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유 (思惟. speculation. denken)하는 존재의 아름다움(1)

나뭇잎숨결 2020. 6. 30. 12:34

 

사유 (思惟. speculation. denken)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망각은 속도에 ()비례하고, 기억은 속도에 ()비례한다

 

 

참고

 

1. Matthieu. 10, 37-42

2. 밀란 쿤데라, 『사유하는 존재의 이름다움』, 『느림』

http://blog.daum.net/m-deresa/12387324

3. 마르틴 하이데거.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존재와 시간』

http://blog.daum.net/m-deresa/12389254

 

-수정 중인 글입니다.

 

 

 

이 글은 신학적, 성서학적, 교리적인 글이 아님을 전제로 한다. 글쓴이의 학습에 의한 직관적 글이고 “십자가=사랑” 이라는 명제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유가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그 유래를 꿰뚫어 볼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존재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라고 말한다. 또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도 말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언어가 매개되는 것이며 그 사유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라는 존재가 현 위치에서 경험하는- 사태와 사건을 추론할 수 있으며, 사유한다는 것은 혼자 수행하는 생각의 흐름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분과의 대화적 상황이 전제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몇 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본다.

 

Q1. 십자가(사랑)는 절대 명제인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천년 전에 J가 던진 명제가 왜 오늘 나에게도 절대 명제인가? 나에게 십자가, 사랑이 절대적 명제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내가 ‘사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상대적인 가치관이 난무하는 이 세계에서 '십자가(사랑)'라는 절대적 가치관으로 살아야한다고 설득당하지 못했을 것이며, 기꺼이 내 삶을 '십자가(사랑)'로 수렴시키려 온 인격을 집중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Q2. 십자가를 멋있게 질 수 있는가?

 

십자가를 절대적인 가치관, 삶의 명제로 받아들였다면 그 다음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런 질문을 결코 그 누구도 한 적이 없었지만 십자가에 대한 반응이 우리가 던지지 못한 질문을 유추하게 한다. 십자가는 결코 미학적이지 않다. 육체를 허물어야 가능한 사건이기 때문에 감각 차원에서 출발한 미학적인 사건이 아니다. 사후적으로 멋있다는 평가가 덧붙여지는 것이지, 멋있게 짊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힘듦’이라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육체는 언제나 시간과 함께 있다. 육체를 허문다는 것은 ‘아직’ 이라는 시간과 ‘이미’라는 시간을 동시에 봉헌하는 일이기도 하다. 육체를 허물면서 시간을 봉헌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오늘’이라는 분절적인 시간을 봉헌하는 행위다.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고 싶은데’ ‘오늘’은 못하거나,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십자가의 사랑은 언제나 ‘오늘’을 요구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질 때에만 영원 속에서 ‘오늘’을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Q3. 십자가를 지고 있다(없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나?

 

우리는 자주 십자가를 이미 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좀 더 무거운 십자가를 더 져야할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십자가 콤플렉스, 희생 콤플렉스를 그분이 원하실까. 이것은 1차적으로 십자가라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상대화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분열증적 신앙 사태다. 1차적으로 십자가의 발원지가 어딘가에 대한 ‘망각’에서 비롯된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순간조차 십자가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나’ 라는 고유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내 십자가의 원천이 나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당신의 십자가나 인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고유성과 우리라는 보편성을 동시에 살아내야 하는 중심의 문제 앞에, 균형감각의 문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고유성이 강한 인격으로 태어난 사람이 보편성으로 넘어가기가 쉬운 일일까?) 십자가 앞에서 타자가 아닌 '나'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고유성의 강도가 평균이상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Q4. 십자가를 진 순간에는 십자가는 망각되는가?

 

이 질문 속에서 기억할 것과 망각되어야 할 것의 충돌 지점을 바라볼 수 있다. 옛사랑의 기억이 좋은 사람은 새롭게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한 사랑이 자신을 지독하게 아프게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의 트라우마에 갇혀서 새로운 사랑을 볼 수도 없고, 새로운 사랑을 할 수도 없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고, 자신의 경험을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지난 시간들을 풀어놓아야 하는 이유다. 이별은 이별이 되게 하고, 사랑은 사랑이 되게 해야 할 이유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 1차적인 이해의 한 부분에 속할 것이다.

 

“십자가=사랑”이라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것은 사랑이신 그분과 ‘함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함께 있다’는 2음절의 축복을 이해하는 데 우리 인생을 다 소비하는 거 같다. ‘함께 있음’을 온 인격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십자가는 무거운, 힘든 그 무엇으로 끝끝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신과 인간의 존재구속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에 대한 시혜적인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구속성에서 기인한다. 예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인격이 어떠하든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말은 다시 제자들을 비롯한 인류 전체의 존재구속성으로 던져진다. 우리는 신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존재다. 신 밖의 세상이 없으므로. 더욱이 우리의 근원이 신에서 연유한 존재이므로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인류의 존재방식인 셈이다.

 

Q5. 그런데, 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가?

