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기다림,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1)

나뭇잎숨결 2020. 8. 2. 17:43

 

기다림,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

-한 완벽주의자의 고독의 물질성을 애도하며

 

[연 중 제 18 주 일(가 해) 2020. 7. 26. Matthieu. 13, 44-52]

 

참 고

 

1. Mattieu. 11,2-11 / 14,13-21

2.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강영안 역, 문예출판사, 1996

3.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박혜영 역, 책세상, 1990

4.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한길사, 2005

 

 

 

1.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블랑쇼는 인간 관계와 글쓰기의 본질을 같은 측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그 단초를 찾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음악의 신으로 나오는 오르페우스는 탁월한 음악의 능력으로 모든 죽음의 상태를 물리치고 명계(죽음, 冥界)로 내려가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돌아오지만.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초조함’을 참지 못해 ‘바깥(뒤)’를 돌아보게되고 에우리디케는 다시 명계(冥界)로 사라져 간다.

 

오르페우스의 ‘초조함’으로 그의 오랜 기다림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때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얼굴에 닿은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블랑쇼는 우리는 어떤 기다림으로 끊임없이 대상을 찾아 헤메다, 결국 그 대상을 찾아내지만 대상을 찾은 순간에 거기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읽어낸다.

 

오르페우스의 비극은 문학이든 인간 관계든 “바깥(dehors)”으로 시선이 옮아갈 때,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추구했던 사람들이 마지막에 건너가게 되는 운명의 갈림길을 지시한다. 이 ‘바깥’은 타자에 의해 진행되는 사건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추방시겼다는 점에서, 자신의 기다림을 자신이 배신했다는 점에서, 주로 완벽하다고 평가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완벽함이 지닌 위대함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 위대함 속에 내재된 위태로움. 완벽함 속에 내재된 차가움에 대한 적시(摘示)가 그것이다.

 

성서의 <소돔과 고모라>, <백제의 망부석 설화>, <용소와 며느리바위 전설>에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에서 나오는 이런 공통된 화소가 등장한다. 선과 악이 나뉠 때, 삶과 죽음으로 갈릴 때, 사랑과 이별로 운명이 결정되는 마지막 순간에 소위 열심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완벽주의자로 일컬어지던 이들이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에 ‘이별’하거나, ‘바위’로 변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불행을 ‘금기’를 어겨서라고 일괄적으로 해석하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기다림’은 우리에게 어떤 본질적인 자세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만 ‘뒤’(밖)를 돌아다보는 그런 상황이 연출되는가? 아니다. 모든 사랑에는 그런 시간들이 주어진다. 사랑의 경우는 두 사람이 같이 뒤를 돌아다보는 경우인데, 시간의 동시성이 아니라 시간의 선후관계를 갖고 누군가가 먼저 뒤를 돌아보게 되고 누군가도 결국엔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는 연쇄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랑의 두려움을 <사랑의 큰 그림>이란 틀로 덮이면서 두 사람이 함께 설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랑으로 사랑의 자리가 사라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것이 관계의 화석화이고 이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랑의 화석화를 경험하는 이들은 대부분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너무나 옳기 때문에, 너무나 의롭기 때문에,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너무나 순결하기 때문에, 너무나 논리적이기 때문에, 이별의 구조 자체도 완벽하다. 이건 아닌데, 정말 이건 아닌데 하면서 왜 아닌지를 자기 심장에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 되었다’는 ‘화석화’란 심리적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미궁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르페우스의 어떤 ‘초조함’이 ‘바깥(뒤)’를 돌아다보게 하였을까. 자신의 기다림을 자신이 배신한 그 지점이 무엇일까. 오르페우스는 오랜 시간 모든 역경을 딛고 죽음의 피안으로 넘어간 그녀를 애타게 그리워했고 찾아 헤멨다, 그때 오르페우스는 오직 ‘사랑’이라는 본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위험한 고비를 뚫고 죽음의 세계까지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위대한 힘이다.

