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Magnificat)

‘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이름의 ‘파사드Facade’ 를 지나

나뭇잎숨결 2021. 3. 11. 16:59

 

 

 

 

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이름의 파사드Facade’ 를 지나

-‘어떤형이상학적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나가르주나)

 

[사 순 제 3 주 일 (나 해) 2021. 3. 7. Jean. 2,13-25]

 





1. 공간에서 ‘파사드Facade’는 무엇인가?
2. 마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Between Scylla and Charybdis)
3.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이름의 성전 파사드



 

 

 

 

1. 공간에서 ‘파사드Facade’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공간이나 장소에 '있어야 할 것'과 '있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며, 우리 마음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이 주제를 성찰해 보기 위해서, 먼저 건축 하면 떠오르는 이들의 건축철학을 살펴보기로 한다.

 

어떤 공간이 아름답다고 불려질 때 그 공간에서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 공간의 ‘파사드’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파사드는 건물의 정면, 혹은 외관을 의미한다. 그 외관은 단순히 아름답다는 외적 의장에 머무르지 않고 어떤 말을 건넨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①건물은 말을 한다. 건물은 우리의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가 되어 일상을 부식시키는 온갖 불온에서 비껴난 이상화된 삶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건물은 우리의 열망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인간적 약함을 채워준다. 다시 말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아름다운 건물은 우리의 열망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어떤 공간과 어떤 희망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 부른다. 알랭드 보통은 건축물을 안정감, 균형잡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밑그림을 그리는 도구라고 말한다,

 

130년째 지어지고 있는 스페인의 바로셀로나나의 성가족 성당(사그라마필리아)은 신이 지상에 머물 유일한 거처라는 평가를 받는 성전이다. 아직도 공사가 진행중인 건축물이기도 하다. 밀가루로 반죽한 듯한 구불구불한 외형과 척추동물의 몸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내부,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가우디는 이 건축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② 모든 것은 자연이 써놓은 위대한 책을 공부하는데서 태어난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작품은 모두 이 위대한 책에 쓰여 있다. 이 책은 전 인류에게 주어져 있으나, 이것을 읽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며 또 노력을 기울이기에 합당한 책이다,(안토니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

 

가우디는 자신의 건축물이 한권의 자연을 읽는 텍스트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될 수 있으면 그 텍스트에서 자연과 인간과 신이 하나로 된 그 '하나Oneness'를 읽어주기를 바랬다.

 

반면 건축은 순전히 기능주의적이라고 바라본 ‘유리마천루’의 시대를 연 루드비히 반 미스 데어로헤는 공간이 단순해질수록 인간은 그 공간에서 최적의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③건축의 기능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영속하는 것은 오직 융통성과 가변성이다, 공간은 적을수록 더 많다. 신은 디테일 속에 있다. 우유라면 차갑거나 따뜻할 수 있지만, 건물은 그 자체로 차갑거나 따뜻하지 않다 (루드비히 반 미스 데어로헤)

 

그는 자신이 설계한 건물들이 차갑다는 비난에 대해, "우유라면 차갑거나 따뜻할 수 있지만 차가운 건물이나 따뜻한 건물은 있을 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는 '월요일 아침마다 새로운 건축을 창조할' 필요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건축에 대한 개개인의 주장, 즉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기념비에 불과한 모든 양식을 경멸했다. 미스는 인간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건물을 짓고자 했다. 또한 건축이란 "한 시대의 의지가 공간으로 옮겨진 것으로 그러한 공간은 살아 있고 항상 변화하며 새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미스는 자신을 그 의지를 수행하는 도구 이상의 존재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반면 르 코르뷔지에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철저히 작가주의를 지향한 건축가라 할 수 있다.

