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학적 존재증명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참 고
1. Luc. 12, 49-53
2.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http://blog.daum.net/m-deresa/12388470
3. 헬렌 슈크만, 『기적수업』. 2015 http://blog.daum.net/m-deresa/12388491
1.
문학에 관한 글,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나 특히 종교나 신앙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정말 어렵다. 종교나 신앙에 관한 글은 그 글의 전제가 ‘사랑’이기 때문이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사랑’보다 더 어려운 숙제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고, 반드시 ‘사랑’에 대해 발설한 말은 말한 이가 삼키고, 또 말한 이가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럼 쓰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임이기에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 중의 현실이다. 생명을 가진 자의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우리가 하는 '사랑'이 '사랑의 실패'처럼 생각되는 순간에도 그것은 '사랑의 과정'이기 때문에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선 말해도 어렵고 말하지 않아도 어렵다. 그럼에도 ‘사랑’ 이 전제된 글을 올려본다.
수많은 시인이 ‘장미’를 소재로 ‘오! 순수한 모순이여!’라는 시를 지었고, 성모님을 일컬어 ‘매괴의 모후’라 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많은 꽃들 가운데 장미는 스스로 ‘꽃’ 임을 증명했음이 분명하다. 무엇으로, 장미는 장미인 것을 증명해 보였을 것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은 방어하기 위해 '가시'를 지닌 장미는 여러 방법으로 자신이 ‘꽃’임을 증명 했을 것이지만, 그 이유 중 하나가 ‘장미’의 아름다움엔 ‘절정’이 있다는 것이다.
꽃의 절정? 아름다움의 극단을 장미는 보여주어야 할 소임을 갖고 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장미는 그 절정의 모든 열락(悅樂)을 보여주었다. 모든 감각이 줄 수 있는 시각, 촉각, 후각에서 개화에서 낙화까지 무릇 ‘꽃’이 보여줘야 하는 아름다움의 총체를 장미는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물감을 풀어도 만들 수 없는 그 색감과 향기, 장미 한 송이를 손에 놓았을 때의 그 질감, 감각을 넘어서는 아우라로 ‘꽃’ 뿐만 아니라 함부로 꽃을 만지는 이들을 찌르면서 동시에 찔림을 당하는 ‘가시’의 숙명까지 동시에 증명해 보여줘야 했을 것이다. 그레서 장미는 한 송이의 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장르, 학문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람들이 ‘사랑’을 왜곡하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남발한다고 하지만 실은 사람들이 가장 입에 올리기 어려워하는 말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자신 안에서 이 말들이 ‘천 번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면 발설하기 어려운 말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은 ‘천한번째 고백’인 셈이다.
우리 모두가 ‘사랑’이라는 명사는 떠올리기 쉽지만 ‘사랑한다’는 동사는 입에 올리기 어려워한다. 보편적 인류애를 말하기는 쉽지만 자신의 구체적 사랑을 들여다보기를 회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랑은 ‘정의 자유, 진리...’ 이런 추상명사와 더불어 존재증명을 요구하는 단어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한다고? 그래 증명해봐!’ 이런 암묵적 존재증명을 요구되는 단어가 바로 ‘사랑’ 이다.
그렇다면 ‘장미’ 한 송이도, 우리가 고백하는 ‘사랑’도 존재증명을 요구한다면 “나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나를 보았으면 하느님을 본 것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느님께로 갈 수 없다”라는 말은 얼마나 엄중한 존재증명이 요구되는 것일까. 예수님 생은 ‘하느님=예수’ 라는 이 절대 명제로 수렴되는데, 예수님의 강생은 이 명제를 인류에게 존재증명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우리 역시, 이 존재증명을 요구받으며, 우리 자신도 어떻게 ‘사람=사랑’인가를 증명하는 순례의 여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
‘사람=사랑’이라는 이 존재증명이란 타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자기증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스스로에게 답해야 한다. 그 질문을 하고 답하는 곳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다.
우리는 모두 두 개의 현실을 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하는 현실’이 그것이다. 전자는 역사와 현실을 사실 그대를 보여주는 일상적 진실을 반영하는 삶을 말한다면, 후자는 일상적 현실을 넘어 우리가 지향하는 당위적 진실을 반영하는 삶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우리가 원하는 삶은 갈등이나 고통이 없는 평온함과 안락함일 것이다. 그러나 ‘있어야 하는 현실’에서는 '불'을 통해 정화된 진정한 평화의 삶이다. 우리가 설사 그렇게 살지 못한다할지라도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삶은 분명히 우리의 지향점이다. 우리는 두 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들이다. 1차적으론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머무는 우리 자신 때문에 갈등하며, '있어야 하는 현실'로 훌쩍 넘어서지 못하는 것 때문에 또다시 갈등하는 두 겹의 갈등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겹의 갈등을 산다는 자체가 적어도 우리가 그분을 지향하고 있다는 하한선의 자기위안을 삼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지향의 명징함을 살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지향의 명료성을 살지 못하게 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명제가 우리 자신에게 명료하게 이해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을 넘어선 상태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갈등 상황에 계속 머무른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현실'이란 당위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겪어냈던, 겪고 있는 갈등상황 혹은 고통이라 이름 붙이고 있는 모든 극복되어야 할 것들을 한번 적어보면 우리가 반복적으로 어떤 행위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시행착오들은 어떤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반복으로 우리가 분명 배우지 못한 그 무엇이 계속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모든 것은 평등하다!"와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여기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평등하다와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는 차이의 극단에 도달했을 때만 언명될 수 있는 말이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 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울은 각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를 도달했어야 했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 -들뢰즈, 『차이와 반복』
들뢰즈는 이를 진정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과잉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 과잉상태에 도달하지 못할까? 이는 우리가 충분히 과잉상태로 우리를 밀고가야 하는 그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절정을 모른다. 장미에게 한 수 배워야 할 부분이다. 알지만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 실은 내재화 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지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분명히 알고 있다면 당연히 내재화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우리 안에 내재화된 된 것들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란 없기 때문이다. 실천할 수 있는 힘이란 내재화의 여부로 알 수 있다.