 

그러나 그녀를 죽음의 세계에서 데려오면서 돌연 그를 사로잡은 ‘수많은 생각’들이 사랑을 덮는다. 사랑의 도그마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사랑에 대한 의심, 자신에 대한 의심, 그녀에 대한 의심이 그를 사로잡는다.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그녀와 사랑을 계속 할 수 있을까? 그녀도 나처럼 사랑을 원할까? 이 사랑이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 사랑을 하게되면 잃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등등... 의심의 이름은 수도 나열할 수 없이 많았을 것이고 그 의심을 상대를 보면서 확인받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불안함을 그녀를 보면서 확인하고픈 마음에 ‘뒤’를 돌아다봤을 것이다. 상대에게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각의 소리를 자신이 확정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사랑의 반대는 ‘의심’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는 J의 언명은 사랑의 초조함에 대한 답이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어쩌면 ‘의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 없는 사랑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의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 중심엔 ‘의심’이 있고 의심의 중심엔 ‘계산’이 있다. 의심하고 계산했다고 고백할 수 없으므로 사랑의 큰 그림을 둘 사이에 놓아두는 것이다.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은 그래서 멋있는 말이지만, 사랑의 트릭스터들이 자주 애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냉정하게 사랑 고유의 그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사랑의 도그마에 갇혔다는 것이고, 내 생각이 만든 사랑의 도그마가 나를 덮쳤다고 고백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이다.

 

 

2.

 

오늘 복음에서 한 문장으로 타전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 앞에 단 한 문장으로 놓여있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라는 팩트, 구약과 신약의 나눠짐, 구세사의 명암처럼 나눠짐이라는 측면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위대해서 위태로웠던 세례자 요한의 기다림 속에 놓여 있던, 한 완벽주의자의 고독의 물질성을 마주하는 심회를 표현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어휘가 없을 정도다. 완벽함이 어찌하여 위태로움을 동반하는가를 바라보기 위해, 세례자 요한의 시간을 조금 들여다보기 위해 <바깥(dehors)을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시선> 이라는 문학 용어를 빌려 온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광야에서 금욕적인 삶, 요르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는 장면, 그의 포효하는 외침 등을 떠올리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의 뜨거움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끝끝내 알아보지 못한 그의 위태로움, 격절, 간극, 한계, 화석화된 심장.....한 완벽주의자의 고독의 물질성에 애도를 하게 만든다. 그것은 예언자 세례자 요한에 대한 애도이자 모든 화석화된 심장을 갖고 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인류의 사랑은 사랑의 상대가 되지 않음에도 이별이란 없다. 그 이유는 그분의 사랑에 어떤 의심도 계산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려 명계로 내려갈 때의 그 심장, 오직 사랑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화석화된 관계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인 세례자 요한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그 보다는 크다’고 하셨던 바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바라봄이다.

 

<하느님 나라의 큰 그림>을 그린 그분이 왜 죽음 앞에서 흔들렸는지? 그 흔들림이 오늘 그분을 따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의 오랜 기다림, 그리움, 사랑, 우리의 신앙이 끊임없이 ‘뒤’를 돌아다보는 화석화된 것은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Mattieu, 14.13)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앞에 놓여 있는 이 한 문장이 주는 묵직함은 Mattieu. 11,2-11과 연결해 읽을 때에만,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즉 구약과 신약이 갈리는 그 접점이 무엇인가를 바라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으로 상징되는 구약의 시대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예수님의 시대를 여는 그 서막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병치되어 놓여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죽음과 생명의 병치가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은 화석화(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시간을 단적으로 ‘기다림’이란 이름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자 요한은 메시야의 시간을 준비하는 사람, 메시야를 그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는 강력하게 기다렸고, 철저하게 기다렸고, 무섭게 기다렸고, 변함없이 기다렸고, 한결같이 기다린 사람, 모든 부사를 총 동원하여 기다리고 또 기다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기다리던 그분이 왔을 때, 자신이 그분의 신발 끈조차 매어드릴 수 없다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분은 한없이 커져야하고 자신은 한없이 작아져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분이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에 놓쳐버렸다.