 

④돌, 나무, 콘크리이트 재료를 이용하여 집들과 궁전들을 만든다. 이것은 건설이다. 건축은 빛 안에서 덩어리들이 함께 펼치는 훌륭하고 위대하며 올바른 연극이다. 공간과 빛과 질서, 이것들은 빵이나 잘 곳 만큼이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 건축을 향하여)

 

건축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프랑스에 가면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사부아> 저택을 필수코스로 방문하기도 한다. 빌라 사부아는 모더니즘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콘크리트 건물의 예술화, 필로티, 옥상정원이라는 건축의 신개념을 만들었으며, 디자인에서 '건축의 5요소'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매년 유제니 사부아(건물주)는 지붕을 통해 빗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겪었다. 미관을 해치는 우수관과 문틀의 제거는 흰 표면을 빗물에 의한 얼룩과 부식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또한 건물은 구조적 내구성을 위한 재료로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균열로 인해 손상 받고 있다. 1940년까지 유제니 사부아가 살고 있었지만, 2차 세계도중에 떠났다. 전쟁 중에 두 번 점거되었는데, 처음에는 독일인에 의해 건초 상가로 사용되었을 때, 그리고 미국인에 의해 두 번 점령당했다, 두 번의 점거로 건물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유제니 사보이는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건물로 돌아왔지만, 더 이상 전쟁 전과 달리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곧 다시 집을 버렸다. 이 별장은 1958년 푸아시 마을에 수용되었는데, 처음에는 이 별장을 공공청소년 센터로 사용하였고, 후에 학교 단지를 짓기 위해 철거하는 것을 고려하였다. 그 집을 구해야 한다고 느꼈던 건축가들의 항의와 르 코르뷔지에의 개입으로 그 집은 철거되지 않았다. 1963년 르 코르뷔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건축가 장 드뷔손에 의해 최초의 복원 시도가 시작되었다. 이 별장은 1965년 프랑스 역사유적 등록부에 추가되어 프랑스 최초의 근대주의 건축물로 지정되었으며, 건축가가 살아 있는 동안 최초의 복원 대상이 되기도 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그는 건축 철학에서 그가 따른 것은 '유기적'관념인데, 그는 건축이란 자연을 지배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주변에 녹아 공간을 디자인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⑤자연을 관찰하라. 자연을 사랑하라. 자연과 기꺼이 하나가 되라. 자연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위대한 건축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다. 내 건물에 물이 책상위로 떨어진다면 그렇다면 책상을 옮기시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939년에 라이트는 그의 후원자였던 에드거 카프만을 위해 착공한 여름 별장인 낙수장(Falling water)를 완공한다. 이 저택은 흐르는 폭포 위에 지어졌다. 자연과 그대로 융합한 이 저택은 21세기가 된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주택이다. 라이트의 자연주의적인 신념을 가장 잘 표현하였으며, 인문학적인 면에서 시적인 표현을 이룩한 건축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또한 캔틸레버 공법을 사용하여 공학적인 혁신을 이룬 건물이기도 하다. 캔틸레버는 한쪽 끝만 받치고 길게 뻗은 바닥을 말한다.

 

라이트는 주택의 본질적인 면, 즉 온화함과 보호 등의 개념을 중시하여 천장을 낮게 한다거나 코너를 활용하는 등의 디자인을 했다. 특히 벽난로(hearth)를 따뜻한 가정의 중심이라 생각하여 이를 부각시킨 주택 설계를 많이 하였는데, 낙수장에서는 집의 가장 중앙에 벽난로와 그 굴뚝을 두고 여기서부터 각 공간이 뻗어나가는 듯한 형태로 표현해냈다.

 

이 집이 자연과 동화된 유기적 건축인 이유는 단순히 폭포 위에 세웠다는 사실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우선 콘크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재료를 해당 지역에서 가져다 썼으며 이는 수직적으로 부각되는 석재 매스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언급된 1층의 벽난로나 메이드룸에선 원래 그 자리에 위치해 있던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집의 일부로 만들어 쓴 것이 돋보인다. 거실로 들어서면 강으로 곧장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집 안에서 다이빙을 시도할 수 있다! 낙수장의 특이한 점으로는 모든 방에 커다란 테라스가 하나씩 딸려 있다는 점인데 이 또한 사적인 공간을 자연을 향해 열어두어 자연과 주택을 연결시키려 한 시도다. 심지어 진입로 부분에서 원래 있던 나무를 자르지 않은 채 그 주변을 돌아 건축물이 지어진 것을 보면 라이트가 자연과의 동화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느껴진다.

