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내(잎)가 죽어야 네(꽃)가 산다면

나뭇잎숨결 2020. 6. 15. 10:49

()가 죽어야 네()가 산다면

-썩는 게 슬프거나, 슬퍼서 썩거나

 

 

참 고

 

1. Jean. 6,51-58

2. 류근,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사, 2018

3.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세계사, 2004

4. 내(잎)가 죽어야 네(꽃)가 산다면-선운사 상사화

http://blog.daum.net/m-deresa/12386572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 류근, 『상처적 체질』

 

 

1.

 

이 글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2020> 복음 묵상하면서 “사랑과 상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려 쓴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하면서 그리스도로 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강론 마지막 문장에서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일 터이므로, 그 ‘사랑’을 ‘상처’를 통해 바라보고자 한다.

 

‘상처’는 분명 ‘사랑’으로만 치유되는 것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사랑’이 곧 ‘상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랑’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상처’를 치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처’를 모르고도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사실 ‘사랑’이 곧 ‘상처’라고 느껴질 때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두렵다. ‘사랑’하는 것도 두렵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더 두렵다.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의 생명은 무엇이며,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두려워도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죽을 만치‘ 사랑하려는 것이다. ‘죽을 만치’ 사랑하다 정말 죽었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생인가? 사랑 때문에 살았고, 사랑 때문에 죽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순례가 어디 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사랑은 감미로운 감성이 아니라, 사랑 뒤에 ‘죽을 만치’ 라는 생존형 관형사와 의존명사가 나란히 붙게 되었다. 이제는 사랑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심장 근처로 손이 갈 정도로 아프다.

 

우리가 하는 사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바라 볼 수 있다. 즉각적으로 피드백이 가능한 사랑이 있는가하면, 하나는 피드백이 가능하지 않은, 피드백이 원천 봉쇄된 사랑도 있다. 사랑, 그 자체의 본질만 투명하게 빛나는 그 사랑만 하게 될 때가 있다. 전자의 사랑은 설사 그 사랑이 고통이나 아픔이라는 말로 표현될지라도 그것은 형체와 감각이 수반된, 확인할 수 있는 사랑이다. 고통이나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쁨인 이유는 인간이라는 한계 상황임에도 액션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액션을 취할 수는 있어도, 육체가 매개된 이 사랑은 채워지기 어렵다. 육체라는 한계에서 무한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의 곡선이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결국엔 상처를 주고 받거나 포기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전자의 사랑은 분명 구체적인 감각으로 표현되고 경험되는 사랑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도 1차적으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체험된 그 사랑일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경험되는 사랑 역시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구체적 사랑이다. 대부분 우리가 체험되는 사랑은 육체를 통한 피드백이 즉각적으로 가능한 사랑이다.

 

신자 공동체는 사랑에 예민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나름대로 사랑을 실천하려는 공동체다. 성당이 아니라도 가정에서 또는 봉사단체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그때 우리는 그런 봉사를 ‘죽을 만치’ 힘들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 봉사는 기쁨과 보람이라는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후자의 피드백이 없는 사랑은 아픔이 봉헌된 사랑이다. 죽음으로 곧바로 연결된 사랑이자 죽음조차 초월된 사랑에 초대된 사랑이다. 모든 불순물이 걸러진 사랑의 정수만 남은 투명한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이 육체를 초월한 그 사랑이다. 우리가 육체를 배제한 사랑을 체험했을 때, 우리를 죽을 만치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는 사랑은 육체를 통한 그 사랑이 아니라 정신 혹은 영혼을 통한 사랑임을 알게 된다. 이 사랑은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사랑의 침묵이 너무 견고해서, 침묵으로 밖에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알면서도 침묵을 벽으로 인식하는 순간 큰 사랑의 상처를 받는다.

 

이 사랑은 감각적으로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사랑이다. 육체가 매개되지 않은, 아니 매개 될 수 없는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성체 안에, 형상 안에 형상을 초월한 그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아가서에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고 표현된 바로 그 사랑이다. 삶을 사랑에 종속시킬 수 있을 때, 경험되는 그 사랑일 것이다. 누군가와 삶을 나눠야지만 성립되는 사랑이 있다면, 그 삶을 생략해야지만, 포기해야지만, 뛰어넘어야지만 성립되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피드백이 가능한 사랑이든 침묵으로 다가온 사랑이든 우리가 지닌 인간이라는 한계적인 조건들로 하여 우리에게 '상처'라는 이름을 남긴다.

