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램프 사이에서
[부활 제4주일(가해) 2020.5.3. 요한10, 1~18]
1.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문>들이 있다. 우리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이 길도 누군가가 열어준 <문>을 통해서, 또 누군가에게 <문>이 되면서 여기까지 걸어 왔다. 모든 <문>은 결국 한 <문>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우리는 수없이 많은 <문>을 두드리고 통과할 것이다. 시행착오만큼의 <문>을 열고, 닫고, 갇히고...,다시 열고... 생은 단 한 번이지만, 생의 비의를 알려줄 <문>은 단 한 번에 알게되거나 열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절대적인 <문>이 지닌 역설이다. 수없이 많은 문을 두드리고 열었다, 닫고, 갇히면서 아! 이것이 내 생을 끌어가는 <문>이었구나! 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기까지 우리는 <문>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다.
개인적으로 내 생의 <문>을 열어준 것은 <책과 램프>였다. 언어를 통해서 나는 세계를 이해했고, 언어를 통해 사랑을 배웠다. 세계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읽게 해 준 언어라는 책, 책이라는 책을 통해 세계를 만지고 알아 갔다. <문>여는 책과 <문>을 닫는 책을 분별하기 까지 내 서재는 <문>이라고 우기는 수없이 많은 책들의 창고였다. 나는 항상 이 책이 <문>을 가리키는지 아닌지를 불면의 밤을 밝히는 <램프>를 통해 확인했다. 책 옆에는 그것이 <문>을 역할을 하는 책인지를 알려주는, 그 언어를 속살을 밝혀줄 <램프>가 항상 있었다.
시인이자, 비평가 남진우는 <타오르는 책>에서 자신의 생을 열어준 것들에 대한 경이로움을 <책>에 비유하여 이렇게 읊고 있다.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 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지위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다 읽고 나면 두 손엔/한 웅큼의 재가 남을 뿐 /눌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라고 적고 있다.
남진우의 시처럼 정말 우리가 열어야 하는 <문>을 열었다면, 그 성공을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 몰락조차도 찬란하고 장엄할 것이다.
2.
부활4주 복음의 핵심 주제는 <문>과 <착한 목자>의 관계로 모아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요한복음 사가는 부활3주, 4주에 걸쳐 ‘진실로, 진실로’ 라는 간곡한 부사를 전면에 내세워 복음이 주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것을 우리에게 거듭 당부하고 있다. 거의 애원의 어조다. 성경은 모두 ‘진실로진실로’에 해당한다. 경중이 없다. 모든 말씀은 우리가 삶으로 녹여 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사가는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관계- 목자와 양, 목자와 도둑, 목자와 하느님 관계를- 거듭해서 확인시키고 싶어 한다.
왜일까?
부활4주일과 오늘 월요일 복음의 서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씀으로 연 다음 “나는 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라는 두 문장으로 모아진다.
①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는 다만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2).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8)난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9~11)
②나는 착한 목자다(11.14)-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12)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나는 목숨을 내 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
①과 ②에는 나(예수님)와 나보다 먼저 온 자들(도둑, 강도, 삯꾼)/ 나와 양의 관계/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명시적으로 나와 있고, 그 세 관계는 결국엔 나와 하느님 관계 설정에 바탕이 된다.
첫 번째 이해하고 넘어갈 부분은 “나는 문이다” 할 때 그 “문”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또 그 <문>은 “착한 목자”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니까 무조건 좋은 미사여구를 다 갔다 붙이면 될까? 그럼 내 신앙은 날로 무럭무럭 커질까?)
사전부터 찾아보는 습관 발동... ‘나는 문이다’ 고 할 때 그 ‘문’에 대한 단어는 대략 63개의 뜻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어에서 “문(door)”은 “thura"로서 Strongs 사전에 의하면 ”열리거나 닫히는 문(portal)이나 출입구(entrance)로 문자 그대로 혹은 상징적으로 쓰일 수 있거나 문(door)이나 입구(gate)로 통로(passage) 번역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만약 ‘통로’로 번역된다면 이 문은 요한복음 14장의 ‘길과 진리와 생명(Via et veritas et vita ,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에서의 그 ‘길’의 의미로 수렴된다.
이때, 나는 <문>으로 들어왔으며 도둑은 <다른 데>로 넘어 들어온 자라고 말하는 공간 개념을 통해, 나와 도둑, 강도, 삯꾼의 의미가 보다 차별적으로 분명해 진다. 예수님 이전에 온 사람들, 예수님 이후에 온 사람들 중에 ‘나를 따르라’ 라고 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많다. 팬덤 문화 속의 집단 쏠림 현상이다. 집단 히스테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문>을 자처했고, 우매한 대중들이 저것이 <문>이고 달려갔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검증 된 것은 <문>이라고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문>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가까운 환상 이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삶은 피폐하고 이기적었고 늘 준전시상태를 가져다 주었다는 점에서, 생은 실종됐고, 그들이 가리킨 <문>은 그들의 생을 송두리째 갈취한 강도, 도둑, 삯꾼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 째 이해해야 할 부분은 <나와 양>과의 관계다. 내가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양들을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라고 말한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내가 말하고-양들은 알아듣는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말하고 듣는” 관계이다. 양과 목자의 관계의 결과물들은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고, 생명을 얻고 또 얻어 생명이 넘치게 하려고 왔다.”라고 말씀하신다.
말하고-듣는다, 알고-안다, 는 늘 함께 다니는 용언이다.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들었을 것이고, 알 것이고 그래서 생명이 넘쳤어야 했을 것이다. 역으로 내가 생명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는다면, 나는 듣지 못한 것이고, 알지 못한 것이고, 그분을 <문> 혹은 <착한 목자>라고 고백하지 못한 것인가?
조금 더, 왜 그분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절대적인 <문>이라고 하는가? 인류의 수많은 스승, 종교,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그분이 유일한 <문>이 될 수 있는 것은 요한10. 12~18에서처럼 ‘그분의 자발적 제헌, 사랑’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그분의 관계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동의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 <나-양- 하느님> 의 관계는 <안다> 라는 단어를 통해 다시 하나로 묶인다. 들어야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나가 되는 신비, 그것은 그분이 자발적으로 바친 <당신의 부활, 그 사랑>의 결과다.
3.
복음을 1차적으로 신학적 성서적으로 읽어야겠지만, 보다 풍요롭게 복음을 읽을 필요가 있다. 보다 풍요롭게 복음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연결해 읽어보는 것이다. 나는 오늘 복음을 나의 삶과 연결하여 ‘책과 램프사이에서’ 라는 주제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책과 램프 사이에서> 그분만이 생의 신비를 알려준 유일한 <문>이라는 것을 매일 확인한다.
아래 덧붙이는 김남조의 <가난한 이름에게>라는 시는 <책과 램프 사이에서> 강의 자료로 선택한 시이다. 이 시의 주제는 <고독>이다. 이 고독은 그분의 말을 듣게 되는 마음의 <여백>이=에 해당한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라는 마지막 연의 의미는 존재론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시는 그나 그녀라는 구체적 사랑의 대상을 갈구하는 실존의 고독, 밥먹고 차 마시고 여행다닐 친구가 없는 상대적인 고독이 아니다. <고독>의 절대성, 그 경지를 지향하고 있는 시이다. 고독의 절대성이 없다면 우리가 만나는 <문>은 하나의 일상적 <문>으로 보인다, 그 <문>이 <길>임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은 <문>을 알아보는 여백의 표지다. 아래 시는 절대 고독 예찬론으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 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 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가진 이름에
울면서 눈감고
입술을 대는 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는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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