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용서의 완성(1), 타자에로의 초월(超越)과 타자에로의 열망(熱望)

나뭇잎숨결 2020. 9. 14. 10:12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어요?"(영화 <밀양>)

 

 

용서의 완성(1), 타자에로의 초월(超越)과 타자에로의 열망(熱望)

-용서한다shalach, 덮는다kaphar, 지워버린다nasa

 

 

 

[연 중 제 24 주 일 (가 해) 2020. 9. 13. Matthieu. 18,21-35]

 

참 고

 

1. 집회서 27,30―28,7/마태오 18,21-35/루가복음 23장34절

2. 딕 티비츠, 『용서의 기술』, 한미영, 역, 알마출판사, 2008

3. 재니스 A. 스프링, 『용서의 기술』, 양은모 역, 메가트렌드, 2007

4.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독백(교부문헌총서26)』 성염 역, 분도출판사, 2018

5.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 서동욱 역, 민음사, 2003

6.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정소정 역, 동서문화사, 2009

7.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헤드, 『과정과 실재』, 오영환 역, 민음사, 2003.

8.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김용준 역, 지식산업사, 1982.

 

 

 

 

1.

 

 

용서의 완성,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어떻게 용서받을 것인가?를 성찰하기 전에 용서해야 하는 주체와 대상인 <나>와 <타자other>의 관계에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 보려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순간조차도 그것은 '못'하는 것이지 '안'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용서의 능력 부족을 용서의 의지 부정으로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필히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에게 용서 받아야 할 순례의 여정에서 <나>와 <타자>가 통과해 온 통시적 역사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당위적으로 용서를 제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때, 용서라는 고귀한 제안이 자칫 용서의 도그마(dogma이성理性적인 비판이 허용되지 않고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리敎理나 교의敎義)에 빠질 수도 있고, 당위를 획일화하는 신드롬(syndrome여러 가지의 증세가 한꺼번에 나타나지만, 원인이 한 가지가 아니거나 명확하지 않을 경우에 이르는 병적인 증상)에 갇힐 수도 있다. 그만큼 용서는 어렵고, 용서는 어떤 사랑의 기술처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용서는 <나>와 <타자>에게 공히 최선의 기쁨이자 자유이지만 그 당위적인 최선이 이루어지기 위해선 용서 안에 작용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통찰한 <神的 행위>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 성찰의 초점은 <나>와 <타자other> 사이에 주고받은 고통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용서의 시작은 하늘이 아니고 우리가 이해타산으로 얽혀져 있는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다.

 

또한 용서는 망각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기억이 좋은 기억이 아니어도 그 기억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불가피한 과정이기도 하다. 그때 어두운 기억을 넘어 신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푼 그 자비의 은총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용서는 <나>의 행위이지만, 엄밀히 그것은 <타자>의 행위이기도 하다. 용서의 완성은 분명 신의 몫이지만 그 몫의 한 끈을 <타자>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자>가 <나>를 용서했는지의 여부와는 별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타자>를 통해 <나-타자-신> 이라는 이 스크럼을 이해하는 것이, 용서에 한발 다가가는 것이자, 용서를 바라보는 낮은 자세일 것이다. <나-타자-신>이라는 이 스크럼에서 <타자>를 먼저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먼저, 동시대를 살아내며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네명의 석학을 통해 그들에게서 <타자>란 누구인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하이젠베르크, 장 폴 사르트르, 에마뉘엘 레비나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헤드는 모두 20세기를 살아낸 석학들이고, 인류사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사유의 흔적을 남긴 분들이다. 이들을 통해 <나와 타자>의 관계가 어떻게 도출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 <타자>란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하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이들의 과학이나 철학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들이 통과했던 통시적 시간 속에서 그들이 목격하고 경험한 인류 역사의 충격파에 대한 자기보존의 반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르트르(1905~1980)하면 떠오르는 철학사조는 실존주의다. 그는 개별적 인간 존재의 자유를 주창하는 철학인 실존주의의 대표적 사상가로 그의 철학이 태어난 시기는 그의 생몰연대 가운데 그에게 가장 치명적인 충격과 상처를 남긴 1.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수많은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을 보며 이런 상황에서 신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창하게 된다. 타자에 대해 성찰할 겨를이 없는 철학의 탄생이다. 그는 타자보다는 느닷없이 세상에 던져진 ‘나’는 어떤 실존 상황에서 어떤 의식을 갖고 살아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래서 사르트르에게 <타자>는 ‘대상’일 뿐이다. 주체의 자리는 언제나 ‘나’가 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년) 파리에 있는 유대인 학교인 에콜 노르말 이즈라엘리트 오리엔탈과 알리앙스 이즈라엘리트 우니베르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프랑스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40년 독일군에 체포되어 이후 5년 동안 나치치하의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포로생활 중에 『존재에서 존재자로』를 쓰게 되고 나와 '타자'(other)는 분리(detachment)임에도 불구하고 동일성(identity)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고 보게된다. 레비나스에게 도구적 이성이란 수사가 붙는 이유는 그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의 이성을 총 동원해야 했으며,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사르트르처럼 대상은 아니지만, 도구적 이성 속에서 태어난 또 다른 <나>가 된다. <타자>가 있어야지만 <나>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자기보존본능에서 타자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본 것이다.

