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amour de soi),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世界上最遥远的距离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연 중 제 26 주 일 (가 해) 2020. 9. 27. Matthieu. 21,28-32]
1. 마태오,21.28-32
2.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이성규 옮김, 범우사, 1997
3.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안종설 역, 열대림, 2004
4.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 문성훈, 사월의책, 2011
5. 허버트 미드, 『정신ㆍ자아ㆍ사회』, 나은영 역, 한길사, 2010.
6. 헤겔, 『정신현상학』, 임석진 역, 한길사, 2014
7. 도스토예프스키,『지하생활자의 수기』, 이동현 역, 문예출판사, 2014
8. 장 자크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 최석기 역, 동서문화사, 2018
1.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이런 주제는 살다보면 우연히 알게 되는 것인가? 아님 치열하게 노력해야 알게 되는 것인가? 아님 알 필요가 없는 주제인가? 아님 꼭 알아야만 하는 주제인가?
모든 인간에게는 그 자신이 인식하든 안(못)하든, 인간 본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일반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루소, 그의 모든 저서에 나오는 <자기애amour de soi>와 <자만심amour-propre>은 <일반의지>을 바라보는 기본 전제에 해당한다. <자기애amour de soi>는 비교 대상이 없는 절대적인 자기사랑이라면 <자만심amour-propre>은 항상 타자와의 비교속에서 얻어지는 자기만족감(열등감)과 관련되어 있다. 동화작가 댄 그린버그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법』에서 “자신의 삶을 정말로 불행하게 만들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법을 배워라” 라고 말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끝내 모르게 만드는 것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자기보존본능이 아니라고 바라본 헤겔은 인간이 갖고 있는 <노예와 주인의 도덕>으로 이를 바라본다. 노예는 끊임없이 자신이 주인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은 몸은 노예이나 의식은 주인상태로 각성된다. 반면, 주인은 어느 순간 노예가 없다면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몸은 주인이나 의식은 노예상태임을 알게 되는데, 이 역전된 의식은 또다시 노예와 주인의 위치가 바뀌면서 같은 싸이클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역사란 다름 아닌 <인정투쟁>이라고 바라보았다.
①생명을 걸 수 없는 개인도 인격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자의식의 자립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다.(헤겔)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생명의 보존을 대신해 선택할 수 있는 목표를 인격의 인정보다 더 높이 정한다. 이 목표가 자의식의 자립성이다. 인격은 타인이 인정하지만 자의식의 자립성은 내가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와 관련, 미국 교육자 로버트 풀러(Robert W. Fuller, 1936~)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②"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은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인정은 유한한 자원이 아니라 무한정 만들어낼 수 있는 자원이다. '당신을 알아가는' 게임은 제로섬게임, 즉 내가 얻는 만큼 너는 잃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게임이 아니다. 오히려 수학에서 말하는 비(非)제로섬게임, 즉 양측 모두 처음보다 더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게임이다."
세상이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풀러의 꿈은 이른바 '인정의 통속화'로 인해 인정투쟁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이 세계는 불가피하게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는 귀결에 이른다. 이에 대해 악셀 호네트가 1992년에 출간한'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인정투쟁』에서 인간의 타락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③인정의 통속화가 극한까지 진행되면, 인정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인정받았음이 타인의 '눈에 들었다'와 동일하게 느껴지는 한, 사람은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사람과 눈도장을 구걸하는 사람으로 양분되기 마련이다.
그런 사회적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긍정적인 자기인식은 오직 사회속에서만 배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회심리학자인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 1863~1931)는 『정신ㆍ자아ㆍ사회』에서 강조한다. 그는 정신이 어떻게 행동과 함께 발현되는지 알고자 했고, 정신을 단순히 개인 유기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비록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것은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④“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태도를 통제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이 될 수 없다. 자의식적인 인간으로서 획득한 것이 우리를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들며 자아를 부여한다. 자아들은 다른 자아들과의 분명한 관련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적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의 자아와 관련해서만 자아를 소유한다.”
미드는 심지어 생물학적 기능조차도 일차적으로는 사회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정신의 설명으로 가능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위해서는 뇌의 자연적·사회생물학적 활동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정신의 사회적 본질을 인식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정신이 사회적 과정, 즉 사회적 상호작용의 경험적 매트릭스 안에서 일어나 발달한다고 간주해야 한다.
