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라지밭, 나의 잡초밭
모든 경계에는 ‘사랑’이 필까?
- ‘모든 희망을 거스른 희망, 희망이 없이도 희망하여’
참 고 2. 폴 틸리히, 『경계선 위에서』, 김흥규역, 동연, 2018 3. 레베카 코스타, 『지금 경계선에서』 , 장세현역, 쌤앤파커스, 2011 4.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작과비평사, 1996 5.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정영목역, 청미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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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첩에 2020년 5월 계획에 중간고사 끝나면 도라지밭에 야생화 뽑기, 라고 적혀 있다. 4일은 도시, 3일은 시골, 도시인도 아니고 시골사람도 아닌 공간적 경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작년에 농지담당자는 절대농지(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 땅)를 휴경지화 했다고 경고장을 보냈다. 풀 안 뽑을 자유를 허하지 않는 농지법이다. 내게는 야생화가 다른 사람에겐 잡초로 보인다. 담당자에게 도라지와 야생화의 비율이 대체 몇 대 몇이면 도라지밭이고, 휴경지로 나눠지는지 질문을 했더니 “누가 봐도 도라지밭이면 도라지밭이고, 누가 봐도 잡초밭이면 휴경지다” 이런 난해한 답이 돌아왔다. 잘 알아듣지 못하겠어서 질문 하나를 더 했다.
“면사무소 근처를 지나다보니 우리 마을은 제초제를 쓰지 않습니다, 이런 플랜카드가 여럿 걸려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그 비법 좀 알려 달라. 시골에 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귀거래사를 고민 중인데, 무얼 심더라도 절대로 농약과 제초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이것저것 심어 봤는데, 뿌리채소 외에는 제초제나 비료를 쓰지 않고는 수확할 수가 없었다. 33그루 과일 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오로지 꽃만 볼 수 있다.” 담당자 왈, “농사를 지으면서 비료나 제초제를 전혀 쓰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덜 쓴다는 표현일 것이다”라는 더 난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그 플랜카드는 오해의 소지를 넘어 친환경 사기에 가까운 거 아닌가? 우리 마을은 ‘비교적’ 제초제를 ‘적게’ 씁니다로 고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자, 농지담당자는 제초제플랜카드는 다른 담당자 소관이므로 자신은 더 이상 대답할 이유가 없노라며, ‘누가 봐도 도라지밭으로 보이게’ 조금 더 잡초를 뽑으시라며 돌아갔다. 나의 도라지밭은 휴경지와 경작지의 경계에 있고, 친환경이란 비료와 제초제의 경계에 있었다.
귀거래사를 고민하는 내게, 시골살이를 이미 경험해 본 지인들이 조언해 준 것이 시골에 산다는 건 풀과의 전쟁이다. 풀이 나오기 직전 제초제를 뿌리면 풀과의 전쟁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들의 말은 과연 맞았다. 난 아직 비료도 제초제도 사용 안했으니 '그 곳은 야생화의 천국이고, 모든 생명체의 천국이다. 도라지밭에서 고라니가 새끼를 낳아 함께 뛰어가는 것을 볼 수도 있다'(제초제를 뿌리지 않아 받은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는 그광경) 어디에 있든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체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반드시’ 기회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럼, 도시에서의 삶은 경계선 위의 삶이 아닌가? 도시에서의 삶 역시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신앙인의 정체성과 현실 세계를 이끌어가는 신념체계 사이에서 예수님을 ‘주님Lord’ ‘아도나이’(Adonai), ‘키리오스’(Kyrios)라 부른 사람으로서 길을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가 세상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위로 하신다. 이것이 위로로 들렸다면 우리는 이미 어떤 쪽으로 삶을 방향지은 것이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문학에서는 ‘트릭스터의 운명' 앞에 서 있다고 부른다. 트릭스터의 1차적 의미는 주동적으로 ‘속임수를 사용하는 자’란 의미다. 2차적 의미는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허용의 트릭스터가 있다.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것이다. 1차, 2차 트릭스터의 의미는 그 주체가 타자다. 3차적 의미는 자기가 자신의 성향이나 가치관에 속는 ‘자기기만’의 트릭스터다.
어떤 트릭스터든 속임수를 통해 다른 인물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특징을 드러내며 어떠한 상황이든지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트릭스터는 공간, 시간, 사회, 언어 등의 여러 축면에서 ‘경계성’을 지니고 있어 어느 한 곳에 속하지 않고, 이쪽과 저 쪽을 모두 취하면서 사회와 타자를 조정한다. 이때 자주 사용하는 것이 발음의 유사성이나 동일한 말들을 사용하는 언어를 통한 조정 혹은 언어 외적인 침묵이 동원된다. 트릭스터는 언어나 의미의 경계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언어나 의미의 영역으로 움직인다.