 

A. N. 화이트 헤드(1861년~1947년) 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영국 램즈게이트 출생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런던 대학에서 응용수학 교수,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는 철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모든 존재는 4차원 시공연속체time-space continuum라는 우주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보는 유기체 철학을 낳는다. 그는 선행하는 세계 전체가 협력하여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잉태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생명은 단순하지 않으며, 새로운 존재의 출현에는 그 존재보다 더욱 큰 것이 관여되어 있다고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사르트르와 달리 만년에 1.2차 대전을 겪어내면서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없다는 것을 통찰했다. 화이트헤드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연합국의 석학으로 이 모든 것을 한발 뒤로 물러나 지켜보면서 전쟁은 그 자체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증오, 분노, 보복, 잔인성, 적자생존 등... 고통과 죽음과 상처만을 남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이트헤드에게 <타자>는 곧 <세계>라는 타자관이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불확정성의 원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고 『부분과 전체』를 쓴 하이젠베르크의 좌우명은 <태초에 대칭성이 있었다>였다. <나>가 있다면 반드시 <타자>가 존재해야하고 <독일>이 라는 부분이 있다면 <인류>라는 전체가 존재해야 된다고 보았다. 그는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의 미국망명을 도왔지만 조국 독일에 남아 히틀러치하의 공포와 압력 연합국측에서의 전범이라는 이중의 국가주의 십자가를 지며, 인류라는 부분과 전체의 균형을 지켜내려했던 물리학자였다. 그는 미국이 핵폭탄을 만들어 히로시마에 투하했을 때, 그의 동료 독일 물리학자들은 핵을 만들 수 있었지만, 독일정부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핵을 만들지 않았다. 만약 하이젠베르크가 핵을 만들어 히틀러의 손에 핵이 쥐어졌다면 인류 역사는 어디로 갔을 것인가? 하이젠베르크에게 <타자>는 바로 내 존재의 근거인 <부분과 전체>였다.

 

이들은 모두 비슷한 시기를 통과했지만 그들 각자가 겪어낸 개인적 경험, 국가주의, 그들이 목격한 것에 의해 <타자>에 대한 각기 다른 인식을  갖게 되고 그들에게 <타자>는 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 <타자>는 오로지 사르트르처럼 <대상>일 수 있으며, 레비나스처럼 도구적인 <나>일 수도 있고, 화이트헤드처럼 <세계>일 수도 있고 하이젠베르크처럼 <부분과 전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를 환경결정론적, 상대론적 <타자론>의 잉태라고 부른다. 그들이 <타자>를 만들어 내는 근원을 좀더 바라보기로한다.

 

Ⓐ인간은 최후에야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졌을 때에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나아가면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정의해 나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의식이 있는 ‘대자존재’이다. 인간은 의식과 함께 있는 존재이며, 또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돌멩이처럼 편하게 존재할 수는 없게 된다.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해 의식함으로써 의식되는 것과의 사이에 끊임없이 ‘틈’을 만든다. 왜냐하면 내가 무언가를 의식하는 것은 그것을 나를 내가 아닌 것으로서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끊임없이 ‘~가 아니다’(無)를 흩뿌린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의식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한, 자신이 완전하게 자신이 될 수 없다. 의식은 동시에 자기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언제나 틈이 생기는 것이다.(장 폴 사르트르)

 