이들 이론을 종합해 본다면, 나를 나로써 알게 되는 것도 사회라는 그물망을 통해서이고 나를 나로써 알지 못하게 하는 것도 사회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게 만드는 것도 사회이고,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사회라는 견해이다. 이런 인정욕망의 싸움에서 중심부 담론의 밖으로 추방된 자들, 인격의 인정도 자립성의 인정도 확립하지 못한 상태를 우리는 <아웃사이더>라고 부른다. 거의 모든 문학작품의 소재는 바로 아웃사이더의 자기찾기, 혹은 자기포기라는 양극단의 주제로 모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⑤아웃사이더는 언뜻 보면 사회문제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다. 아웃사이더는 사변도 철학도 거부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존재와 무다. 그들은 반생명성이다. 아웃사이더의 본질적인 문제는 생활의 문제다. 아웃사이더는 자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웃사이더의 구제는 양극단에 있다. 탈출구를 알게되는 것은 환상을 볼 때나 강렬한 열정의 순간일 경우가 많다. 환상을 보는 인간은 반드시 아웃사이더다.(콜린 윌슨, 『아웃사이더』)
⑥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나는 확신한다. 의식의 과잉은 고사하고 어떤 종류의 의식이건 의식은 모두 병이라고. 치통에도 쾌감은 있는 법이다. 모든 것은 생활의 따분함 때문인 것이다. 원래 인간은 바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두 발로 걸어다니는 배은망덕한 동물이다. 인간의 가장 큰 결점은 영원불변의 부덕이다. 이 부덕의 결과로 무분별이 생긴다. (도스토예프스키,『지하생활자의 수기』)
콜린 윌슨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들의 작품 안에 등장하는 아웃사이더 못지않게 그들 자신이 아웃사이더였고, 그 아웃사이더를 문학으로 형상화(핍집성)하여 인정투쟁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웃사이더로 생을 마감한다. 중심부 담론이 규정하는 자의식과 인격에 그들이 끊임없이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적 자기인식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를 안다는 것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 준다.
2.
그렇다면 성서에서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21.28-32)
이 짧은 문장 안에는, 구약과 신약이 나눠지는 기점이 어디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앞으로 성큼 다가가게 만드는 발언이자, 현대의 사회철학자들이 논하는 인간의 본성과 아웃사이더에 대한 논의가 집약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존재론적 의미가 들어있는 다층적인 선언에 해당한다.
수석 사제들, 백성의 원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이들은 모두 중심부 담론을 끌어가는 이들이다. 반면 세리와 창녀는 중심부 담론에서 축출된 아웃사이더들이다. 여기서 그들이 속해있는 카테고리나 직업군이 <하늘나라>라에 들어가는 무조건적 전제조건이 아님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모두 어떤 상태를 지칭한다. 즉 우리 안의 지향점을 예표한다는 측면에서 자기 평가가 겹친 그런 상태라 할 수 있다.
먼저, 세리와 창녀로 지칭되는 그들이 어떻게 세례자 요한의 회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을까?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도덕으로 그들이 소리를 듣는 과정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세리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 부역하는 어떤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이민족의 통치행위에 부역하는 그러면서 돈을 치부할 수 있는 위치, 창녀는 쾌락과 소비에 동원되어 몸을 통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리보다 훨씬 극심한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보여진다. 그들은 일단 사회적 인정 투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자의식 측면에서에서 마이너스 자존감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어떤 상태를 대변한다. 하느님 나라를 그들이 확실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들의 상태에서 벗어나 지금과는 다른 인간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했을 것은 분명하다. 무엇인지 확연히 알 수 없지만 이건 아니다, 라는 지점이 자기애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마이너스 자존감에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체념 절망, 자포자기, 자살, 이런 마이너스 선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확연히 알 수 없지만, 그들 내부를 건드린 어떤 소리에 반응했고, 지금까지 그들이 들었던 외부의 소리와 자기 내부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혐오하는 소리 너머에서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 그 불확실함에 그들을 던질 수 있었다. 노예가 주인으로 각성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수석 사제들, 백성의 원로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이들은 모두 중심부 담론을 끌어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이미 인정투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한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 역시 그들 내부에서 끊임없이 비교우위의 어떤 인정을 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소리를 듣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지 못했지만...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같이 라든가..혹은 당신이 무슨 권리로...이런 말들은 모두 비교우위에서 나온 말들이다. 이들이 비록 중심부 담론을 좌우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항상 자기보다 못한 누군가에 의해서만 겨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낮은 자존감을 가진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도 세리와 창녀처럼 낮은 자존감이긴 마찬가지지만 기득권, 인사이드라는 허세가 그 낮은 자존감을 가리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자만심을 갖고 있는 것이지 자기애를 갖고 있는 상태는 아닌 것이다. 주인의 도덕 안에는 언제나 노예가 있다는 헤겔의 말을 그래서 지금도 유효한 말이기도 하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21.28-32)
여기서 이들도 언젠가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겠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자만심이라는 허세를 내려놓는 그 시간이 필요하다. 그들이 자만심이라는 자기인식의 틀을 깨고 자기애로 넘어가는 시간은 세리나 창녀가 바닥에서 솟구치는 그 시간보다 더 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인정투쟁에서 성공한 이들이 갇히는 매트릭스다.
인정투쟁에서 소위 성공한 사람, 주류, 인사이드가 갇히는 매트릭스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시스템이기 때문에 빠져나오기가 휠씬 어렵다. 세리나 창녀는 생존의 이유로 붙잡힌 지하의 시간이라 벗어나기 그보다 쉽다는 것이다.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물든 마음의 세탁이 필요하다. 즉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받아들일 '여백'이 필요하다. 그 여백을 누가 먼저 만들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너희보다 먼저'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수긍할 수 있다. (추가 부연 설명)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이들을 통해서 <자기애amour de soi>와 <자만심amour-propre>이라는 양극단의 자기인식의 매트릭스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이 짧은 말씀에 담겨 있는 '자기애'의 여정은 거리로 치자면 세상에서 가장 먼거리에 해당한다. 끝내 진리를 듣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그러나 진리를 들으려는, 마음의 여백, 귀를 연 사람에게는 가장 가까운 거리이기도 하다.
