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데자뷔(deja ve) 안에 자메뷔(jamais ve)

나뭇잎숨결 2020. 5. 25. 15:13

데자뷔(deja ve) 안에 자메뷔(jamais ve)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혹은 가벼움

 

 

 

1.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http://blog.daum.net/m-deresa/12386058

2.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역, 민음사, 2009.

 

 

 

 

 

1.

 

‘데자뷔’는 20세기초 프랑스의 의학자인 플로랑스 아르노(Flornce Arnaud)가 하나의 현상으로 규정하면서 떠오른 용어다. 이를 초능력 현상에 크게 관심을 가졌던 심리철학자 에밀 부아라크(Emile B0irac)가 ‘데자뷔’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모든 예술, 의학, 심리학 영역에서 ‘기억과 망각’에 관한 가설로 차용된 용어다.

 

“뇌가 스치듯이 본 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저장하기 때문에 이전의 무의식적 행동이나 망각된 기억이 되살아나 기시감이 드는 것”이라고 ‘데자뷔(deja ve)’ 현상을 설명하거나, 불교에서 전생차원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이미 본 사람처럼 느끼는 시간되돌리기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자메뷔(jamais ve)’ 혹은 ‘뷔자데(Vejade)’는 미시감으로 이미 본 시간, 공간, 사물, 사람이 처음 본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심리상태, 혹은 의학적으로 치매상태를 규정하는 용어로, 늘 접하는 익숙한 상황이 돌연 낯설게 느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매일 타고 다니던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 문득, 참 낯설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오은이라는 시인은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라고 쓰기도 한다.

 

데자뷔(deja ve) 와 자메뷔(jamais ve), 정반대의 심리상태나 뇌의 작용이 아니라 데자뷔(deja ve) 안에 자메뷔(jamais ve)가 있다고 바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어떤 사물, 공간, 시간, 사람과 ‘익숙해진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이나 전체적인 면모를 인식한 후일 수도 있으나, 다른 차원의 문제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떤 대상과 익숙해졌다는 것이 곧 함께 한 공간이나 시간의 차원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의 급격한 변모과정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 안에 이미 ‘예수님적’인 것이 내재화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성령이라는 외부에서 주어진 힘, 변화의 추동뿐 아니라, 이미 ‘생득적’으로 제자들이 지닌 ‘예수님적’인 것들, 망각된 것이 되살아 난 것이라 보면 안될까.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그 맥락에서 바라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전체성을 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곁을 ‘마음으로는’ 수없이 떠나면서 몸으로 온전히 ‘떠나지 않은(못한) 것’은 그들 안에 ‘예수님적인’ 것, ‘하늘’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혼란은 예수그리스도라는 정체성뿐 아니라, 자신안에서 예수님이 낯익게도 낯설게도 느껴지는 그 무엇 때문이기도 했 을 것이다.

 

예컨대, 상대를 너무나 편안하게 생각해서 사과해야 하거나 그로 인해 관계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사람인데, 익숙하고 편하게 생각되는 것은 함께한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생득적’인 것으로 설명할 때 더 설득력이 있다. 굳이 불교의 인연설 혹은 운명론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모든 만남은 이미 준비된 만남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이전에 살아온 삶의 과정, 지향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돼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나’를 사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왜 ‘그를 사랑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낯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그 사람의 내면, 정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람에 대한 ‘익숙함’, ‘편안함’이란 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나’,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그 사람 안에서 빛나고 있음을 보았을 때가 그렇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습관 등은 낯선데, 그 사람의 정신은 익숙할 때, 데자뷔(deja ve) 와 자메뷔(jamais ve)를 동시에 경험한다. 사랑은 차이점 찾기가 아니라 공통점 찾기일 때 성립되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트필드의 말을 인용해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 글을 쓰는 작업은 단적으로 말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물과의 거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필요한건 감성이 아니라 잣대다”(하루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고 말한다. 익숙함이 아니라 세상과 타인과의 ‘거리와 간격'을 확인하는 것이 글쓰기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믿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다...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라는 쓰고 있다. 우리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무거움이 아니라 가벼움이라고 본 것이다.