Ⓑ사물의 외형이 어두운 밤 속에 감추어져 버릴 때, 그 때는 세상도 아니며 대상의 성질도 아닌 밤의 암흑이 우리를 점령한다. ...파스칼이 말한 무한한 공간의 침묵이 우리를 불안케 한다. 다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의미도 없이, 어떤 명사도 덧붙일 수 없다. 다만 있을 뿐이다. 마치 비가오고 날씨가 덥듯이 그렇게 있을 뿐이다. 본질적인 익명성, 정신도 외재성도 맞서 있지 않다...타자는 타자로서 높음과 비천함의 차원에 스스로 처해 있다. 영광스런 비천한, 타자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 과부와 고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동시에 나의 자유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는 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에마뉘엘 레비나스) ‘

 

Ⓒ우주의 본성은 '생성'becoming과 '존재'being와 '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세 가지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으로 궁극적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 탐구의 결과로서 관계성의 범주가 성질의 범주보다 우위에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이 현실적 존재다, 우선 현실적 존재는 독립성을 지니고서 따로 떨어진 채 국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적 존재의 새로운 합성concrscence과정에 우주의 모든 항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적 존재 자체가 우주의 모든 항목의 응결체이기 때문에, 현실적 존재는 우주 전체의 연대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먼지 하나의 출현에 전 우주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버려진 채 세게 안에 던져져서 인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그의 실존에 대해 홀로 책임지고,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상에 따라 자신을 창조하고, 자신의 가치를 선택하고, 선악을 결정하고, 헌신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입법하므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주창한다. 자기 자신안에서 ‘틈’을 보는 사르트르에게 타자와의 관계는 또 다른 ‘틈’을 지닌 오직 '대상'일 뿐이다.

 

Ⓑ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은 분명히 자기중심적인 존재이지만 안으로 안으로 향하는 내면성에 의하여 분리, 닫힘, 폐쇄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상황에 직면하여 타자와 자아는 윤리적 관계를 맺는 자기 보전본능을 가진 존재라는 또 다른 특성을 지니게 된다. 타자에로의 초월과 타자를 향한 열망을 갖는 존재라고 보았다.

 

Ⓒ에서 화이트헤드는 경험은 곧 실재(reality)이며, 실재론자로서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세계는 단순한 주관적인 관념(표상)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있는’ 본질로써, 이 계기들은 동시에 존재 전체의 총체와도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을 ‘느끼고 있다.’ 계속해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종의 역동적인 통일체인 것이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시에 ‘살아 있는’ 유기체라고 보게 된다. ‘살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정지해 있지 않고 움직이는 ‘과정’(process)으로 보았다.

 

이들은 통해 우리는 <나와 타자>의 관계란, 그들 각자가 겪어내고 엃히고설킨 이해타산의 실존 상황에서 타자관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끼리도 전혀 다른 타자관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이 <타자>관은 절대 윤리가 아니라 상대 윤리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을 윤리, 종교적으로 획일화할 수 없는 <타자>관이 형성되어 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용서해야할, 용서 받아야할 <타자>를 바라볼 차례다. 우리는 일단 <타자>의 통시적인 시간들을 바라볼 수 없다는 데서 용서의 가장 큰 장애에 봉착한다. 오늘, 내 앞에서 표출된 <타자>의 이해할 수 없는 파렴치함. 언행, 폭력성, 탐욕, 비굴함, 잔인함...등 비윤리성이 어떤 역사를 통과해 <타자>의 인격으로 덧입혀졌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타자>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는 것이 그 어떤 앎보다 <타자>와 용서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운동장이 아닐까?

 

성서에 용서는 세 형태로 나온다. <용서한다shalach, 덮는다kaphar, 지워버린다nasa> 나는 <타자>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덮을 수 있고, 지울 수 있는 것이다. <타자>를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 받아야 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니 <몰라야 한다>. 끝내 <타자>는 알 수가 없다. 용서의 머뭇거림과 거부라는 지연(遲延)은 내가 <타자>를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와 <타자>를 아는 것은 오직 <신> 뿐이다.

 

예컨대 내 아들과 딸이지만 나는 내 자녀들조차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 자녀들의 역사를 지켜보았어도 그들에 대해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켜본 <타자>도 알 수 없다면 지켜보지 않은 <타자>의 역사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용서는 <神的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타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만이 <나>의 모름을 넘어서, <타자>의 상처와 고통과 분노와 증오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스페인 멜리데 성당 십자가

 

2. 그렇다면 성서에서는 용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성서에의 두 측면에서 용서가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용서는 분리(分離)의 상태를 없애는 일이다. 하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리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의 분리는 따로 존재하는 분리가 아니라 연쇄적인 분리라는 점에서 분리의 고리라 할 수 있다.