 

낙수장은 그 과감한 선택을 통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에 따라 논란 역시 불러일으켰다. 우선 건축주인 카프만부터 아우성이었다. "일단 폭포의 따가운 물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그리고 공학적으로도 20세기 초의 기술로 만들어졌던 탓에 캔틸레버는 노후화 되어 휘고 있다. 지금은 켄틸레버 곳곳에 금이 가있다는 것과 폭포위에 세워진 탓에 냉기와 습기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이렇듯,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빌라사부아와 낙수장이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머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어떤 공간은 그 공간을 설계한 사람의 건축철학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건축철학이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얼마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가는 파사드의 아름다움과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마음,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Between Scylla and Charybdis)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Between Scylla and Charybdis)’ 는 관용구이며 진퇴양난의 의미로 쓰인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는 그리스 신화속의 바닷가에 사는 괴물들이다.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는 귀향을 하며 첫번째 코스인 좁은 해협에 이르는 데, 양쪽에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가 버티고 서 있자, 그는 스킬라를 선택하는 데, 그나마 부하 6명만을 내어 주고 해협을 통과하였다. 즉, 이 신화는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보다 피해를 덜 받는 쪽으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우리 마음은 어떤 착각이 야기한 형이상학과 어떤 진실이 보여준 형이상학 사이에 있거나, 아예  두 세계를 이분해 형이하학에 매몰된 마음이거나 형이상학에만 경도된 마음 사이에 있다.

 

어떤 공간이 그 안에 거주하는 이들의 실존을 반영한다면 걸어가는 건물인 우리는 무엇을 담지하고 있는 존재인가를 묻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의 여부가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임상심리학자들은 현대의 병리현상의 중심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 마음의 중심엔 ‘기억’이 있다.고 본다.

 

타자가 나에게 낯설거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공통된 기억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에서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각인된 기억이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주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자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맞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억을 재구성하거나 새롭게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 마음이 집착의 장소라는 것에 대해,

 

⑥ 바람 때문에 사찰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를 두고 두 승려가 논쟁을 벌였다. 한 승려는 깃발이 펄럭인다고 하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펄럭인다고 했다. 둘의 논쟁이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자 육조 혜능이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다. 너희들의 마음이 펄럭이고 있을 뿐이다” (무문, 무문관)

 

이것은 우리의 의식이 외물인 바람과 깃발에 가 있었기 때문이고, 또 무엇을 주체로, 무엇을 대상으로 보고 있는가에 따라 같은 맥락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모든 현상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는 조건이기에,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에 따라 고통의 이름을 적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형이상학적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가는 자가 아닌 것도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는 운동도 아니고 가는 자도 아닌 제3의 것이 가는 것인가?(나가르주나, 『중론(中論)』)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고 했을 때, 착각은 부재와 연관되어 있거나 과잉의미부여의 심리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부재상황에서 기억, 부재, 그리고 고통이라는 치명적인 매커니즘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는 집착은 세상의 실재 즉 불변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고 말한다. 나가르주나가 경계했던 것은 언어에 의한 문법적인 착각 때문에 우리가 형이상학적 사유에 속고 있다는 것이다. 어법상 주어에 해당하는 어떤 것이 마치 하나의 실체처럼 인식된다는 것이다

 

‘A는 간다’ 라는 명제는 반복 혹은 중복의 오류로 A는 본질적으로 가는 자이기 때문에 술어에 간다는 말은 동어반복이라고 본 것이다. 불변하는 실체를 자기동일성으로 환원할 때 우리는 거기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기대나 희망은 없는 것은 실재화할 때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마음은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마음의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심신비이원론적 관점과 유사하다.

