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어떤 응시(凝視), 천진하게, 물끄러미, 하염없이

나뭇잎숨결 2020. 10. 21. 09:41

어떤 응시(凝視), 천진하게, 물끄러미, 하염없이

-사랑, 겸손, 희생은 매일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연 중 제 29 주 일 (가 해) 2020. 10. 18. Matthieu. 28,16-20]

 

 

 

참 고

 

1. 마태오. 28,16-20

2. 성녀 소화 데레사,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안응렬 역, 가톨릭출판사, 2011

3. 김훈, 『자전거 여행』, 생각의나무, 2007

4.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윤새라 역, 열린책들, 2014.

5. 톨스토이, 『세 가지 질문』, 장영재 역, 더클래식, 2017

6.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김설인 역, 현암사, 2019

7.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한겨레출판사, 2018

8. D 로즈, 『헤겔의 법철학 입문 』 , 이종철 역, 서광사, 2015

 

 

1.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기 위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한다.

 

김광섭 시인은 「생의 감각」이란 시에서

 

①“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모두 그 출발점이나 도착점은 ‘나’다. 마치 내가 우주의 중심, 배꼽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라는 시행을 다시 읽어보면 모든 부재의 이유가 다름 아닌 ‘나’에 있었음을 바라보는 어떤 회한의 시선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있음’의 주체가 아니란 것을 절절하게 알게 되는 어떤 시간들.

 

시의 후반부에서,

 

②“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푸르던 빛은/장마에 황야처럼 넘쳐 흐르는/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하늘이 무너져버리는 것 같은 시간을 통과하는 자신에게 ‘생의 의미’를 알려준 것은 어마어마한 어떤 세계나 이념이나 그 누군가가 아니라 강기슭에 간신히 버티고 피어있는 꽃 중에 가장 작은 꽃, 무더기로 피어있는 채송화였다. 이 시의 화자는 어떤 포즈로 채송화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마지막 잡은 끄나풀이 그 작은 꽃이라니...그는 죽어야하는 이유, 천 가지에 맞서 살아야하는 이유 한 가지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화자가 본 것은 실은 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라도 살아내고 싶은 자신 안의 그 ‘간절함’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유치환 시인은 「생명의 서(書)」 1연에서

 

③“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저 머나먼 아라비아의/사막으로 나는 가자” 라고 읊고 있다.

 

시의 제목이 ‘생명의 서(書)’ 다.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애증을 감당하지  못해 생명이 부대낄 때, 그런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겠다는 것, 우리는 언제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나? 여기서 ‘아라비아사막’은 공간 이동이 아니라 죽음과 맞먹는 절대고독의 시간을 직시하겠다는 어떤 결연한 대결의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지란 것도 그마저도 없으면 살 수 없는 이의 생존이유라 하겠다. 여기서 신마저도 신음하는 아라비아 사막은 바로 자신의 내면일 것이다. 불모의 땅 같은 자신을 감당하는 문제 앞에 서 있는 사람.

 

위의 두 시는 우리 모두가 겪어내는 삶의 지난한 시간에 대한 어떤 내적인 대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대처란 것이 어떤 액션이 아니라, 더는 어떤 액션마저도 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어떤 응시(凝視)>에 있었다는 점에 두 시가 감추고 있는 위로일 것이다.

 

응시(凝視), 눈길을 한 곳에 모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뚫어지게 바라보겠다는(바라보았다는)것은 우리가 어떤 극단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다. 모든 것을 걷어낸 후에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힘이다.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에서 위로를 찾을 때 걸어갈 힘마저 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출 필요가 있다.

 

소설가 김훈은 『자전거 여행』 산문집에서 ‘어떤 응시(凝視)’에 대해 나무의 삶을 비유로 바라본다. 나무는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다. 나무의 나이테의 바깥을 젊음으로 안쪽을 죽음을 앞둔 노인에 비유하여, 이 두 삶을 동시에 살고 있는 나무만이 하늘을 향해 살아 있는 나무가 된다고 보았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이미 죽음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④“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 밑동에서 살아있는 부분은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이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이미 무기물로 변해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 중심이 나무의 존재를 하늘을 향한 수직으로 버티어 준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나무는 죽는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다”

 

그러므로 나무의 중심부는 존재의 고요한 기둥이고 바깥쪽은 생성의 바쁜 시간인데, 중심부가 죽음의 쇠퇴가 아니라 나무의 완성이며, 이 완성은 '적막한 무위이며 단단한 응축'인 것인데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나무의 향일성은 이 중심의 무위에 기대고 있다고 보았다. 모든 고가구의 대부분도 이 중심부를 목재로 쓴 것이라 한다.

