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나뭇잎숨결 2020. 6. 9. 10:53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참고

 

1.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주석서』

2. 십자가의 성 요한 『영혼의 어둔 밤』

3. 폴모리아-여름날의소야곡 (Paul Mauriat-Serenade to summertime)

 

 

“한 처음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 1장)

 

1.

 

그대는,  언제 자신이 ‘빛’ 속에 있다고 느끼세요?

 

나는 ‘어둠’ 속에 있을 때 그 빛을 느낀다. 분명,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밤인데, 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빛’만 있는 것도 아닌, ‘어둠’과 ‘빛’의 공존에서, ‘어둠’에 눌려 이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쩔쩔매고 있을 때, ‘빛’이 계속 함께 있었음을 느끼곤 한다. 혼란과 고요가 함께 있는...그것을 느낀다고 해서 어둠이 주는 혼란이 약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 어둠과 빛, 모두 힘을 지니고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는 이를 포스와 파워라는 두 힘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빛과 어둠의 공존 속에서 ‘어둠’의 힘에 의해 그 ‘빛’이 상쇄되는 것도 아니다. 때론 어둠이 빛을 바치고 있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살아낸다는 것은 ‘빛’과 ‘어둠’과 동행하는 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향일성 식물들이 태양 을 향해 자기 몸 전체를 온 힘을 다해 향하듯, 우리 역시 ‘빛’ 쪽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온 인격을 다해 향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앙인들은 자신이 ‘빛’의 자녀임을 알기에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순례의 여정 중에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어떤 ‘준거의 틀’이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어둠으로부터 지켜내고, 신앙의 분열증을 스스로 제어하기 위한 지혜다. 이 세상 순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빛’과 ‘어둠’과 피할 수 없는 동행을 한다는 것이라면, ‘어둠의 심연’이 아직 이 세상 곳곳에 드리워져 있는 곳을 향일성 식물처럼 온 인격으로 '빛'을 지향하며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빛’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쉽다. ‘어둠’을 느끼는 순간조차도 ‘빛’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어둠을 더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은 마치 그것이 땅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빛’보다는 ‘어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두 종류의 ‘밤’을 살고 있다. ‘어둠’의 밤과 ‘암흑’의 밤이 그것이다. ‘어둠’의 밤은 인간이라는 유한성으로 인하여 보편적으로 주어진 지(知)의 밤이며, ‘암흑’의 밤은 마음의 가난으로 인하여 내가 나에게 준 결여(缺如)의 밤이다. 어둠 속에 있는 것은 내가 이유나 결과의 ‘빛’을 박탈당하여 그 무엇도 비난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며, ‘암흑’ 속에 있는 밤은 사물이나 지식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혼란으로 내가 눈이 멀 때 일어난다.

 

삼위일체대축일 복음과 강론을 묵상하면서 연계되어 떠오른 문장들이다. 아래 인용한 문장들에는 모두 ‘빛’과 ‘어둠’이 공존하면서, ‘빛’으로 비상하는 힘을 갖고 있는 문장들이다.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또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아우구스티누스)

 

