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어디에도 없는 님, 어디에나 있는 님

나뭇잎숨결 2020. 5. 21. 08:58

어디에도 없는 님, 어디에나 있는 님

-시와 복음 연결해 읽어보기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절)....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오늘 복음을 한용운 시인의 「알 수 없어요」 연결하여 읽어보기로 한다.

 

①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②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③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④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⑤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⑥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을 감상하면서 모든 시는 ‘상처에 대한 보고서’ 라고 했다. 그 상처의 원인은 ‘님이 부재’한다는 데서 기인한다. 한용운, 그의 시 전편에도 ‘님은 부재’한다. 그런데 한용운 시인은 어디에도 없는 님을 천지에 가득한 님으로 만든다. 그래서  한용운의 시에는 ‘눈물’이 없다. ‘님만 부재하는 것이 아니고, 눈물도 부재한다.’

 

그것은, 시의 표현 기법인 역설법에서 기인하겠지만, 실은 그가 갖고 있는 사유체계의 깊이에서 기인한다. 현상적 존재로서의 ‘나’와 초월적 존재로서의 ‘님’이 합일하기 위해서는 역설적 진리를 통한 깨달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한용운 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메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님은 국가, 절대자, 민족, 민중(어린 양), 독자 그리고 님...그렇게  포괄적인 님이다.

 

「알 수 없어요 」시는 내용상 ①~⑤----->⑥의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 비연시다.

 

오동잎=발자취, 푸른하늘=얼굴, 향기=입김, 작은 시내=노래, 저녁놀=시를 연결하는 5행은, 자연현상에서 부재하는 ‘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화자가 숨어 있다. 6행에 이르러 화자 '나'가 나타나며  '그칠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님이 부재하는 밤을 밝히는 등불'임이 도출된다. 어디에도 없는 님이, 천지에 가득하다는 깨달음에 이른 결과이다.

 

그렇다면 「알 수 없어요」는 무명의 모름이 아니라, 유식의 모름에 해당한다. 우리는 한순간에 이런 사유체계를 가질 수도 없으려니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앎에 도달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더욱이 자연현상에서 부재하는 님의 현존을 확인하기란 힘들다. 이슬 한방울에 우주가 있다는 현란한 말장난이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유체계'란 선천적인 유전자가 아니라, 세상의 본질을 보기위해, 본질 아닌 것에서 눈을 돌릴 수 있을 때 형성되는 내면의 힘, 정신의 힘이다. 시인이 본질에 대한 갈망이 부재하는 님을 보게 만든 것이다. 부재하는 님을 보겠다는 갈망이 현실을 능가할 수 있는 역설의 미학을 낳았고, 시인이 갖고 있는 갈망의 힘이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처럼 초월이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서 님이 부재하는데, 어찌하여 한용운 시에는 '눈물' 한방울 없는 초연한 자아, 유리알처럼 투명한 자아만 있는가를 해명하는 게 관건일 듯하다. 한용운 시의 자아는 애초에 초월적 자아인가? 라는 질문이다. 한용운의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님의 침묵」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온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한용운 시의 자아는 범속한 현상적 자아인 '나'와 초월적 자아인 '님'이 어떻게 합일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한다. 부재하는 님, 오감각으로 체험할 수 없는 님의 부재에 대해, 결코 초연한 자아가 아니다. 시 속의 자아가 괴로워하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의 원천 때문에 정작 님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을 어쩔줄몰라 하는 자아다. 화자는 님의 부재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압도당하는 자아다. 펑펑 울면서 님을 찾아 헤매는 자아다. 주저앉아 있는 자아가 아니라, 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고자 하는 자아다.  그래서 온힘을 다하여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으려는' 자아다.

 

⑤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현실을 압도하는 한용운 시의 역설의 미학은 ⑤행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⑥행에서의 타고남은 '재'가 '기름'이 되는 '무용'에서 '유용'의 발견이란, 행의 결과물이다.  ①~④까지는 우리가 예민한 감각을 동원하면 공감할 수 있는 시적 세계다. ⑤행은 주관적 변용의 극대화로 '연꽃같은 발꿈치로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하늘을 만진다'는 표현이 나온다.  온 몸으로 지상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저녁놀'의 '육체화'를 통해,  인간이라는 가난한 존재가 어디까지 다달을 수 있는지 아름다움의 최고치를 보여준다. 숭고미의 절정이다. 지상과 천상을 합일시키는 초월의지란 인간 자신안에 이미 내재한 절대자의 경지를 이끌어냄이라할 수 있다. 에서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에서 '나'라는 작디작은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양재천의 붓꽃

 

그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요한 복음 16. 16ㅡ20)을 생각해 본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절)....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조금만 있으면' 볼 수 없는, 그러나 '조금 있으면' 다시 볼 수 있는, 제자들과 님과의 고별사에 나도 함께 동행해 보기로 한다.