 

세례자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었고, ‘나약하고 비굴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그의 위대함은 메시아를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

 

세례자 요한의 그 무엇이,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메시야를 알아보는데 마지막 순간에 망설이게 한 것일까? 성서해설서들은 그것을 당대의 일반적인 메시아상, 권능의 하느님상에 초점이 놓여있다는 것으로 요한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해석한다. 1차적으로 그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Mattieu. 11,2-11에서는 그 단적인 언명들이 서술되어 있다.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크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분, 메시야가 선생님이냐고 묻고 있고, 예수님은 내가 메시야다가 아니고 메시야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그분의 행적을 통해 말씀하신다. 언뜻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이 빗나가는 듯한 이 말에는 구약과 신약의 갈림, 그 나눠지는 초점이 무엇인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매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점점 커져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

 

위의 두 문장은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말할 때 흔히 인용되는 성서귀절이다. 그렇게 겸손하다고 평가되는 그분이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갈 때 그 변화의 흐름 속에 놓여있는 ‘사랑’은 보지 못했던 거 같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도 그 행적 안에 놓여 있는 ‘사랑’을 놓쳤고,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넘어갈 때 그 끌어당김의 법칙 안에 놓여 있는 ‘사랑’도 놓쳤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어느 순간 목적과 수단이 분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집약은 고독이 짙게 묻어 있는 표현이다. 모든 예언자의 운명처럼 세례자 요한도 고독했다. 고독도 사랑처럼 타자가 있어야 성립하는 용어다. 신형철은 ‘결여‘라고 말하고 라캉은 ’욕구‘라고 말하고 레비나스는 ’고독‘이라 말하는 그 채워져야 하는 부분, 세례자 요한은 절대적으로 고독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완벽했다.

 

완벽벽주의자의 눈에는 세상은 불완전하고 한순간에 개조하고 싶은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지키고자 하는 그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철저하게 금욕적인 삶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면 세상은 선과 악의 명암이 뚜렷해진다. 그때 그는 인간의 결여가 사랑할 수 있는 여지, 서로 채워주어야 할 인간의 조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구제불능의 상태로 보이고 타자와 차별화가 생긴다. 연민과 자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때부터 그의 고독은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 이제 하나의 사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독의 물질성, 사랑의 도그마가 만들어진다.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에서 언급한 ‘고독의 물질성’에 대해 좀 더 읽어보자.

 

“타자와의 거리지움은 고독의 물질성이다. 그것은 타자와 확연히 구별되는 사유하는 자아와 타자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전체성이 깔린 동일성의 자아다. 전자가 고립적이라면 후자는 폭력적이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세상을 즐기는 '향유적 자아'라고 말한다. 혹은 '고독의 물질성' '분리에의 욕망'이라고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자신과 동일한 존재자, 즉 홀로 있는 존재자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동일성은 자기로부터의 출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자기로의 귀환이다. 현재란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존립한다.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자리잡기로 치른 대가이다. 존재자는 자신에게 몰두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몰두하는 방식, 그것이 곧 주체의 물질성이다.”

 

<하느님 나라>의 수단과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이 어려운 것은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도 사랑이어야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활 3년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행적이었다. 그분이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이 오실 그분이냐고 물었을 때 내가 한 일을 보라, 는 말이 그것을 대변한다. 그가 한 말이 그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바로 그의 진정한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수단과 목적이 갈라질 때 거기서 고독의 물질성, 심장의 화석화가 이루어진다. 심장이 딱딱해졌어, 라는 표현이 바로 그런 비유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완벽함이든 누군가의 완벽함이든 그 완벽함을 위해 우리가 간과하게 되는 것, 완벽함 자체는 상찬의 덕목이나 그 완벽함은 외적 형식이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 사랑을 담는 거푸집일 뿐이라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격랑 속으로 몰고 갔던 좌우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에게 환멸을 일으켰던 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지시하는 고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르짖는 이들의 폭력성에 설득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대함을 가장 위태롭게 만드는 원인은 본말이 전도되는 교조적인 도그마Dogma이다. 심장의 화석화이다.