 

칸트는 마음이 이렇듯, 형이상학을 만들어 내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⑧우리 인식은 마음의 두 기본 원천에서 발생한다. 직관과 개념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지반이다(칸트, 『순수이성비판』)

 

칸트는 우리가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에서 직관이 생기고, 표상을 통해 인식하는 능력에서 개념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표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동적으로 어떤 개념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다른 개념이 만들어질 때까지 인식의 주인으로 우리를 끌어간다고 보고 있다.

 

우리에게 감각인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일에 골몰해서 산책을 한다면 우리는 주변의 사물에서 봄이 왔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봄이다, 라는 특별한 발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항상 대상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라고 말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⑨기억하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만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 ‘없다’는 부재의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의식적 효과에 해당한다.(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베르그송은 과거의 기억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자체가 일종의 기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예가 기억상실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이란 과거의 대상뿐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의식마저도 가능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기대 역시 기억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기대는 물론 미래의 사건이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⑨지각된 광경은 순수존재를 갖지 않는다. 내가 보는 그대로 정확하게 지각되는 광경은 개인적인 나의 역사의 한 계기이다(메를로 뽕티, 『지각의 현상학』)

 

메를로 뽕티는 존재를 인식하는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에서 인식이 재구성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 존재자체는 헤겔의 이론처럼 “우리는 존재 속의 구멍이 아니라 존재의 주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육체가 가진 자연적 능력과 개인적인 나의 역사가 결합된 상태라고 보고 있다.

 

⑩청년들의 낭만적인 열정과 활동이 현존하는 질서에 구멍을 내고 세계를 변혁하고 개혁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존재의 구멍’이란 새로운 것을 도래시킬 수 있는 인간의 ‘순수의식’을 의미한다(헤겔, 『미학강의』)

 

메를로 뽕티는 ‘존재의 구멍’이라는 헤겔의 견해는 받아들인다. 선천적으로 인간은 그런 순진무구한 존재이나 세계는 인간이 지닌 그 순수의식을 변형시키는 “함몰이나 주름”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진정한 형이상학과 인간이 만든 형이상학이 갈리게 된다. 라이프니쯔와 들뢰즈는 형이상학의 어떤 방향성을 제시한다.

 

“형이상학적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는 나가르주나의 견해는 ‘어떤 형이상학적 착각은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형이상학이 집착과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어떤' 형이상학이 고통과 집착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⑪ 휘어지기 쉽고 탄력적인 하나의 물체는 또한 하나의 주름을 형성하는 결집된 부분들을 갖고, 그 결과 그 부분들은 부분의 부분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응집력을 줄곧 유지하는 더욱더 작은 주름으로 무한히 분할된다.(라이프니치, 『단자론』)

 

라이프니쯔는 ‘모나드에는 창이없다’는 단자론을 통해 완벽한 형이상학을 추구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라이프니쯔의 형이상학은 그 발판이 형이하학임을 간과한 것이라고 바라본다. 어떤 형이상학도 형이하학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랑도 이 땅의 아픔을 모르고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찌그러진 진주인 바로크에 비유한다. 바로크는 '물질의 겹주름'이며. 바로크는 어떤 한쪽에서 절대적인 본질을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적인 세계와 절대적인 세계는 연관된 어떤 연산 함수, 특질을 지시한다고 말한다.

 

⑫​"바로크는 끊임없이 주름을 만든다. 그것은 사물을 발명하지 않는다 : 동양에서 온 주름들, 그리스, 로마, 로마네스크, 고딕, 고전주의 등등의 많은 주름들이 있다. 그러나 바로크는 주름을 구부리고 또다시 구부리며, 이것을 무한히 밀고 나아가, 주름 위에 주름을, 주름을 따라 주름을 만든다. 바로크의 특질은 무한히 나아가는 주름이다. 그리고 무한이 두 층을 가지듯, 바로크는 두 방향을 따라, 두 무한을 따라 주름들을 분화시킨다 : 물질의 겹주름과 영혼 안의 두름." (들뢰즈, 『주름-라이프니치와 바로크』)

 

바로크(Baroque)는 '일그러진 진주 pérola barroca'에서 유래되었다듯, 매우 독특함, 기이함, 불협화음, 비정상을 나타낸다. 화가들 중에서는 카라바조, 루벤스, 렘브란트, 젠틸레스키, 반 다이크, 베르니니, 벨라스케스가 , 음악에서는 바흐, 헨델, 비발디가, 건축에서는 베드로 성당이나 베르사유 궁전이 , 철학자들 중에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가 이에 속한다.