 

먼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남겨진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시겠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런 세상 속에서 제자들이 살아내야 한다. 그냥 혼자 잘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무엇으로 그들이 그 세파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예수님의 부재 속에서 '예수님의 현존' 하느님의 현존'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예수님의 현존, 하느님의 현존을 안다는 것은 ' 당신의 부활, 그 사랑' 이 함께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것만이 그들이 세파를 헤쳐나갈 힘이고, 세상의 권력을 이길 힘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논리는 같다. 인지성정이다. 우리보다 먼저 귀천하신 분들이 임종할 때,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육체의 고통 안에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 ‘더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회한’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켜본 모든 임종은 그러했다. 하물며 사랑 자체이신 그분이 무슨 사랑인들 제자들에게 주고 싶지 않으시겠는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고, 조금있으면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어디서 그분을 볼 수 있는가? 여기서 조금 있으면 성령의 시간을 의미하겠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볼 수 있게 할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 뿐이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도 오직 ‘사랑’ 뿐이다. 그분이 '사랑'이니까.

 

이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복음을 바라보자. 오늘 김신부님의 강론은 제자들의 입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자들은 바로 우리니까. 우리의 아픔, 고통, 슬픔은 나아진 듯, 사라진 듯 하다가 다시금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매번 극복하고 이젠 끝인가보다 하면 또 다른 고통, 슬픔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신자가 되었다고 슬픔이나 고통이 패스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의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슬픔’, '고통'을 한번 찬찬히 바라보자. 그 슬픔, 고통은 표면적으로 분명 누구나 느끼는 슬픔이고 고통일 것이다. 우리가 방문을 걷어 잠그고 밤새도록 하염없이 울게 되거나, 길을 가다가 심장을 쥐어 뜯으며 주저앉게되는, 그 슬픔이 분명할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가다 눈물 때문에 중간에 내리게 될지도 모르고, 수업을 하다 목이 메어 오늘 수업을 여기서 마칩니다, 라고 나올 수도 있다.

 

이제 슬픔의 이면을 바라보자, 슬픔이나 고통의 이면을 보는 것이 신앙인이라 할 수 있다. 그 슬픔과 고통 '속으로' 조금 더 걸어가 보자. 우리와 동행하는 '사랑'과 함께 걸어가 보자. 슬픔의 안으로 걸어들어가  무엇이, 누가  함께하는지  바라보는 것. 슬픔이나 고통의 이면을 본다는 것은 우리와 동행하는 그 분. 그 '사랑'을 알아 본다는 것이며, 그 사랑을 알아본다는 것은, 그 분의 시선으로 슬픔과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다.

 

그분의 시선으로 슬픔과 고통의 이면까지 깊이 바라보는 것, 그때 슬픔이나 고통은, 사랑에서 이탈했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중임을 보게된다. 반복되는 고통이나 슬픔을 겪으면서,  예수님의 '수난-고통-죽음-부활-승천'의 과정을 '온몸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게 된다. 예수님만큼이 아니라 우리 만큼의 '사랑'을 알게되는 과정이다. 작고 작은 나에게 땅과 하늘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시선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았을 때만 가능한 일임도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반복'되는 슬픔과  고통에 대한 정립이 필요하다. 우리가 겪어내는 슬픔과 고통은  '수난-고통-죽음-부활-승천'의 과정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우리가 알수 있는 그 '사랑'이 아니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용운에게 '역설'이 필요하듯, 우리에게 평생 '반복'하면서 이 '사랑'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복'에 대한 통찰을 들뢰즈에서 좀 들어보도록 하자. 개인적으로 들뢰즈의 통찰에서 많은 위로를 얻었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 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을은 각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를 도달했어야 했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

 

                                                                 - 질 들뢰즈, 김상환 역,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pp. 626~ 633

 

 

'반복'되는 일상에서 그분과 함께 슬픔과 고통의 이면을 보게되었을때,  어떤 상황에도 함께 하시는 그 분으로 인해,  오늘 우리의  슬픔과 고통 역시 또 '그분의 방식으로' 극복되리라는 것, 그때 슬픔이나 고통은 오신부님의  '부활6주의 강론'처럼  '아름다운 고통' 이란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이 아름다움웠듯...그래서 고통 안에 기쁨이 있고, 고통안에 사랑이 있음을 보게 되고, 살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도 위의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처럼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님'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시인의  사유체계가 부재하는 님을 현존하게 만드는 역설의 미학을 낳았듯, 우리도 '수난-고통-죽음-부활-승천'의 주인, 그분으로 인해 고통과 죽음 속에 머물지 않고 '영원한 사랑' 보게 된다.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서  "세상 끝날까지 언제와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그분의 말씀과 동행하게 된다. 임마누엘, 얼마나 아름다운 순례의 동반자인가?

 

이 세상이 주는 고통, 슬픔은 '유한'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 끝날 때까지 동행하는 그 분은 '영원'하다. '유한'은 '영원'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사랑'을 이길 수 있는 이 세상의 그 어떤 힘이나  '권력'도 없다. 신앙인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알고 '영원한 사랑'에 온 인생을 던지는 사람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문학과 종교는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문학 역시 사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이 논하는 이 우주가 빅뱅이론에 이론에 의해 사라져도, 열평형상태에 도달해 우주가 사라진다 해도 그 ‘영원한 사랑’ 만 오로지 남을 것이다.

 

 

 

 

 

천지에 님은 없지만, 천지에 님만 있습니다.

 

어디에도 님은 없는데, 어디에나 님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