오늘, 우리만 경계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었나보다. 인류의 스승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이를 아예 ‘중용’ 이라는 ‘덕목’으로 설정할 정도로 학문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때 ‘중용’이란 ‘이쪽도 저쪽도’ 취하지 않음에서 나온 초월적인 무위자연에 가깝다. 이것은 거의 종교적 차원에 이른 것으로 범인들이 따라하기 힘든 경지다. 서양에서도 이를 ‘중용’이라고 불렀지만 중용을 본격적인 덕목으로 바라본 아리스토텔레스는 양쪽에서 ‘적당히’ 취하는 ‘절제’를 중용이 주는 ‘선’이라며, 그 때라야 사람은 비로서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중용의 트릭스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동양의 스승들은 이를 물질주의의 경도에서 나온 저잣거리의 아전인수, 인간을 하향평준화 시키는 행위라고 쏘아부쳤다.
함민복 시인은 시적으로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라며 그 경계에 서 있다는 ‘긴장감’이야말로 세계의 안팎이 던지는 그 어떤 환상에도 쏠리지 않는 주체의 거듭남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2.
그렇다면,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유혹하는 세상의 한 복판을 건너고 있는 신앙인은 어떤 신념체계를 갖고 ‘흔들리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념체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런 연장선에서, 부활6주까지의 복음에서,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 서 있는 제자들은 통해, 신앙인은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건너가고 초월할 수 있는가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철저히 묵상하는 것은 신앙인이라는 자기기만의 트릭스터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의 입장에선 유다나 제자들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지만, 유다나 제자들의 입장에선 예수님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라 우길 수도 있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이 맘에 안 들어 떠나간 제자들의 그 마음속엔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 트릭스터’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죄명도 ‘자칭 유대안의 왕’ 이라 적자고 주장한 이들의 면면을 우리는 성 금요일 수난주일 복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떠나면서 끝내 떠나지 못했던 제자들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진정한 희망과 위로를, 예수님이 떠나시고 비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를 단적으로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로마서4.18),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로 사랑의 그 지점을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Brioude의 Saint Julien 성당에 있는 그리스도 상'
2.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유혹하는 세상의 한 복판을 건너고 있는 중이라고 언급했다. 신앙인은 어떤 신념체계를 갖고 ‘흔들리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그 신념체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라는 질문 앞에서,
매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우선,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 길은 ‘희망’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자기 정립인 듯하다. ‘무엇을 희망할 것인가’는 실상,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와 같은 맥락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때, ‘인간적인 모든 욕심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다시 솟아난 희망!’ 아름다운 아픔, 아름다운 고통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글 도입부에서 문학적인 ‘트릭스터’란 단어를 끌어들였다. 트릭스터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트릭스터가 ‘자기기만’이라 부르는 세 번째 트릭스터다. 다른 트릭스터는 내가 주체가 아니다. 그러나 세 번째 트릭스터는 내가 주체가 되어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트릭스터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우리가 성찰할 부분이다.
우리는 ‘적당히’ 착한 사람이라는 게 자기기만 트릭스터의 가장 큰 함정이다. 그만큼 살면 많이 착한 것이고, 그만큼 열심히 살면 많이 희생한 거고, 그만큼이면 잘 살아내고 있다는 충족감, 자기 합리화, 세상의 가치관에 적당히 타협하여 양쪽의 이로움을 모두 교묘히 취하는 서양적인 중용에 편승한, 착함의 하향 평준화란, 자기기만의 함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죽어도 바오로 사도의 신념체계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로마서4,18) ‘희망이 없이도 희망하여’를 이해할 수도, 살 수도 없을 듯하다.
부할6주의 복음과 강론을 묵상하면서,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로마서4,18) ‘희망이 없이도 희망하여’에 세상이 던지는 신념체계와 신앙이 던지는 신념체계의 갈림길이 있다고 보았다. 누군가 바라본 그 지점을 나도 바라볼 수 있어서 행복했고, 그래서 마음이 정말 많이 아프기조차 하다. 그러나 그 아픔이 아름다운 아픔이기 때문에, 그 아픔을 봉헌할 수 있는 나이기 때문에, 훗날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지 않는다 해도, 그로써 족할 거 같다. 보았고, 살 것이니까...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정영목역, 청미래, 2013) “사랑에 빠지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허점을 넘어서고 싶어하는 인간 희망의 승리이다.” 라고 말한다. '사랑' 에 '희망'의 있다고 믿는 사람만이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모든 희망을 거스린 희망’(로마서4,18) ‘희망이 없이도 희망하여’를 살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졌을 때 뿐이다. 그때 "모든 경계에는 과연 사랑이 필까?" 에 대한 답이 나올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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