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나뭇잎숨결 2020. 6. 11. 13:40

독일 바이에른 들판

 

 

“적극적으로 자기주장을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두지 않게 된다. 당신이 요구한 것을 얻게 될지 혹은 필요한 것을 달성하게 될지의 여부는 상관이 없다. 중요한 점은 모든 상황과 자신의 감정과 스트레스 수위와 자아상에 대해서 통제권을 가진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는 점을 안다는 것이다.”

 

                                    -수 비숍(Sue Bishop)의 『자기주장의 기술(Develop Your Assertiveness)』(2006)

 

 

어린 시절부터 가장 많이 들은 지적이 “다 좋아, 아무 것도 바꾸지 마, 그런데 딱 하나, 자기주장만 좀 내려놓으면 돼, 고집 부리지 말고”라는 것이었다.

 

강론은 모든 신자들을 겨냥한 것인데 마치 나를 겨냥 한 듯, 오늘도 강론 듣고 찔리고 또 찔렸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해 주신 말씀을 미사 중에 그대로 듣게 되다니...더우기 지금 내가 추진하는 일들에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그 부분들을 마치 독심술로 알고나 계신듯...

 

오늘 미사  때, 파견된 사도의 덕목으로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빈손의 역설에서 물질 뿐  아니라,

“의견, 고집, 자기 주장 조차도 지니지 말라”는 성향 혹은 기질의 빈손까지를 요구하신다.

 

의견과 고집과 자기주장은 자기 삶을 스스로 컨트롤 하겠다는 성향의 표현이다.

또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주지 않으면 실행될 수 없는 일들을 추진할 때 리더의 덕목이기도 하다.

 

사도들이 그 어려운 전교와 전교의 끝에 순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꺾지 못할 강한 고집과 자기주장이 그들을 극단까지 밀고 갔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조차도 지니지 말라? 그야말로 빈손의 빈손의 역설인 셈이다.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여기에 멈춰서서 몇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답은 언제나 ‘예수님의 부활 그 사랑’에 있다.

총론과 각론이 충돌할 때 각론이 총론에 수렴되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사도들에게 총론은 복음 전파고, 각론은 전파의 효율성 혹은 그들의 성향이나 기질일 것이다.

 

“바르나바-마르코- 바오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파 운명을 좌우할 이 막강한 조합에서 총론은 무엇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 사도들 사이의 ‘사랑’ 일 것이다.

복음전파에 따르는 모든 반대와 위험에 대항할 무기는 그들이 성향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사랑'일 것이니...

복음 전파의 성공여부는 인간의 수량적 수치의 통계가 아니라, 복음전파의 내용일 것이다.

그들은 메신저이지 메시지가 아니다. 메시지는 '예수님의 부활, 그 사랑' 이다.

그렇다면 빈손의 역설의 역설은 “오직 그분의 사랑만 지녀라, 사랑에 순명하라”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내게 주어진 일과 사랑에서 “예수님의 부활, 그 사랑”이라는 총론에

나의 가치관, 성향, 기질이라는 각론을 수렴시켜야 한다는 답이 자명하게 도출된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답을 보고 답안지를 쓸 일만 남아 있다.

그 답을 다른 말로 풀어보면, 자신을 온전히 지우라는 것이다.

너라는 에고는 지우고, “오직 그분의 사랑만 지녀라, 사랑에 순명하라”

 

 

 

살베레지나 http://www.youtube.com/watch?v=jywh5rGV8_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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