내가 타인이 규정하는 내가 아닌 본래의 나에게 도착하는 시간, 자신이지만 자신이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는 시간,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는 드디어 알게 되는 과정은 결핍과 결핍을 넘는 결핍의 바다를 헤엄쳐 가는 것과 비슷하다.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만큼이나 머나먼 곳에 있는 당신을 내 앞에 세우는 일과도 같다. 이 과정은 세상의 소음과 내 안의 소란을 견디고 견뎌서 더는 견디고 싶지 않는, 견딜 수 없는 그 상황에서, 길을 가다가도 이건 아니다는 자기 각성이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지점에서, 뭔가 생의 다른 이면을 보게 되는 절실한 갈망의 지점에서, 그 다음, 우리가 돌아선 그 지점이 불확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그 지점에서 <자기애>는 선물처럼 주어진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황금률을 주셨는지도 모른다.
3.
글을 마무리 하며.
인도의 시성(詩聖) 이라 불리는 타고르의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世界上最遥远的距离>의 첫연과 마지막 연을 읽어보기로 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생사의 거리가 아니라/내가 네 앞에 서있어도/내가 널 사랑하는지를 네가 모른다는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물고기와 새의 거리다./하나는 하늘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世界上最遥远的距离>는 운명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비장미로 읽혀지지만, 한용운의 <님의 침묵>처럼 <너> 혹은 <당신>을 다의적으로 읽어볼 수 도 있다. 이 글에서는 ‘너’를 ‘나’로 치환하여 ‘자기애(amour de soi)와 자만심(amour-propre)의 경계 넘어서기’ 혹은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에 관한 성찰의 키워드로 읽어보았다.
사랑,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1차적 초점이 맞춰진다. 우리 외부에 있는 대상, 타자 혹은 신이라는 대상이 사랑도 하기 전에 앞을 딱 가로막는 느낌이거나 혹은 감상적이거나 정서적 측면으로 몰입된 어떤 불가항력적인 도파민의 상태를 떠올리게 된다.
사랑의 대상이 ‘나’라면? 그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상태일까?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만히 바라보면 ‘희생’이 아니라 ‘사랑’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무엇을 위하여 라는 거창한 대의명분, 희생이 아니고, 자기애의 극치가 필연적으로 인류애를 낳은 것이 아닐까? 십자가란 가장 자기다움으로 돌아간 상태, 가장 자기다움의 결정적 실현, 자신이 누구인지 확연히 바라본 자의 지복직관의 상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싶은지에 관한 궁극적인 각성이 아닐까?
과연 나다움을 모르는 상태로 내가 당신다움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채워줄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고 우리 각자의 역사를 바라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끝끝내 모르고 가는 상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싶은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의 아우성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까?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안다는 것이 왜 이 세계에서는 그렇게 불가능한 상태처럼 비춰지는 것일까?
그런 대답은 한순간에 한 문장으로 대답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글에서는 인간의 존재방식에서 그 단초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존재방식, 인간은 타자가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회성이라는 그물망으로 세상에 던져진다. 이 세상에 던져진 나라는 자기인식은 결핍이다. 우리가 세계의 문을 열고 만난 것은 결핍된 존재가 또 다른 결핍된 존재와의 조우, 무한을 알기 위해서 유한의 통과의례를 치러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각자가 신의 모상으로 창조된 풍요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오직 유한을 통해서만 체험된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란 다름 아닌 유한을 못박는 것처럼 보인다. 유한을 못박지 않고서는 내가 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결코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유한이 무한을 바라볼 수는 없다. 사랑은 사랑을 알아보고, 사랑은 사랑에 끌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무한을 알지 못하는 세계에 던져져, 유한의 조각들을 한껏 끌어 모은 자와 그 마저도 갖지 못한 자의 상태를, 아웃사이더 혹은 사회적 박탈감이란 용어로 기술하곤 한다. ‘사회적 박탈감’이란 단어는 물질이 인간의 계급을 구분하는 기재로 사용될 때 쓰는 사회적 용어다. 물질이 인간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상대적 기준은 될 수 있겠지만 절대적 기준이 되는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 보다 더 비극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박탈감 때문에 행복과 불행이 좌우된다면, 그 사회는 한 인간의 본성에 전제군주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은 비교우위의 관점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애(amour de soi)와 자만심(amour-propre)'의 경계를 넘어서 혹은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에 관한 성찰의 여정 중에 있는 순례자다. 자기애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행위이다. 그때,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었다면 필연적으로 너라는 타자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걸어야 할 그 길' 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걸어야 할 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기쁜 소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복음은 ‘사랑을 잃은 이들이 다시 사랑을 찾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그들이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희망적인 소식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살아있는 복음’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늘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복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놓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이, 마음 까지 내려오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머리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이 마음 까지 내려오기를 기도하면서 이번 한 주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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