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하늘’은 왜 ‘하늘’인가?

나뭇잎숨결 2020. 6. 2. 10:25

하늘은 왜 하늘’인?

 

 

참 고

 

1. 복음: Jean. 20,19-23

2. 마르틴 부버, 『나와 너』(1923), 『두 가지 믿음 방식』(1950)

3. 건강한 나르시시즘, 치명적 나르시시즘http://blog.daum.net/m-deresa/12385125

 

 

 

1.

 

‘코로나 19’가 ‘거르고 지나간’ 것 , 감염자와 비감염자, 침묵하는 자와 대화하는 자, 교조적종교인과 포괄적종교인, 집밥 먹는자와 외식 하는자 등등...이다.

 

마르틴 부버는 ‘너’가 활짝 꽃피던 시대가 지나가고 ‘그, 그것’이 꽃피는 시대로 신앙은 접어들었다면서 어떤 길을 걸어야 그분이 원하는 신앙의 길일까를 고민했던 신학자로,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데, 어떤 성찰의 지침을 던져준다. 우리 신앙이 ‘너와 나’의 관계인가? ‘나와 그’의 관계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아니면 이 두 질문이 ‘십자가’를 이루는 관계인가 하는 질문이다.

 

나는 한때 가톨릭에 대한 책보다 개신교신학자가 쓴 책, 불교경전을 더 많이 읽었다, 나는 내 신앙이 타 종교인이 쓴 책 때문에 흔들렸다면 그것은 내 신앙의 그만큼 밖에 안 되는 것이므로 마냥 흔들려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도 있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하늘’이 ‘하늘’이라면 모든 인류를 품는 것이지 가톨릭이라는 종교란에 동그라미를 한 사람만 품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는 공유되는 것이지 독점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카테고리로 ‘너와 나’를 갈라놓았다면 왜 그 시간에 ‘하늘’을 믿어야 하는가? 신앙은 자기 안의 카테고리를 매일 허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왜 마리아막달레나에게 최초로 나타나셨을까? 당시 인류가 안고 있던 얼마나 많은 카테고리를 허무는 혁명적 현현인가? 종교가 건전한 도피처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가톨릭이라는 특정 종교를 방어하기 위한 교조적 종교인은 아니다. 그 푸른 시절 학부수업 때, 종교다원론 수업에서 불교 강의를 더 많이 신청해 들은 거 같다. 교수님이 언제 불교로 개종할 건지 물어 본 적도 있었다.

 

신앙은 신비다. 그냥 나는 하느님! 하고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 나의 진짜 아버지 같고,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는 거 같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품어줄 거 같고 넉넉하고 따뜻하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공생활 3년, 수난, 죽음, 부활—그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이 세상 어떤 사람이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까? 수난, 죽음, 부활, 이 세 단어만으로도 사랑에 관한한 누가 그 ‘사랑’을 따라갈까? 예수님이란 이름 자체가 그냥 설레고, ‘사랑’과 동일시되고 마냥 설렌 이름이 아닌가? 목숨까지 바친 그 ‘사랑’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고, 마치 나도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거 같은 착각도 들고 하지 않는가? 성령! 말로 다할 수 없는 저 깊은 곳의 울음까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내가 드리지 못하는 기도마저 대신 해 주는 그런 벗, 변함없는 친구, 지고한 수호자 성령! 마리아, 성모님! 그냥 어머니 그 자체를 느끼게 되는, 묵주만 만져도, 성당 근처만 지나가도 유년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모태의 근원,...이 모든 것이 그냥 나를 어떤 곳으로 끌어갔고, 나보다 더 큰 힘이 있어 속수무책으로 잡아당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믿음, 신앙인 거 같다. 1차적으로 그렇다.

 

성령강림대축일 강론의 두 개의 키워드! 성찰과 용서! 나는 강론에서 언급된 과잉성찰의 대상에 속한다. 자신의 장점보다 부정적인 면을 파고 또 파는 그런 유형에 속한다. 매일 잠들기 전에 하루를 성찰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노트 펼쳐놓고 일기 쓰듯 성찰 한다. 나는 고백성사 때 거의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본 것보다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 본 것 같다. 내 기대치가 늘 나에 미치지 못해서 행복하지 않았으니까. 못했으니까.