 

오늘 예수님이 보여주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은 성찬례를 통한 사랑,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자비가 깔려 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궁극의 지점이 어디인가를 간과한 것은 바로 연민과 자비가 바탕이 된 그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결여된 하느님 나라는 종교의 도그마Dogma에 빠진 것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도그마란 관념이다. 심장이 화석으로 변하는 이유는 자기 도그마에 빠지는 행위이고 이것은 사랑을 관념화하는데서 비롯된다.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세례자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에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나눠짐의 그 접점에 관념과 구체화의 갈림길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과 헤어짐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의 기다림도 어렵지만 막상 그렇게 만나려고 했던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도 그 사람이 내가 바로 만나려고 했던 그 사람임을 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 맥락에서 Mattieu. 11,2-11에서의 세례자 요한의 질문과 죽음은 성서 가운데 가장 슬픈 장면중 하나라 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아서 이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그토록 준비한 사람임에도 이별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 슬픈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이별은 ‘사랑의 큰 그림’을 그렸던 대상끼리의 헤어짐이란 점에서 그 슬픔이 배가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장면은 우리와 무관한 관찰자시점으로 읽고 넘어갈 장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데, 세례자 요한만큼 철저하지도 완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기다림의 자세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고’ ‘그리워’할 것인가? 이때 기다림이나 그리움은 정서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어떤 본질적 자세, 사유의 깊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멈추어야 한다.

 

기다림은 표면적으로 수동적이다. 기다림은 무엇보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보이는 것이 단지 보이는 그대로 명석판명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우리와 결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영원히 대상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는 대상을 보이지 않는 것 어떤 느낌, 정서로 경험할 때, 즉 대상이 어떤 느낌을 통해 우리 내부로 들어오는 사건, 그저 보여지기만 하는 상황을 벗어나서, 그 존재가 우리 안에 어떤 흔적으로 스며들어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며, 사랑은 존재의 경험 그 자체를 가리킨다. 존재의 존재감을 느끼는 사건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의 이름, 우리가 사랑하게 된 대상의 이름을 어느 정도 언어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상대방으로 인하여 느낀 그 어떤 느낌이나 정서들은 실은 내가 알고 있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념에 그가 부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정서적으로 어떤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어느 정도. 대상을 무엇이라고 어렴프시 규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규정하는 그 개념과 대상의 본질이 일치하지 않았을 때부터, 화석화가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이별 역시 여기서부터가 아닐까.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메시아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예수님과 요한의 이별의 이름이었다면.(설사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직관하고 있었어도 그의 죽음이 모면되거나 유예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던 사랑하는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은 것은 그분의 손실이자 그분을 기리는 우리의 손실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마저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우리가 그분을 알아본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 밖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니라 내가 그리고 있는 틀 혹은 프레임으로 관계의 이름을 붙일 때 이별은 예정되어 있는 수순일 것이다. 그때 관계의 화석화가 이루어진다. 관념이나 개념은 정서적 측면에서의 왜곡이지 본질적 측면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다림의 두 번째 측면으로 넘어가야 할 필연성을 발견하게 된다. 기다림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그 대상을 만나는 것만으로는 필요충족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두 번째 측면은 '어떠한 수동성보다도 더 수동적인' 행위로 넘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대상에 붙인 이름들을 남김없이 지우는 시간이다. 즉 언어(개념의)의 망각이다, 대상에 대한 자신에게 주입된 개념을 놓아버리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상대에게서 받은 인상적인  그 느낌들을 지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라져 가는 느낌은 우리 눈앞에서 증발하여 공백의 무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만남, 대상이 정서의 차원에서 진정한 존재의 차원으로 내면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내면화의 과정이 내가 규정한 것들에 대한 망각에서 비롯된다.

 

망각하지 않으면 기다림을 지속할 수 없다. 망각은 1차적으로 고통스럽다. 보는 내가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대상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능동성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망각은 다만 그 존재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어떠한지’ 인식하는 수동적인 행위, '어떠한 수동성보다도 더 수동적인'행위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없이 망각 속으로 들어가기를 요구받은 우리는 대상 그 자체로부터 돌아서서, 그 대상에 대한 말(규정, 파악)을 모두 지워야 한다. 그것은 바라봄을 통해 포착된 대상을 결코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재현)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블량쇼) 여기서 '망각' 혹은 '지운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나의 환상과 도그마를 지운다는 것이지 대상의 본질을 지운다는 것이 아니다. 