Ⓑ“두 번째 밤은 첫 번째 밤을 감싸며, 어둠이 암흑을 비춘다. 밤은 어두웠으며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십자가의 성요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주석서』에 있는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또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는 문장은 ‘관계론’에 관한 것이다. ‘사랑’의 관계론에 관한 것이다. 존재한다는 자체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하늘이 하늘인 이유, 하늘과 땅의 존재 이유이다. 홀로 ‘자존’할 수 없는 신의 운명이자 인간 운명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 1장에 언급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에서 하느님과 우리는 그 ‘존재 양식’은 다르겠지만 ‘홀로’ 가 아니라는 공통의 존재 양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는  일반적으로 이 세상과 분리된 관상수도원의 수도자들의 영적 상태, 흔히 더 높은 영적 상태로 가기 위해 거치는, 침묵의 시간을 통과하는 영혼의 과정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데, 성 요한의 저 직관이 우리와 삶의 양식이 다른 관상수도원의 영적 갈망의 상태이기도 하겠지만 이 세상 순례의 여정에 있는 우리의 영적 갈망의 상태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땅을 하늘과 결합시키고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는 직관으로 바라 볼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았듯”,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사랑의 문을 연다는 것” 은 피를 흘리는 순교가 아닐지라도, 단지 정신승리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임을 추론 할 수 있다. 온몸으로 하늘을 지향하지 않는 데 하늘과 땅이 연결될 수 있을까? 인격을 위격과 연결시키는 일인데 그것은 피를 흘리지 않는 또 다른 이름의 순교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 시간들은 성 요한의 직관처럼 ‘밤이 밤을 밝히는’ 그런 시간을 살아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소망이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것은 항상 십자가와 동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사람이 어떤 꿈을 꾸는 일도 그의 평생의 피땀과 관련된 것이다. 시골에 도서관을 짓겠다는 계획은 낭만적인 꿈이지만 그 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선 치밀한 준비과정이 요구된다. 일단 그 꿈을 꾼 그가 왜 도서관을 짓겠다고 생각했는지 그 의도가 그 자신에게 선명해야 한다. 그 행위 자체의 목적이 ‘하늘’을 지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분 안에서 꿈을 꾼다는 것은 하늘을 땅으로 옮겨 놓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가 하늘을 땅으로 옮겨 놓는 그런 꿈을 꾼 것도, 그 꿈을 실현하기 보낸 30년이 넘는 시간도 삼위일체 하느님 의 그 ‘사랑’이라는 ‘빛’이 함께 했음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꿈이 이루어졌는지가 초점이 아니라 그가 그분 안에서 꿈을 꾸었다는 것이 초점이다.

 

꿈도, 사랑도 모두 한 처음의 그 ‘하늘’을 ‘땅’으로 모셔오는 일이다. 그 관념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온 몸이, 온 인격이 따라주어야 한다. 땅을 하늘에 연결시키는 일, 내 인격을 그분의 위격에 연결시키는 일,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순례의 목적이고, 우리는 의식+무의식 속에서 무엇보다 이 숙제를 잘 하고 싶어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땅을 향해 있고, 우리를 향해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디를 향해 있고, 또 누구를 행해야 하는지를...”의 제언에 대해, 우리는 그 답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과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어디’와 ‘누구’는 삼위일체대축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 우리자신에게 소명해야 하는 부분이기에 그렇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는 바로 인간 비극의 근원에 놓여있는 ‘어디를’은 ‘누구를’과 연쇄된 고리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흔들리는 순간 누구를 향한 시선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때 이 사랑이 어디서 온 것인가? <~ 으로부터> 온 것인가를 되돌려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77억 인류 가운데 나는 왜 당신을 알아보았는가? 사랑의 근원을 잊지 않을 때, 우리가 하는 힘든 ‘사랑’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그 ‘사랑’안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또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아우구스티누스)에서도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나> 혹은 <너>이면서 동시에, <나> 혹은 <너> 밖으로 나가야 하는, <나> 혹은 <너>가 향해야 하는 그 ‘하늘’은 무엇인가, <나> 혹은 <너>를 통해서 바라봐야 하는 그 ‘하늘’은 대체 무엇인가? 그 것을 온 인격으로 질문하고, 살아냄으로 답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일 것이며,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일일 것이다.

 

 

2.

 

글을 마무리 하면서,

 

