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지고 가야할 고통의 몫은 다르지만, 고통의 크기(무게)는 비슷하다”
줗은 스승이라면 제자들에게 점점 난이도를 높이면서 교육을 할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스승만큼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자, 그들이 곧 스승의 메신저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그 가르침이 완성되었다고 생각되지 않아도 세상속으로 그들을 파견한다. 스승은 그들이 되어질 모습, '아직'을 '이미'로 믿고 바라본다. 선취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마태오 복음은 파견하는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라는 빈손의 역설에 대해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을 때만,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을 체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견의 목적이 '사랑'이고 그 수단 역시 '사랑'인 셈이다. 무엇을 전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의 체험이자 함께하는 사랑의 체험이다. 그런 맥락에서 제자들이 지닌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존재의 전부인 그분의 ‘사랑’ 이다.
그들은 메신저이지 메시지가 아니지만, 그러나 메신저는 메시지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사랑이 되었을 때에만 사랑을 전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미사의 파견에서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라는 말씀은 <사랑이 되어서 사랑을 전하십시오> 라는 전언이기도 하다.
사랑이 아니면서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을 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인생은 미완성입니다만, 사랑은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이 아닌 사랑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랑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사악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을 내팽개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인 것입니다. "(
http://blog.daum.net/m-deresa/12389273김영승 시인)
김영승 시인은 인간은 나약하지만 사랑은 완성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면서, 사랑을 포기하는 이유가 인간의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사악함'이라고 섬뜩하게,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요즘, 블로그에 계속 사랑에 대한 글이나 시를 올리고 있다.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과 문학에서 말하는 사랑이 다르지 않다. 같은 사랑이다. 시는 각자 경험한 사랑으로 읽으면 된다. 문학은 정답이 없다.
한용운 시인의 <정천한해情天恨海>(http://blog.daum.net/m-deresa/12389270)에서의 사랑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삼위일체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이 지향하는 궁극의 지점이다. <사랑의 꿈에서 불멸을 얻겠다>는 고백은 <님에게만 안기겠다>는 고백과 같은 맥락이다. <님에게만 안기지> 않고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 할 수 없으며,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멸을 얻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프랑시스 잠의 <아침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http://blog.daum.net/m-deresa/12389271) 이 시의 화자는 표면적으로 무척 <고요> 하다. 이 고요함과 저 고요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시인의 전기적 사실을 바탕으로 읽어보면 그 <고요>는 엄청난 <자기투쟁> 속에서 나온 고요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김유정 작가가 쓴 <봄봄>, <동백꽃>이라는 소설 속의 해학이 가득한 그 맥락과 부합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은 그 자체가 사랑이다. 오늘 우리가 식탁에 빵을 올리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하는 모든 일들, 그 사소한 일상에 깃들여 있는 사랑을 보려는 시인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지 못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오늘, 이 ‘따뜻한 달걀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바로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인 것이다.
타고르의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http://blog.daum.net/m-deresa/12389272) 는 <운명적으로> 함께하지 못하는 사랑의 숙제를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지독한 위로>의 시다. 가장 어려운 사랑의 난이도라 할 수 있다. 왜 난이도가 높은 사랑의 숙제를 내주셨을까?를 생각하면 <사랑=십자가> 라는 답이 나온다. 답은 나왔지만 그런 숙제를 받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이 시대에도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로 그 분의 사랑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분의 사랑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누군가는 계속 이 시대에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전해야 하는 메신저는 <사랑=십자가>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뜨겁게, 피를 철철 흘리며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http://blog.daum.net/m-deresa/12384788)는 것은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하라는 제언이다. 시인 자신의 전기적 사실이 바탕이 된 시이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라는 여인과의 만남은 릴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릴케의 인생은 살로메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 살로메는 당시 니체를 비롯한 서구 지성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여인이었다. 릴케 혼자 살로메라는 그 여인의 사랑을 독점할 수 없었다. 릴케는 이 숙제를 시로 풀었다. 어떻게 살로메라는 한 특정인에 대한 사랑이 시로 승화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시를 통한 종교의 실현에 가깝다.
김영승 시인의 <나 때문에 우는 여인이 있다면 나는 행복하다>(http://blog.daum.net/m-deresa/12389273)는 직설과 <'있음'에 대한 통회>는 현재진행중인 뜨거운 사랑을 하는 자의 <사랑의 모든 것>에 관한 시다. 사랑의 뜨거움과 차가움, 사랑의 고귀함과 추악함이 지니고 있는 그 모든 양면성의 통합, <고린토전서13장>의 해석본이라 할 수 있다. 김영승 시인의 시어는 생생하다. 살아 있는, 날 것의 언어다. 언어에 치장을 하지 않는다. 모든 시어를 살면서 먹어본 것만 뱉기 때문이다. 가식이 없다. 그의 삶 자체가 시다. 시의 제단에 자신을 제헌하는 시인들이 있는데, 그런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시인이 곧 시고, 사랑은 곧 시라고 말 할 수 있는 시다.