 

이를 우리는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개혁이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모두 충족시키려는 이런 몸부림은 바로크적이라고 들뢰즈는 바라본 것이다. 이는 마치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Between Scylla and Charybdis)를 통과해야 하는 사랑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주려는 이 필사의 노력이 바로크적인 아름다움이 놓여있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형이상학은 집착을 낳지만, 어떤 형이상학은 집착을 벗어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유다인이나 초기 제자들의 형이상학과 예수님의 형이상학의 차이점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이름의 ‘성전’ 파사드

 

 

성전정화는 인류를 위한 축제의 완성에 대한 로드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로드맵이 인류를 위한 축제이기 위해서 철저하게 바로크적 사랑이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순3주 강론, 바오로 서간문, 복음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3-25 13) 는 말씀은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tetelestai)’(요한 19, 30)와 연결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성전 파사드가 무엇인가를 계시한다.

 

또한 유다인의 형이상학(사랑)과 초기 제자들의 형이상학이 왜 집착을 낳게되었으며 예수님의 형이상학(사랑)은 어떻게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시켰는지 추론할 수 있다.

 

“다 이루었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tetelestai)’, ‘텔레오(teleo; 끝마치다, 완료하다)’의 현재완료 수동태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을 이제 마쳤다’, ‘~을 다 완성했다’가 될 것이다. 상거래나 법률적 마침, 약속의 완성을 말할 때 쓰는 단어로 상거래에서 사용하는 테텔레스타이는 ‘~에 대한 합당한 값을 다 지불했다’의 의미가 될 것이다.

 

이 대속개념이 말씀의 완성이자 구원의 완성이다.‘따라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3-25 13) 는 것은 ‘다 이루었다(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예수라는 이름의 성전, 그 정면, 파사드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언은 시간적으로는 유다인들의 파스카축제가 가까워진 시점이고, 그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예루살렘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는 파스카축제를 유다인의 축제일뿐,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하느님 사랑을 재현하는 그 축제가 아님을 소유격으로 제시한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성전정화 사건은 파스카축제가 인류의 축제가 아니라 유다인이라는 한 변방의 민족에 국한된 변질된 축제로 전락하였음을 보여준다.

 

반면 ‘이 성전을 허물어라.(형이하학)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형이상학)’(요한 2,13-25 13) 이 십자가신학이 담고 있는 범우주적인 사건은 인류의 축제로 계시하면서, 당시 성전정화의 사건 안에 있었던 인물들의 면면을 통해 이를 제시한다. 이 인물들은 2천년전에 있었던 사건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 도래한 사건이자 우리 내면의 풍경이라 할 수 있다.

 

(1) 비들기를 파는 상인들과 환전꾼-물신주의자

(2) 가야파를 비롯한 유다인들-교경유착자들

(3) 제자들의 피상적인 믿음상태

(4)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집단히스테리적인 믿음상태

(5) 예수님

(6) 복음사가

(7) 복음을 경청하는 인류

 

이렇게 성전정화사건에는 일곱주체가 있는 셈이다.

 

유다인들의 축제로 전락한 파스카축제는(형이하학을 제거함으로써 형이상학이 실종된)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신 분이 아니라 백성의 생명을 희생제물로 요구하는 신으로 제시한다. 이 경신례가 두려움을 팔고, 죄를 팔고, 선민의식을 팔고, 신을 눈에 보이는 특정 공간인 성전에 가두는 ‘집단무의식’을 인류의 마음에 심게된다.

 

복음과 독서와 강론에서는 공통적으로 ‘성전’과 ‘마음’에 ‘채워져야 할 것’혹은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주 그 사실을 망각하는가?

 

그 답을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1서 1,22-25에서 이렇게 제시한다.