이 글은 두 개의 밤을 여전히 살고 있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쓴 글이다. 밤을 통해서 ‘빛’을 본다는 것은 어둠의 역설이자 ‘빛’의 역설이다. 교리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층이 있다. 그 층을 넘어서면 그것은 본인의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시혜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은총의 부분들이다. 어둠을 어둠으로 수용해야 하는 그런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이 두 밤은 ‘자기 의식적 존재’인 인간이 ‘나’ 스스로는 ‘나’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시간 속에서 두 개의 밤을 의지하여 그분께 건너가는 ‘빛’의 순례가 아닐까. 이때 ‘밤이 밤을 밝히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모든 해석을 유보하고, 모든 위로를 반납하고, 모든 소망을 내려놓고, 어떤 답도 구하지 않고, 두 개의 밤 속에서 조용히 한결같이 걸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땅을 하늘과 연결’시키는 순례의 숙제는 두 개의 밤을 끝까지 살아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강론에서 언급된 것처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내가 최초로 어둠과 빛을 인식한 것은 <나>라는 존재를 인식한 순간으로, 한글을 읽혀야 하는 다섯때부터인 거 같다. 빛과 어둠, 두 순간이 겹치면서 경험되었다. 언어가 어떤 사람의 운명이 되었을 때, 그것은 기쁨의 세례가 아니라 격렬한 어떤 거부의 몸짓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운명에 투자할 그 징그러운 시간을 본능이 먼저 알아보는 거 같다. 빛을 산다는 것은 본능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한글을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한글을 모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자음과 모음이 만나 하나의 음절을 이루고 그것이 하늘, 하느님, 어머니, 엄마라는 단어가 만들어 진다는 것에 그는 설득당하지 못했다. 누가 뭐라고 설명을 해줘도 그 가 설득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았다. 그것 때문에 그의 성모님 같은 엄마를 얼마나 속상하게 만들었는지. 언어의 자의성과 필연성에 대해 그 누가 그를 설득해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데리고 밤마다 첫 영성체교리를 직접 가르치고 기도문을 함께 외웠다. 거의 민담수준으로 각색한 교리였고, 기도문은 모두 어떤 리듬을 갖고 있는 노래였다. 시각이 없는 사람이 오직 청각으로 이 세상을 알아가는 것처럼 어머니 옆에 누워서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하루를 열고 닫아야 한다는 것을 세뇌 비슷하게 ‘듣고’ 배웠다. 시각으로 세상을 배운 것이 아니라 청각으로 세상을 이해하였다. 그는 어느 날 운동장에서 손가락으로 하.늘.하.느,님 이라 한자 한자 써 봤다. 언어와 그가 운명처럼 만나는 순간이었다. 청각으로 듣던 것에서 시각으로 어떤 세계가 보이는 듯 했다.

 

그는 학교운동장에서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보면서 한글을 스스로 터득하고 처음으로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책 한권을 꺼내 읽어 보기로 했다. 늦은 가을날 도서관 가득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1850년 새니얼 호손이 쓴 <큰바위 얼굴>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었다. 어린소년 어니스트가 어머니의 영향으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동경하다 결국은 그 자신이 그 얼굴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처음 한글을 터득한 그가 그 자신에게 준 환희와 빛의 세례였다. 언어로 하늘을 땅으로 옮겨 놓는 그의 업의 시작이자, 도서관을 짓겠다는 꿈은 그렇게 어떤 씨앗으로 그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것은 동시에 그에게 어둠도 선사했다. 책을 읽듯 세계를 읽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지식을 책을 통해 접하다보니 <결여>라는 어둠을 그 자신에게 각인시키기 시작하였다. 세상의모든 책은 <결여>가 낳은 사생아다.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감도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어둠은 동시에 빛과 공존한다는 것을 그렇게 경험했다. 책은 그에게 빛이면서 동시에 어둠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삼위일체강론 원고를 읽고 연계되어 떠오른 아래의 글들은 나를 다듬는 풀무와 같은 문장들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세계에 원하는 것이 없는 거 같은데, 수시로 <결여>라는 암흑을 경험하는 지식노동자의 삶! 그동안의 삶이 언어를 매개로 하늘을 땅으로 옮겨 놓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내가 하는  ‘사랑’이 땅을 하늘과 연결시켜 놓는 그 일이라면, 그것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좁히신 성자 예수님의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면, 그 길에 어떤 산이 놓여 있다 하여야 넘어야 할 것이다.

 

Ⓐ“너보다 더 네 것이 무엇이며, 또 너보다 덜 네 것이 무엇이냐”(아우구스티누스)

 

Ⓑ“두 번째 밤은 첫 번째 밤을 감싸며, 어둠이 암흑을 비춘다. 밤은 어두웠으며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십자가의 성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