 

성령강립대축일 강론 너무 좋았다, 이렇게 행복한 강론을 묵상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유월의 시작은 그렇게 멋있게 시작됐다.

 

그런데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이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논리는 실종되고 의식의 흐름으로 흘러가 발산형 글이 내 통제권을 벗어났다. 그 글을 쓰느라 하루 한 끼 먹는 밥도 못 먹어서 당은 떨어지고, 전자파로 눈에서 별 나오고, 몸도 휘청거리는데... 저녁때, 읽어보니 이건 글이 아닌 거다. 삭제키 눌렀다. 정말 나를 때려주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지하철에서 울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커플이 싸우는 거다. 모든 연인의 싸움이 제3자에게 웃음밖에 안 나오는 사소한 주제이듯, 가만히 들어보니 정말 사소한 거였다. 둘이 싸우다 각자 다른 역에서 내렸다. 그들이 앉았던 텅 빈 자리, 한참 보다가 눈물이 나왔다. 인간은 왜 이리 하찮은 것이냐? “바람아, 모래야, 먼지야, 우리는 얼마나 더 적어져야 하느냐?” 김수영 시의 한 귀절이 나를 흔들었다. 너는 누군가의 담장에 피어있던 유월의 장미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할 수 있냐?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내가 너무 감정 컨트롤 못하고 부족해서, 미치겠어서, 늘 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나여서...지하철에서 내려 나에게 벌주려고 아파트까지 걸어 왔다.

 

‘나’같은 인간 유형을 ‘그’라고 객관화 해보자. ‘그’는 왜 이렇게 자신의 무궁무진하게 좋은 장점 보다, 자신의 하찮은 부족함 때문에 일희일비하는가? 1차적으로 그들에게는 자존감을 중요시하는 성향이 있다. 일단 나르시스적 인간이다. 유년시적부터 자신이 자신에게 반한 상태다. 너와 나를 비교했을 때, 타자가 그것은 수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으로 자신은 꽤 그럴듯한 존재라고 인식한 것이다. 자신의 경쟁자가 자신이 되는 순간이다. 완벽하게 자신에게 반하고 싶은데 어중간하게 반하게 되니까 자신이 견딜 수 없는 거다. 2차적으로 ‘그’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자신의 원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 방향성이 주어진다면 완덕의 경지로 나아갈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높은 덕의 경지로 자신을 몰고 갈 기질을 안고 있다. 3차적으로 ‘그’들은 심리학적으로 가학과 피학의 그 쾌감을 은근히 즐긴다. 즐거움의 여러 유형 중에 하나다. 4차적으로 그들은 그렇다면 자신의 장점을 모르는가? 당연히 안다. 그것은 당연한 자신의 조건이라고 인식한다. 아니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부족함이 많은 여타의 다른 사람들에게 불만을 별로 갖지 않은가? 관심이 없는 거다. 너무나 자신에게 취해있어서 다른 사람을 볼 겨를이 없는 거다. 혼자 여행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거다.

 

자기성찰도, 용서도 그 궁극엔 ‘사랑’으로 수렴된다. 그런 측면에서 자기성찰도 용서도 모두 “神的인 행위”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성찰은 진정한 자기애로부터, 용서는 진정한 타자이해라고 분류되거나 선후관계처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이 두 영역은 맞물린 톱니바퀴같은 것이어서, 거의 동시적으로 우리 내부에서 일어난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는 것도 우리의 힘만으로는 사실 가능하지 않다. 강론에 언급된 거처럼 분명 우리 안에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는 행위에서만 이 두 행위는 동시적으로 가능할 거 같다. 잃어버린 사랑의 회복이란 사랑받을 권리 하에서 사랑할 권리도 수행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이 무엇인가? 에 대한 생각을 좀 더 해보기로 한다.