 

"형제 여러분,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북음에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3-25 13) 에서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공관복음서를 포함한 네 복음서는 성전정화사건을 공통으로 다루고 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은 위한 기도의 집이다(마르코11, 15-19))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태오 21, 12~17)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 45~48)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2, 13~22)

 

공관복음서인 마르코, 마태오, 루카는 성전을 모두 ‘나의 집’이라고 서술하고 있다면 요한 복음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의 집=내 아버지 집=

 

이 도식은 요한복음은 누군가의 입을 빌려서 예수님의 정체성(나는 ~이다)을 선언하기 보다는 직접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정체성을 공표한다는 자기선택적 사랑에 초점이 놓여 있다. 그 공표의 내용은 듣는 청자가 누군가에 따라서 확연히 그 방향이 달라진다.

 

Ⓔ환전상과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유다인-“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제자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에서는 타복음에서 다루었던 유혹사화가 빠지고 성전정화에 상대적으로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 는 점을 상기시키는 장면이다.

 

Ⓕ는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에 해당한다. 이방인의 뜰에서 비들기를 팔고 환전상을 허용했던 상업주의와 율법주의 결합자체인 그들에게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강생신학과 십자가신학을 계시하고 공표한다,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들었을리 만무함에도 그들을 향해 전언된 이 말씀은 인류라는 청자에게 주는 하느님의 선물인 셈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최측근에 있던 제자들은 성서에 적힌 문자해독자 내지 진리확인자인 셈이다.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있었지만 믿지는 못했다. 그들의 진리확인도 예수님의 사후 부활 승천 사건을 체험한 후에야 ‘믿게 되었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여기서 믿기 위해서 알고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그 안다는 것이 믿음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일임을 보여준다. 유다인들도 제자들도 많은 군중들도 공통의 문제 <앎>의 결여, ‘표징’의 의미를 알지 못했음을 복음사가는 전한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인지 드러내는 기적의 원리인 표징을 의미하는 세메이온(Semeon-세메이아Semeia)이라는 단어를 쓴다. 공관복음은 뛰어난 능력이란 뒤나메이스 (Dynameis)를 사용한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세메이온(Semeon-세메이아Semeia)은 하느님의 영광을 의미하고 그 영광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영광으로, 그분을 믿느냐?라는 질문으로 요한복음에서 표징은 우리의 믿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다인-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제자들-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추종자들-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복음에서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표징’과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그분을 믿게되는 ‘표징’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표징의 간극에서 우리 마음에 채워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이 요구하는 표징(semeion)은 우주적 재난 같은 천재지변을 의미한다면, 사람들이 피상적 믿음을 유발시킨 표징은 기적사화나 병이 낫거나, 오천명을 먹였거나 등등 물질세계의 재편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여주실 유일한 표징은 십자가에 못박여 죽으시는 ‘예수자신’이었다. 진주로 말하자면 산산히 부서진 진주였다.

 

유다인이 요구하는 것이나 사람들의 피상적 믿음을 유발하는 표징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궁극의 이유에는 이렇듯, 너무나 큰 간극이 있었다. 예수님의 분노는 인류 역사의 수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인류, 근본적인 탄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신부님은 사순3주 강론에서 성전정화사건을,

 