3.
실천이 유보된 내재화의 혼란은 우리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 어떤 극복되어야 할 것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말한다. 타인에게 문제 상황으로 보이는 것이 내게는 전혀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고, 내게 문제인 것이 타인에게 전혀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다고. 이렇게 보면 우리는 모든 문제 상황은 사람의 수만큼 다르다고 바라볼 수도 있다. 과연 그러한가? 엄밀히 타인과 내가 문제가 무엇이라고 각기 다르게 지목할지라도 문제 상황은 하나라는 것이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이 세상에는 77억의 인구가 적어도 한 가지씩 어떤 문제 상황을 앞에 놓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문제가 각기 다른 문제해결을 요구한다면 사실 이 세상의 문제는 해결이 요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형식이나 상황이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 문제의, 문제의 근원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단 하나의 문제 상황만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제를, 고통을, 극복하겠다는 일념의 첫번째 고리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다고 했을 때 그 문제의 문제는 무엇인가? 정말 내 문제를 내가 알고 있는가이다. 내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엽적인 문제를 절대화하는 것은 아닌가?
표면화된 그 문제를 일으킨 근본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재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단하고 있는 그 중심에 있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내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하는 현실’이 주는 두 개의 문제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예외적인 인류란 없다. 전자는 상대적인 '소유'의 문제라면 후자는 '애주애인'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의 문제이다. 문제의 경중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가 문제라고 하는 것들은 상대적인 문제를 절대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질문해야 할 것은 내가 문제를 알고 있는가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고 말하는 그것이 정말 내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문제인가? 하는 점이다. 문제가 무엇인가를 내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무엇을 문제라고 보아야 하는가를 물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제게 경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제가 지금 제 상황에서 경제적인 문제를 문제의 1번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이것이 맞습니까? 제 고통의 근본적인 문제가 경제적인 문제입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고 질문을 제대로 할 때 그 질문은 이미 답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할 때 '있어야 하는 현실'은 주변부로 물러난다. 우리는 고통이나 갈등의 주 원인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서 바라보는 것이지 ‘있어야 할 현실’에서 바라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복음을 묵상하면 우리 안에서 태우고 끊어내야 하는 것들은 갈등하는 습관임을 알 수 있다. 더 엄밀히 말해 갈등을 즐기는 습관이다. 갈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쾌락원칙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취하려는 충족의지에서 비롯된 쾌락원칙이 우리를 갈등 상황에 처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자체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갈등을 지키고 즐기는 한 우리는 마땅한 질문을 자신에게 혹은 기도 중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갈등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하는 현실’는 상호보완적일 수 없는 진실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상호배타적 진실에 해당한다. 전자를 취하는 한 후자는 취할 수 없다. 후자를 취하는 한 전자는 그렇게 큰 매력이 아닌 것이 된다. 서로에게 서로는 기회비용인 셈이다.
그분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하는 현실’을 모두 취하려 하셨다면 그분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셔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 상황에서 답은 언제나 그분에게 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무엇을 태워야 하고 무엇을 끊어버려야 하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갈등과 고통에 직면하여 평화를 구하는 우리에게 헬렌 슈크만은 <기적수업>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개인적으로 수없이 많은 문제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항상 헬렌 슈크만의 <기적수업>에서 도움을 얻었다.
“형태가 무엇이든 유일한 문제는 (그분과의 사이가)‘분리’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너는 답이 적절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직면한 듯한 모든 문제에서 ‘근원적인 일관성’을 지각한다면, 너는 그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음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제가 있을 뿐임을 깨우치려 노력한다”
실존의 모든 문제에서의 답은 그분과의 ‘분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제라고 설정한 것은 이미 답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없이 긋는 성호경, 그 '종(縱) 과 횡(橫)'. 우리는 '횡(橫)'의 문제를 문제의 중심으로 보고 있지만, 실은 '종(縱)'의 문제가 문제의 중심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애주애인 (愛主愛人)- 애주(愛主)하면서 애인(愛人)하지 못할 리 없고, 애인(愛人) 하면서 애주(愛主)하지 못할 리 없다. 이론은 그렇다. 그러나 사랑의 시작인 '종(縱)'은 그분을 사랑하는 애주(愛主)로 부터이다. 만약, 사랑이 문제라면 애인(愛人) 하기 때문에 애주(愛主)를 못하는 게 아니고, 애주(愛主)를 못하기 때문에 애인(愛人)을 못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신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사랑의 방법이 현실원칙에 의해 융통성을 지닐지언정 사랑하지 못할 대상은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사람=사랑>이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 주어야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그 자기증명의 끝에 ‘평화’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고, 살게 될 것이다. '있어야 하는 당위의 현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끌고 갈 때 맞이하는 바로 그 '평화'다.
그러기 위해 무엇을 태워야 하고 어떤 사슬을 끊어내야 하는지, 우리가 태워야 하고 끊어내야 하는 것은, 사실 현실의 삶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고정된 인식의 틀을 태우고 끊어내라는 것이리라. '있어야 하는 현실'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끌어가게 하라는 '인식의 대 전환'이 바로 평화의 수단인 불’일 것이다.
Pachelbel's Canon - London Symphony Orche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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