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지지 마라-나를 만져 보아라"
-‘보고 믿는 신앙’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여정에서
[부 활 제 2 주 일 (가 해) 2020. 4. 19. Jean. 20,19-31]
1.
이 글은 ‘보고 믿는 신앙’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여정에서, 어떻게 ‘육신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 또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나의 부활’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려는 글이다.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에만 환호하는 예수님의 팬클럽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 부활을 축하합니다!’ 속에는 분명히 ‘나의 부활도 축하합니다!’라는 의미가 중첩되어야 했을 것이다.
요한복음(20장11-29), 루가복음(1장26-38), 요한네스 로쯔의 『사랑의 세 단계』(서광사, 1991), 장 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문학과지성사, 2015), 플라톤의 『향연』(서광사, 2016), 비트켄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책세상, 2006)을 참고하여,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나의 부활’일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성서 속의 ‘마리아 막달레나’와 ‘토마스’를 통해 보여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중심으로 신앙이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어떻게 가능할까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리스도교의 궁극의 지향점이 ‘사랑’이고 불교의 지향점이 ‘자비’라면 ‘사랑’과 ‘자비’는 철저하게 관념화된 용어이다. ‘신은 존재한다 God is Being’ ‘존재는 존재다Being is Being’ “나는 나다 I am I’ 이 아름다운 말들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관념을 관념으로 말하면 관념은 동어반복이 된다. 동어반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무런 힘도 없다. 동어반복은 모순처럼 안에서 사라지든가 밖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전자는 실체 없는 중심이고 후자는 외적한계이기 때문이다. 종교나 신앙이 관념으로 시작해 관념으로 끝날 때, 종교와 신앙은 맹신이 되고 이 세상과 무관한, 스스로 자초한 아웃사이더가 된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삶은 계란이다”라고 유머를 하셨다지만, 엄밀히 그건 유머가 아니라 진실에 가까운 구체화다. 나에게 삶은 뭐냐고 묻는다면 삶은 “채식주의자에게 건넨 육개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신앙은 ‘구체적’인 것이 그 출발선이다. ‘보고 믿는 신앙’이 출발점이다.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은 신앙의 정점이다. 보편적 사랑이라는 관념은 신앙의 최종 지점이다. 구체적인 것을 관념으로 배울 수 없다. 그러나 관념은 구체적인 것으로 배울 수 있다. 관념은 온 ‘몸’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구체적인 것에서 ‘사랑’이라는 관념으로 넘어간다. 우린 그것을 ‘가톨릭 혹은 보편적’이라 부른다. 애석하게도 종교인들이 신앙의 차원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이유는 관념으로 관념을 배우기 때문이다.
2.
비트켄슈타인부터 시작해 보자. 비트켄슈타인은 2차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논리-철학논고』(책세상, 2006)를 썼다. 그는 자신이 유럽의 재벌상속자에 속했지만 물질로 인한 거짓 추종과 교류를 원하지 않았다. 물질이 주는 힘의 약함과 진리가 주는 힘의 강함을 예리하게 간파한 젊은 철학자였다. 그는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많은 대학의 러브콜을 마다하고 정원사, 건축일, 초등학교 교사 일을 하면서 당대 주류철학의 관념성을 강력히 비판했다.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증이 가능하다고 본 실증주의 철학자였다. 기존의 철학은 마치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동어반복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어반복은 오직 동어반복을 하는 이가 그 자신이 한 말에 사로잡히게 할 뿐이지, 이 세상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으며...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산자에게 죽음은 체험되지 못하고, 죽은 자 역시 죽음은 체험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산자는 죽어 본적이 없으므로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어서도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트켄슈타인에게 ‘죽음’은 오직 [죽음]이라고 괄호치기가 가능할 뿐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종교, 신앙, 진.선.미 등 형이상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말하지 말라는 것은 말하려면 제대로 말하라는 반어법이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부활’을 알 수 있는가?
복음으로 넘어가 보자. 요한복음(20장11-29)과 루가복음(1장26-38)을 연결해 읽어보자.
부활한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붙잡지 마라’(낭시는 ‘만지지 마라’고 번역) 토마스에게는 ‘만져보아라’ 라고 정반대의 말씀을 하신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만의 부활로 끝날 확률이 높다. 도대체 어쩌라는 것이냐? 라는 질문이 나올만 하다.
그런데, 루가복음 1장의 수태고지 장면,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치밀하다. ‘보고 믿는 신앙’이 어떻게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의 단초를 제공한다. 무조건 ‘믿어’가 아니다.