 

김광섭 시인, 유치환 시인, 소설가 김훈은 그들 각자의 생명의 책에 기록할 어떤 지난한 생의 역사란 ‘적막한 무위’ ‘단단한 응축’을 바라보는 <어떤 응시(凝視)>로부터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어떤 응시(凝視)>가 <어떤 생성 (生成)> 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있다. 이것은 밖으로의 어떤 액션이 아니라 내면으로의 깊은 침잠을 의미한다. 응시란 육안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심안 혹은 영안으로 세계와 타자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끌어들임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응시(凝視)>가 <어떤 생성 (生成)>를 가능케 한다면 이것은 자연발생적인 인과관계인가? 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⑤사소한 것들을 잃는 일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것들이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가장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관련이 있는 사소한 것들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는 『슬픔의 위안 : 어느 날 찾아온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기까지』에서 우리가 어떤 상실이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은 ‘사소한 것들’이 상기시키는 어떤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 ‘사소한 것’들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모든 상실과 부재는 다만 시간의 죽은 흔적을 목격하고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사소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응시.

 

⑥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슬픔의 힘’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는 신형철 선생은 우리는 모두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동정을 걷어내고 타인에 대한 진정한 응시 ‘천진하게’ ‘물끄러미’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그 자체는 우리가 어른을 벗고 아이로 돌아가는 순진무구한 상태라는 것이다.

 

⑦그리고 중요한 때는 ‘지금’이며, 필요한 사람은 ‘함께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있는 이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세 가지 질문)

 

⑧사랑은 인간에게 몰아를 가르친다. 그 때문에 사랑은 인간을 고통에서 구제한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우리가 인생에서 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은 ‘중요한 때’와 ‘필요한 사람’과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 것이라고 바라 보았다. 톨스토이 삶 전체를 통해 내린 결론은 ⑦에서 ‘오늘, 함께하는 사람, 함께하는 이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것도 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내면의 응시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 내면의 응시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이 ⑧에서 말하는 ‘몰아의 사랑’까지 가는 생성의 시간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응시(凝視)>가 <어떤 생성 (生成)>를 가능하게 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우리가 그런 인과적 고리를 자연발생적으로 인도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된다.

 

우리는 자본이 추동하는 활동과 속도, 잉여라는 거대 담론과 마주하여, 삶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하여도 세상을 등진 은둔자의 입장에서의 방향설정이 아니란 점이다.

 

우리는 어떤 거대시스템 속의 한 단자와 같은 존재로 살고 있다. <어떤 응시(凝視)>가 <어떤 생성 (生成)>을 낳아야 하는 이곳은 ‘물질과 에너지와 속도’가 지배하는 곳이다. 어떤 응시(凝視)>가 <어떤 생성 (生成)>을 가능하게 한다는 전제는 그래 좋아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라고 그 가치의 실천을 이 띵에서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철학자 헤겔이 이솝우화속의 이야기를 빌려와 모든 관념은 현재성과 현장성이 중요하다는 말로 인용했고, 카를 마르크스도 “바로 이 자리에서 네 실력을 보이라”는 뜻으로 썼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또 어떤 정치적으로 상대의 정치성을 검증하기 위한 명제로 자주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라는 말은 단순히 정치적인 검증언어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우리 자신이 <응시(凝視)>한 것이 <어떤 생성 (生成)>을 낳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마치 모든 신앙인들에게 그래, 사랑 좋다. 자비 좋다. 여기가 로도스다. 당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그 사랑을, 그 자비를 여기서 보여줘라?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 밖의 영원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우리를 시간 안에서의 영원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시간 안에서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 왜 힘이 드는가? 시간 안에서 영원을 바라보는 것이 왜 우리에게 벅찬가? 우리는 두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말해 볼 수 있다. 사랑을 하는 데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봉인하느라 왜 죽을만치 힘이 드는가?

 

세속이 주는 윤리적 양심이 아니라 신 앞에 있는 영성의 소리는 우리에게 어떤 답을 되돌려 줄까? 사랑을 봉인하는 이유는 사랑하면서 견디는 것보다는 봉인하면서 견디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봉인하면 우리를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 몰아의 사랑까지는 유보해도 된다. 사랑을 추억하기만 하면 된다.

