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막을 건너는 두(여섯)가지 방법

나뭇잎숨결 2020. 6. 23. 08:52

 

사막을 건너는 두(여섯)가지 방법

- 열정을 가로막는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

 

 

참 고

 

1. Matthieu. 10, 26-33.

2.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기적수업, 텍스트 서문)

    http://blog.daum.net/m-deresa/12388065

3. 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고상숙 옮김, 김영사 , 2011

 

 

 

그대는,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큰 좌절감을 느낄 때가 언제인가요? 나는 100의 사랑을 주고 있는 데, 사랑하는 이는 나에게 1도 사랑을 주지 않는 거 같을 때 좌절감을 느끼나요?

 

나는 사랑하는 이들이 그 언젠가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를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의연하고 담대해져서가 아니라 죽음이란 고통을 익명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으로 넘어간 것들은 고통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일 뿐이다. 고통의 소비일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가 오늘 어떤 걱정을 하는지? 그가 왜 불안을 느끼는지? 그것이 자신 안에서 점점 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은 아닌지? 그가 느끼는 블안, 걱정, 두려움, 고통을 추론 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좌절감이다.

 

더 나아가 그가 어떤 고통을 느끼고 두려움에 처할지라도 그것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지 나와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두번째 느끼는 좌절감이다.

 

여기까지 말하고나면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랑을 하는 듯하다.

 

그런데, 나는 나의 고통, 너의 고통, 우리의 고통, 인류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고통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흔히 고통은 나누면 적어진다(작아진다), 라고 말하지만 고통은 나눌수 있는 것이 아닌 거 같다. 각자의 몫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키레네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 진다.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피땀을 닦아준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위로일 뿐, 예수님의 고통은 오로지 예수님만이 지고가셔야 했던 그분의 몫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내 고통은 오로지 내가 지고 갈 몫인 것처럼. 아무리 내가 당신을 사랑할지라도 당신 몫의 고통은 내가 대신 져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고통 받는 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 줄 수 있나? 그냥 함께 하는 것뿐이다. 그의 몫으로 주어진 고통을 그가 끝까지 지고 갈 수 있도록, 그러나 그가 혼자가 아님을... 초상을 치를 때, 한쪽에선 연도하는데 한쪽에선 고스톱치면서 밤을 함께 새워주는 것처럼.

 

고통은 1대1 대응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자가 가난한자를 위로할 수도 있지만 부자가 가난한 자를 위로할 수도 있고 역으로 가난한 자가 부자를 위로 할 수도 있다. 부자 역시 물질적 고통이 아니라 다른 고통을 겪어냈을 것이니까. 고통에서 면죄부를 받은 인류는 없으니까. 내가 겪는 고통이 인류 최초의 유일무이한 고통은 아니니까.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믿음 때문에 생긴 것인지, 복음을 전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인지, 자신의 죄 때문에 겪는 고통인지, 아님 그의 죄 때문인데 그 옆을 지나가던 내가 그 죄를 나누어 갚고 있는 중인지, 아님 그 모든 것이 함께 복합되어 나타나는 고통인지 그 구분을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보았다.

 

 

예컨대1. 가수 싸이가 군대를 두 번 갔다왔다고 하는 것과 내 아들이 군대를 두 번 갔다 왔다는 것과는 그 고통의 이름이 다르다. 제대하면 유학을 가려던 모든 계획이 자동 취소되고, 훈련소 입소부터 다시 해야 했을 때, 아들이 내 앞을 지나갈 때, 사람이 지나간다가 아니고 분노가 지나간다고 느껴질 때, 이건 분명 살아 있으면서 겪는 일일테고 2년이 지나면 끝날 것임에도 침묵밖에 줄 것이 없을 때...이 고통의 이름은 무엇일까?.

 

 

예컨대2. 딸이 정말 사랑하는 남친, 내가 사윗감으로 지목한 청년이 개신교 집안이라, 상대의 부모님들이 결혼 조건으로 종교를 개신교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을 때, 딸이 내 엄마가 믿는 종교를 결혼 때문에 절대 바꿀 수 없다고 이별하고 와서, 밤새 딸의 방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를 몇날 며칠을 귀를 막아도 들어야했을 때, 이 고통의 이름은 무엇인가?

 

예컨대3. 야! 첫눈이다! 라고 말한 친구를 3시간 후에 병원 수술실 앞에서 밤새 기다리다, 한 쪽 눈은 실명입니다. 한 쪽 눈은 경과를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눈길에 미끄러져 중앙분리대를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돌진했고, 앞 유리를 뚫고 나오면서 그 유리가 눈을 가로질러 지나갔습니다. 생명을 건진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고통의 이름은 무엇인가?