 

여기서, 우리에게 성체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단지 육체의 부서짐뿐 아니라 정신의 부서짐, 영혼의 부서짐이 함께 한 총체적 부서짐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인간역사를 통시적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육체와 정신의 총체적 부서짐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서 울어라”라고 위로 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총체적 부서짐을 경험한 예수님만이 부서지고 있는 상태의 우리를 위로할 수 있으니까.

 

물론 상처에서 상처만 본다면, 죽음에서 죽음만 본다면 상처나 죽음으로 훼손시킬 수 없는 그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바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상처와 죽음을 사랑만큼이나 묵상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처의 안으로 피땀을 흘리며 들어갔을 때, 사랑으로 받은 상처는 상처로써만 치유된다는 상처의 역설과 만나게 된다. 계속 자신이 받은 상처만 헤집고 들여다보는 한 그 상처는 아물 수가 없다.

 

박완서씨는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산문집에서 외아들을 잃고 한동안 하느님과 철저히 냉담상태였음을 고백한 글을 쓴 적이 있다. 하느님과 화해한 것이 ‘피에타의 성모님’ ‘전쟁 중에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 ‘그 아들을 잃은 인류의 모든 어머니들’을 떠올리며, 그 상처에 자신의 상처를 포갰을 때, ‘참척’의 아픔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상처가 상처의 강을 건너가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 상처는, 사랑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예수님의 상처에 담겨있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으로 모아진다. 자기 한계를 넘어섰을 때, 생각의 틀을 깼을 때, 겸손해 졌을 때, 우리는 성체성혈의 사랑의 신비를 볼 수 있고, 그리스도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성체성혈대축일 강론의 대 주제다.

 

그런 맥락에서 유다인, 이스라엘백성,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같은 운명을 살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의 한계, 절망, 실망, 좌절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당위인 셈이다. 그러기 위해서 ⑩에서 말한 몸을 돌보듯, ‘자신의 생각을 돌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통해 오신 그리스도의 몸, 성체의 그 사랑의 신비를 비로소 알 수 있고, 살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 거짓 희망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랑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체성혈’ 그 사랑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흔들림 없는 진리로 받아들이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부속가에서 노래한 것처럼 “성체를 영하고도 삶과 죽음으로 운명이 갈라진 이유는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을 말하기 전에 상처를 바라보아야할 이유이다. 왜 나는 상처를 주거나 받는가?

1차적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좌절, 절망, 실망, 한계는 모두 상처라는 말로 모아진다. 2차적으로 그 상처가 상처로써의 기능을 완수했다면 상처는 사랑이란 말로 대체할 수도 있다. 물론 상처에 머물러 상처만 낳았다면 그것은 사랑에서 버려진 쓸모없는 나뭇가지겠지만, 우리가 그 상처를 발판으로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갔다면 그것은 사랑의 문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때, 사랑과 사랑이 충돌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자의 사랑은 자신에게서 발아된 작은 사랑이라면, 후자의 사랑은 성체성혈의 그 사랑, 세계와 타자와 하나가 된 큰 사랑이다.

 

그런 맥락에서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하는 그 지점에서 그 상처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강론에서 언급된 ‘생각을 돌보는 일’일 것이다. 생각을 돌본다는 것이 상처를 느끼지 못하는 그 상태로의 수직적 비약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히 상처에 대해 묵상했을 때, 아플 만큼 아팠을 때, 그 상처의 이름이 나의 어떤 욕망의 표출인가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사랑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좌절, 절망, 한계. 상처..는 모두 물리적인 세계와의 충돌을 의미한다. 이 물리적 세계와의 충돌에서 불가피하게 N0!라고 거절당했을 때의 부정적인 상태를 상처 혹은 한계라고 한다면, 그 N0는 그 자체로 내가 추구할 것이 못되는 한계적인 세계의 소유의지이거나, 어떤 N0는 끝끝내 추구해야하지만 내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 즉 초월적 방식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답을 갖고 있다.

 

우리가 한계 앞에서 무엇인가 질문할 때, 그 답을 1%로 모르고 질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질문하는 바의 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다만 그 답대로 내가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의 동의를 얻고 싶은 마음에서 질문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했을 때, 그 상처를 준 대상은 실은 나 자신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음 문장은 신학적+교리적+성서적인 해석이 아님을 전제로 한다.- 예수님의 상처와 죽음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에게 준 상처와 죽음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준 죽음이다. 간디의 타살은 간디가 간디에게 준 타살적 죽음이다. 나의 상처와 죽음은 내가 나에게 준 상처와 죽음이라 할 것이다.