(1)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2)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3)“성령께서 너에게 오시고 지극히 높은 분의 힘, 하느님의 아드님(삼위일체신비-신학적으로), 네 사촌 엘리사벳의 보아라(구체적으로)...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신앙적으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1)과(2)에서 마리아의 대답은 ‘보고 만지는 신앙’의 차원이라면 (3)의 차원은 ‘보지 않고 믿는 차원’으로 넘어간다. 가브리엘 천사는 ‘보고 만지는 신앙’의 차원에서 엘리사벳이라는 구체적 인물을 통해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마리아가 왜 교회와 신앙의 상징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멘트다.
성서 속의 마리아 막달레나와 토마스는 공생활 3년이란 긴 기간을 거치면서 예수님의 구체적 사랑을 보고 또 본 인물들이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이후 그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차원’을 요구하신다. 부활의 발현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 사랑의 마지막 트레이닝, 구체화다. 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토마스, 제자들에게 구체화의 과정이 또 필요했던 것을 예수님은 아신다. 예수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시간은 제자들에게 구체화의 사랑이 심화되는 시간이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토마스는 이런 구체화의 재확인 과정을 거친 후,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곧바로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 의 차원으로 넘어가지 못했다면, 우리 안에 질문하지 못하거나 안하는 질문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대체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가능한가?
4.
요한네스 로쯔의 『사랑의 세 단계』(서광사, 1991), 장 뤽 낭시의 『나를 만지지 마라』(문학과지성사, 2015), 플라톤의 『향연』(서광사, 2016)은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 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
먼저, ‘떼어놓음으로써 지켜주는’이라는 역설은 장-뤽 낭시가 쓴 『나를 만지지 마라』(요한 복은 20장 11~18)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리스어로는 “Me mou haptou”, 라틴어로는 “Noli me tangere”, 불어로는 “Ne me touche pas”로, 영어 킹 제임스 판에서는 “Touch me not”, 영어 표준번역에서는 “Do not hold on me”로, 한국어 성경에서는 “붙들지 마라”로 번역되었던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에세이인데, 이 책에서는 낭시는 이 점을 특별히 고려해 라틴어 번역 문장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125페이지의 이 책은 5개의 문장으로 축약된다.
“①나를 만지지 마라. 왜냐하면 내가 만지기 때문이다. ②그 이 만짐은 너를 떼어놓음으로써 지켜주는 것과 같다. ③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④너는 누구도 만지거나 붙잡을 수 없다. ⑤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랑시의 문장은 정말 아름답지만, 그 심층까지 다가가는데 사유의 시간이 필요한 책이다. “떼어놓음으로써 지켜준다”니? 낭시는 진리와 만짐의 관계를 일반화 시키는데 주력했다. 글을 쓸 때 ‘구체화- 일반화- 추상화’로 넘어가면 누구나 글을 쉽게 이해한다. 그런데 사유가 일상화된 작가들은 구체화를 과감히 생략한다. ‘진리는 증명될 수 없다’ 는 것이 그들의 지배적인 생각이고, 구체화가 사족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요한네스 로쯔의 『사랑의 세 단계』(서광사, 1991)도 그런 맥락에 속하는 책이다. ‘절대적 시여가 절대적 수여가 된다는 것’ ‘에로스-필리아-아가페’ 가 서로 삼투하면서 십자가의 곤궁이 부활의 풍요를 낳을 수 있다는 것, 이 아름다운 직관들이 어떻게 이해가 가능한가?
5.
그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 플라톤의 『향연』이다. 플라톤의 향연을 읽지 않은 사람도 ‘플라토닉 러브’, ‘철인정치’ 라는 말은 들어 봤을 것이다.
플라톤은(기원전 427~347) 아테네의 귀족청년으로 정치적 장래가 보장된 젊은이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431~404)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하면서 플라톤의 꿈은 한바탕 꿈이 되고 만다. 스파르타가 세운 30인 참주정치에 의해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28세의 미모가 수려한 청년 플라톤. 늙고 못생긴 소크라테스는 당대 아테네 젊은 청년들의 추종과 구애의 대상이었다.
예수님의 사후, 그 제자들이 복음을 쓰고 서간문을 쓰고 순교를 하듯, 플라톤도 진리 그 자체라 일컬을 수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정신의 소유자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유명한 대학의 원조인 아카데이아를 만들고 우리가 아테네 학당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그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진리를 영원히 계승하고 싶었을 것이고, 사랑을 영구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리와 지식에 대한 사랑, 철학은 그렇게 태어난다.
