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는 현실!

나뭇잎숨결 2020. 4. 28. 15:38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는 현실!’

 

-세 번 쓰는 고백록

 

[부 활 제 3 주 일 (가 해) 2020. 4, 26 Luc. 24,13-35]

 

 

 

 

 

1.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무엇 때문에 계속 살아야 하는가?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 아니면 자신에게 되돌리지 않는 질문들이다. 우리는 지금도 세상을 향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던질 수는 있겠지만, 자신을 향해 마땅한질문을 던지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바뀌어야 한다고 쉽게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이고, 내가 참 부족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순간조차도 어떤 우월의식으로 무장돼 있기 일쑤다. 만약 상대가 그래 맞아 네가 죄인이고, 네가 부족한 사람이고, 네 탓이야라고 인증해 준다면, 왈칵 성을 낼 것이 뻔하고, 좀 더 세련되었다면 웃음으로 눙치거나, 얼굴이 붉어지고, 집에 돌아가 그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있을 것이다. 내가 부족하다는 그 말을 하는 순간조차도 바뀌어야 하는 것은 세상이지 내가 아니다이건 적어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하한선의 미덕에 속한다. 그러나 최상의 미덕은 아니다. 아니 미덕의 범주에 아예 속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마땅한 질문을 하는 순간, 나는 나의 전모를 내 책상 앞에 꺼내놓아야 한다. 페르소나의 가면을 벗어 던져야 한다. 타인의 전모를 알 수 없듯, 나의 전모를 낱낱이 머리카락의 숫자를 세듯 그렇게 알 수도 없겠지만, 나의 전모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본다면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것이 1차적인 반응일 것이다.(유다는 자신을 들여다 보다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내가 나에게서 도망치려는 그 나를 붙잡아 나의 전모를 조금 더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성찰이고 고백이다. 나를 객관화하는 과정이다.

 

이런 객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용서를 논하고, 사랑을 논하고, 산다는 것을 논하는 것은 비약이다. 이 과정을 무섭게, 가차 없이, 엄중하게 수행하면 할수록 용서하지 못할 것도, 사랑하지 못할 것도 사실은 없다. 내가 나를 변호하고 합리화 할 수 있다면, 타인을 변호하고 합리화 할 수 없는 상태란 도대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어떻게 나를 객관화 할 수 있을까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시는 현실!’ 그것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현실,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그 무엇보다 사랑!”을 이해해 보고자 쓴다. 이 글이 끝날 때 쯤, 나를 객관화하는 것예수님의 좌절을 모르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가가 밝혀지길 바란다. 나를 객관화 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 고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기대와 계획과 원의에서 빗나가는 이 세상을 보고 좌절을 모르는 현실이 가능할까? 그 정점에 어떻게 도달 할 수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고백'함으로 자신을 넘어섰던 인류의 스승들의 고백의 목소리를 짧게 들어보기로 한다.

 

이 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성염주교역, 경세원, 2016),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이용철역, 나남, 2012) 톨스토이가 쓴 고백록(박문재역, 현대지성, 2018), 인류의 3대 고백록으로 상찬되고 있는 책들을 참고하여 쓴 것이다.

 

인간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 그렇기도 하고, 옳은 일이 달갑지 않아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몰랐던 것은 알게 될 수 있으나, 달갑지 않은 것이 달갑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성염주교역, 경세원, 2016)

 

가장 장수한 사람이란 가장 오랜 산 사람이 아니라 가장 뜻깊은 인생을 체험한 사람이다.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색하라. 신에게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먼저 신의 도움을 어떻게 해야 받을까 노력해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이용철역, 나남, 2012)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이나 내일 하게 될 일의 결국은 무엇인가? 인생전체에서 결국은 무엇인가? 왜 나는 왜 걸어가야 하는 것인가? 왜 나는 어떤 것을 원하거나 행하는 것인가? 내 인생 속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내게 찾아올 죽음으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그 어떤 결국의, 궁극의 의미가 존재하는가? (톨스토이가 쓴 고백록, 박문재역, 현대지성, 2018)

 

고백록은 쓴 세 사람은 인류의 스승이다. 치열하게 삶의 본질을 추구한 분들이다. 세상을 향한 질문에서 자신을 향한 질문으로 질문의 방향이 돌아섰을 때, 우리는 고백하게 된다. 무쏘의 뿔처럼 세상으로 걸어나가기 위해, 한순간 세상으로 난 을 닫을 필요가 있다. 그때 우리가 반드시 열어야 할 ’,  통과해야 할 을 발견하게 된다.

 

 

 

 

  

 

 

 

 

2.

 

이 글의 첫문장에서 언급한 산다는 무엇인가를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작일 듯하다. 창세기에서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 카인에게 네 아우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이 질문들은 부활3주 복음, 엠마오의 제자들의 그 어디에를 해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신이 신이라면,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도 세고 있는 바로 그분이라면.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셔서 물은 것이 아닐 것이다. 어디에는 그의 정체성과 신학적 물음이 담겨있다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레아로 갈 것이니...그들에게 일러라”(마태오28, 7)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낙담했을 때 그들이 어디로 갈지 그분은 이미 알고 계셨고, 먼저 그곳으로 가신다. 우리가 절망의 극점에 있던 바로 그 순간 혹은 공간 그 자리인 어디는 바로 부활한 예수님과 만나는 베델이다.