오늘 올린 최승자 시인의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http://blog.daum.net/m-deresa/12389276)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아침에 눈뜨자마자 반사적으로 떠올리거나 자신에게 주입해야 살 수 있는 햄릿형 실존 상황에 놓여있는 이들에게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처절한 질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칫하면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외치는 시로 읽힐 수도 있다.
“각자 지고 가야할 고통의 몫은 다르지만, 고통의 무게는 비슷하다”는 명제를 최승자 시인의 시에 적용하기 참으로 어렵다. <사랑이 내 몸을 부러뜨려 네 꽃병에 꽂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독설에 가까운 독백은 사랑의 상처에 대한 처절한 거부의 육성이기도 하고, 사랑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의 비명이기도 하다.
최승자시인은 시인이자 번역가다. 그의 번역서와 시집 출간의 연보를 대략이라도 훑어보면 이것이 과연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한다. 표면적으로 워크홀릭이다. 사랑 대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인슈타인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들이다.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시다. 워크홀릭은 도피형 워크홀릭이 있고, 실존형 워크홀릭이 있고, 존재형 워크홀릭이 있다. 이 세가지가 복합된 워크홀릭이 있다. 최승자 시인도 그 중 어떤 워크홀릭 속에서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라는 시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거칠게 이 시의 주제는 산다는 것이 사랑이다, 라고 말 할 수 있다. 특정 대상이 없어도 살아냈다는 것이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얼마나 고단하고 슬픈 사랑이냐? 대상도 없는 사랑, 부칠 곳 없는 뜨거움을 일에 쏟아 붓는 사랑, 오늘 치의 닭고기를 우적우적 먹고 있는 사람, 아마도 저 시의 화자는 일하다 블라인드를 올리니 하루가 다 갔어...생각해보니 밥도 안 먹었어... 냉장고 열어보니 먹을 것도 없어...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아무 거나 꺼내서 먹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 음식물로 후두룩 떨어진 눈물... 눈물과 음식물을 동시에 삼키며...이 것도 삶이냐? 나는 대체 무엇이냐?... 왜 자살하지 않고 여전히 살고 있는가? 라고 자신에게 묻다, 그 질문이 존재자에게 넘어간 상황...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이여! 보고 계십니까? 라고... '너'라는 생명의 주재자에게 치받으며 묻는 말...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같은 나약한 인간이, 도도한 인간 역사의 운명을 관장하는 그분에게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왜 살아야 합니까?...실존의 엄중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김혜순의 <칼과칼>(http://blog.daum.net/m-deresa/12389278)은 사랑이 진행형일 때, 무림도사가 되어야 하는 <사랑의 기술>에 관한 시이다. 어떤 사랑이든 피가 묻어있지 않은 사랑은 없다. 그러기에 사랑은 방심할 수 없다. 운명이라 이름 붙은 것은 모두 방심할 수 없다. 방심하는 순간 내 심장은 그 운명의 칼끝에 찔리어 피를 흘리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면서 찔리고, 찌르면서 그래도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 사랑하는 자의 부유하는 그 상태에 관한 것이다. 삶에 착지하지 못하는 사랑, 삶에 착지 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랑...이 시대를 사랑없이 어떻게 통과하나?를 고민하면서 화자는 저 공중에 있다.
어느 시인이 무슨 시를 썼든, 당신이 어느 시를 찾아 읽었든, 아니 읽지 않든, 우리는 모두 사랑이라는 숙제를 받은 사람들이다. 살아 숨쉰다는 것이 그 숙제를 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당신에게 주어진 사랑의 난이도가 어렵다면 당신은 선택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랑으로 인해 눈물이 바다가 될 때까지 울어야 하는 사랑이라면... 그러나 당신만 선택받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생존해 있는 우리 모두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그런 맥락에서 “각자 지고 가야할 고통의 몫은 다르지만, 고통의 크기(무게)는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승자 시인의 시 속의 화자처럼 지고가야할 실존의 무게가 버거운데 어떻게 김혜순 시의 화자의 고통과 그 무게가 같다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물을 수 있다. 어떻게 내 심장에 박힌 대못과 너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비슷한 무게일 수 있느냐?라고 물을 수 있다. 물론 상대적 기준으로는 비슷하지 않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으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날 때 사랑의 역량이라는 소임이 있다. 사랑의 역량은 다르지만, 그것을 지는 힘듦은 같다고 보아야 한다. 50을 지고가야하는 역량으로 이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50을 다 졌다면 그것은 100의 짐을 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꽃동네가 탄생한 것이다. 후원금을 보내는 사람이나 그 후원금으로 생존하는 사람이나 같은 <생존의 크기와 무게>를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겉으로 드러난 고통의 무게는 다르게 보일지라도 생존이라는 짐은 평등하고 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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