 

사랑을 봉인한 상태에서 우리가 숨을 수 있는 곳이 우리가 정의한 희생과 겸손이라는 방패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작은 사랑이 아니라 우리 보다 너무 큰 사랑이다. 사랑이 너무 크면 우리는 그 사랑을 관념의 영역으로 슬쩍 넘겨둔다. 마치 책에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넘기듯 가끔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바깥의 사랑으로 넘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으로 넘겨놓는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슬픔을 도입부로 끌어들인 이유다.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사랑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감당하지 못해서 슬픈 것이다.

 

전교주일 복음으로 마태오. 28,16-20을 묵상하다 보면 당시의 제자들은 어떻게 이 사랑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처음에는 우리처럼 뒤로 뒤로 물러섰을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점이 성령강림대축일이 제정되는 다락방이었을 것이다.

 

⑨“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으신 분이 그 권한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일임했다. 이 사랑을 제자들이 능히 감당 할 수 있었던 사랑인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도망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고백의 위로속에서 숨고르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죄인이라고 고백한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연도 바칠 때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감당할 자 누구입니까?’ 라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헤아린다면 감당할 자 누구입니까?’는 아닐까?

 

세상에는 자신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눠 바라볼 수도 있다.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로. 아직도 인류는 고백하는 자와 고백조차 할 수 없는 이들로 나눠져 있다. 말하자면 인류는 죄의 테두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조금 각성되고 믿음에 투신한 사람들조차도 아직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죄인이라고 처음 고백하는 것이 어렵지 고백에도 관성이라는 게 있다. 죄조차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뛰어난 사람일지 모르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도 그럴까? 죄인이라고 고백해야지만 될 거 같은 겸손이라는 체 앞에서 한껏 몸과 마음을 수그린 상태, 그것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일까? 우리는 그래야지만 그분이 은총을 주실 거 같은 느낌적 느낌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죄인인 것을 모르는 자와 죄인이라고 고백한 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죄인들에게 하늘과 땅의 권한을 일임했다는 것인가? 여기엔 뭔가 예수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엇갈리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사랑이 그렇게 위축된 영성으로 어떻게 감당할 만한 사랑인가? 하는 의문이다.

 

자신에게 온 사랑조차 감당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늘과 땅의 권한이라는 그 큰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감당할 수 없는 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그분은 왜 맡겼을까?

 

어떻게 이 큰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기 위해 전교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선교 (宣敎) 혹은 전교 (傳敎)의 소명은 당시의 제자들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소명이다. 선교의 최전선에 있던 바오로 사도나 지금도 해외선교를 하고 있는 선교사들이나 전투적인 가두선교 등을 생각하면 이것은 특별한 이들에게 주어진 은사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승천대축일 복음을 다시 전교주일 복음으로 연결하여 묵상하다 보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알 수 있다. 전교의 메시지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이들에게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외에는 지닐 필요가 없다는 전언이기도 하다. 그러니 전교의 소명은 믿는 이들의 보편적인 소명일 것이다.

 

또 굳이 소명이라는 말이 오히려 당연한 사랑의 확산을 어떤 이름으로 카테고리화 한다는 느낌도 지울 수가 없다. 사랑은 그 자체가 확산의 에너지다.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봉인된 어떤 것, 웅덩이에 고인 물일 수가 없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으로 차고 넘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이 세계를 풍요로움으로 채우고도 남을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렇다면 소명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사랑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듯하다. 전교를 바오로적 영성과 소화데레사적 영성 으로 대별해 본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본질적인 그 무엇이 있을 지도 모른다.

 

⑨“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28,16-20)

 

지상에 남긴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눠 묵상해 보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가 받아들이든 아니든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해서 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바라보는 것이고,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깨어있다는 것은 어떤 시점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목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보면 그렇다. 예컨대 우리는 가을이 언제 왔다가 언제 가는지 모른다. 어느 날 보면 이미 가을은 익을대로 익은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저 가을마저도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 있다.

 

여기서 <어떤 응시(凝視)>가 <어떤 생성 (生成)>을 가능하게 한다면 이 바라봄의 시작은 감사(에우카리스띠야(Eucharistia)에 있다고 하겠다. 용서를 바라볼 때 ,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십자가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는 움직임으로 나타나 있다. 우리가 자신의 그 무엇을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하느님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것을 선사로 받고, 받음으로써 하느님을 유일한 주님으로 알아 모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봉헌은 우리가 드리지 않으면 하느님이 갖지 못할 그 무엇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받은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차지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렇기에 봉헌이나 봉사나 감사는 우리가 전적으로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받은 자가 되어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차지하도록 하는 것, 여기서 희생의 의미도 재 정의가 되어야 하는 어휘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의 희생’이라는 말은 함께 결합될 수 없는 명사의 조합인 셈이다.