 

두 사람은 글쓰기와 사랑은 모두 본질을 바라보는 행위,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수승천대축일 복음과 오신부님의 강론의 초점은 ‘갈릴래아와 그 산에서의 만남’ 그리고 ‘이별 후에 다시 만남’에 집중된다. ‘승천’ 이란 어감 자체가 무거움이 아니라 가벼워짐이 실행될 수 있을 때 가능한 단어다. 여기서 떠오른 상태들은 ‘익숙함과 낯설음’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상반된 존재성에서 도출된다.

 

 

에밀 부아라크 Émile Boirac, 1851–1917

 

 

내가 나가지 않는 모임 가운데 하나가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이다. 특히 남학생이 섞인 모임은 안 나간다. 이름만으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그 익숙함, 술 한잔 들어가면 거리낌 없는 스킨쉽, 세월을 훌쩍 건너뛴 비속어와 해라체의 반말,,,미성숙한 초등의 모습을 지금 그 사람의 전부라고 바라보는 그 시선들을 웃으며 견디고 싶지 않아서다.

 

‘익숙함-낯설음’, ‘무거움-가벼움’이란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뿐 아니라, 신앙이 있든 없든 이 세상을 ‘건너가는’ 지혜에 가까운 지침일 것이다.

 

‘네가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만큼 그 사람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라’, ‘친할수록 거리를 둬라’, ‘경이원지하라’, ‘관계의 아름다움을 지속하는 것은 더 친해짐이 아니라 단절되지 않을 만큼의 간격이다’, ‘타인과 아름다움 간격을 유지하라’, 또 어떤 일에 미숙하거나 욕심을 부릴 때, 선배들이 해주었던 조언들, ‘어깨에, 마음에 힘을 빼라, 바람이 일과 관계 사이를 통과하게 하라’ ‘우리가 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지워놓은 삶의 무게다, 모두 내려 놓아라’...등등의 말들이 그것이다.

 

그 모든 조언들과 강론말씀의 요지는 “피상적인 익숙함과 작별하라, 변하지 않는 것만을 사랑하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삼키고 소화시켜야 하는 말들인데, 참 아픈 말들이다.

 

이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데자뷔(deja ve) 와 자메뷔(jamais ve)’는 뇌의 기억 작용 이전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가치관에 달려 있다고 전제했다. 둘은 정반대의 심리상태이나 뇌의 작용뿐 아니라 ‘데자뷔(deja ve) 안에 자메뷔(jamais ve)’가 있다고 바라 볼 수 도 있지 않을까? 라고 글을 시작했다. 우리가 어떤 대상, 타자와100% '이상적' 인 부부로 살지 않는 한(결혼이 관계의 유토피아란 말이 아니다. 부부 역시 낯설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 뿐이다.) , 우리는 타자에게서 ‘데자뷔(deja ve) 와 자메뷔(jamais ve)’를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타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데자뷔(deja ve) 안에 자메뷔(jamais ve)’가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낯설음'을 포옹하는 '익숙함'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하나되는 것, 혹은 원래 하나인 것」(to hen)을 본질, 실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사고방식에 따른 것으로, 어떠한 것이 다른 것에 의해 생성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철학에서는 자기 자신과 일치해야하는 것, 자기동일적으로 존재하는 것, 다른 것에 의존하여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사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정신적 가치들은 ‘생득적’으로 지니고 있는 본질(substantia)이라고 보았다. 이것에 대하여 본질의 반대어인 실존(existentia)이란, ‘밖에 나서는 것 ex-sistere 밖에서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하늘’은 본질이다. 본다는 것은 대상의 전체적인 면모를 알고, 본질을 사는 것이라 할 때, 밖에 있는 대상의 실존적 조건들을 보는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우리가 대상의 전체적인 면모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원래 우리가 그 가치들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진정 익숙하지 않고 ‘스스로’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작별하는 것은, 실은 있지 않은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사유속에서만 자기화 할 수 있는 ‘넓고, 깊고, 높은 하늘’의 실체일 것이다. 이미 내 안에 변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해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을 받아들이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원래 ‘익숙함’일 것이며, 존재의 ‘가벼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