 

어떤 사람의 글을 읽다보면 그 사람 안에서 ‘사랑’의 역사가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있는지 축적도처럼 그려진다. 예컨대 최승자 시인의 시론에 대해 한 번도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도, 학회지에 논문을 실은 적도 없다. 정말 좋아하는 시인인데 쓰지 못했다. 다른 평자들이 최승자 시인에 대한 언급한 것도 올리지 않았다. 전기적 사실에 의존해 해석된 그 ‘사랑’이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 문학을 한 5년 끌어안고 있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상이 쓴 책은 딱 3권이다. 이상에 대해 쓴 논문이 천 편 정도 된다. 이상의 ‘사랑’, 그 궤적을 읽는데 5년이 걸렸다. 그때 내 정신세계는 거의 ‘이상’이었다. 이상을 읽고 이상에 대해 쓰는 데, 삼십대를 다 보낸 거 같다. 이상의 ‘사랑’에서 벗어나는데 또 5년쯤 걸렸다. 한국현대시사에서 최승자를 거론하지 않고 시사를 바라볼 수 는 없음에도 최승자 시인의 시에 나오는 ‘사랑’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언급하려면 그가 번역한 번역서, 출간된 시집 전부, 평론을 다 읽어보아야 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에 대해 쓰기엔 내가 ‘이상의 사랑’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했다. 아마 『신곡-지옥편』을 쓴 단테는 최승자 시인의 초기시에 나오는 그 ‘사랑’을 이해할 듯하다. 하늘로 승천하는 ‘사랑’을 저 지옥의 맨바닥에 추락시키는 ‘사랑’의 낙차를 거론하려면 최승자 시인만큼의 정신줄을 쥐고 있어야 한다. 관념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자기 유폐속에서 출산한 ‘사랑’을 감당하기에 나도, 우리문학사도 멘탈이 너무 약하다.

 

이렇게 문학에서 거론된 ‘사랑’도 이해하려면 지난한 시간들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물며 누군가 한 생을 살아내면서 한 그 ‘사랑’을 말한다는 것은 무지의 폭거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랑’을 모르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의 ‘사랑’에 대해서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누구도 누구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랑’은 한 사람의 ‘성역’에 해당한다. ‘사랑’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어느 날, ‘사랑’이 그를 찾아왔고, 그의 시간들안에 허물 수 없는 집을 지었다면, ‘사랑’은 어떤 사람의 실존 전부와 연결된 심부, 역린에 해당한다.

 

만약, 어떤 어머니가 여고생인 자기 딸에게 남겨준 마지막 노트에 “딸아, 함께 오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한 시간은 너무 행복했다...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딸아 부탁이 있다...내가 주는 선물을 잘 간직하길 바란다...내가 남겨주는 선물은 ‘하느님’이다. 그것이 내 유산의 전부다”라고 하였다면, 첨언하여, “엄마가 필요할 땐 엄마가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면 그 사람을 만날 것이고, 일이 필요하면 일이 주어질 것이고, 돈이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돈도 주어질 것이다, 그러니 세상일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걱정도 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 잘 간직하여라, 만약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을 땐 우선 ‘하느님’을 제대로 간직했는지 그것부터 성찰하거라” 이런 마지막 글을 남겨주었다면... 하느님을 ‘믿어라’가 아니고 하느님을 ‘간직하라’고 한 어머니의 음성을 온몸으로 읽어내려고 한 딸이었다면...그것은 ‘사랑’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크기, 깊이, 높이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11월 위령성월이 되면 유서를 미리 써본다. 그것이 몇 십장, 몇 백장이 된다해도 그 것은 단 하나의 단어 ‘사랑’ 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냥 ‘사랑’이란 단어로 축약할 수 있는 것이지, 어떤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이것은 누군가의 특별한 부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지향은 ‘사랑’ 일 것이란 점에서 그렇다. 우리 생 전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랑’으로 모아지는 과정이다. ‘사랑’을 배우기 위해 너무나 큰 기회비용을 지불한다는 게 늘 문제지만, 77억 인류, 그 어떤 삶이 마감될 때에도, 어떤 사유재산을 축적했는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 했는지로 평가받는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처럼 보인다. 믿지 않는 이들이 무덤을 그렇게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종교가 있든 없든 보편적인 인간의 존재 조건일 것이다. 종교인은 하느님이라는 ‘사랑’의 근원을 알고 ‘사랑’의 역사를 쓰는 사람이라면, 믿지 않는 이들은 하느님 자리에 다른 대체물을 통해 ‘사랑’의 역사를 쓴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믿든 안 믿든 모든 사람은 ‘사랑’의 역사를 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생이 이끌어지길 바라고, 마감되길 바란다. 그러니 ‘사랑’의 역사를 쓰는 줄도 모르고 쓰는 중인 셈이다. 결국은 하느님이라는 ‘사랑’으로 수렴될 생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용기보다 안 믿을 수 있는 용기란 얼마나 아이러니한 용기인가?