 

 

 

 

오신부님의 부활3주 강론에서 시골로 내려가는 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내려가는 이것은 상승의지가 아니라 하강의지다. 자살의 유예다. 하강의 극점에서만 상승할 수 있다. 상승의 아이러니다. 흔히 인생에 바닥을 쳤다, 라고 생각되는 그 시간, 장소는 비상의 순간 즉 오메가 포인트다.

 

어디서언제’ ‘누가’ ‘무엇을’ ‘’ ‘어떻게를 담고 있는 연쇄적 고리의 단어조합들이다. 기사문쓰기의 원칙이자. 행위 원칙이다. 아이들이 귀가시간이 늦을 때, 부모는 어디 있었니?’ 라고 먼저 묻는다. 어디에라는 질문은 n항의 가능성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지를 담고 있다. 했는지, 안했는지가 아니라 할 가능성의 세계다. 지향점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그들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을 따르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했다는 것을 보고, 들어서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벗어나 길위에 있다. 부활3주의강론에서 이것을 절망과 죄책감으로 바라본다. 길위의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바로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신앙이라는 순례의 여정에서 인간의 기대와 하느님의 기대 사이의 간극그 좌절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다시 옛 삶으로 귀의하려는 우리 자신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제자들의 좌절은 모두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서 시작된 일로 본 것이다. 그들이 그릇된 구세주론을 갖고 있었든,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권능의 하느님에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따랐든, 어찌되었든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이들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보면 그들은 모두 그분은 만났기 때문에빈무덤이든, 다락방이든, 갈릴레아든, 엠마오든... 숨거나, 헤메거나, 가고 있는 중이였던 것이다.

 

그 절망과 낙담의 순간에 생각이 충격 속에 갇혀버린 그 순간시골에 내려가는제자들에게 그분이 먼저 다가 가신다. 사랑이 절망 곁에 다가간다. 이미 유다의 자살을 알고 있는 예수님, 실의에 빠진 그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셨을까? 절망은 다리가 없다. 오직 사랑만 다리가 있다. 절망 상태인 그들은 예수님께 갈 수 없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과 동행한다.

 

어떤 충격 속에 잠입해 있을 때, 우리는 동행하는 이들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과의 동행이 끝났을 때 어느 날 문득, 이마를 짓이기며,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 삶에 다가온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사랑은 뼈아픈 사후체험이다. 그들은 충격으로 눈멀었기 때문에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다.

 

시골로 내려가는 그들에게 다가온 예수님과의 대화는 바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쓴 고백록의 아름다운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눈먼 자가 쓴 고백록이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그분은 그들에게 먼저 고백할 기회를 주신다. 루가24, 17~24에는 현재 그들의 절망의 이유와 신앙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들이 기대했던 구세주상, 부활한 그분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 짧은 문장 속에 담겨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고백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가톨릭에는 7성사가 있고 고백성사성체성사못지않게 하느님 체험의 거룩한 시간이다. 고백성사는 사제에게도 신자에게도 무척 힘든 시간을 주고받아서 완성되는 성사다. 충분히, 온전히 고백이 이루어진다면 그 자체로 이미 치유는 끝난 셈이다.

 

마리아막달레나가 눈물로, 향유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이 발을 씻어준다는 표현들이 성서에 나온다. 일곱 마귀를 쫒아주었다는 표현도 나온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마르타의 불평을 유발하는 장면도 나온다. 무엇이 마리아막달레나로 하여금 예수님께 열절케 하였을까? 그것은 고백의 힘이라고 추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곱마귀를 일곱상처라고 읽으면 안 될까? 어떻게 읽든 그녀의 삶은 평탄치 않았을 것이며, 온갖 상처투성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털어 놓을 수 없었을 그녀의 상처들을 유일하게 고백케 만들었던 그분, 그녀는 눈물로, 향유로, 머리카락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은 것의 증인이 되었던 그녀!

 

그렇다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절망의 고백 역시 그들에게는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 고백 다음에야 예수님은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들려주시고,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면서, 감사기도를 하신 후에 빵을 떼 주시고, 그들은 눈이 열리고, 그분을 알아보고,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고 그 즉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내려가던 그들이 이제 올라간다. ‘길 위의 미사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죄와 죄책감의 차이는 다음 기회에 심리학적으로 조금 더 생각해 보려한다. 유다의 절망은 왜 죄이고, 제자들이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절망은 왜 죄책감인지?)

 

 

3.

 

만약 베드로가 고백록을 썼다면 어떤 고백록이 씌어졌을까?(요한 21, 15~19)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 글을 조금 더 전개하는 것이(이 글 역시 성서적 신학적 관점이 아님을 밝히면서) 좌절을 모르는 현실을 바라보는 수숭일 듯하다.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시는 현실!’ 그것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현실,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그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부활3주 강론을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파스카 성야 강론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죄와 죄책감까지 씻어준 사랑이었다. ‘희생을 통해 이루신 사랑, 그 이상의 사랑이 바로 그 예수님의 부활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온 인격으로 알려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바로 자기 고백의 시간들이다.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듣는 과정이다. 자기 삶을 자신이 가감없이 바라보는 순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사실 고백성사는 신자가 고백하고 사제가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백을 자기가 듣는 과정의 다름 아니다.

