았을 때, 우리는 문득 사랑 없이 산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은 표면적으로 자각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내재화된다. 일에 몰입한 순간에는 사랑이란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방해가 되기도 한다.
워크홀릭workaholic에 걸린 사람들에게 워크홀릭workaholic 자체가 타인에게는 고통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워크홀릭workaholic에 걸린 사람들은 일하는 그 자체에서 큰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들이 그렇게 일에 몰입하게 되었을 때 일과 사랑이 양립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일을 위해 제갈량이 사랑하는 부하 마속의 목을 베듯(읍참마속) 일 속으로 우리가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많은 마속을 제거한 상태이거나 우리도 모르게 캐리어라는 성전을 짓게 된다. 일에는 성취감 못지않게 그가 일군 업적을 과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적 세계의 카달로그가 놓이게 된다. 그러다보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도 모르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일을 바라보는 표피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그렇게 살다 이 세상 순례를 마칠 것이다. 일에 대한 성찰은 일 그자체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성찰로 넘어간다. 일이라는 물적 세계의 기반을 물적세계를 통해 바라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은 형상의 세계인 물적 기반인데 모든 물적 세계의 기반은 형상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하느님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예외없이 사랑이라는 키로 모든 것을 거르게 만드는 시간이 주어진다. 계획하지 않는 삶 속으로 우리를 걸어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랑의 숙제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시간 속에 놓이게 된다. 시간 밖에서의 영원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의 영원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불가항력으로 어떤 시간 속으로 걸어가게 된다. 이것은 분명 그분의 사랑이자 축복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순례의 유일한 것이 되기까지는 이 시간들은 우리에게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2.
그런 맥락에서 일에 대한 두번째 성찰은 '일'로부터 우리가 하는 '사랑'으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지금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힘은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삶이 되는가?
일과 사랑은 그 자체가 선과 악의 대립은 아니다. 선과 더 좋은 선의 대립이라고 봄이 마땅하다. 일도 그분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포함한 형상의 세계는 하느님나라는 물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물적 세계는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그런 맥락에서 일과 사랑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선과 본질적인 선과의 충돌이라 봄이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죽을만치 힘든 것이다. 선과 악의 대립이라면 자명하게 선을 선택하면 된다. 그러나 선과 선의 대립이라면 어떤 선을 선택해야하는지 그 지침이 우리에게 내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르는 체란 오직 그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대략 다섯 개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심연深淵 →Ⓑ심연深衍(넘침), →Ⓒ심연深延(덮음), →Ⓓ심연深羨(무덤)→Ⓔ심연深淵
그것은 1차적으로 자신이 지은 성전이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물적 세계의 그 존재이유를 바라보는 시작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무너지기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장님이면서 동시에 눈뜬 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지은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실제로 무너지기도 하고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여,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지듯, 그동안 생의 집을 지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고 생각되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그런 순간은 사실 인생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이자,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넘어서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자신이 지은 성전이 허물어졌다는 것은 사실 축복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과정은 죽음과 맞먹는 고통의 과정을 겪어야하기에 그것을 축복이라고 아무리 자신에게 들려준다한들 위로없는 몰약을 마시는 것과 다름없다. 살아서 죽음의 시간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겪어내지 않으려면 자살하거나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부터 등을 돌려야 한다. 그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자살이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허물어졌다고 했을 때 허물어진 그 잔해 속에서 우리는 ‘가난’이란 근본적인 이름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가난’을 일부러 묵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풍요를 원하지 가난을 소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난을 바라보는 순간을 자신에게 주지 못한다. '가난'을 묵상하는 것은 가난 그 자체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풍요의 근원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절대 가난을 묵상하면서 형상의 세계에 대한 그 존재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형상의 세계란 그 자체가 하느님 현존의 집이어야 함을 바라보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절대적 곤궁이자 절대적 가난이라는 말이 그래서 성립한다. ‘있음’에서 무(無)를 바라보아야 하는 시간이다. 형상의 세계에서 형상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는 사랑에 대한 바라봄이기도 하다.