Ⓚ성전의 본질-Ⓛ유다인들에 의한 본질왜곡1-Ⓜ제자들에 의한 본질왜곡2-Ⓝ성전본질회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느껴야 할 성전이 오히려 부담과 억압과 구속의 장소로 변질된 것입니다. 그렇게 본래의 의미를 보여줘야 할 성전이 다른 것들로 채워지고, 다른 것으로 채워진 성전에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더 이상 찾기가 어려워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던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예루살렘 성전이 변질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헛된 자부심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집착과 고집도 한 몫 했습니다.Ⓜ그렇다면 제자들이 버려야할 것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생긴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헛된 희망이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베드로였고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라는 베드로의 말은, 초라한 예수님은, 볼품없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재판받는 예수님, 그가 기대했던, 또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집착이란 반드시 다른 욕망을 부르고, 이것은 돌고 돌아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자신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제자들도 예수님께 대한 헛된 기대와 집착을 버려야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그 힘든 길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흔히 요한복음은 7개의 표징, 7개의 담화, 7개의 선언으로 이루어진 책이라고 부른다. 철저하게 예수님의 표징을 통해, 담화를 통해 선언을 통해 태초에 말씀이 었었다는 근원적 정체성을 표명한다. 이 근원적 정체성의 확인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죽음을 통한 사랑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의 기대와 희망을 내려 놓은 상태에서의 그분의 사랑을 믿는 것,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라는 베드로의 말은, 초라한 예수님은, 볼품없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재판받는 예수님, 그가 기대했던, 또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들뢰즈가 간파한 대로 일그러진 진주같은 바로크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하게 일그러지고, 훼손되고, 원형이 사라진, 소멸 가운데 남아 있는 그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라는 성전의 파사드를 거쳐 오늘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믿겠느냐?'고 질문하는 그 사랑이다.

 

복음과 강론에서 말하는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순례 여정도,

 

성전에서 비들기나 팔고 환전장사꾼처럼 현실적 복을 추구하거나, 더 나아가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열심이고 속으로는 뼛속까지 세속적인 회칠한 무덤같은 유다인처럼 교경유착에 빠지거나, 최측근거리에서 있음에도 제자들처럼 이쪽과 저쪽을 저울질하느라 미망에 헤메거나, 군중들처럼 놀라운 일에 환호하고 박수치는 박수부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조금 늦게, 천천히 알고 싶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베드로사도처럼 ‘난 그 사람을 모릅니다’가 아니라 ‘난 그 사람을 모르고 싶습니다’일 것이다. 그래서 ‘비신자처럼 살다가 신자처럼 죽고 싶다’는 말이 서슴없이 회자되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어떤 공간을 기획한다는 것도, 어떤 소임을 다 하는 것도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에서 결코 예외적일 수 없을 것이다. 부연하자면 우리는 모두 형이상학(사랑)을 추구한다. 그 형이상학이 -‘어떤’ 형이상학적 착각이 집착과 고통을 낳는다(나가르주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삶으로 재배치 하는가의 문제와 닿아있다.

 

 

(보충 부연)유다인이나 초기 제자들이 추구하던 형이상학적 착각은 분명 집착과 기대를 낳게하는 형이상학이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인류애는 집착이나 기대에서 벗어나는 형이상학(사랑)이었다는 점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의 실존(형이하학)을 통해 형이상학을 완성했다면, 유다인과 제자들은 형이하학을 건너 뛴 상처받지 않고 주름지지 않고 함몰되지 않은 완전한 형이상학을 추구하려 했다는 점일 것이다.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단순적용은 율법의 율법주의를 낳게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자비는 철저하게 관계론과 상황론에서 나온 사랑이다. (새벽미사 이현섭 요셉 신부님 강론 듣고 부연) 하느님의 축복은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말은 그래서 우리가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할 화두이다. 예컨대, 혼자 어떤 일을 추진하다보면 일에 속도감도 붙고 깔끔하다, 그러나 함께 어떤 일을 하다보면 일의 진척도 느리고 자칫 충돌을 피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은수자로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여기서 자아가 강한 두 사람이 사랑하기 어려운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도 절대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황윤리가 언제나 절대윤리를 끌어가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에. 하느님 집에는 무수히 많은 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이름의 ‘파사드Facade’ 를 지나, 예수가 인류를 위해 준비해주신 파스카 축제가 우리에게 주는 자비, 자유, 사랑, 기쁨... 의 진정한 의미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써 강론에서 제언하는 바를 힘들지만  바라볼 수 있고 또 따르려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대상에 대한 헛된 기대나 희망을 버렸을 때, 진정한 희망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고, 그 길보다 아름다운 길은 없을 것이며, 그 사랑보다 깊고 높은 사랑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전도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자신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제자들도 예수님께 대한 헛된 기대와 집착을 버려야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그 힘든 길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