 

우리가 십자가와 사랑을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유의 능력이 없었던 시간에도 우리는 자기만의 십자가를 지고 오늘까지 걸어왔다. 십자가는 일정 연령이 되어야지만 발급되는 주민등록증이 아니다. 예컨대, (십자가라고 말하는)누구의 엄마로 사는 것만 힘든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는)누구의 딸과 아들로 사는 것도 힘들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사랑처럼 늘 존재함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생명으로 던져진 그 순간에, 던져졌다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한한 세상에 무한이라는 사랑이 던져진 것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여기는 천국이 아니다, 여기는 우리가 지나가는 곳이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유의 능력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십자가라는 실체를 알아버렸고, 사랑의 기준점이 아가페까지 올라갔다. 그 모든 것을 안 순간부터 십자가는 힘든 그 무엇이 된 것이다. 내 사랑의 의지가 주어져야지만 질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어제의 사랑 때문에 오늘의 사랑을 할 수 없음을 힘들어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사랑이라 할 수 있다. 해야 되는 사랑이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사랑을 ‘저만치’ 두어야하는 그 힘듦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유할 수 없었다면 십자가에 대해, 사랑에 대해 괴로움도 힘듦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마치 천년이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심장이 아픈 경우, 십자가와 사랑을 사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은 삶을 나눠야지만 가능한 사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의 집은 1인실이 아니다. 있을 곳이 많다. 사랑의 양태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 사랑은 행위동사와 상태동사를 넘나든다는 것이다. 동사와 형용사의 구분이 애매모호한 단어들과 같다.

 

Q6. '사유'가 어떻게 '사랑'이고 '십자가'일까?

 

“Ⓐ사실 십자가는 무거워서 힘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이 문장을 사유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 할 수 있을끼? '하느님'을 사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었기에, 그것은 '고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랑'임을 바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 하느님을 만나나? 사람은 언제 하느님과 예수님이 같음을 바라볼 수 있나? 사유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사유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을 삼위일체로  알아보는 문이다.

 

하느님(사랑)에 대해 우리가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우리와 그분이 함께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어떤 상태로 있든, 사랑과 나라는 생명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깨달음이라고 표현되지만 실은 '기억의 되돌림'이다. 하느님과 나는 근원적으로 함께였었고, 지금도 함께 있고,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든 망각하든 그것은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하느님 사랑을 말하는데, 하이데거를 끌어들인 이유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를 사유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의 되돌림이라고 할 때, 여기서 나오는 사유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무엇을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을 사유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기억’이자 ‘감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깊이’ 사유하기를 원하신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사랑의 이름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인 것이다. 사유할 수 있을 때에만이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그 ‘깊이’를 바라볼 수 있다. 그때, 나라는 '유한한' 존재가 그분이라는 '무한한' 존재와 어떻게 '하나'이며 '함께'인가를 바라볼 수 있는데, 사랑만이 유한과 무한의 경계를 없애기 때문이다.  바로 그 통로가  '십자가'이기에, 십자가란 사랑의 ‘깊이’를 온 인격,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기에 “십자가=사랑”라고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그분에게 드릴 수 최고의 ‘감사’는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바라볼 수 있도록 '깊이'  ‘사유함’이다. 이것이 그분 사랑의 은총에 대한 ‘응답(entsprechen)이자 반향(反響 Widerhall)’이다. 우리의 현상태로는 그분의 대화상대가 아니지만, 우리가 사유의 저 깊은 심연을 뚫고 여기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을 훨씬 넘어섰을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그분과 직접 대화한다는 것이 실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나를 사랑하기 힘든 것은 나라는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 사랑을 내가 다시 반복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아버지 집에 있는데 내가 마치 탕자처럼 집을 뛰쳐나와, 그분께 받은 사랑의 모든 유산을 탕진하고,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 것처럼 항상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이 아버지 집이 아닌 곳이 있으랴?

 

그런 맥락에서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아픈 사랑의 시간들을 방생해, 놓아주는 것이다, 내가 한 그 사랑들을 망각할 때, 놓아줄 때 하느님 사랑의 ‘기억’이 나를 온전히 차지할 것이다.

 

망각해야 하는 것(과거의 나의 사랑)이 기억해야 하는 것(태초부터 함께 한 하느님 사랑)을 가로막아  '십자가'가 '사랑' 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지... 밀란쿤데라는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과 망각해야 할 것,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과 기억할 것을 구분하면서, 인간의 비극을 기억과 망각으로 조명하면서  ‘망각은 속도에 반비례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에는 고르디우스의 전차가 있었고, 그 전차에는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매듭이 달려 있었다. 아시아를 정복하는 사람만이 그 매듭을 풀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그 지역을 지나가던 중 그 얘기를 듣고 칼로 매듭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칼로 잘랐다고 하는 전설 속의 매듭이다. '대담한 방법을 써야만 풀 수 있는 문제'라는 뜻의 속담으로 쓰이고 있다.

 

‘나’라는 ‘십자가’는 '대담한 방법을 써야만 풀 수 있는 문제'에 속한다.

 

하여ㅡ 내가 오늘의 사랑을 하지 못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옛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에서 그 사랑을 꾾어내 레테의 강물에 던져야 할 이유이다. 그 사랑들을 곱씹어 보았자. 분석하고, 반성해 보았자, 우리는 두 번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지 못한다. 나는 점점 더 사랑의 트라우마라는 늪에 푹푹 빠져, 오늘 내게 온 사랑의 나그네에게 물 한잔 주지 못하는 몰인정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의 사랑이 없는데 내일의 사랑이 있다고 나를 세뇌시키지 말자!

 

그러기 위해 사유(하느님 사랑을 기억하는)와 생각(옛사랑을 기억하는)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