형상 너머의 순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심연'이다. 심연으로 이끄는 것은 ‘사랑’이다. 어쩌면 사랑 자체가 심연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죽음의 시간조차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순간이 거쳐야하는 시간이라고 바라보기 때문에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감각적, 정신적으로 사유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시간 자체가 사랑인 것은 분명하지만 Ⓐ심연深淵이라고 밖에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마르코 14, 32-34/ 루가 22.39-46에서는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잠으로 보여준다. 어떤 순간에 사랑이 위로가 아니게 된다. 오히려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위험하고 가장 냉혹하고 가장 매정하고 가장 잔인하고 가장 고독하며, 가장 외로운 그 무엇이 된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 앞에서 잠에 떨어진 제자들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사랑이 없었다면 싶은 그런 순간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다. 일에만 몰두하고 사랑없이 살았던 그 시간들이 훨씬 더 간단하고 가볍고 유쾌하고 명쾌하게 삶을 누렸던 기억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우리한테 사랑이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 그 풍경은 어떠한가? 그것은 환하다를 넘어서 빛나는 풍경일 것이다. 그것은 시각적 환함일 수도 있고 정신적 환함일 수도 있다. 사랑은 빛의 체험이다. 그동안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사랑으로 인해 체험된 빛은 큰 차이가 있다. 이 빛으로 인해 그동안 빛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작은 빛, 불완전한 빛, 사랑의 빛에 비하면 빛에 겨우 진입한 정도의 빛이란 각성에 접어들 때 우리가 지은 성전은 서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사랑의 빛으로 그동안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불완전한 빛이었음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로인해 거대한 빈곤과 결핍을 맞보게 된다. 무(無)를 보게 된다. 이 단계는 형상의 세계에 길들여 있던 정신이 형상 너머를 바라보는 시간이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처럼 인식된다.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보석들, 자신이 이룩한 것들, 자신이 투신했던 일들, 그 시간들이 무너져내린 하찮은 돌무더기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일에 투신함으로써 희열이란 자아만족으로 살던 사람들이 이 순간들을 특히 어려워한다. 워크홀릭이란 형상의 세계와 하나로 된 삶이었기에 그것을 떼어내는 과정은 고통이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통제의 키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낯선 삶의 방식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 낯섦은 메꿀 수 없는 결핍이란 이름으로 다가온다. 그 결핍의 이름은 형상도 아니고 형상 너머도 아닌 무주공산의 '빈지대'이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어떤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 여기서 많은 이들이 내적갈등을 겪거나 그 결핍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이별하게 된다. 이것은 사랑의 과정 중 생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랑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거르는 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을 거치면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얼굴을 만나게 된다. 사랑은 상대에 의해 고무될 수는 있어도 상대에 의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심연 深淵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는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느껴졌다면, 그것은 서로의 액션 때문이거나 주고받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각성된 의식 때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자체가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자, 무한을 갈구하는 욕망이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으로만 채워진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저 깊은 심연 深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연深衍(넘침)도 경험하게 된다. 한 인간이 지닌 오욕칠정의 상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을 수 없는 해일처럼 범람하는 시간들이 다가온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의 둑이 무너진다. 사랑이 삶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사랑을 이끌어 가려할 때, 좋은 것도 극단으로 나쁜 것도 극단을 치닫게 된다. 이성의 실종이란 것을 실감하게 하는 시간이다.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요구로 분출되는 시간으로 이때 누군가가 키를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금방 훼손되는 죽음의 상태에 갇히게 된다.
그 다음에 심연深淵과 심연深衍(넘침) 속에서 집을 짓고 상량식을 하듯, 사랑이라는 지붕이 덮어진다. 사랑 본연의 빛이 아니고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의 빛으로 그 집을 밝혀야 하는 深延(덮음)에 처한다. 자기의 사랑이 자신조차 비추지 못하는 희미한 빛(어둠)임을 보게된다. 욕망과 욕망의 충돌로 사랑이란 심연深淵은 深衍(넘침)과 深延(덮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랑의 深羨(무덤)을 만들게 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랑이다. 여기서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랑이란, 형상 너머로 넘어가지 못한 상태, 어둠을 의미한다. 마치 죽은 상태에서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형상의 틀을 넘지 못한 자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피폐해진 자신을 목격하게 되는 시간이다.
그때 우리는 실로 이런 뼈아픈 고백을 -가난한 자의 노래-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사랑의 님이시여! 사랑으로 존재하다, 사랑으로 지음받고, 사랑으로 이 세상에 던져져, 사랑으로 양육되고, 사랑으로 사랑을 알아보게 되었으나, 그 사랑으로 드디어 눈멀고 말았습니다. 사랑이 아니었던들 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 사랑으로 인해 성전은 무너지고 사랑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이 때 우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이 무엇인지 드디어 알게 된다. 가난은 (사랑의) 어둠이다. 형상의 세계에서도 형상 너머의 세계에서도 '스스로'는 살지 못하는 '빈지대'의 영혼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빈지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 빛이 없다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이렇듯 자신이 만든 성전이 허물어지는 Ⓐ심연深淵 →Ⓑ심연深衍(넘침), →Ⓒ심연深延(덮음), →Ⓓ심연深羨(무덤)→Ⓔ심연深淵 의 시간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 드디어 바라보게 되는 그 시간은 다시 심연으로 돌아간다. 이제 형상의 세계에서도 형상 너머의 세계에서도 살 수 없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수용하게 된 시간 속에서 Ⓐ심연深淵→Ⓔ심연深淵 으로 가는 순환의 시간을 살게되는 것이다. 가시적인 시간 속에서 불가시적인 시간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연深淵이 우리가 지은 가시적인 세계를 허무는 심연이었다면, Ⓔ심연深淵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그 심연의 시간을 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은총이고, 은혜라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과 노동'의 존재이유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사는 이 형상의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앞에서 언급 하였듯, 사람은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이 어찌하여 보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까?라는 질문은 형상-형상너머-형상이라는 되먹임 상태에 이르게 되어야 비로서 그 답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과 노동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일과 노동이 우리의 성전을 짓는데 주력하여 일과 노동에 함께 하는 본질적인 힘을 만나지 못한다면, 즉 보이지 않는 사랑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순례는 공수래공수거가 될 것이 뻔하다. 우리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왔고 ‘사랑’으로 갈 것이고 영원히 '사랑' 으로 남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순례 그 어느 순간도 ‘사랑’이 아니고는 성립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것과 사는 것은 같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일과 노동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수단이며, 사는 것은 그 일과 노동을 통해 본질적인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본 상태에서의 '일과 노동'은 그 자체로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대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사랑)을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지금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실 십자가의 죽음을 살아 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지은 성전을 허물고 자신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존재란 것을 인정하는 바로 그 시간을 살아내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때 우리는 보이는 이 세상에 희망을 거두고, 보이지 않는 사랑에 희망을 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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