 

이를 헤겔은 “언어는 실재를 살해 한다”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상대가 누구인가를 알게되지만, 관계의 성숙은 언어화를 포기하는 것이다. 언어는 오히려 사랑하는 상대의 본모습을 가리는 경우가 많다. 언어를 통한 개념을 놓아버리는 '빈지대'에서 대상이 지닌 진정한 면모를 바라보게 되고, 우리는 그 대상을 진실로 그리워할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게 된다.

 

그래서 바라봄과 말함 사이에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 그 심연 속에는 침묵과 결핍이라는 강이 놓여 있다. 존재를 경험하려는 이는 그 심연 속에서 그의 침묵을, 그라는 존재를 듣도록, 존재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는 분명히 바라볼 수 있는 존재로 존재하지만 그는 지각으로 알 수 없는 존재로 부재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는 침묵으로 부재하면서 그는 듣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현존한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말함으로써, 또한 누군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 그 드러남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망각하면서 대상의 존재를 조금 더, 분명히 알게 된다.

 

환상이나 도그마를 버리고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것이 관계나 사랑의 궁극일 것이다. 대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환상이었던 것을 알게되면 대상의 변화무쌍한 액션에 따라 나의 사랑을 수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순례중에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기다림의 자세, 그리움의 자세, 사랑의 자세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도 지상의 모든 사랑도 그래서 짝사랑인 것이다. 피를 나눈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그래서 짝사랑이다. 하물며 순례의 길위에서 만난 우리의 사랑이 어찌 짝사랑이 아니랴.

 

사랑을 하면서 사랑에마저 구속당한다면 그것이 사랑의 도그마라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에 대한 관념, 사랑의 도그마에서 벗어났을 때만 상대의 본질을 비로소 볼 수 있다. 상대의 본질을 본다는 것은 대상(사랑) 그 자체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사랑과 사람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도그마와 사랑은 하늘과 땅만큼 전혀 다른 의미인 셈이다. 자신이 내린 사랑이라는 관념에 매몰 될 때, 우리는 사랑에서 벗어나 ‘바깥(뒤)’를 바라보는 것이며, 그 결과는 이별이거나 심장의 화석화, 돌로 변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기다리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기다림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어찌 그 것이 그분만의 문제이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이런 간곡한 기도를 올릴 수 있다.

 

사랑이시여! 우리는 사랑을 원할 뿐 사랑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아니 사랑을 모릅니다. 하오니, 사랑을 바라보기 위해서, 사랑을 살기 위해서 사랑이여! 영원히 저와 함께 해주소서!

 

사랑의 도그마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기다리는지는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세로 그것을 이루려하는지는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목적지를 몰라서 길을 잃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목적지에 맞는 수단의 괴리에서 길을 잃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나,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이유이다.

 

 

 

[참고] 도그마(Dogma)는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어원은 그리스어 ‘dokein(생각하다)’에서 유래했고, ‘의견 ·결정’을 의미한다. Dogma도그마는 신조(信條), 교조(敎條) 또는 신앙심(信仰心)으로 번역되는, 무언가에 대한 굳은 믿음과 그러한 가치관을 의미한다. 누군가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는 대개 부정적인 어감으로 독단, 집념 또는 고집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일이 많다. 본래 진리나 교의를 의미하는 단어였으나 지금 같은 독단이라는 의미로 확장된 것은 중세 시대 이후이다. 자연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신앙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많은 현상들이 밝혀진 반면에 신학자들이 기존의 종교적 입장을 고수하며 이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를 한심하게 여긴 무신론자와 계몽가들이 도그마를 '쓸데없는 집념'이나 '광적인 믿음' 같은 어투로 사용하면서 그 뜻이 변했다. 여기에서 유래된 용어가 바로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라는 사상이다. 이름만 들으면 '남을 가르치려 하는 사상' 이라고 해석하기 쉽지만 바로 위에 말했듯 '비합리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사상'을 뜻하는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