 

Ⓓ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창세기3,9)

 

Ⓔ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기4,9)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집회서27.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오18.35)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루가23,34)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에서는 인간이 원죄의식을 갖게 된 고통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과 신과 분리(分離)가 시작되고 모든 고통과 악의 최초 원인이 된다고 보는 관점이다. Ⓔ에서는 인간과 신의 분리가 필연적으로 나와 형제의 분리를 낳게 되는 분리의 연쇄고리가 나온다. 실존의 이해충돌이라는 결과는 하느님과의 분리가 인간과의 분리를 필연적으로 생성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해당된다.

 

Ⓕ와 Ⓖ는 인간이 용서의 은총 속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제시된다. 은총은 <나-형제-하느님)과의 관계의 끈을 맺는 것이고. 하늘이 나에게 맡겨 준 축복의 열쇠는 형제의 손을 통해서 온다는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지난 주 복음처럼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서”라는 축복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용서는 끊어진 축복의 고리를 잇는 판도라 상자인 것이다.

 

Ⓗ는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용서의 근본적인 바라봄에 해당한다.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나>는 <타인>을 모른다는 것이다. 더욱이 <타인>도 <타인>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두 겹의 모름의 상황에서 용서를 행하는 것이고, 용서받는 셈이다. <타인>의 무지이자 <타인>에 대한 무지의 교차점에 신의 함께함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용서는 우리가 신을 따라야지만 가능한, 신의 자비의 은총을 기억해야지만 가능한 <神的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주인의 자비는 주인이 ‘빚’이 아니라 ‘부채’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빚’(오페이레테스)은 상당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죄책감마저 담고 있는 단어인 반면, ‘부채’(다네이온)는 상호 동등한 경제적 거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하는 것은, 단순히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동등한 형제적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아울러 자비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청원과 연결됩니다. 용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에게 잘못한 이가 더는 나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해방해 주는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에서 말하는 “동등한 형제적 관계”의 회복이나 Ⓙ에서 “형제를 해방해 주는 것”은 인간이 모두 <신적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도 잘 모르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신이 우리와 함께 했을 때에만, 가능한 은총이 용서라고 본 것이다.

 

 

 

 

 

 

 

3.

 

현장에서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숱한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에 대한 경험적인 제언을 하고 있는 임상심리학자들 입장에서 현대인들에게 제안하는 용서의 황금률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차원의 용서는 자신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누구든 자신이 품고 있는 원한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다. 용서하지 않으면 영혼이 점점 엷어져 인생을 망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앍고 있다. 또한 원한을 품는다 해도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용서를 통해 그 상처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개인적인 용서는 세 가지 범위의 용서 가운데 가장 치료의 의미가 크다. 개인적인 용서를 실천하면 상처에서 치유로, 피해자에서 승리자로, 쓰디 쓴 인생에서 보다 나은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다.(딕 티비츠)

 

Ⓛ용서하지 않을 시간을 주라’ 상처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 어려움에 빠진 우리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이고도 새로운 모델로서 수용과 순수한 용서를 하라. 가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용서하지 않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뉘우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하려고 몸부림치는 환자들을 보고 ‘수용’이라는 과정을 제안한다. 수용의 과정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정해야 하고, 다시 그것이 순수한 용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단계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재니스 A. 스프링)

 

딕 티비츠와 재니스 A. 스프링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임상심리학자들이다. 이들은 <타인>에게 받은 상처나 고통이 너무 커, 육체가 허물어진 극단까지 이른 이들을 상대로 그들을 치료하면서 얻어낸 임상결과들이다. Ⓚ는 용서보다 큰 치유의 약물은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타자를 위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서 용서하라는 제언이다.

 

Ⓛ은 용서의 도그마에 빠지지 말라는 제언이다. 용서는 분명 치유가 분명하지만 서둘러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윤리의 우월감이자 타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또 다른 폭력이라고 보는 시각으로 오히려 용서의 도그마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나 역시 용서해야하고, 용서 받아야 하는 순례의 여정 중에 있는 순례자이다.

 

나의 전 역사를 성찰해 보면, 내 경우는 나와 하느님 사이의 분리 또는 흔들림이 있을 때, 용서해야 하고 용서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걸 뒤집어 바라보면 그곳에 용서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면 나와 <타자>의 관계 역시 올바르게 정립된다는 점이다. 용서의 상황이 전무하다는 것이 아니다. 용서 할 수 있는 여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나-타자-하느님>이란 스크럼을 <하느님-나-타자> 스크럼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만유 위에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라>는 말씀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다.