플라톤의 『향연』(서광사, 2016)은 기원전 384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극작가 시인 아가톤이 레나이아 비극에서 우승한 것은 자축하는 술자리에서 파이드로스(신화적관점), 파우사니아스(소피스트관점), 에뤽시마코스(의학적관점), 아가톤(시인의 관점), 아리스토파네스(희극작가의 관점) 그리고 소크라테스(예언자 디오티마의 대화) 등, 이들 6명이 에로스를 중심으로 한 사랑론을 펼친 산문이다. 그 시대에 사랑은 오직 ‘에로스’라는 어휘로 기술됐던 거 같다.
그들 여섯 사람의 사랑론은 모두 후대, 그리고 우리 시대 누군가의 사랑론을 낳게 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예언녀 디오티마와의 대화를 통해 설파한 사랑론은 왜 당시의 아테네 청년들이 열광적으로 소크라테스를 추종했는지 가히 알만한다. 이미 소크라테스는 요한네스 로쯔가 간파한 대로 ‘에로스-필리아-아가페’가 나눠질 수 없음을 직관한 듯하다. 무엇보다 사랑이 어떻게 구체화를 뛰어넘어 사랑 그 자체의 본질로 귀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을 ‘진리’와 동의어로 말한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인 아가톤에게 질문한다.(아가톤은 소크라테스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다. 알키비아테스가 술잔치 끝에 나타나 소크라테스에게 울면서 사랑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가톤은 당시 소크라테스를 추종하던 젊은이에게 질투를 유발시킨 장본인이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연구자들에게 게이설을 낳은 장본인이다)
Q1. “에로스가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한다면, 자신이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소유하지 않아서인가?” 소크라테스의 이 질문에서 사랑을 사고하는 방향과 문제설정이 달라진다. 질문으로 사랑을 다르게 사고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예언녀 디오티마에게 질문하는 방식을 배웠다고 얘기한다. 에로스가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라면 사랑에 대한 온갖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결핍이 된다고 말한다.
Q2. 소크라테스는 다시 아가톤에게 질문한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인가?” 아가톤은 스승의 두 번째 질문에 놀라 “에로스는 추한 것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말을 빌려 “세상에는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중간상태’ 있는 데, 바로 인간의 사랑은 선과 악의 ‘중간상태’에 있고, 빈곤과 풍요의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에로스로 지칭되는 사랑의 근원은 그의 어머니가 가난하고 그의 아버지는 풍요롭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Q3. 이번엔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질문한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대체 뭘까요?”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위대한 정령입니다. 모든 정령은 신과 필멸의 중간에 있어요” 라고 말한다. 요한네쯔 로쯔가 에로스에 구원이 필요하다고 한 부분과 맥락을 같이한다.
Q4.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다시 질문한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인간들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디오티마가 대답한다.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번엔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이가 사랑에게 바라는 게 뭐죠?”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을 소유하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한다.
Q5. 벗이여, “아름다운 것들을 그가 소유함으로써 얻는 게 뭐죠?” 디오티마가 묻는다. “그건 대답하기 어렵지만 행복해지겠지요.” 그 질문 끝에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왜 행복해 지기를 바라지요?” 이런 질문은 할 수가 없겠지요.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의 말을 긍정한다.
Q6. 벗이여, “모든 사람들이 항상 같은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특정 종류의 사랑을 떼어내 거기에다 전체에 속하는 것을 갖다 붙이고 다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같은 사랑인데 말입니다.
Q7. 벗이여, “사랑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인가요?”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반쪽도 전체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스러운 것은 불완전하지만 사랑은 완전합니다.” 여기서 '사랑스러운 것'과 '사랑'이 같지 않음을 말한다.