 

우리가 오로지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우리 기쁨의 원천이다. 여기서 ‘나 같은 죄인’이라는 말은 사실 보류되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니 아예 안 쓰는 편이 더 감사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선교의 대상인 모든 민족은 이미 하늘나라의 기쁨으로 충만한 이들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기쁜 소식을 살고 있는 이들이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기쁨을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또 살 수 있는지 먼저 그 기쁨으로 살아보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바오로사도는 전교의 최전선에서 가장 험난한 사도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 아니라 가장 큰 기쁨 속에 살았던 분으로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기에 전교는 말로 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온 인격으로 살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슬픔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같이 슬픔이 되었다가 기쁨으로 넘어가는 어떤 결절점이 되어주는 것이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다 보면 사실 이 세상은 슬픈 곳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이름은 무엇인가?

 

교회에서 선교의 수호자라 부르는 <모든 것의 모든 것(everything of everything)>이 되겠다고 한 소화 데레사 성녀의 영성에서 그 답을 바라보고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하느님 사랑이 ‘최소’에 담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소화 데레사는 “작은 꽃, 작은 붓, 작은 길의 영성"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⑩“애덕”이 제 “성소”의 열쇠를 주었습니다. 저는 만일 교회가 여러 가지 지체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졌다면, 모든 기관 중에 제일 필요하고 제일 귀한 것이 그에게는 없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이 심장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질 지경에 이른다면, 사도들은 복음을 더는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를 흘리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한다는 것, 즉 한 말로 말해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미칠 듯이 기쁜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오 제 사랑이신 예수여!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제자리를 찾아냈습니다. 천주여, 이 자리를 제게 주신 이는 바로 당신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 <사랑>이 되겠다는 그리하여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겠다는 이 서원의 아름다움은 작은 것 밖에 드릴 수 없는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인가를 바라보게 된다. 누구든지 사랑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화데레사 성녀는 15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여 폐결핵으로 24세에 귀천했다. 9년의 시간도 주로 병상에서 기도와 일기를 쓰면서 <모든 것의 모든 것(everything of everything)>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수도원 밖의 영혼들과 깊은 교감을 하는 신비를 살았다는 것이다. “타인들의 영혼과 깊이 교감하라(Be deeply in touch with the souls of others)”는 바로 그 삶을 살아낸 것이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 안의 그 뜨거움은 소화 데레사 성녀의 그 뜨거움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간적으로 확대된 전교나 공간적으로 붙박혀 있었던 전교나 그분 보시기에는 같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같은 효과이기도 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선교 혹은 전교는 영성의 어떤 고유한 영적 상태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타인들의 영혼과 깊이 교감하라(Be deeply in touch with the souls of others)"는 것, 예수님의 공생활의 면면을 바라보면 선교의 영성적인 측면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에서 소화 데레사 성녀를 포교의 성녀로 지목한 것만 보아도 전교의 영성이 특별한 이들에게 주어진 은사가 아닌 교회 구성원 보편의 은사임을 알 수 있다.

 

하여, 소화데레사의 바람과 기도가 어떻게 하늘과 땅올 연결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천주여, 이 자리를 제게 주신 이는 바로 당신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3.

 

칼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창백한 푸른점』을 읽어보면 우리가 사는 태양계보다 더 큰 은하계가 수천억개 이상 존재한다는 것이 천문학자들의 일반적인 학설이다. 21세기에 인간이 성취한 과학으로도 그것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지, 이 우주의 크기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무심코 읽고 밑줄 그은 그 부분이었다. 어느 날 별을 보다 머리를 치듯 그 문장이 압도했다. 그날 이후, 어떤 응시의 임계점을 넘어버린 듯 했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또 그렇다면, 오늘 내가 알고 있는 그분의 사랑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 아닌가? 라는 것....그날 이후 기도의 방향이 달라졌다.