 

왜? 우리는 얼마큼 사랑하면 죽게 되고, 어떻게 사랑하면 상처받게 될지 적어도 알고 있다. 상처와 죽음에서 도망치거나 뒤돌아서면 상처와 죽음도 우리를 피해간다. 상처와 죽음을 끌어안았을 때만 우리는 상처받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상처와 죽음은 언제나 사랑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유능한 사냥꾼은 상한 새를 향해 총을 겨누지 않는 것과 같다.(물론 피해가거나 포기하거나 도망쳐서 받은 상처와 죽음은 여기서 거론 하지 않겠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의 상처는 물리적인 세계를 통과하면서 내 욕망의 충돌에서 느끼는 혼란이고 좌절이고 절망이고 아픔이고 한계다. 원래 상처라는 단어는 사랑처럼 타자가 개입되어야지만 성립되는 단어다. 그런데, 사랑이나 한계의 매개자인 타자는 근본적으로 내가 배워야 하는 부분을 건드려준 은인에 불과하다. 결국은 내가 나에게 준 상처이자 한계인 셈이다.

 

상처의 현주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한계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1차적인 길일 것이다.

 

 

 

 

 

 

 

2.

 

글을 마무리 하면서,

 

‘내(잎)가 죽어야 네(꽃)가 산다면-썩는 게 슬프거나, 슬퍼서 썩거나’를 해명할 차례다.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라고 류근 시인은 『상처적 체질』에서 나는 상처받기 위해 사랑한다, 나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자격도 없는 사랑의 거지다, 사랑할 때 받은 것은 상처밖에 없었고, 남은 것도 사랑밖에 없었다. 그 상처에 기대어 간신히 시를 썼고 겨우 살았다, 상처가 없었다면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고 살지도 못했을 것이다. 탄수화물이라는 밥을 먹은 게 아니고, 상처를 먹고 살았다. 사랑과 그리움의 크기란 상처의 크기였다고 말 할 정도다, 자신의 앞으로의 생도 상처에서 고름을 끍어내어 그것을 분석하는 일이거나, 아예 상처와 한 몸이 되어 일백번 고쳐죽어 진토가 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에서’라는 시비가 있는 선운사에 가면 꽃무릇이라 불리는 상사화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길을 걸을 수 있다. 꽃무릇은 잎이 져야지만 꽃이 피는 구근초다. 같은 몸이지만 꽃과 잎은 함께는 존재할 수 없어서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내(잎)가 죽어야 네(꽃)가 산다면’ 이 제목은 ‘예수님이 죽어야 인류가 살 수 있다’로 바꿀 수 있다. 예수님이 그냥 인류의 스승 중 한분, 진리를 깨달은 각자였다면 오늘, 당신과 나의 사랑의 지향점은 어디였겠는가? 그분이 받은 상처와 죽음으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사랑에 대해, 사랑의 상처에 대해, 삶의 방향에 대해 뜨겁게 고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꽃무릇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 상처를 잎이라 한다면, 사랑은 꽃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이 깊어지면 상처도 없다. 상처가 삶에서 겉도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삭아졌을 때, 상처 그 자체도 소중하다. 그것이 사랑의 상처니까. 상처는 곧 사랑이니까.

 

흔히, ‘상처받지도 말고 주지도 말라’ 라는 말들을 한다. 얼마나 표피를 건드리는 말인가를 성체를 영하는 사람들은 알 수 있다. 자신의 생명이 사랑이고 삶의 지향점이 사랑이라면 이렇게 바꾸어 말해야 할 것이다. 상처받아라, 그것이 사랑이 될 만큼, 더 많이 상처받아라, 그러나 상처는 주지마라, 그가 혹시 상처와 사랑을 나누어 생각할지도 모르니.

 

성체성혈 그 사랑이 무엇인가? 상처와 죽음을 통한 사랑이다. 형체 속에 현존을 감춘 그 사랑이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에 견줄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 우주가 사라져도 남을 유일한 것은 그 '사랑' 밖에 없다.

 

그렇게 절대적인 사랑인데, 부속가에 나오는 “성체를 영하고도 삶과 죽음으로 운명이 갈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바오로 사도는 성혈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고,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피와 살에 동참한다는 무엇인가? 성체를 영하고도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이유는 예수님의 그 ‘사랑’에 동참하지 않은 결과이다. 이것은 지난주 <삼위일체대축일강론>에서처럼 하느님이 내린 심판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을 잃은 자신이 자신에게 준 결과라는 점에서, 사랑에서의 자기추방, 자기유배라고 바라볼 수 있겠다.

 

‘내(잎)가 죽어야 네(꽃)가 산다면-썩는 게 슬프거나, 슬퍼서 썩거나’ 모두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