 

그런 맥락에서 모든 신부님들, 목회자들이 말하는 ‘사랑’의 그 궤적을 어렴프시 가늠해 보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표현은 같지만 그 모든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분들 모두가 ‘사랑’에 온 생애를 건 분들이니 마땅히 ‘사랑’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사랑’을 살아야 할 것임에도, 그분들 삶이 그 ‘사랑’에 녹여져 나오기 때문이다.

 

성령강림대축일 강론을 읽고 1차적 느낌은 ‘환하다’ 는 것이었다. 자기성찰과 용서를 통해 ‘사랑’이라는 단어가 도출되는 과정이 누군가의 한 생을 더듬어 보듯 명징하게 보였다, 그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게 만들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신앙”에서 거론한 것처럼 “사랑”은 관념이다. 관념을 관념으로 말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철학, 종교, 윤리에서 거론하는 관념들은 직관에 의존하므로, 연역으로 글을 써야 할 주제겠지만, ‘사랑이라는 관념을 자연과학적 방법론인 귀납으로 쓴다면 그 강론을 듣는 사람들에게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설교나 강론 방법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주제를 바라보는 분의 사유의 깊이와 깊이 관련 있을 듯하다.

 

‘사랑’의 시작은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거 같다. 자신을 총체적으로 잘 안다는 것은, 타인을 잘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강론에서 언급한 거처럼 신앙인들은 성찰을 자주하므로 자신의 고쳐야할 부분에 초점을 맞춰 살다보니 부족한 면에 주로 포커스를 맞추기도 한다. 자신의 부분을 전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자기와 우정을 맺는데도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은 성모님 축일이다. 성모님 앞에 ‘겸손’이란 덕목이 늘 따라다니는데, 겸손이야말로 자기 사랑의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겸손은 동양적인 겸양의 낮추기가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주님의 종이오니” 속에는 자기 앎, 자기 가능성의 최대치를 알고 있는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성서 속의 제자들은 우리의 희망이다.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오늘 우리도 두려워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오해하는 것들 가운데 도저히 ‘할 수 없음’이란 게 있다. 내 힘으론, 인간의 힘으론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그 ‘할 수 없음’을 ‘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듯, 변화는 원인은 언제나 그 이전과 다른 ‘사랑’이다.

 

성령강림축일 복음과 강론의 핵심에 해당하는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사랑의 힘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부활, 그 사랑’을 체험한 제자들이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사랑의 힘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체험했다는 것은 삶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우리가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역시 우리의 변화된 삶의 여부로 추정가능하다.

 

나무도 본능적으로 ‘사랑’을 지향한다. 나무에게 생존은 사랑이다. “산정의 어떤 나무는 /바람 부는 쪽으로/ 모든 가지가 뻗어있다//근육과 뼈를 비틀어/제 몸에 바람을 새겨놓은 것이다”(김주대,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사랑과 상처의 거리는 몇 미터일까? 사랑을 떠올리는 부분과 상처를 떠올리는 뇌의 시상하부는 같은 부위일 것이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는 법, 예수님의 세상 보는 방식이다. 상처를 사랑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눈!

 

자신에게 매몰돼 있는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나약함, 죄밖에 없다. 여기서 하느님과 인간의 큰 간격이 만들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힘이란 인류를 끌어안을 수 있는 힘 일진데, 그것이 무엇을 보는가에 의해 좌우한다.

 

 

“자신들 안에 남아 있는 사랑의 힘을 찾아내기” 이 경지는 어떻게 주어지나? 자신이 아무리 사랑을 원해도, 하려해도, 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지하 벽에 갇혔다, 라고 표현하곤 한다. 사랑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그 사랑이 그분에게서 온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시간들이 없다면, 사람은 사랑으로도 얼마든지 피살당할 수 있다. 관념살인이다. 친구들은 내 몸무게가 급격히 주는 것을 보면 너 사랑에 빠졌구나, 라고 말한다. 죽을 거 같다는 느낌은 정신이 아니라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그런 상황을 “깊은 슬픔과 절망, 그리고 지독한 분노 때문에 사랑할 힘을 잠시 잊었을 뿐”으로 강론은 바라보고 있다.