Q8. “그렇다면 사람들은 좋은 것을 사랑한다고 단적으로 말해도 될까요?” 사랑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Q9. “그렇다면 어떤 열성과 노력을 다해 사랑스런 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까요?” 벗이여,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잉태중입니다. 잉태와 출산은 신적인 것입니다. 필멸의 존재 안에 내포된 불사의 요소입니다. 정신적으로 임신한 자는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자와 사귀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몸으로 낳은 자식보다 더 아름답고 불사적인 지식들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벗이여! 정신의 임신, 출산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Q10.“지혜로운 디오티마여!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먼저 한 사람의 몸을 사랑하여 그 안에 아름다운 담론을 낳아야 합니다. 이로 인해 아름다운 것을 식별하게 되면 사랑의 신비를 향해 올바로 나아가거나... 한 아름다운 몸에서, 두 아름다운 몸으로, 두 아름다운 몸에서. 모든 아름다운 몸으로. 모든 아름다운 몸에서, 아름다운 활동으로, 아름다운 활동에서, 아름다운 지식으로, 아름다운 지식에서 아름다움 것 자체만을 대상으로 하는 저 특별한 지식으로 나아감으로써 드디어 아름다운 것 자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라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움 그 자체, 사랑스러운 것과 사랑 그 자체를 나누다가 Q10 에서 일치시킨다. 아름다운 것이 ‘보고 믿는 신앙’이라면 아름다움 그 자체는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의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으로 어떻게 진리와 사랑이 넘어갈 수 있는지 Q9에서 보여준다. 한사람의 아름다움에서 모든 사람의 아름다움으로...결국엔 사람에서 사랑으로 수렴된다. 아름다운 것이란 구체에서 아름다움이란 관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사랑스러운 것에서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6.
정리해보자면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은 한 사람의 구체적 대상을 사랑함에서 시작한다. 그것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다음 차원으로 넘어가기 어렵다. 예수님의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까지의 상황이 그것을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신부님의 강론 '당신의 부활, 그 사랑'은 구체화의 재과정이다.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고... 여기 먹을 것이 있느냐?... 그물을 배 오른 쪽으로 던져 보아라...’ 등등...얼마나 구체적인 사랑인가?
이제, 마리아 막달레나와 토마스에게 ‘만지지마라-‘만져보아라’의 의미를 가정해 볼 수 있겠다. (신학적 성서적 관점 말고)토마스는 누구인가? 토마스는 구체적 만짐의 사랑이 필요한 인류의 상징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77억의 인류는 구체적 만짐이 아직도 필요한 상황이다. 물질적, 정신적, 영적으로 배고픈 인류에게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누구인가? ‘복된 하느님의 애인’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님, 당신 부활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시킨 첫 인류! "마리아!-라뽀니!" 그 짧은 말이 담고 있는 예수님과 막달레나 사이에서 교감되는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 하여, '날 만지지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라' 는 예수님의 말씀에 막달레나는 그대로 따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더이상 만짐에 머무르는 신앙이 아니다. 그녀는 '보지 않고 믿는 인류'의 대열에 성큼 서 있게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녀가 예수님 생전에 얼마나 구체적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는지도 가정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겠다.
이제, 낭시가 말한 “나를 만지지 마라. 왜냐하면 내가 만지기 때문이다. 그 이 만짐은 너를 떼어놓음으로써 지켜주는 것과 같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의 의미, 요한네스 로쯔가 통찰한 “절대적 시여가 절대적 수여가 된다는 것, ‘에로스-필리아-아가페’ 가 서로 삼투하면서 십자가의 곤궁이 부활의 풍요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보지 않고도 믿는’ 차원임을 수긍할 수 있겠다. 그들은 모두 신앙의 정점을 말하고 있다. 인류는 지금, 그 정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사랑은 3년으로도 부족한 제자들의 결핍을 구체적으로 다시 채워주는 시간들이었다. 그들의 물질적, 정신적, 영적 결핍이 얼마나 큰 것인가. 바로 오늘 우리들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나타나심을 신학적으로 "현현. 에피파니" 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구체적 사랑'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일깨워주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체적 사랑이 되어 주어야 할 당위'이기도 하다. 그것이 오신부님의 부활2주 강론의 핵심주제, '보고서야 믿는 신앙'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글을 끝내면서, 플라톤의 『향연』(서광사, 2016)에서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대화편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떨린다. 올해는 더욱 그랬다. 나는 올해 진심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라고 말한 거 같다. 나도 부활했음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향연』의 Q9에서 Q10에 읽으면서, '사랑 때문이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죽음이 두렵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에게 사랑의 조각들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죽음의 저편으로 서둘러 건너간 사람들...모든 성인성녀들. 그들의 순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인류의 선각자들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그 경지가 무엇인지? 절로 가슴에 손이 얹어 진다. 무릎이 꿇어진다.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지금까지 읽은 모든 책에서 더듬거리며 말하고자 했던 ‘그 사랑’에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랑은 어디서 왔는가? 그분에게서 온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의 전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토마스의 입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 왜 터져나오게 되었는지? 왜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이 행복한지를 수긍하게 되고, 그런 신앙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이 큰 순례의 선물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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