 

유다를 향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고백의 순간, 그 은총의 순간들을 그가 상실했고, 그것은 배신자 한 사람의 상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 한 페이지가 사라지는 손실에 해당한다. 아마 유다가 하느님 자비를 믿고 자신의 죄보다 사랑이 크다는 것을 바라보고 고백록을 썼다면 성서는 더욱 풍요로운 복음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죄, 죄책감도 은총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요한 21, 15~19에는 베드로에게 너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세 번의 질문이 나온다. 세 번 모른다고 배신했으므로 세 번 물었어야 한다고 복음해설서들이 대부분은 말하고 있다. 1차적으로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싶다. 그것이 지금까지 보여준 예수님의 일관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 순간에 개과천선 하지 않(못한다)는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회적 위치나 스펙보다 항상 좋은 엄마이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로 완성되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늘 형편없이 부족한 모성애를 지닌 엄마였다. 이제, 두 아이들이 모두 출가해 내 손을 떠났다. 나는 매일 어제보다 조금 더 좋아지고 있다. 내 인격이 그분으로 인해 조금씩 다듬어 질 때마다, 모성애도 조금씩 커진다. 어제보다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고, 아마도 이 세상 순례가 끝날 즈음에 이르면 꽤 줗은엄마일 수도 있을 거 같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적어도 과정의 과정의 반복, 그리고 넘어섬...그러므로 우리의 순례는 세 번의 고백록을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드로의 세 번의 고백을 세 번 쓴 고백록으로 읽어보자.

 

Q1.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A1.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J: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Q2.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A2.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J: 내 양들을 돌보아라

 

Q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A3 ...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J: 내 양들을 돌보아라...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젊었을 때는.....늙어서는,,,

 

사실 우리가 고백하든 안하든 그분은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 세고 계신다. 숨어서 한일도, 드러내고 한 일도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굳이 베드로에게 물을 이유가 없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분이 모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 알려주기 위해 고백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고백은 우리가 삶을 직시하고, 반추하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우리가 쓰는 첫 번째 고백록은 상대적 우위의 고백록이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 듯, 적어도 아무개보다는 잘 살아온 삶, 자부심이 가득한 상대적 고백록이다. 두번째 고백록은 비교 대상이 없는 절대적 고백록으로 넘어간다. 세 번째 고백록은 슬픔의 고백록이다. 사랑을 알면 알수록 나는 너무나 사랑하는데 형편없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사랑은 해도 해도 주님의 사랑 앞에 턱없이 부족한 사랑일 뿐이다. 받은 것이 더 큰, 이로써 갚을 길 없는 사랑의 고백록이 씌어진다. ‘그렇기 때문에사랑했던 날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론을 쓴다는 것은, ‘젊었을 때는 내 맘대로 선택적 사랑이 가능했지만, ‘늙어서는선택적 사랑이 불가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냥, 모두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고백록이라 할 수 있다.

 

고백은 아프다. 살점을 떼어내는 것만큼 아프고 정말 아프다. 고백은 삶이 분리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분리의 아픔 너머에 그분의 사랑이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도 아프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정말 아프다. 베드로 세번째 고백을 슬퍼하며라고 복음사가는 쓰고 있다.

 

우리는 고백함으로서 죄(죄책감)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정립이 가능하다. 예수님을 일컬어 좌절을 모르는 현실 이라고 하는 표현은 하느님의 사랑은 죄보다 크다는 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아니 죄와 하느님의 사랑과는 비교가 가능치 않다는 표현일 것이다. 고백하기 전에 우리는 죄와 죄책감의 벽에 갇힌다. 죄나 죄책감이 훨씬 크다. 그러나 고백하면서 자신을 묶었던 죄나 죄책감의 사슬이 실은 자신이 만든 기억의 독재였음을 알게 된다.

 

좌절을 모르는 현실은 그것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서 출발한 사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사랑로 전이될 때, 삶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순간은 우리의 계획과 원의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좌절, 절망이라는 결론으로 매듭짓게 되지는 않는다. 기대나 계획이 어긋난 것에 대해 아쉬워는 하겠지만, 내 한계로 인해 벌어진 상황들에 대해 아파는 하겠지만, 그것이 삶을 포기하거나 생을 끝내야 할, 좌절, 혹은 절망이라는 곳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왜 예수님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활, 그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순례의 여정에 있는 사람들이 꺼내 쓰는 사전에서 점점 사라지는 단어 중에 절망과 좌절이란 단어도 포함된다. 부활 3주 강론의 주제, “‘예수님은 좌절을 모르시는 현실!’ 그것은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현실,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그 무엇보다 사랑!”에 우리는 초대된 사람들이다.

 

 

 

클레멘스의 첫번째 편지(First Letter of Cl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