 

‘용서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따라 하는 일, 또는 하느님께서 하시 일을 닮아 가는 것’‘성령이 누구신지 알아가는 것보다,,,그 사람이 하는 일을 보고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용서는 다시 자신 안에 있는, 잃어버린 사랑의 힘을 되찾아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따라서 해 보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 모든 사람을 그냥 용서할 듯하지 않은가? 용서에 대한 이런 명문장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만약 성령강림대축이니, 은사, 용서 이런 관념이 앞서 거론되었다면, 우리 각자가 받은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알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았으니,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 이렇게 연역적으로 강론이 전개되었다면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용서는 신적인 행위’라고...‘용서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따라 하는 일, 또는 하느님께서 하시 일을 닮아 가는 것’...이란 용서의 뜨거움이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관념으로 관념을 말할 수는 있어도, 관념으로 관념을 설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점진적으로 어떤 주제를 향해(현실인식-사랑1-사랑2-용서-성령) 하나씩 짚고 넘어갈 때, 그 강론을 듣는 신자들은 조금씩 그 세계로 ‘함께’ 이끌어간다. 강론은 ‘동행’인 거 같다. 그래서, 강의든 강론이든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동행한 강의나 강론은 늘 어떤 변화의 움직임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성령이 무엇인가? 보다 성령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지, 그리고 내 은사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거 같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내가 한 일을 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신앙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보다 삶으로 살아낸 그 결과로 확인하고 바라보는 것이 마땅하다.

 

 

2.  

 

 

‘사랑’은 존재증명을 요구하는 단어다. 사랑은 추상명사지만 ‘하다’라는 행위서술어가 붙으면서 언제나 변화의 중심으로 걸어가려는 맹목적인 운동성을 갖고 있는 단어다. 생명이 이미 변화의 과정이므로, 사랑이 없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사물은 사랑과 생명이 만나 변화의 운명을 수행하는 중이다. 예수님처럼, 제자들처럼 ‘사랑’에 전생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자신이 온전히 ‘지워지면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고독의 심연이나 죽음에 자신을 던지는 사랑의 존재증명의 극단에 해당한다. 우리는 예수님만큼, 제자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사랑’의 존재증명을 매 순간 요구받고 있다.

 

지난주 예수승천대축일 강론을 묵상하고는 반성문 많이 썼다. ‘익숙함’에 대해서. 이번 주 성령강림대축일 강론은 모든 것을 치유 받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둘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나 자신이 그린 사랑의 궤적에 해당한다. 제자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던 상태와 여러 사람 앞에서 유창하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던 그 두 상태가 모두 제자들이었듯, 전자에서 후자로 변해간 것이 제자들이었듯,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는 분명 다른 사랑의 진도를 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번주 강론의 핵심 주제 “자신들 안에 남아 있는 사랑의 힘까지 찾아내기”의 과정이었고, 우리 역시 그 과정을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변화란 ‘거쳐야만 하는 그 과정이나 그 시간’를 생략하지 않는다는 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이 말하는 ‘사랑’에 생략은 없었다. 우리는 전례시기로 부활축제기간을 끝내고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연중시기로 접어들겠지만, 신앙은 모든 시기가 함께 중첩되는 거 같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 그 사랑을 만나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그 과정이나 그 시간’은 생략할 수 없다. 사랑의 기회비용이다.

 

우리의 목마름이나, 간절함이 우리 생을 이끌어가게 만드는 듯하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이 ‘사랑’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면. 설사 부족한 ‘사랑’일지라도, 그 부족한 ‘사랑’은 아름다운 여정이라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눈물겨운 사랑은 있어도 부끄러운 사랑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우리의 존재 이유이자, 원인이자, 과정이자, 결과라고 말할 수 있기에 그렇다.

 

글을 마무리 하면서, ‘하늘’은 왜 ‘하늘’일까? ‘하늘’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일까? 홀로 ‘하늘’이라면 ‘하늘’일까? ‘땅’을 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땅’은 ‘땅’인가? ‘하늘’을 우러르기 때문에 ‘땅’이 아닌가? ‘하늘’과 ‘땅’은 독립변수가 아니다. 종속변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