 

“제가 어제보다 오늘 조금만 더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십시요!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알게 해주십시오. 제가 바라본 그 사랑을 제가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사랑을 응시할 수 있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그것을 말로나 글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알았다. 오늘 내가 알게된 사랑이 인간이 알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가 아니란 것을. 또 내일이 되면 오늘의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또 내일인 오늘은... 그래서 알았다. 사랑엔 최대치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경계도 없고 한계도 없다는 것을...어떤 선을 그어서 여기까지라고 그 최대치라고 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용서는 한계를 넓혀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용서는 아예 한계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용서는 한계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용서는 무한히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자신이 받은 용서를 그렇게 무한히 기억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오승원 이냐시오 신부님)

 

그런데 여기서  ‘한계가 없다’는 것은 인간은 말을 할 수 있을지언정 체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그냥 그것을 응시(凝視)라는 어휘로 뭉뚱그릴 수밖에 없다. 마치 처음 보는 장면에 넋이 나간 아이처럼 <천진하게, 물끄러미, 하염없이>, 바라본 것을 열어놓는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이 규명하지 못한 이 우주의 크기처럼. 내가 오늘 알고 있는 사랑이 모른다는 것에서는 어느 정도 멀어졌을지 모르지만 진정 안다는 것에서는 한없이 멀다는 것을.

 

다시 복음과 데레사 성녀의 고백을 함께 읽어본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소화데레사 성녀는 15세에 가르멜에 입회해서 24세에 귀천했다. 성녀의 귀천의 이유가 폐결핵이었지만, 이 글이 마무리 되는 부분에 이르러 그것은 하느님 사랑이라고 바라보게 되었다.(이렇게 바라보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진정 하느님 사랑이 두려웠다. 일반적인 두려움과 구별하기 위해 '외경심'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를 알 듯했다.) 우리 안의 사랑의 세포를 모두 깨워 놓으면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의 원심력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마지막에 '절제'의 은사를 청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인성녀들은 그 원심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로의 부름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봉인 (封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100세 인생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하느님의 시간, 하느님의 사랑 이 원래의 본뜻을 알고도 우리가 그 영원과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자신은 죄인이지만 죄인으로 인식하는 데 머무르기 보다는 큰 사랑을 받은 자로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예컨대 내가 절실히 필요한 것을 옆집 사람이 갖다 주었다고 하자. 그동안 옆집 사람과 소원한 관계였다고 하자. 내가 원하는 것이 절실했다면 감사합니다!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원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다면 받을까말까 또 받기는 받되 구구절절 사족이 붙는다. 또 너무 고마워서 갚고 싶다면 그 갚는 행위에 대해 희생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외에는 그 역시 사족이다.

 

언어는 우리에게 심리적인 도피처를 제공한다. 특히 신앙인들이 사랑, 희생, 겸손이라는 말을 매일 다시 써야하는 이유다. 언뜻, 겸손하면 떠오르는 성서속의 인물은 예언자들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즈카리아의 아내이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그리고 성모님, 죄뒤로 숨지 않았던 막달레나 성녀다. 그들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그분의 사랑을 네! 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겸손한 이들로 칭송받을만 하다. 죄의 고백을 겸손이라 한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희생이라 한다면 우리는 두 번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나는 전생이 곡비였던 거 같다. 너무 잘 운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기뻐도 울고 안타까워도 울고 감동해도 울고 억울해도 울고 감사해도 운다. 미사 때도 매번 운다. 하루도 울지 않고 지나가는 적이 없는 거 같다. 상가집에 가서 상주보다 더 운다. 가을이라 어디를 가도 아름답다. 교정을 걸어도 들길을 걸어도 그냥 도시 한 복판을 걸어도 어디든 아름답다. 이렇게 너무 아름다운데 왜 눈물이 나오는 것이냐? 생각해보니 언제나 나에게 온 사랑이 너무 큰 데 그것을 제대로 바라보고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회한이 쌓였으면 오늘 사랑이라도 잘하면 될 것을,,, 오늘 나에게 온 사랑도 너무 큰 사랑이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서 운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너무 커서 운다. 울면서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나를 씻느라 운다. 내가 곡비인줄 아는 친구들은 손수건만 보면 갖다줘서 손수건 부자다. 얼마나 더 울라는 것이냐?

 

사랑, 겸손, 희생은 매일 다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는 이 글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소화 데레사 성녀의 깨달음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애덕”이 제 “성소”의 열쇠를 주었습니다. 저는 만일 교회가 여러 가지 지체로 이루어진 육신을 가졌다면, 모든 기관 중에 제일 필요하고 제일 귀한 것이 그에게는 없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이 심장에는 사랑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사랑이 꺼질 지경에 이른다면, 사도들은 복음을 더는 전하지 못할 것이고, 순교자들은 피를 흘리려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성소를 포함한다는 것, 즉 한 말로 말해서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미칠 듯이 기쁜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오 제 사랑이신 예수여! 제 성소를 마침내 찾았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제자리를 찾아냈습니다. 천주여, 이 자리를 제게 주신 이는 바로 당신입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