 

어느 해, 한해를 마감하는 국문학행사에 잘 나가는 작가 한 분을 초대했다. 그분은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으니 작가와의 대화시간에 강의실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우리 모두는 기대했다. 그 작가가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을 쓰게 된 배경,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의 입에서 발설될 촌철살인의 문학적 언어들을...그런데 작가가 느닷없이 신체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더니 끝까지 신체험에 대해 말하고 강의실을 나갔다. 작가가 강의실을 떠나고...정전되듯 갑자기 싸한 정적 속에서 떠오른 말들... 이거 학술토론회 아니라 간증시간이었어...시간이 흐른 후에 알았다. 그분이 불의의 사고로 임사체험을 하고 죽음의 강을 건너다 다시 깨어났다는 것을...우리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위에서 바라본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아보면,

 

용서의 처음 단계는, <나>는 <타자>를 모른다는 것이고, <타자> 역시 <나>를 모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나>와 <타자>가 분명 형제이고 동일자인데, 이것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바라볼 수 없는 지점이란 사실이다. 더욱이 내가 받은 자비 역시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안에 빛(그분)이 함께 했을 때에만 <나>와 <타자> 안에 있는 어둠을 헤치고 빛을 바라보게 될 수 있다. 이것은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타자>의 시간 속에서, 혹은 <나>의 시간 속에서 선택적인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상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용서는 무엇을 잊어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는 것이란 말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에 용서는 우리가 쌓은 <과거>를 넘어 <나>와 <타자>에게 <오늘>을 돌려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용서라는 황금률을 말하기 전에, 용서의 대상 <타자>에 대해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을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한 우리는 타자에게로 넘어갈 수가 없다. 우리의 한계란 우리가 언제나 주체의 자리에 붙박혀 있다는 점이다. 타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타자와 내가 주체-대상이라는 전도된 시선에서 타자에로의 초월을 감행하게 된다.  그때 타자는 내가 이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수용하게 혹은 허용하게 된다. 그대가 없다면 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 바탕은 내가 자비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는 기억의 회생이 가능할 때, 이루어진다.

 

개인적으로 용서를 해야 할, 혹은 용서 받아야 할 상황에서 일단, 모든 판단을내려놓고, 모든 정서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 상황이 떠오를 때마다 <주의기도>를 바친다. <주의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 때마다 타자를 대상에서 주체의 자리에 앉히게 된다. 타자가 내 안에서 주체의 자리에 완전히 앉았을 때, 타자가 먼저 손을 내민 적이 비일일비재하다. 용서에 관한한 <주의기도>만큼 절대적 힘을 발휘한 기도는 없었다. <주의기도>를 바치는 횟수를 바를 정자로 표시하면서 바쳐본 적도 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바친 적도 있다(내가 타자를 미워하거나 증오하거나 혐오하거나 분노하거나 저주할 수 있는 시간이 대체 얼마나 되는지,  그 감정이 완화되는 그래프는 어떻게 그려지는지 알고 싶었다.)

 

타자에로의 초월이나 열망은 구체적인 것이다. 파도가 밀려가면 밀려오는 시간만큼의 용서의 시간이 필요하다.

 

<용서, 타자에로의 초월(超越)과 타자에로의 열망(熱望)-용서한다shalach, 덮는다kaphar, 지워버린다nasa> 이라는 이 글의 주제는 <나>를 넘어서야, 그 너머,  <타자>를 열망하는 생명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서 나를 넘어설 수 있다. 또한 내가 받은 자비의 은총을 기억할 때만이 나로부터 타자의 자유를 열망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우리 안에서, 우리 삶에서 용서의 물길을 열게 된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어요?"(영화 <밀양>) 여기에 "그 인간이 나를 용서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이 나를 용서했다"는 것을 동시에 바라볼 때 용서의 완성은 '나'나 '그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용서의 스크럼 <나-타자-하느님>이라는 이 무너질 수 없는 관계는 <한계-기억-완성>이라는 싸이클을 부단히 우리 안에서 재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용서는 한계를 넓혀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용서는 아예 한계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용서는 한계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용서는 무한히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자신이 받은 용서를 그렇게 무한히 기억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나의 용서가 용서의 완성이 아니라는 사실...나의 용서가 완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그 용서가 완성된다는 것입니다.”(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

 

 

 Ennio Morricone - The Mission Main Theme (Morricone Conducts Morric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