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사랑의 세 단계, 한 인격이 한 인격에게

나뭇잎숨결 2020. 4. 17. 12:16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요한네스 로쯔, 사랑의 세 단계, 심상태역, 서광사, 2005

 

- 한 인격이 한 인격에게

 

사랑의 본질은 우리의 파악능력으로부터 벗어난 아무리 해도 결코 완전히 규명할 수 없는 감추인 신비로 나타난다...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래서 달변이 아니라 눌변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 속에서 홀연히 정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인간을 엄습하는 힘"으로 묘사한다. 논리나 이성이나 의지로 제어하지 못하는, 통제할 수 없는, 무모한 것이 사랑이다. "당신의 부활, 그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이 지닌 모든 에너지들을 움직이고 활성화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기본적인 힘이요, 이 에너지들을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거나 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끌수 있는 기본능력이다. 하여, 사랑은 인간의 다른 어떠한 힘보다도 더 '결정적 운명'이 된다. 그래서 한 사람의 궁극적인 '인격 평가'는 그의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

 

사랑은 우리가 오랫동안  그나 그녀를 만나기전, 간절하게 기다려야만 다가오는 선물이고 은총이다. 누구나 사랑을 원한다. 원하는지도 모르는 원함이다. 우리는 좌절하고 희망을 접거나 성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랑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삶의 동력이나 목적 같은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 대상을 만나기 전에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늘 머리와 가슴속에 사랑을 그리며 산다. 우리는 사랑이 촉발시킨 그 이미지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힌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익명의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 또 그 그리움은 이미지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그 이미지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닮아 있다.  사랑의 이미지는 죽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눈앞에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고, 산 자는 물론이고 특히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죽음이 있는 곳에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가 있는 곳에 그리움이 있다. 사랑은 시각적 은유 속에서 살아나고 살아남는다. 

 

사랑이 왜 죽음의 이미지와 닿아 있는지에 대해서 좀 더 부연이 필요하다. '난 -널 -사랑해'에 대한 대상의 태도는 동시에 똑같은 무게로 '나도 당신을 사랑해'로 돌려질 수 없다. '분명한 거절'  혹은 '대답없음' 혹은 '불충분한 대답' 이라는 것으로 돌아왔을 때, 그 어느 것도 불면의 밤 속에서 자맥질하다 불쑥 솟아 오른 최초의 발화에는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두 '사계'에 잠겨 있다 라자로처럼 '뜻밖의 깨어남'을 경험한다. 사랑은 동시적이기보다 대부분 '사후적'이다. 부재의 현존이다. 우리가 경험한 수많은 사랑, 예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는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을 낳지만. 대상이 있을 때는 현존하는 이에 대한 부재를 낳는다.  대상이 있어도 사랑의 결핍을 체험한다. 사랑은 아가페에 도달하기 까지는 채워질 수 없는 텅빈 우주다. 류시화 시인은  이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라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사랑은 대상을 초과한다. 절대적 충만에 도달하려는 '무한에 대한 갈구'가 사랑이다. 삶의 차원이 아니라 죽음의 차원까지 넘어서려는 것이 사랑이다.

 

더불어 사랑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증명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 대상은 어떤 항목으로도  분류할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의) 특이함에 부응하려 온 유일한 이미지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이 세상의 상투성을 과감히 벗어난다. 계급을 허물고, 상황을 박차고, 사회의 중심부 담론을 허문다. 현실적으로 줄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음에도 사랑한다. 볼 수 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음에도 사랑한다. 사랑하면 할수록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랑한다. 사랑은 혁명이다.

 

요한네스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로 이 '사랑'을 기술한다. 하나의 사랑이 에로스(감각적 가시적 아름다움), 필리아(정신-인격적 사랑) 그리고 아가페(신적-은총적)의 세 가지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세 양식들은 다시 하나의 사랑 안으로 삼투한다. 이 삼투를 통해서 사랑이 비로소 계발된 전체로서 드러나고 이 전체 속에서 오직 사랑이, 온전한 사랑 자체가 된다.    

 

한 사람이 이 삼각형 속에서 직관화되는 사랑의 충만 속에서 깊이 생활할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시여(absolutes Geben)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수혜(absolutes Empfangen)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사랑의 세 단계 속에서만 비로소 인간은 충만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사랑의 단계란 매 단계가 다른 두 단계들을 배제하거나 또는 한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단계를 희생해야하는 그런 의미의 단계가 아니다. 이 단계들은 오히려 하나요, 동일한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 국면들은 서서히 계발되고 서로 보완함으로써 성숙되며, 이 성숙의 정도에 따라 서로 더 내적으로 깊이 침투하며, 그럼으로써 인간을 전면적으로 사랑하는 자로 만든다.

 

관건이 되는 것은 에로스에 대한 모든 부당한 편견을 없애고 꼭 필요한 생산적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중심 역할은 필리아가 수행한다. 필리아는 한편으로는 에로스를 정화하고 에로스의 온전한 인간적 면모를 보전시키며 인격적 사랑으로서의 아가페를 위한 길을 마련한다. 인간으로부터 상승하고 자체적으로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에로스와 필리아라는 이 두단계의 사랑과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으로 내려오는 아가페가 유대된다. 이 아가페는 다른 두 단계의 사랑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사랑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준다.

 

 

철학에서 최초로 사랑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플라톤의 <향연-대화편>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향한 성향이자 다른 반쪽인 연인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려는 열망을 에로스라고 하였다. 그가 논하는 에로스의 본질은 하나가 되려는 열망과 추구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이데아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써 현실계의 육체의 속박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데아의 본질을 잊지 않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적인 사물안에서 아름다움이 이데아를 회상하게 되고 이러한 회상이 영혼 안에 있는 에로스를 일깨운다. 에로스는 현실계에 잠시 머문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의 에로스를 회상함으로써 실현된다.

 

그리하여,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지복인  것이다. '사랑함'이 곧 '사랑받음'이란 역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의 인격은 한 인격에서 다른 인격으로 넘나들며 확장되며,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한 처음' 그 '있음existence'으로 고양되고 수렴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원래 자리이자, 사람이 있던 원래 자리다. 사람=사랑이다.  우리는 지금 원래 '하나Oneness'였던, 바로 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