 

고통은 하느님과 그 어떤 보상심리로 거래할 수가 없다. 아들은 고3때까지 복사대장을 했고, 딸은 성당에서 줄곳 반주자였고, 친구는 봉사단체 둘을 운영할 정도로 하느님 사랑에 몰입해 있었다는 것이 고통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고통은 이제 시간이 흐르고 추억이 되었다.

 

살아온 시간만큼, 차마 나열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인연이 많을수록 고통도 많은 것이 아닌가. 인연이, 혈연이 고통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한 행복, 불행, 고통, 이별, 죽음...사람들이 겪어내는 그 모든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엄정함만 느낀다.

 

내가 아무리 죄를 짓지 않아도(그럴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내가 맺은 인연들로 하여 내 앞에 놓이는 수없이 많은 고통의 이름들은 죄일까, 믿음일까? 아님 무엇일까?

 

익명의 누군가는 지금도 내가 겪은 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의 사막을 건너고 있을텐데, 인류가 겪는 고통에 비해 이 개별적인 고통은 왜 그토록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개별적인 고통도 아프지만 고통의 국지성에 대해 몰입하고 있는 것에 대해 또 다른 고통을 느낀다.

 

이때, 기도는, 고통이 온 이유를 알지 못하므로, 고통의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이 고통이 빨리 지나가게 해 달라거나, 고통을 당한 그가 용기를 잃지 않게 해 달라거나 하는 기도조차도 차마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고통이라고 느낄 때, 인류가 비로소 평등하다고 느껴지면서, 고통의 대상이 나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라고 나에게 겨우 묻거나,

 

당신은 우리를 무슨 그릇으로 쓰시기 위해서 우리를 다시 빚으십니까? 당신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왜 옛 성전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짓게 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할 따름이다.

 

그 때 위로는 오직 ‘십자가’ 뿐이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강론과 복음을 북상하면서 그동안 살아오면서 고통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 두려워했던 것들을 총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아직도 그것이 고통인 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죄의 대가인지, 하느님께서 내 몫으로 주신 것인지는 좀 더 묵상해 볼 여지가 있기는 하다.

 

잠정적으로, 젊은 시절엔 인연의 빚을 갚는 고통이었다면, 지금은 내 성격, 성향으로 인해 진행형인 고통을 나에게 지게하고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다. 오늘 내 고통과 두려움은 모두 내가 나에게 준 것들이다. 일도 사랑도 다 그렇다.

 

그럼에도, 어제의 고통이 모두 추억이 되었으니, 고통은 지나갔다는 것이고 영원한 이름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고통으로 인해 풍부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음에 머리 숙일 뿐이다. 그것이 내가 고통이란 봉인을 풀고 들여다본 축복의 이름이었다.

 

나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존재’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고통으로 인해 받은 축복의 이름이다. 고통이 없었다면 얼마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삶을 살았을까?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의 저자 스티브 도나휴는 우리의 삶은 사막여행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며, 열정을 잃어버린 것은 죽기 전에 이미 죽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니 “열정을 가로막는 두려움과 불안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171p) 라고 조언을 하고 있다.

 

막연한 두려움 등 마음 속 열정을 가로막는 허상의 국경에서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사막에는 허상의 국경만이 아니라 하나의 고통을 마감하는 진정한 경계선도 있으므로, 진정한 경계선을 건너고 나면 또 다시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는 조언이다. 그 전제조건이 열정이다. 열정은 모든 두려움을 돌파할 수 있는 신적인 힘이라고 본 것이다.

 

<기적수업, 텍스트 서문>에서는 “실재는 위협받을 수 없고, 비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고통 혹은 두려움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비실재를 실재화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보면 열정과 사랑은 같은 이름으로 보이기도 한다.

 

고통 하면 떠오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뜻이 종횡으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죄를 지어 고통을 초래하지 않아도 인류의 죄는 코로나19처럼 나눠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오는 고통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고통이고, 또 피해야 하는 고통이지만, 자기 몫으로 주어진 고통은, 우리가 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껴안아야 할 고통...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

 

강론에서는 고통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한 고통은 피할 수 있고 피해야 하는 고통이라고 전제한다.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이 문제다. 누군가의 잘못은 누군가가 짊어져야 하는 고통을 낳고, 그  고통은 인류연좌제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결국은 이 세계가 하느님 나라가 되지 않는 한,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도나휴는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너는데 여섯가지 방법이 있다고 조언하지만, 강론과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든 생각은. 나 자신이든 그 누구든 죄로 인해 초래된 고통과 내 몫으로 하늘이 준 고통을 교차하여 내가 지고갈 십자가를  지고 순례를 하는 것이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고통을 피해서 산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어디에서 찾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을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주여 이 잔을 제게서 걷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라고 겟세마니동산의 기도를 오늘도 올릴 따름이다.

 

 

 

Ich Liebe Dich /Dana Winner

https://www.youtube.com/watch?v=vG-jyJ9ZJjQ 5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